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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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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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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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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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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27화

DUMMY

혼마치에서 정동까지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였다. 그럼에도 뛰다가 남의 이목을 끌게 할 수는 없었다. 대로변을 절대적으로 피하고 뒷골목만 걷고 있음에도, 그들을 보고 기억하는 사람이 최대한 적도록 노력해야 했다.


주리는 그대로였지만, 정우는 천 지부장이 넘겨준 변장 도구를 바로 사용했다. 삿갓을 푹 눌러쓰고 이와타 사토루 중의원 의원으로 변장할 때 사용한 가까 수염과 가짜 수염을 쓰고 지팡이를 든 채 허리를 살짝 굽히니 영락없이 시골서 올라온 노인네의 행색이었다. 주리는 딱 시골서 올라와 길을 모르는 영감님을 안내해 주는 마음씨 고운 여학생 격이었다.


최대한 조심하면서도, 주리의 가슴은 언제 심장이 그렇게 쾅쾅 떨렸는지 모를 지경으로 천천히 뛰고 있었다. 최악의 위협 중 하나였던 오재두 경부보는 분명 끝장났을 것이다. 존경하는 천 지부장이 그자를 어떻게 처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곱게 죽진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다른 경찰들을 대동하지 않고 자기 혼자 온 걸 보니 다른 경찰들도 자길 잡으러 밀려들진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이 놓일 대로 놓인 주리는 숫제 흥흥 콧노래까지 불러볼까 생각하기도 하다가도, 정우의 굳은 표정을 보고 그건 안하기로 한다. 정우는 주리와 달리 계속 경계감을 늦추지 않았다. 아직 관동군 장교들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주리를 쫓고 있는 게 분명한 그들이였다. 주리의 행방을 알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끌어오므고 있을 터였다. 현재까지는 그들을 보지 못하였지만,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예감은 적절했다.


“거기 서랏!”


“엄마얏!”


갑작스렇게 울린 고함에 주리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안정되었던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또 내려앉았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억하는 목소리였다.


“이년! 당장 헌병대로 가자!”


으르렁거리는 그 목소리는, 바로 우에스기 사부로 중위의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본 주리는 우에스기 중위의 살기등등한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고야 말았다.


어떻게 우에스기 중위가 여기에 있는가? 그 과정은 몇 시간 전에 이들이 종로경찰서를 나와 주리가 다니는 고등여학교로 향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오야기 중위가 주리가 어느 학교 다닌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먼저 주리를 확보하러 가기 위해 서두르던 차였다.


그런데 후지무라가 가다 말고 곤란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멀쩡히 등교하기는 할까?”


그 말에 우에스기와 쿠스노기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라도 그런 일을 저지르면 우선 도주부터 하는게 당연할 터였다.


“그럼 어떡한다지?”


우에스기 중위의 표정은 참으로 난감해졌었다.


“별 수 없다. 학교에 가서 한주리 양의 친구들에게라도 물어서 평소 어디 자주 가는지를 알아서라도 추적해야지.”


“그것 밖에는 없겠네. 그런데 만약 정말 학교에 없다면, 이 경성 바닥에서 뭔 수로 찾는다냐.”


쿠스노기 중위가 막막해져서 푸념하던 차에, “선배님들! 선배님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신이치 아니냐! 여긴 어떻게 왔냐?”


우에스기 중위가 오래간만에 웃음지었다. 그들의 후배이자 사령부의 비서인 미나모토 신이치 중위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웃음은 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참모장 각하를 모시고 왔습니다. 선배님들이 맡으신 송금 건, 이미 사령관 각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저는 특별히 부탁드려서 경성에 내려와 선배님들을 찾아다닌 겁니다. 선배님들 신병을 제6헌병대에서 확보했다고 들어서 거기 가 봤는데, 풀려나서 돌아다니고 있다 하더군요. 그쪽에서 선배님들이 묵은 여관을 알려 주어서 알음알음 알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 용케도 잘 찾았구나.”


참모장이 직접 내려왔다는 것은 사령부에서도 이 사태를 지극히 심각하게 바라봄을 뜻했다. 미나모토 중위의 표정이 흙빛인 것도 이를 보여주는 듯 하였다.


“위에선 우리더러 뭐라고 하더냐? 뭐 들은 거 없어?”


