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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연재수 :
170 회
조회수 :
21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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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64,671

작성
20.07.29 19:15
조회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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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글자
12쪽

Re 65. 무법자들의 성 1

DUMMY




01.

성의 주인들이 나타났다.


칠흑의 밤처럼 새까만 로브를 입은 자들이었다. 로브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어 누가 우두머리인지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대개 말을 타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걸어온 이는 말 뒤에 소를 끌고 왔다. 제각기 크고 작은 날붙이들을 소지하고 있었고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로브 사이로 살기등등한 눈빛을 드러냈다.


마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도시 안에서 만난 그림자는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저것들은 뭐냐?"


그들이 성의 코앞까지 다가와 물었다. 서로에게 묻는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텅 비운 채 떠났던 그들의 보금자리가 듣도 보도 못한 자들에 의해 채워진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에는 분노도 억울함도 없었다. 그저 성 위에 선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굴어갈 셈인지, 아니면 설마 그들의 보금자리에 그냥 엉덩이를 깔고 붙박을 예정인지를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아직 누구도 날붙이를 빼드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딜 다녀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러니 보금자리에 살그머니 엉덩이를 디밀고 들어온 못된 도둑 고양이들은 이제 다시 제 갈 길 가셔야 할 때였다.


'당황스럽겠지. 어이도 없겠고. 이제 곧 나서는 이가 있을 텐데.'


사자는 성벽에 기대어 서서 그들 중 누가 우두머리일지를 생각했다. 상황을 안전하게 끝내려면 우두머리가 누구냐가 중요했는데 마드가 이를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때 머리끝까지 덮어쓴 로브를 벗어던지며 한 사내가 다가왔다. 낮 동안 로브를 벗고 다녔는지 머리가 발갛게 익어 있었다.


머리에는 푸른 혈관이 푸르죽죽하게 돋았는데 엄청 심한 고혈압이거나 아니면 꽤 화가 많이 난 것이리라. 사자는 그가 우두머리일까 눈을 반짝였다.


"어이! 거기 남의 성벽 위에 올라가 계신 분들. 여보세요? 똑똑똑? 들리슈? 지금 거기가 뉘 집인 줄 알고 들어가 계신 건가?"


사내가 말했다. 척 봐도 사내는 지금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 중이었다. 그의 말 사이사이에 새빨간 화가 푸시시 새어 나왔다. 부릅뜬 눈이 그의 벌건 민둥머리처럼 시뻘개졌다.


"빌어먹을 모래땅을 쉬지 않고 걸어 집으로 왔드만 이거 웬 첨 보는 것들이 성을 뺏고 궁디를 디밀고 있네. 이보슈들, 대체 어디서......"


"저, 이건 오해입니다! 저희는 이 성을 뺏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자 옆에 서 있던 비드가 대답했다. 비드의 대답을 들은 사내가 눈썹을 씰룩였다.


"오해? 오해에? 지금 오해라고 하셨어요, 아저씨?"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가 쳐들어 하늘을 보았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주변에 나란히 선 로브의 사내들은 좀 지루해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대변자를 자처한 이 대머리가 얼른 폭발해서 쳐들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날도 이제 곧 저물 텐데 피를 보아서라도 빨리 들어가 쉬자.


대머리가 계속 말했다.


"아저씨. 그럼 오해를 푸시러 이리 내려오셔야 하는 거 아닐까? 거기 그렇게 좆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지 마시고. 가진 거라곤 늙은 좆밖에 없어서 좆만한 얼굴이 뭔지 모르시려나? 이 썅-"


그때 뒤에 있던 로브들 사이로 남자 하나가 로브를 내리며 앞으로 나왔다. 사자는 보자마자 알았다. 그가 우두머리였다.



02.

"야, 비켜라."


사내가 말했더니 대머리가 곧장 비켜섰다. 머리에 울그죽죽하게 돋았던 핏줄이 어느새 싹 가라앉아 있었다. 화가 풀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그저 새로운 사내가 앞으로 나오며 비키라고 지시한 것뿐이었는데 화가 싹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억지로 잡아 눌렀던가.


대머리가 고개를 숙이며 비켜 서자 사내가 부츠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사자가 신은 것 이상으로 낡고 주름진 부츠였다. 사내는 허리 뒤에 검을 매달았는데 칼집이 없어 날이 밖으로 드러났다. 사내가 성문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들었다.


