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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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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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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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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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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화

DUMMY

정우가 병상에 누워 주리의 애정 가득한 보살핌을 받는 반면, 종로경찰서의 와카마쓰 코스케 경부는 지극히 곤란한 지경에 처하였다.


오전 10시 30분 경에 혼마 서장이 고등계 사무실 문을 쾅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시뻘개진 얼굴에 뜨거운 콧김을 마구 내뿜으며.


“오재두 경부보 어디 있어! 이놈 당장 나오라고 해!”


나카하라 경무국장이 대담하게도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에게 맞서 오 경부보의 수사를 계속 진행하라 지시한 후 서장이 고등계 1과 사무실에 직접 찾아오는 일은 없었었다. 그런 서장이 갑자기 사무실에 나타나 고함을 지른 것은 예삿일이 아니란 것이었다.


서장 뒤에 있는 고등계장은 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냐는 얼굴이었다. 와카마쓰 경부는 무슨 일인지 몰라 “지금 보성전문학교에 수사차 나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가, 불벼락을 맞았다.


“보성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오? 그놈이 어디가서 어떤 난리를 쳤는지 몰라?”


혼마 소장이 씩씩대며 밝힌 것은 다음과 같았다. 혜화동에 있는 한 고등여학교의 재단이사장이 강력한 항의전화를 걸어왔다. 종로경찰서의 조선인 형사 한 명이 오전 수업 중에 다짜고짜 교실로 쳐들어와서 여학생들을 겁박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교탁 위에 권총까지 꺼내놓고 실탄까지 보여주며, 원하는 대답이 없으면 누구라도 쏴 버리겠다는 공포분위기를 연출하였다는 것이다. 이 형사의 협박에 그 반 학생 여럿이 불안감을 호소하는 등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평범한 고등여학교였다면 서장이 수사라는게 다 그렇다고 여기며 “거 미안하게 되었수다.”라며 그냥 전화를 끊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절대로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 학교는 평범한 고등여학교가 아닌 내지의 재벌기업이 만든 재단이 운영하는 데다가, 재단이사장도 기업 회장의 친인척이었다. 그 만큼 이 아가씨 학교에는 총독부 관리들이나 조선 내의 실업가, 또는 총독부에 협조적인 조선인 상류층 인사의 여식들이 다닌다. 오 경부보가 그런 학교에서 난리를 부린 이상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사장이 그것도 모자라서 경무국과 경기도경찰부에도 항의전화를 했으며 내무성과 경시청에도 항의할 거라고 하니 서장은 말 그대로 죽을 상이 되었다.


서장은 잔뜩 성이 난 이사장에게 그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허리를 굽실거리며 급구 사과의 말을 전달하고, 이 사달을 일으킨 오재두 경부보를 확실히 징계한 뒤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놈 경무국장님에게 인정받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지! 복귀하면 즉시 내 사무실로 올라오라고 전해! 그리고 자네는 부하가 어디 나돌아다는지도 제대로 파악 못하고 뭐 하는 거야!”


와카마쓰 경부는 그저 얼떨떨할 수 밖에 없었다. 오 경부보가 그저 보성전문학교의 김성수 주무이사를 만나러 가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근데 왜 아가씨 학교에서 학생들을 겁주고 있었다는 건가? 서장에게 난데없이 호통을 듣게 된 경부는 참으로 억울했지만, 여하튼지간에 관리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죄송합니다. 오는 즉시 올려 보내겠습니다.”


서장은 “흥!”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서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경부와 그의 부하들은 그 뒤에서 눈치보고 있다가 그제야 얼굴이 벌개져서 호통치는 고등계장의 잔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나 진짜 조만간 정년이란 말이다! 퇴직금 다 못받게 되면 니들이 책임질 거냐!”


고등계장의 지청구에 그저 형사들은 “죄송합니다!”만 반복할 뿐이었다. 고등계장도 횡하니 나가버린 후, 와카마쓰 경부가 분통을 터트렸다.


“이놈 대체 어디 가서 뭐하는 거야! 왜 내게 거짓말까지 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와카마쓰는 씨근덕거리며 자리에 앉아서는, 비어 있는 잔을 손에 잡았다. 윤 순사가 쪼르르 달려와 주전자의 물을 채워준다. 경부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속에 끓는 열을 식히려 애를 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 경부보는 감정이 결여된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어 섬짓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대단히 유능하고 감이 좋은 훌륭한 사냥개였다.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을 수사하며 무리한 면모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무국장에게 직접 탄원하며 수사를 진행시키는 과감함으로 그 약점을 매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연히 상관인 자신에게 거짓말까지 하며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 망할 자식! 들어오기만 해 봐라! 제대로 된 해명 없으면 진짜 큰일날 줄 알아라!