쿠스노기 중위가 걱정스럽게 물어본다. 미나모토 중위의 표정은 지극히 심각했다.


“저도 자세히 들은 것은 없으나, 선배님들 모두 중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기랄. 역시.”


우에스기 중위는 불경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하였다. 사령부에서 해군과 심각한 문제가 생길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것을 그들의 독단행동으로 만들어버리고 사령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게 가장 간단하다고 느끼는 터였다. 이 임무에 가담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어째서 진작 생각하지 못하였던가! 후회막급이었다.


“이시와라 중좌님이 남긴 말씀은 없나?”


후지무라 중위의 물음이었다. 이 지시를 내린 사람이 바로 이시와라 간지 중좌다. 그 이전에 그들을 만주사변의 제1선에 뛰어들도록 세계최종전쟁의 장대한 전망을 불어넣어준 사람도 그다. 그런 이시와라 중좌가 뭔가 책임을 같이 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청년장교들이 다 같았다. 그러나 미나모토 중위의 안색은 더더욱 어두워져만 갔다.


“그게······. 제가 어떻게든 선배님들을 구해 달라고 머리숙여 부탁드렸는데······. 중좌님 말씀이······.”


“뭐라고 하셨어? 말해 봐.”


차마 말을 못하던 미나모토 중위는 선배들이 계속 채근하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귀관들은 본관을 실망시켰도다. 그 한 마디만 하고 더 말을 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하! 그래!”


우에스기 중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말았다.


“우릴 잘라버릴 꼬리로 여기셨다 이거지!”


배신감이 혈관 전체를 타고 흘렀다. 그래도 조만간 중앙으로 진출할 이시와라 중좌가 어떻게든 그들을 책임져 주리란 희망이 없지 않았었다. 천황 폐하와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이 전 세계를 지배한다는 웅대한 이상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그들의 출세를 보장해 줄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발언을 얼마나 했던가?


임무실패를 한 이상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은 없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어떤 보호도 없이 내팽개쳐진다는 것은 정말로 신경을 서서히 헤집어놓을 일이었다.


쿠스노기 중위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고릴라 같은 얼굴이 더더욱 험악해진다. 후지무라 중위만이 냉정을 유지한다.


“화를 내도 나중에 내자. 일단은 한주리 양을 잡는게 급선무다.”


“예? 형수님이요?”


미나모토 중위는 처음 듣는 얘기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세한 사항을 선배들에게 들은 미나모토의 얼굴은 불시에 감찰실에서 검열을 내려왔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마······.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그 착하고 마음씨 고운 형수님이! 타마쨩은 형수님을 친언니처럼 여기고 있단 말입니다!”


“기억하잖냐, 신이치. 한주리 양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요즘 같은 자유연애의 시대에는 약혼식 때 그런 얼굴을 한 신부라면 바람나기 십상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후지무라 중위가 미나모토의 충격 받은 얼굴에 더욱 충격을 가하였다. 미나모토 중위는 사랑하는 약혼녀 타마코가 수 시간 동안 주리 얘기를 계속 해주어 단지 그녀를 존경하는 아오야기 중위의 약혼녀일 뿐만 아니라 타마코의 자매같은 친구로서 아주 좋은 감정을 가진 터였다. 그런데 그 형수님이 아오야기 중위와 그들 모두의 뒷통수를 치고 있다니 얼떨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한주리 양의 학교로 가본다. 그곳에서 행방을 알아낼 단서가 나올지도 몰라.”


미나모토 중위는 그리하여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한 채 선배들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고등여학교 정문이 보이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학교에서 뛰쳐나오듯이 등장한 한 사내를 보았다. 오재두 경부보였다.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쿠스노기 중위가 황당해했다. 오 경부보가 지나가던 택시를 잡더니, 운전석 문을 열어젖히고 운전수를 확 끌어내리더니 자기가 운전해 떠나버리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졸지에 차를 강도질당하게 된 택시기사가 “이 도둑놈아!”라고 절규하는 것도.


그런데 후지무라 중위가 재빨리 택시를 잡는다.


“빨리 타! 저자를 따라가야 한다!”


장교들은 갑자기 후지무라 중위가 재촉하니 영문을 몰랐지만, 추리력 뛰어난 그가 그러자고 하니 일단 택시에 끼어 타고 봤다.


