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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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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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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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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245화

DUMMY

다음 날 아침, 나카하라 국장은 출근하자 마자 총독 집무실에 불려갔다.


“대체 업무 마감보고도 하지 않고 퇴근한 건 무슨 경우요! 원래 안그러던 사람이 왜 그러오!”


총독의 견책에 국장의 입에서는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그 말에 영혼이 들어가 있는 느낌은 없었다. 총독은 한번 성을 내고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국장이 그때 무단으로 퇴근해서 지금 전달하겠소. 그 몇달 간 계속 문제를 일으킨 탈쓴 불령선인들 수사는 금일부로 헌병에 이첩하도록 하겠다고 결정하였소. 불령선인들이 군의 예산을 건드린 이상 이제 이 사건은 군의 문제가 되었소. 관련자들의 결정적 증언도 확보하여 범인도 특정되었으니. 수사기록과 여타 필요한 사항을 헌병이 요청하면 바로 인수인계 할 준비를 갖추도록 해 주시오. 헌병이 경찰 협조를 요청하면 바로 지원해 주고.”


결국 이렇게 결정이 났는가. 평소의 나카하라 국장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결정을 번복해 달라고 강경히 요청하였을 것이다. 경찰을 몇 년 동안 괴롭히고 최근 단단히 굴욕을 준 자들이었다. 올해 봄에 들어와서 많은 단서를 확보하며 추적중인 자였다. 그런데 헌병이 그들의 일과 수고를 중간에서 가로채버린다는 것이다. 헌병이 그들을 체포할 시 경찰을 무능한 집단으로 비춰지는건 일도 아니었다. 경찰과 헌병의 오랜 알력과 충돌의 역사 속에서, 굴욕감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그러나 이 문제를 조용히 무마하라는 천황의 성지가 내려온 이상, 항의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체념이 이미 국장의 마음 속에 내려앉아 있었다. 큰 목소리를 낼 힘이 나지 아니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총독은 의외라는 눈치였다. 강한 반발을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 외로 국장이 고분고분하게 따라 주니 더 군말하지 않았다.


이후 나카하라 국장은 11시 15분경에 총독부를 나섰다. 일찍 나가는 편이 좋았다. 헌병대가 정동 일대를 봉쇄한 이상 체호프에 가려면 줄서서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총독 집무실에서 돌아와 받은 보고는 기가 막혔다. 조선군헌병사령부 소속 제6헌병대가 정동 일대의 모든 도로를 틀어막고 검문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에 어떠한 협조도 구한 적이 없으며, 봉쇄한다고 사전에 알리지도 않았다. 정동파출소와 주재소 경찰들은 헌병대가 아무 말도 없이 거리에 철조망을 차고 차단봉을 설치하자 왜 말도 없이 이러냐고 항의했지만 자기들은 지시받은대로 할 뿐이라는 무례한 답변만 돌아왔었다.


간부들은 당장 조선군사령부에 항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경찰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국장은 하야시 사령관에게 항의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바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항의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 확신이 되지 않았다. 이미 군은 모든 것을 자기네들 멋대로 하고 있었다. 항의하고 따져도 사령관은 무시할 것이고, 관동군과 뒷거래를 하는 총독이 제대로 된 중재를 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로 조선군사령부에 항의 전문을 보내는 건 일단 오후로 미루고, 점심에 있을 비밀 만남을 생각했다. 각종 사건과 조롱의 편지로 자신의 속을 계속 긁어놓은 장백대호 천남건을 만나기로 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히로요시의 혀에 술 취한 상태로 마음이 넘어가 버렸다. 더 이성을 유지했다면 그런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약속을 한 이상 무시하기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전날 약속은 취해서 섵부르게 한 거였다고 무르는 것도 모양새가 살지 않았다. 그리고 한 바탕 뭔가 뒤집어 엎어 버리며 쌓인 울분을 해소하고 싶다는 기묘한 감각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무슨 20대 애송이처럼 굴고 있다고 한탄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게 풀리지 않으면 더 답답하기만 할 것 같았다.


국장은 점심은 혼자 나가서 먹겠다며 비서 무라타 경부보에게 알려 놨다. 경부보는 경호 인력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며 일부러 떼놓았다. 가끔 혼자 먹고 싶을 때도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불령선인들을 잡겠다고 헌병이 들쑤시고 다니는 마당에 참 한가롭다는 뒷말이 나올 것이 예상되었지만, 이미 경찰경력을 여기서 끝내기로 마음먹은 마당에 대수롭게 여겨지진 않았다.