젊은 건지 늙은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우뚝하게 선 코와 날렵한 턱만 보자면 이제 막 말을 타기 시작한 어린 병사처럼 보였다가도 잿빛 머리에 허옇게 내려앉은 세월이 백전노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은 한없이 검정에 가까운 갈색이었는데 눈 안에도 하얗게 시간이 들어차 있었다. 남자의 눈은 피곤해 보였지만 왠지 서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어이, 거기 위에 있는 분들. 여기는 우리 성이오. 당신들은 남의 성에 와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지. 어디서 온 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을 뺏긴 우리는 당황스럽기가 이를 데가 없어. 그러니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셔야겠는데 언제까지 그 위에 있으실 생각인가?"


비드가 그 말에 대답을 하려다가 사내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비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사내는 사자에게 말했다. 사자는 흥미로웠다.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한눈에 알아봤단 말이지. 아무래도 꽤 오래 무리를 이끌어 온 모양이다.'


질문을 던진 사내는 참을성 있게 사자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생각할 시간을 얼마든지 주겠다는 너그러운 태도였으나...... 그의 눈에서 천천히 차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끝없는 적개심이었다.


그때 성문이 열렸다. 마드가 성문을 지나 그들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레이피어를 허리 옆에 얌전히 찬 채 였다. 민병 대원 둘이 그녀를 따랐다. 사자가 그들의 만남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03.

"내가 나가서 이야기할게."


까만 로브들이 나타났을 때 마드가 사자에게 말했다. 마드는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그녀는 위기보다도 염치를 생각하고 있었고 돌아온 집주인들에게 당신네 집을 좀 빌려서 쓰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어떻게 물어야 할지를 열심히 고민했다.


뭐, 답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요청 따위 먹힐 리가 만무했으니.


"괜찮겠소? 보아하니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이들인 것 같은데 위험할 수도 있소. 아까 내가 살펴본 중앙 역사에 저들의 물건들이 있었소. 그런데 하나같이 통일되지 않고 물건들이 제멋대로더군.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소?" 사자가 말했다.


"다 여기저기서 강탈했거나 훔쳐 왔다는 뜻이지. 어쩌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대일 수도 있소."


마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기대에는 돈이 들지 않으니까. 간절하게 부탁하면 성 한구석을 잠깐 빌려줄지도 몰라. 사막이 물론 변질되고 사는 게 팍팍하기는 해도 약간의 인정이 남아있기도 하거든. 만일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 성을 나가야겠지. 어쨌든 지금 주인은 그들이니까, 남의 집을 뺏을 수는 없잖아?"


"좋아. 우리의 리더는 당신이니까 맡기겠소. 하지만 돌발 상황에는 항상 대비하시오."


"응, 주의할게. 그래도 뭐, 크게 걱정은 안 해. 당신이 있으니까."


"아니, 나는 저 위에 있을 거요." 사자가 말했다.


마드가 일순 당황하며 사자를 바라보았다. 검사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래, 내가 리더니까 내가 알아서 감당해볼게. ...... 게다가 이것 역시 당신이 말한 '경험'의 일환인 모양이고 말이야. 안 그래?"


사자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드는 성문 앞에서 나갈 준비를 하며 생각했다.


'이제 보니 사리안은 공화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을지도 몰라. 사람을 종종 분통 터지게 만드는 걸 보면 말이지.'


그때 마드의 귀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우두머리 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04.

성문이 열리고 마드가 걸어 나오자 앞에 선 사내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피곤함이 재깍 가시고 반짝임이 스며들었다. 그의 눈을 초롱초롱하게 만든 것은 단연 호기심이었다.


그는 성벽 위의 먼지 쌓인 (그리고 뭔가 불그죽죽한 색으로 염색까지 한) 로브를 입은 사내가 분명 우두머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벽 위 남자의 깊게 팬 눈을 보자 떠오른 사내가 있었고 놈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분통이 터져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그들과 드디어 대화를 하겠다며 나선 이를 보라. 여자였다.


여자를 보자마자 평범한 인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웬만한 사내보다 훌쩍 키가 큰 늘씬한 몸에 풍부한 영양을 받으며 자란 듯한 머릿결과 피부. 그리고 어릴 적부터 좋은 가정과 교육 속에서 자랐음을 예상케하는 기품이 넘치는 태도와 자신감 있는 눈빛까지.


그녀의 눈에 서린 자신감은 최근에 손상을 좀 받은 모양이었지만 타고난 자존감은 전혀 색이 바래지 않았다. 남자가 히죽 웃더니 마드에게 말을 건넸다. 목소리에 가득했던 적의는 어느새 희미해졌다.