“오재두 씨가 뭔가 단서를 잡은게 틀림없다. 저자를 추적하면 한주리 양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오, 그렇군!”


그리하여 후지무라 중위는 택시기사에게 앞서 가는 택시를 따라가 달라고 하였다. 택시는 오 경부보가 강탈한 차를 따라 종로거리를 지나고 청계천을 건너 혼마치로 내려갔다. 택시기사는 추적당하는 걸 모르게 해 달라는 후지무라 중위의 주문에 거리를 꽤 벌린 채 운전했다.


“설마 여기에 놈들 근거지라도 있단 건가?”


우에스기 중위가 고개를 갸우뚱한 그 순간, “저, 저거!”소리가 일제히 튀어나왔다. 저만치 앞에서 차를 길가에 급정거시키고 내려서 누군가를 붙잡은 오 경부보를 본 것이었다. 그에게 잡힌 세라복 차림의 여학생은 다름아닌 주리였다. 졸지에 목표가 눈 앞에서 사라지게 생겼다.


“당장 잡아야 한다!”

우에스기 중위가 다급히 말했지만, 하필 오 경부보의 택시가 길을 틀어막는 바람에 그 뒤에 있던 차량이니 인력거니 그런 것들이 다 멈춰서며 교통정체가 발생하고 말았다. 장교들은 급한 나머지 택시에서 우르르 내려 달려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제복 순사 네명이 오 경부보를 잡고는 결박지어 끌고가는 것이었다. 주리는 그 순사들을 따라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장교들은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이 도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대체 왜 제복경찰들이 사복경찰을 체포해서 끌고간단 말인가?


“이게 대체 뭔 사태입니까?”


미나모토 중위가 어이가 없어서 물어보자, 후지무라 중위도 “나도 모르겠다.”라고 대꾸한다. 방금 일어난 상황은 후지무라 중위로서도 추리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한주리 양이 이 근처에 있는 건 확실하다. 모두 흩어져서 찾아보자. 여기는 뭉쳐다니기에는 너무 넓으니. 파출소에 있다면 상황 설명하고 신병 인계받아서 끌고오도록 한다. 잡으면 이 곳으로 와서 기다려라.”


“알았다!”


그렇게 네 장교들은 각자 단독으로 행동하며 주리를 찾아 혼마치 거리 곳곳을 대로변과 뒷골목을 가리지 않고 헤매게 되었다. 우에스기 중위는 그러던 중에 우연찮게 주리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고함을 내지른 것이었다


“당장 이리 와!”


우에스기 중위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이 망할 것이 테츠를 배반하고 불령선인으로 의심되는 놈과 붙어먹은 것도 모자라서 우리 앞길을 다 망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주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우에스기 중위를 보고 또다시 눈 앞이 컴컴해졌다. 안심하다가 탈이 나게 생겼다. 계속 긴장하고 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주리는 혹시 이럴 때를 대비해서 정우와 말을 맞춰두기로 한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이 관동군 장교에게 이년 저년 소리를 들은 게 짜증이 나기도 했다.


“나 참! 우에스기 중위님! 왜 갑자기 만나자마자 반말이세요!”


“뭐, 뭐라고?”


주리가 벌벌 떨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당당하게 나오니 우에스기 중위가 오히려 당황한다.


“저번 행사 이후로 못 뵈었다가 갑자기 만나게 되었는데 이년저년 하는 건 또 무어에요? 제가 중위님에게 그런 막말 들을 사람인가요? 중위님 부인 되시는 분께 일전에 좀 무례하게 굴었다고 생각하고는 있는데, 그렇다고 왜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정우는 우에스기 중위의 갑작스런 등장에 신경을 곤두새우면서도, 주리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오재두를 상대하던 것도 그렇고,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빠져나갈 수 있는지 체득하고 있는 게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우에스기 중위는 주리가 따지고 들자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주리의 태도가 이상하게 당당하여 꼭 자신이 오해를 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주리가 자금 운송 정보를 넘겼을 것이 분명하다는 후지무라 중위의 추리를 다시 떠오르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뭐긴 뭐요! 우리 정보 누출한 사람, 당신이잖소!”


“예? 이건 뭔 소리세요?”