총독부 앞을 지나 덕수궁 쪽으로 걸어내려가 보니 정말 헌병이 깔려 있었다. 헌병 완장 단 군인들이 차로 중앙에 차단봉을, 양 옆에 철조망을 치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헌병의 복장은 가볍지 않았다. 소총을 어깨에 비끌어매고 탄띠를 허리에 둘렀으며 노란 별이 달린 철모를 쓴 것이 금방이라도 전투에 투입될 태세였다. 아리사카 소총에 달린 어제 갈아놓은 듯한 날카로운 총검이 햇살에 번뜩이며 싸늘한 분위기를 풍긴다.


헌병들은 소총을 잡고 정동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다 붙잡고 이것저것 고압적인 태도로 물어보며 수첩에 이런저런 사항을 다 적고 있었다. 이들이 전신에서 뿜어내는 서슬퍼런 기세, 그리고 조선인과 일본인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동등하게 움츠러들게 만드는 분위기는 흡사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였다.


국장은 경찰정복을 얇은 봄철용 코트로 가리고 있었기에 그가 최고위급 경찰간부임은 저들이 모를 터라 정동으로 들어가느라고 서 있는 줄 뒤에 섰다.


시간이 지나 그의 차례가 되자, 헌병 상등병이 그를 내리깔아본다.


“이름하고 가는 목적지 대쇼.”


연장자를 대하는 예의범절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국장은 말 없이 경찰수첩과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임을 알아차린 상등병은 상당히 당황한 눈치가 되었다.


“정동은 무슨 일로 가십니까?”


“식사하러 왔네. 여기 괜찮은 식당이 있다고 해서.”


“아, 그렇습니까.”


말투는 경어가 되었지만 여전히 친절함이라고는 없었다. 옆에서 같이 검문서는 오장은 뭐라 휘갈겨 적더니 “다음!”이라고 외친다.


그런데 검문을 통과해 들어가다가 왼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차로로 들어가려던 승용차 한 대를 멈춰세운 헌병들이 차의 탑승객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까닭이었다. 승용차 본네트 앞에 달린 유니언 잭을 보아할 때 영국 총영사관 소속 관용차인 것 같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나카하라 국장이 듣기에도 발음이 대단히 새는 영어를 구사하는 헌병들은 영국 외교관들의 항의도 무시하고 차 트렁크를 강제로 열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


국장은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외교관 관용차 상대로 저렇게 우격다짐으로 검문하다가 외교적 문제라도 발생하면 어쩌자는 건가? 헌병은 그걸 생각할 정신머리도 없다는 건가?


이때 나카하라 국장은 몰랐지만, 제6헌병대장 기타무라 소좌는 불령선인들이 소련 총영사관 관용차를 타고 정동으로 도주했다고 확신하고, 외교공관 관용차도 봐주지 말고 철저히 수색하라고 지시한 판이었다. 상부 지시 이외에 생각하지 않는 헌병 병력은 앞으로의 일은 상관하지 않고 외교공관 차량을 마음대로 뒤지고 있었다.


국장은 이 꼴을 뒤로 하고 러시아요리집 체호프로 향했다. 들어오자마자 죽은지 오래된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예수의 이콘이 눈에 띄는 곳이었다.


그때 국장은 선뜻한 느낌이 들었다. 저만치 앉아서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몇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신경쓰지 않을 자들이었지만, 오랫동안 조직범죄를 상대해 온 국장에게는 저들이 들어오자마자 보낸 심상찮은 눈초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하겠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불령선인 강도단의 두목을 만나러 오는데, 그 부하들이 긴장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러시아인 종업원이 와서 이름을 물어보더니 바로 식당 뒷편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들어가자마자 그를 반겨준 자는, 여유 있는 자세로 차를 홀짝이고 있던 천남건이었다. 식탁 위에는 네모나고 큼직한 종이 봉투 하나가 있는데 그 레코드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 옆에는 유성기 하나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잘 오셨소, 국장. 앉아 주시길 바라오.”


말투는 퍽 정중하였다. 나카하라 국장은 천 지부장의 여유만만한 태도를 본 순간, 퉁명스러운 언사를 숨길 수 없었다.


“레코드가 원본인지 확인한 후 받고 갈 거요. 빨리 틀어주기나 하시오.”


저 망할 놈을 잡으려고 몇 달간 골머리를 썩히고 속앓이를 했는데 저놈은 여전히 내 머리위에 올라 앉으려고 하는군!


“날 대하는 게 불편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겠소. 솔직히 나도 그쪽을 대하는 게 편하지는 않으니 말이오.”