"당신, 누군지 알 것 같아. 어제 사막에 아주 큰 소란이 있었지. 이곳 사막 동북부까지 시끌시끌하게 만들었거든. 전쟁이라도 터진 건 줄 알았지. 그래서 잠시 성을 비워두었던 것인데 걸려든 것이 소란을 일으킨 당사자일 줄이야. 나는 제국의 개들이 올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 당신, 세이마르의 민병 대장이로군."


"마드 세라자드입니다." 마드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유마 올리오요." 사내가 이름을 밝혔다.


마드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로브에는 지워지지 않는 기름기, 혹은 땟자국이 있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피처럼, 아니 필시 핏자국이었다.


허리 뒤에 덜렁거리고 있는 것은 날이 초승달처럼 구부러진 '월도'였다. 지방의 귀족들, 그리고 무법자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무기였다. 칼집에 넣지 않은 칼날이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마 올리오님. 성의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먼저 인사를 드리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유마는 계속해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마드를 응시했다. 소문이 자자한 세이마르 민병대의 대장이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가늠해보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대답 없이 마드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집에 보도 못한 인사들이 쳐들어 와 있으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겠나? 뭐, 아무튼 우리는 너무 피곤하니 이만 비켜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네. 유마님. 감히 청컨데 저희 세이마르의 시민들과 민병 대원들에게 이 밤이나마 머물 곳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당신...... 우릴 처음 보지 않나? 뭘 믿고 그렇게 부탁을 하는 거지?"


"물론 유마님을 처음 뵙습니다만 ...... 제국의 개들에게 쫓기는 선량한 시민들을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을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요?"


유마가 마드의 말에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꾸밈이 없었다. 사자가 비식 웃었다. 그 웃음을 대머리가 보았고 눈썹을 씰룩였다.


'저토록 순진한 말을 하는 지휘관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꾸밈없는 그녀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다. 저 사내도 그걸 느낀 모양인데.' 사자가 생각했다.


한참을 웃던 유마가 웃음의 여운으로 킥킥대며 마드를 바라보았다.


"정말 재미난 민병 대장님이로군. 좋소. 함께 안으로 들어갑시다. 뭐 챙겨줄 것은 없지만 달빛을 피할 지붕 정도는 빌려주지. 자, 들어가자고!"


성의 원래 주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날의 달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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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Re 81. 비골라 2 +10 20.08.20 691 31 12쪽
80 Re 80. 비골라 1 +4 20.08.19 687 32 12쪽
79 Re 79. 양동 작전 4 +4 20.08.16 706 30 12쪽
78 Re 78. 양동 작전 3 +6 20.08.15 700 35 12쪽
77 Re 77. 양동 작전 2 +6 20.08.14 706 36 12쪽
76 Re 76. 양동 작전 1 +4 20.08.13 717 30 13쪽
75 Re 75. 생매장 +4 20.08.12 715 33 12쪽
74 Re 74. 구출 작전 3 +6 20.08.09 773 36 12쪽
73 Re 73. 구출 작전 2 +6 20.08.08 776 31 13쪽
72 Re 72. 구출 작전 1 +6 20.08.07 783 34 13쪽
71 Re 71. 마스칼 2 +4 20.08.06 778 35 12쪽
70 Re 70. 마스칼 1 +4 20.08.05 856 31 12쪽
69 Re 69. 유마 3 +8 20.08.02 817 38 13쪽
68 Re 68. 유마 2 +4 20.08.01 813 36 12쪽
67 Re 67. 유마 1 +2 20.07.31 857 37 13쪽
66 Re 66. 무법자들의 성 2 +8 20.07.30 843 38 12쪽
» Re 65. 무법자들의 성 1 +6 20.07.29 852 36 12쪽
64 Re 64. 퇴각 2 +8 20.07.26 899 41 12쪽
63 Re 63. 퇴각 1 +9 20.07.25 898 32 12쪽
62 Re 62. 세라자드 4 +10 20.07.24 925 42 12쪽
61 Re 61. 세라자드 3 +6 20.07.23 930 38 12쪽
60 Re 60. 세라자드 2 +10 20.07.22 931 41 12쪽
59 Re 59. 세라자드 1 +5 20.07.19 1,006 39 12쪽
58 Re 58. 침공 6 +7 20.07.18 1,007 42 12쪽
57 Re 57. 침공 5 +9 20.07.17 1,027 40 12쪽
56 Re 56. 침공 4 +11 20.07.16 1,010 44 12쪽
55 Re 55. 침공 3 +9 20.07.15 1,038 44 12쪽
54 Re 54. 침공 2 +9 20.07.12 1,062 42 12쪽
53 Re 53. 침공 1 +4 20.07.11 1,102 39 12쪽
52 Re 52. 세이마르 5 +4 20.07.10 1,118 4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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