와카마쓰 경부는 그렇게 생각하며 궐련을 빼 물었다. 윤 순사가 어김없이 쪼르르 달려와 불을 붙여주었다. 아무리 그가 뛰어난 사냥개라고 봐줄 수 없는 일이었다. 주인을 무는 사냥개를 어떻게 오냐오냐 받아주겠는가?


그런데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1시간 30분이 지나 점심 시간이 되어서도 오 경부보는 돌아오지를 않는다. 혹시 몰라서 오 경부보의 하숙집에도 전화해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고, 종로 내 파출소나 주재소에 들렀는지 전화해 보니 다 못봤다고 한다.


서장이 지나가다 말고 문 열고 들어와 “이놈 들어왔어?”라고 물어도 다들 “아직 안 왔습니다.”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놈이 현위치 보고도 한 적 없나?”이란 질문에도 대답은 “없었니다.”였다.


“이놈 하는 짓 보게! 어떻게 보고 한번 없이 밖을 돌아다니고 있어! 이거 근무 중 무단이탈이잖아!”


와카마쓰 경부도 대체 오 경부보가 어디서, 뭔 짓을 하는지 몰라 갑갑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서장은 “퇴근시간 전까지 이놈 복귀 안하면 근무이탈죄를 적용해 수배 때리고 말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나갔다.


“거 미치겠구먼! 이놈 대체 어디 갔대?”


경부가 탄식하며 냉수만 들이킨다. 사실 물보다는 맥주나 정종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다. 부하 형사들 또한 오재두 경부보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얼굴에 불안한 물음표만 띄운다.


와카마쓰 경부는 일단 1시간 넘게 계속된 흥분을 가라앉혀 보고, 차분하게 상황을 돌이켜 본다. 오 경부보는 저번에는 다소 무리했지만 그렇다고 멍청이는 절대 아니다. 오 경부보가 그 여학교에 갔다면, 그곳에서 반드시 수사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하필 그런 영향력 있는 재단이 운영하는 아가씨 학교에서 위험천만한 수사를 한게 제일 큰 문제지만.


그런데 왜 그 학교인가? 그리고 또 왜 김성수 씨를 수사하러 간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갔어야 했단 말인가? 뭔가 알아내고 추리한 바가 있다면 늘 자신에게 보고하던 오재두 경부보였다. 합당한 이유가 있는 이상 그 학교 수사하는 데 허가를 내려주는 게 당연한데, 왜 숨겨야 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그 여학교에서 오 경부보가 뭔 수사를 했는지 아는게 급선무였다. 와카마쓰 경부는 오오이시 순사에게 오 경부보가 갔다던 그 여학교 전화번호를 알아 오라고 시켰다. 오오이시 순사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리고 쪽지에 번호를 써서 전달하자, 경부는 당장 그곳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경부는 전화를 받은 재단 직원에게 종로경찰서 형사라고 밝히며 오늘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급구 사과드리며 경위 조사에 협조해 달라고 저자세로 말했다. 직원이 그러자 잠시 기다려 달라며 전화를 바꾼 사람은, 재단이사장이었다.


- 그래. 그쪽의 오재두 경부보라는 형사는 징계를 받았소?


이사장이 심화가 들끓는 목소리로 묻자, 와카마쓰 경부는 그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이사장님!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아직 경부보가 서에 오지 않아 징계위원회가 열리지 않았으나, 반드시 중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흥! 경찰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 형사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없으면 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하시오!


“알겠습니다. 징계처분 후에 제가 그 친구를 직접 데리고 이사장님을 찾아뵈어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시던가 말던가.


이사장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징계위원회 회부를 위해서는 사건의 경위 조사가 필요합니다. 경부보가 난동을 부렸다는 그 반의 선생님이나, 아니면 그때 수업 중이던 선생님과 통화할 수 있겠습니까?”


-거참 물어볼 것도 많구려!


이사장이 버럭 짜증을 내긴 했지만, 징계를 위한 조사라고 하니 그래도 순순히 당시 수업 중이던 교사와 연결해 주었다. 그 남교사는 전화를 받자마자 “어떻게 경찰이 학생들에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부터 하니 경부는 역시 죄송하다는 사과부터 먼저 해야했다. 선생의 입에서 들은 경위는 이리하였다.