천 지부장 입장에서도, 범죄자에 대한 심판을 인생의 사명으로 삼아 온 경찰당국의 최고위 인사와 마주대할 때 자연스러운 경계감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히로요시를 믿었기에, 그리고 국장의 강직함을 믿었기에 경찰 병력을 죄다 투입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는 않았다. 다행이도 소련 총영사관 첨탑 위에 오른 제자들은 주변을 감시하고 헌병 병력이 일대에 깔리긴 했지만 경찰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나카하라 국장이 자기 혼자 왔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좋소. 확인해 드리지.”


천 지부장은 문제의 레코드를 유성기에 집어넣고 작동시켰다. 유성기를 통해 며칠 전 저녁에 히로요시의 하숙방에서 들은 그 목소리와 그 대화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5분 정도 레코드 내용을 들은 국장은 “이만하면 되었소.”라며 유성기 바늘을 잡아올린다.


국장은 인사 하나 없이 바로 레코드를 잡아 휙 가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천 지부장이 묻는다.


“그 레코드, 어떻게 총리실에 전달할 거요?”


“상관할 바 아니오.”


국장은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레코드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빈 공간만 만졌다. 천 지부장이 바로 눈 앞에서 잽싸게 레코드를 잡아챈 것이었다.


“무슨 짓이오!”


나카하라 국장이 으르렁거렸다.


“그 레코드가 확실히 내각총리실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하오. 우리가 목숨 걸고 녹음한 데다가 이곳저곳에서 달라고 손 내밀 자료요. 그걸 맨입으로 넘겨주기는 힘들지 않겠소?”


국장의 부릅뜬 눈이 정면으로 천 지부장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이곳은 적지 한복판이다. 칼자루는 분하게도 저쪽이 쥐고 있었다.


“우체국에 경찰 전용 통로가 있소. 긴급히 수송될 경찰 우편을 먼저 발송하는 통로요. 그곳을 통해 레코드를 보낼 것이오.”


“사전에 총리에게 보고를 전달할 것이오?”


“그렇소. 레코드를 오늘 부쳐도 총리실까지 도착하려면 10일 이상은 걸릴 것이오. 그 전에 총리대신 각하께 사전에 상황을 설명하는 보고서를 먼저 전문으로 발송하려 하오.”


“그렇군. 잘 알겠소.”


그 말을 끝내고 차를 홀짝일 때, 탈을 써서 얼굴을 감춘 명수가 들어왔었다. 영등포 폐공장에 설치한 함정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보고를 들은 후, 천 지부장은 명수를 내보내고 말을 이었다.


“이 건은 아시다시피 총독이나 경시청을 무시하고 총리에게 직보를 보내는 행위요. 총리대신이 그쪽의 보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건 말건 간에 위험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오. 그걸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소?”


“이미 각오는 되어 있소.”


경무국장이 바로 대답한다.


“히로요시에게 들었겠지만, 난 내지로 보직을 옮기게 되오. 사실상 수사를 더 하지 못하도록 쫓겨나는 거지. 그런 와중에 뭔가 불이익을 더 받는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소. 경시감이면 올라갈 만큼 올라간 거고, 더 올라갈 생각은 없소.”


“좋소, 국장. 뒤가 없는 사람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지.”


천 지부장의 목소리 투가 달라진 것은 그때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나름의 존경심과, 그리고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국장은 우리의 큰 적이자, 우리가 공들인 계획을 망쳐 놓으며 우리 정부 사기를 크게 꺾어 놓은 장본인이오. 하지만 동시에, 존경스러운 적이기도 하지.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사람이면 어딘가 더렵혀진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난 그쪽에게서 그런 면은 한번도 찾지 못하였소. 사심 없는 상대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롭고 힘든 존재요.”


범죄자 주제에 점잖을 빼는군. 나카하라 국장은 천 지부장의 진지한 태도에도 그가 계속 속을 긁어 댄 것을 생각하면 이 칭찬의 말도 무언가 그를 가지고 놀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주대하며 새삼 말하겠소.”


“뭘 말이오?”


“부인 분 신상을 가지고 협박한 거 말이오.”


그 말에 나카하라 국장은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하였다. 천 지부장은 진지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본다.


“그렇게 하는 편이 그쪽을 더 열받게 만들 거라 생각해 그랬소만, 역시 가족을 가지고 협박하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었소. 그것도 부인을 한때 잃을 뻔한 사람에게 그랬다는 건, 확실히 내 계획이 심했소. 물론 부인을 해칠 의사는 일전 편지에도 밝혔듯이 일절 없었소. 이 자리를 빌어, 사과하겠소.”