“옥면옥 예약한 사람 당신으로 알고 있소! 그곳에 축음기 숨겨두고 우리 대화를 녹음해서 불령선인놈들에게 넘긴 거잖소! 그 카라스마 준이치로라는 놈과 불륜을 저지르면서! 그놈도 불령선인이지?”


“뭐, 뭐라고요?”


주리는 그 말에 화가 단단히 났다는 듯 얼굴을 시뻘겋게 했다.


“와, 진짜 기가 막히네! 어떻게 친구 부인 될 사람의 정숙함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세요? 그리고 제가 불령선인과 어울려요? 중추원 참의이신 아버지의 딸인 제가요? 왜 만나뵙자마자 밑 도끝도 없이 그런 소리신지 전혀 모르겠네요! 그 요릿집 제가 예약한 건 맞는데요, 무슨 거기서 정보가 누출되었으니 제가 범인이니 그런 소리는 왜 하세요? 제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이······.! 이······..!”


주리가 더더욱 당당하게 나오니 우에스기는 또 다시 일시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니 주리가 이 정보누수의 범인임을 알려주는 직접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그 정황만 가지고 후지무라 중위가 추리해 낸 것이었을 뿐. 물론 후지무라 중위의 추리는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기에 그의 말을 철썩같이 밑고 주리를 추적해 온 것이지만, 직접증거가 그의 손에 없는 한 주리를 끌고갔다가 엄청난 낭패만 볼 수도 있다는 예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9살은 어린 여학생에게 말로 지고 있다는 건 자존심이 매우 상하는 일이기에 언성이 더더욱 높아진다.


“에이잇! 시끄럽다! 당신의 불륜 사실은 토비에게 들어서 잘 아오! 당신 옆에 있는 저 남자가 바로 카라스마 준이치로란 놈이지!”


물론 주리는 망설임 없이 응수한다.


“뭔 소리세요? 이분은 시골에서 아들 집 찾아 오신 시골 어르신이라고요! 이곳 길을 잘 모르셔서 제게 도와달라고 하여 길 찾아주고 있는데, 거기서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님이 왜 나와요?”


우에스기 중위는 그제야 주리 옆의 그 남자의 행색을 보았다. 삿갓을 눌러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흰 수염을 기르고 조선옷을 걸친게 확실히 그냥 조선 노인처럼 보였다. 영락없이 시골서 갓 올라와서 해매다가 마음씨 고운 여학생의 안내를 받는 노인네다. 하지만 우에스기 중위는 물러날 생각이 없다.


“분명 가짜 수염이겠지! 저놈 면상을 봐야겠······.”


그러나 우에스기 중위가 그 다음에 한 말은 “어억!”이었다. 우에스기 중위가 주의를 자신에게서 주리로 돌린 그 순간, 정우가 망설임 없이 그의 명치께에 정권을 거세게 내지른 것이었다. 삽시간에 급소를 얻어맞은 우에스기 중위가 숨을 못 쉬는 그때, 정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휙 하고 휘둘러진 정우의 지팡이가 중위의 뒤통수를 맹렬하게 가격했다.


퍽!


속을 파고 납을 부어넣어 만든 그 지팡이었다.


우에스기 중위는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로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뒷통수로 가져다 데려다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푹 고꾸라진다.


정우는 쓰러지는 우에스기의 몸을 재빨리 받아내고, 그가 허리춤에 찬 권총집에 꽃힌 일본군의 제식권총인 14년식 권총을 꺼내 탄알집을 빼버렸다.


“이예에에!”


주리는 우에스기 중위가 자신에게 정신팔린 틈을 타 정우가 완벽히 제압해 버리자 신난 나머지 환호성을 질렀다. 추격해 오는 장교 한 명을 이렇게 무력화시키니 얼쑤절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우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주리를 보고 싱긋 웃는다.


그러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사, 사부로오오!”


갑작스런 굵은 목소리에 둘 다 눈을 번쩍 떴다. 돌아본 자리에는 쿠스노기 모토스케 중위가 경악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던 것이었다. 쿠스노기 중위의 눈에서 친구가 제압당하는 걸 본 경악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격노로 바뀐다.


“이 망할 연놈들, 죽여버리겠어!”


쿠스노기 중위가 와락 고함을 지르고는 군도를 확 빼들었다. 맹렬하게 빛나는 군도를 든 덩치가 그들을 향해 돌진한다. 일본 표현 저돌맹진이란 이걸 두고 말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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