- 형사님이 갑자기 수업중인 교실에 들이닥쳐서 학생 한 명을 찾았습니다. 그 학생 찾겠다고 수업을 방해하고 학생들을 겁을 준 겁니다. 총까지 들이밀면서 말이죠! 학생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학생 한명 찾으려고 그랬단 말입니까?”


경부는 잠깐 당황했다. 오 경부보가 사회주의 팜플렛 들고다녔던 여고보 학생을 교실에서 잡아 끌고 나온 적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언제나 교장실을 방문해 이 학생에게 치안유지법 내지 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으니 체포하겠다고 통보하는 절차를 거친 뒤에 행한 일이었다. 대체 어떤 학생이기에 여학생 한명을 잡기 위해 필요한 절차도 무시하고 난동까지 부려야 할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그 학생은 누구였습니까?”


그때 와카마쓰 경부는 선생의 대답에 귀를 의심했다.


“그 반의 한주리라는 학생이었습니다.”


“예? 누구요?”


경부는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 경부보의 사촌여동생이라며 도리야끼와 말차를 사들고 와서 대접하던 귀엽게 생긴 여학생. 그리고 그 전, 오 경부보가 용의자를 고문한 낸 뒤 유치장으로 질질 끌고가던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얼굴로 얼어붙어 있던 여학생.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그, 그 한주리 학생은 출석했습니까?”


-출석했다면 그 형사님이 그 자리에서 잡아갔겠죠. 평소 결석이 잦은 학생인데 오늘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와카마쓰 경부의 두뇌가 빠르게 돌아간다. 오 경부보는 왜 사촌여동생을 무리를 하면서까지 잡아가려 한 것인가? 그가 사촌여동생에게 이렇다 할 감정이 없는 사람임은 안다. 사촌여동생이 약혼하게 되었다고 하자 다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거내도, 이에 고맙다고 대꾸하는 그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원래 자신의 후견인 격인 외숙부 한덕만 참의에게도 무슨 가족의 정 같은것은 전혀 드러내 보이지 않는 자니. 그가 가족에게 가진 감정은 냉담함과 타산, 그리고 불령선인인 친부모에 대한 증오와 경멸 뿐이었다. 그는 친부모에 대해 언급이 나오기만 해도 그 차가운 눈에 무서운 불을 켰다.


이때 와카마쓰 경부는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역력히 느꼈다. 오 경부보가 그리 다급하게 한주리 학생을 잡아야 할 이유를, 그리고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무리한 수사를 강행한 이유를 부지불식간에 추리해냈기 때문이었다. 가족에게 보이는 것이 냉담함 또는 증오밖에 없는 자가, 감정을 냉담함에서 증오로 바꾸었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경부는 목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낀다.


“혹시 한주리 학생의 담임선생이십니까?”


-아닙니다. 바꿔 드릴까요?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와카마쓰 경부는 주리의 반 담임선생인 여교사와 통화할 수 있었다. 경부는 통화를 시작하자마자 “한주리 학생은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특이사항은 없었습니까?”라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담임 선생은 순순히 말해주었다. 중추원 참의이자 방직회사 사장의 딸인 한주리는 1년 전까지만 해도 항상 밝고 명랑하고 재기발랄하여 선생들의 귀여움과 같은 반 학생들의 우정을 두루 받았으며, 내지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항상 곁에 학생들이 몰려다녔다. 그런데 결핵에 걸려서 5학년 마지막 달에 요양을 내려간 후에 올해 3월에 졸업반으로 올라왔는데, 그때부터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지고 말수가 극히 줄어든 데다가 갑자기 이유 없이 눈에 눈물이 맺힐 때가 있을 정도로 우울증 증세를 보여서 친했던 친구들하고도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아 모두와 소원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 시점에서 선생도 걱정이 되어 여러 차례 상담을 하려 했으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3월 말에 들어서며 표정에서 어둠이 차츰차츰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4월경에는 예전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작년에 보여줬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표정은 퍽 밝아지고 명랑한 기운을 보이면서도 어딘가 진지하고 성숙해진 느낌을 주었다. 꼭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 무언가 길을 찾았다는 확신이 담겨 있는 듯 하였다. 상태가 좋아진 뒤에도 주변 학생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고, 수업시간에 지극히 지루하단듯이 시계를 여러 차례 물끄러미 쳐다보다 지적을 여러 번 받았으며, 가끔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혼자 히죽히죽 웃는 경우가 보였다. 이 시점에서 아버지 한 참의가 학교에 찾아와 조만간 시집갈 것이니 하고 싶은 데로 놀게 해주고 싶다며 부탁하여, 최소 출석일수만 채우면 얼마든지 결석해도 좋다는 교장선생의 허락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근래에는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만 출석하였다는게 선생의 말이었다.