천 지부장은 그러며 고개를 숙인다.


“정말 미안했소.”


천 지부장은 진심이었다. 계획을 실행할 때는 총독 암살계획을 무위로 돌려버리고 유진만, 이덕주 두 동지를 체포되게 만든데다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독립운동을 중학교 2학년생의 유치한 치기 정도로 폄하한 그를 가지고 놀아준다는 흥분이 앞섰었다. 그러나 상대가 그리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협박을 한 것은, 돌이켜보면 대단히 떳떳치 못한 일이었다.


나카하라 국장은 순간 “기가 막히군!”이라며 고함을 내지를 뻔했다. 감히 내 부인을 해치겠다고 암시한 범죄자 주제에 지금 와서 위선을 떤단 말인가!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와서 점잔이라도 빼겠다는 건가!


그러나 바로 눈 앞에서 진지하게 사과하는 사람 앞에서 차마 높은 언성이 튀어나오지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범죄자라 할 지라도, 저렇게 정중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강도단의 두목이라기에는 믿기지 않는 예의와 품위를 갖추고 사과하는 자에게 성을 내는 건 아무리 봐도 옹졸한 행동이었다.


허나 그러할지라도, 그렇다고 “지난 일이오.”라고 말할 수는 절대 없었다.


“당신네들은 대체 뭐가 문제요?”


국장이 사상범과 불령선인에게 계속 가지고 있던 감정과 의문을 입에서 쏟아내 버린다.


“내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 정도의 재능 있는 사람이, 왜 그걸 세상의 평안과 질서를 위해 쓰지 않고 범죄와 혼란에 쓰고 있는 거요!”


그 말에 천 지부장이 숙인 머리를 들었다.


“맹자께서는 사람의 본성에 대해 말씀하실 때,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려 할때 누구든 막으려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셨지. 우리가 그쪽에서 범죄라 규정한 것을 하고 있는 이유가 그거라오.”


둘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국장은 수호하고자 하는 세상이 평안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린 아니라오. 모두가 살만할 세상이라고 느꼈다면 나도, 그리고 내 수하들도 음지에 머물지 않고 양지로 나왔겠지. 유감스럽게도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내지인이 조선인을 차별하는 문제 때문이오? 그 문제는 나도 잘 알고 있소. 나도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오. 하지만 앞으로 시간을 들여 시정하면 될 문제요. 법적으로 그러하던 사회적으로 그러하던 말이오. 더 질서와 법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문제에, 왜 법을 무시하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위험행동을 하며 이러려는 것이오?”


그 말에 지부장의 입에서 냉소가 떠오른다.


“왜 그걸 합방 때부터 하지 않았소이까?”


“우리 제국이 다른 나라와 하나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소. 그럴 때는 다 시행착오가 일어나기 마련이고······.”


지부장은 국장의 말을 끊어 버린다.


“시행착오를 시정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소? 의병들이 봉기하고 기미년 만세운동이 있었는데 달라진 건 뭐요? 문화통치? 내선융화? 확실히 1910년대에 비하면 달라지긴 했겠군.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본질 하나가 빠졌소이다. 여전히 그대들이 우리 윗전에서 앉아 있으려는 거지.”


그러며 천 지부장은 남은 차를 다 비웠다. 그의 시선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다.


“내 수하들을 몇년 전에 작고하신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에 위탁교육을 맡긴 적이 있었소. 전술훈련하고 중화기 훈련하고 집단생활을 배우도록. 백야 장군에 대해서는 국장도 들어봤을 거요. 그 녀석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하나같이 혈기왕성한 애들이었는데, 거기 생활을 하는 걸 보니 계속 춥고, 배고프고, 졸려했소. 평소 나에게 훈련받을 때는 그러지 않더니 말이오. 웬지 아시오?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명령받고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그랬소. 가고 싶어서 간 곳에서도 그런데, 억지로 그렇게 된 사람들이라면 어떻겠소? 이른바 두분 군주의 합법적인 조약으로, 남의 나라 궁궐에 군대를 들이밀고 몰려들어 협박해 맺은 조약에 나라가 없어졌는데 춥고, 배고프고, 졸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소?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그것이외다, 국장 나리! 자율성과 창발성을 거세당한 채 무기력하게 있는 동포들을 그대로 두고볼 수 없어서 그렇소! ”


그러나 나카하라 국장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그대 조선인들도 유신 이전 우리 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양반이라는 특권적 지배계층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들이었소! 그들의 지배는 옳고, 우리의 지배는 나쁘다는 것이오? 그들의 지배 하에서는 춥고, 배고프고, 졸리지 않았단 말이오?”