와카마쓰 경부는 식은땀을 훔쳐냈다.수많은 사상범을 수사하며 여러 차례 본 경우들이었다. 내지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상류층 학생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집안 때문에 가난해졌다며 괴로워하다 불온사상에서 답을 찾았다며 밝아진 경우들이 그의 수사기록에 적혀 있었다.


오 경부보가 어떤 경위로 갑자기 사촌여동생을 의심하여 이 여학교로 쳐들어갔는지는 아직 원인불명이다. 하지만 모종의 정보를 얻었다면, 오 경부보에게 한주리 학생은 하루 속히 필히 입을 다물게 해야 할 존재다. 불령선인 친부모에 불령선인 사촌여동생까지 있다는 것은, 그에게 심각한 혹을 하나 더 붙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호, 혹시 한주리 양이 불온한 발언을 하거나 불온서적을 읽다가 적발된 적은 없습니까?”


경부는 그 발언을 하고 곧바로 “아뇨. 그런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라는 대답에 무슨 바보같은 질문이었냐고 생각한다. 그런 걸 대놓고 들고다니던 멍청한 사상범이 어디 있겠는가? 경부는 협조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경부는 머릿속에 쏟아진 정보들을 정리했다. 한주리 학생의 행동은 확실히 그녀가 사상범이 되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 경부보가 한주리 양을 찾아 거짓말까지 하며 여학교에 난입한 이유는 그 여자에게 정보를 캐내고 입을 막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목숨을 앗아가더라도. 이유는? 불령선인 사촌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한주리 학생이 불령선인이라면 심각한 일이었다. 오 경부보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한때 고등계 사무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던가? 진작 그녀가 수상하다고 느꼈어야 했다. 또래 여학생이 끌려가는 것을 보고 그리 충격받았던 사람이, 생글생글 웃으며 수고한다고 주전부리를 선물하고 수사정보에 흥미를 보이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겼으면서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극히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분명 한주리 학생이 학생 사상범들과 유사한 변화를 일으키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불령선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가? 상대는 재력 있는 기업 사장에다가 중추원 참의의 딸이다. 이것만으로 단정짓고 보고해 수배를 요청했다가는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 있음이었다. 더 조사가 필요했다.


게다가 하필 한 참의의 딸이란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과 미쓰이 사토시 사장이라는 두 사기용의자의 피해자인데, 경찰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피해사실을 부정하며 오히려 고발을 취하하였다. 왜 문제의 중심에 그가 있는 건가? 혹여 이 사기 사건과 한주리 학생의 불령선인 의심에 연관성이 있는 건가?


와카마쓰 경부는 바로 지갑 속의 명함을 꺼내 한 참의의 비서실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비서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떨리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여기 종로경찰서입니다. 혹시 사장님과 통화 가능합니까?’


-예? 경찰이요?


이상하였다. 평소 어디든 경찰서라고 전화하면 목소리에 당혹감 또는 두려움이 깃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한 참의의 비서는 경찰이라고 밝히자 목소리가 갑자기 들뜨고 있었다.


-아이고, 순사님! 마침 전화하려고 했습니다! 빨리 우리 사무실로 좀 와주십시오!


“예? 그건 무슨 말입니까?”


-사무실에서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도무지 수습할 수가 없어요! 제발 빨리 오셔서 진정 좀 시켜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수화기 너머로 비서의 말이 묻힐 정도의 고성방가가 들렸다. 뭔가 화가 잔뜩 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지르는 고함소리가 울렸다. 와카마쓰 경부는 뭔지는 몰라도 일이 터졌다는 직감에 즉시 출동하겠다고 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윤 순사 빼고 다 나 따라온다! 경위는 가면서 설명하겠다!”


와카마쓰가 그러며 외출용 코트를 챙겨 입으니 휘하 형사들이 빠르게 따라나선다. 차량에 탑승하며 한 참의 사무실에서 대난동이 벌어진 것 같다고 말하니, 마쓰우라 순사가 말한다.


“그럼 보안계나 사법계 애들이 할 일이잖습니까?”


그 말대로 난동 사건에 고등계 형사들이 출동할 이유는 없었다. 와카마쓰 경부는 한 참의를 당장 조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신의 추리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형사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참한 아가씨가 불령선인으로 의심된다고요? 그리고 경부보님은 그 아가씨 입을 막으려고 한 거고요?”


노무라 순사부장이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그래도 그거면 경부보님이 거짓말까지 하고 그 여학교 쳐들어간 이유가 설명되긴 하지만······.”