“그런 식으로 우리를 갈라치기하려는 건 당신네들의 오랜 습관이지.”


천 지부장이 그렇게 운을 땐다.


“양반이라는 건 당신네들의 귀족과 무사처럼 거저 얻는 게 아니외다. 시험을 통해 얻는 것과 세습을 통해 얻는 것의 차이를 그대도 모르진 않잖소? 유신 이전에 성이 없던 집안인 그대가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터인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소?”


나카하라 가즈오의 나카하라 성씨는 유신 이후 국가에서 붙여진 성이며 그 이전에는 그저 ‘넓은 땅 가운댓집’으로 불리던 평민 집안이었다. 국장은 자신이 바보같은 반문을 했음을 바로 깨달았다.


“제길. 히로요시가 말해 줬겠군.”


“아, 그렇소이다. 아무튼 순조대왕 연간부터 이 양반이라는 것이 몇몇 뼈대 있는 가문을 제외하면 그렇게 희소성 있는 것도 아니게 되었소. 죄다 양반이 되려고 하던 때니. 그런데 여기까지 말하려면 얘기가 딴 데로 넘어갈 것 같군.”


천 지부장은 역사 얘기는 이쯤 하기로 한다.


“여하튼 말이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그 길로 가려는 와중에 당신네들이 와서 자기네들이 해 주겠다며 다 빼앗아가 버렸소. 그대가 가장 경멸하는 범죄행위가 국가 단위로 일어난 거요. 그쪽이 원하는 대로 당신네 나라의 법과 질서 내에서 살아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랬을 것이오. 동지를 팔고 모시는 분들을 팔면 얼마든지 가능했지. 근데 그런 꼴을 계속 보게 될 이상, 그렇게 살 수가 없었소이다. 그게 우리가 당신이 말하는 범죄행위를 하는 이유요. 조금 이해가 가시겠소?”


그러나 국장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진 채였다. 그는 천 지부장의 말에, 흡사 그를 가르치려고 드는 태도에 계속해서 생기는 반발심리를 구태여 숨기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일전에 방송에서 말했듯이, 야쿠자도 겉으로는 인의를 내새우오. 꽤나 그럴싸한 명분을 장황하게 늘어놓긴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오. 당신네들은 그저 혼란과 파괴를 보고 싶은 게 아니오? 세상이 뒤집어지고 흔들리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게 아니오?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파괴와 폭력의 명분을 찾고 싶은 게 아니오? 그것이 가져다주는 금단의 과실이 더욱 달콤해서가 아니오? 나는 수도 없이 많은 범죄자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이오, 천남건 씨! 자기정당화를 하려는 범죄자들 만큼 교화의 여지가 없는 자들도 없지! 애석하군. 가당찮은 소리를 늘어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범죄가 좋다고 하는 게 더 속시원했을 것이오!”


그 말에 천 지부장은 상당히 답답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화를 내지도, 반박하려고 다시 논리를 구사하지도 않았다. 그저 곤란하다는 투로 한마디 말할 뿐이었다.


“내 안사람은 내가 사람을 굴복시키는 재주는 있어도 설복하는 재주는 없다고 잔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긴 한것 같군. 하지만 내 수하 중 한 명은 다를 것이오. 잠깐 기다려 보시오. 걔라면 더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그쪽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그러며 천 지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만 바로 방을 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국장은 갑자기 방에 혼자 남겨지게 되자 화가 치밀어서 “쓸데없는 짓 마시오!”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방 안으로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나카하라 가즈오 경무국장님이시죠?”


얼굴이 점잖고 부드러운 인상에 눈에 총기가 어린, 전반적으로 품위가 있어 보이는 양복 차림의 청년이었다. 그가 매우 예의를 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국장님께 드릴 말씀이 조금 있어서 그런데,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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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228화 +8 20.11.21 263 11 17쪽
227 227화 +6 20.11.20 262 9 17쪽
226 226화 +6 20.11.18 261 10 20쪽
225 225화 +12 20.11.15 268 11 19쪽
224 224화 +10 20.11.14 262 9 17쪽
223 223화 +4 20.11.12 265 10 13쪽
222 222화 +8 20.11.08 264 11 19쪽
221 221화 +8 20.11.04 260 10 14쪽
220 220화 +12 20.11.01 261 10 15쪽
219 219화 +8 20.10.30 264 9 16쪽
218 218화 +4 20.10.27 264 10 14쪽
217 217화 +12 20.10.25 262 10 15쪽
216 216화 +8 20.10.24 263 13 19쪽
215 215화 +8 20.10.21 263 1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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