오오이시 순사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확실히 모르는 일이다. 우선 증거가 더 필요해. 한 참의 나리를 조사하여 최대한 알 수 있는 걸 알아봐야 한다.”


경부가 침착하게 말했다. 비서가 한 참의와 연결해주지 않고 바로 와달라고 한 것을 보면 꽤 심각한 일이 터진 것 같았다. 오늘 안에 대체 무슨 일로 오 경부보가 그런 짓을 벌였으며, 또 한주리 학생이 정말 불령선인인지 알려면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터였다.


한 참의의 회사 사무실에 가보니, 정말 상황이 심상찮았다. 대부분 중년 이상의, 얼굴에 기름이 흐르는 양복장이 사내들이 회사 사무실을 매우고 마구 고성을 지르고 있던 것이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어떡할 건데요!”


“만주에서 석유는 개뿔이! 우린 다 사장님만 믿었단 말입니다!”


“당신 배임죄로 고발할 거야! 내 돈 어떡할 건데!”


“당장 내 투자금 돌려내!”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양복장이들이 한 참의의 사장실 앞을 틀어막고 있어서 그를 볼 수조차 없었다. 실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경부는 대체 뭔 난리인지 알 수가 없긴 했지만, 여하튼 이런 소동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와 안면이 있으며 방금 통화했던 비서가 질린 얼굴에 화색을 보이며 달려왔다.


“형사님! 잘 오셨습니다! 좀 진정시켜 주십쇼!”


“아, 알겠습니다.”


성난 목소리들이 떠들어대는 소리에 귀가 아파오는 경부는, 목소리를 크게 냈다.


“경찰이오! 모두 진정하고 해산하시오!”


그러나 그의 말은 거센 목소리들에 묻혀서 영 들리지가 않는다. 휘하 형사들이 “아, 경찰이라니깐! 안들리쇼!”, “당장 진정하지 않으면 체포하겠소!”라고 소리쳐도 성난 군중들에겐 먹히지가 않는다.


이들이 도무지 말을 안 듣자 경부는 성을 내며 “경찰이라니깐!”이라고 고함을 지른 그 순간이었다.


탕! 탕! 탕!


귀청을 때리는 파열음이 사무실을 진동시켰다.


“아이고야!”


갑작스럽게 울린 총성에 모두 우르르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와카마쓰 경부 이하 형사들도 기겁하여 그 자리에 고꾸라지려다가 그들이 경찰임을 자각하고 권총집에 손을 대는 두가지 동작을 동시에 취하려 든다.


세 차례의 총성이 들린 사무실 입구에서, 황갈색 군복의 군인 한 명이 어슬렁어슬렁 들어온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파충류의 눈이 굴러다니고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었으며 불룩 나온 뱃살이 돋보이는 헌병 장교였다. 그 장교가 혀를 낼름거리며 입술에 침을 묻힌다. 그의 권총에는 방금 격발되었음을 알려주는 화약연기가 솓아오르고 있었다.


“난장판이 따로 없구만 그래. 뭐, 간단히 정리되었지만.”


헌병소좌는 그렇게 말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그 뒤로 헌병 병력 여러 명이 뒤따른다. 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이 일어날 생각을 못하고 몸을 비비고 기고 비척거리며 길을 터준다. 흡사 구악성서 출애굽기 속에서 홍해가 갈라지듯 길이 열린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는, 사장실 의자에 앉아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떠는 한덕만 참의가 있었다.


“참의 나리. 두어달 전에 뵈었었죠?”


기타무라 헤이스케 소좌가 이가 다 드러나게 씩 웃음짓는다.


“조사할 게 한두개가 아닌데, 우리와 같이 가셔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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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229화 +8 20.11.22 265 9 15쪽
228 228화 +8 20.11.21 261 11 17쪽
227 227화 +6 20.11.20 261 9 17쪽
226 226화 +6 20.11.18 260 10 20쪽
225 225화 +12 20.11.15 266 11 19쪽
224 224화 +10 20.11.14 261 9 17쪽
223 223화 +4 20.11.12 263 10 13쪽
222 222화 +8 20.11.08 262 11 19쪽
221 221화 +8 20.11.04 259 10 14쪽
220 220화 +12 20.11.01 260 10 15쪽
219 219화 +8 20.10.30 263 9 16쪽
218 218화 +4 20.10.27 263 10 14쪽
217 217화 +12 20.10.25 261 10 15쪽
216 216화 +8 20.10.24 262 13 19쪽
215 215화 +8 20.10.21 262 1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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