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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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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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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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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DUMMY

“뭔 또 같은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냐? 불령선인들과 어울리더니 이상한 말이 늘었어!”


나카하라 국장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면박을 준다. 철도국의 5급 사무관에 불과한데다 불령선인 조직에 가담한 조카가 무슨 총독과 관동군사령관을 어찌할 수 있다는 비책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취기가 잔뜩 오른 국장에게는 그저 코웃음 칠 말이었다.


그런데 국장은 히로요시가 다시 입을 열자, 몸에서 취기가 사라짐을 느꼈다.


“백부님이 도청하여 녹음한 자료하고 우리가 관동군 장교들 대화 녹음한 자료를 내각총리실에 보내는 겁니다.”


히로요시는 원래 총리실에 근무하는 도쿄제국대학교 동기에게 이시와라 간지 중좌와 청년장교들의 대화를 녹음한 레코드를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대신에게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동기가 관동군과 범죄조직의 연관이, 그리고 외국 요인들에 대한 암살음모가 녹음되어 일본 정계와 군부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그 레코드를 총리대신에게 전달할 정도로 대담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어떤 수단으로 레코드를 총리실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현 체제에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백부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 경시감 계급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인 백부님이 우리쪽 자료와 경찰 쪽 자료를 종합해 총리대신에게 보낸다면, 한 바탕 난리를 일으킬 수 있을 겁니다. 관동군 특무기관이 아편밀수 조직과 연관되었고, 중국과 소련 인사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조선총독이 이들과 검은 돈을 거래하였다고 말이죠. 이는 야마나시 전 총독이 일으킨 뇌물 사건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딴 것도 아닌 아편거래에 연관된 거니까요! 이누카이 수상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설령 우가키 총독이 뭔가 수를 써서 총독 직에서 면직되진 않는다 해도···....”


“히로요시, 잠깐! 잠깐 기다리거라!”


취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던 국장은 이 급작스러운 제안에 잠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히로요시의 제안은 분명 솔깃하였다. 천황도 이누카이 총리대신도 모두 관동군의 아편거래와 조선총독의 가담이 모든 문제의 근원임은 모른다. 그 상태에서 횡령된 해군예산을 옮기는 청년장교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만약 국장이 문제의 근원에 대해 총리대신에게 직접 전달하고 유력한 증거들까지 보낸다면, 일본은 한바탕 뒤집어질 것이었다. 총리대신은 천황에게 이 사태의 진상을 보고할 것이다. 천황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진상을 조사하라는 새로운 성단을 내린다면, 총리대신은 내무대신을 통해 경시청에 긴급수사를 진행하라고 전할 것이고, 육군대신에게도 관동군에 대한 대대적 감찰을 내리라고 요청할 것이다. 총독과 관동군사령관을 비롯해 이 일에 연관된 고위직 인사들이 도쿄로 송환되어 문책을 당하고 피의자로서 진상조사를 당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마땅한 자들이 모두 처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제안의 솔깃함에도, 국장은 이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히로요시. 머리 꽤나 썼구나.”


국장의 풀린 눈에 총기가 돌아온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네 목적은 이걸로 이 나라에 혼란을 일으키는 거지? 총독부와 관동군사령부가 스캔들로 뒤집어지며 총독부 행정에 어려움이 생기고 방위태세가 약화되며 경찰과 육군이 충돌하는 것을 바라는 게지? 그럴 목적으로 나더러 협력하라는 것이냐?”


그가 조카를 보는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나카하라 국장은 천남건으로부터 관동군 봉천 특무기관의 아편 밀거래 연루에 대한 증거자료들을 받고 느낀 대단한 불쾌함을 떠올렸다. 불령선인의 두목 천남건의 속셈은 뻔했다. 그가 조선에 관동군이 밀거래한 아편이 퍼지는 사태를 막겠다는 정의감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국장이 보기에 천남건은 모든 사상범들이 그렇듯이 대일본제국의 혼란과 국력의 약화를 꾀하고 있었다. 물론 마약을 거래한 불법행위자들은 엄단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천남건의 의도에 움직여줄 수는 없었다.


히로요시는 백부의 이 반응을 예상했기에, 날카롭게 정곡을 찌른다.


“폐하께서 내린 사건을 무마한다는 결정도 그 계산 하에서 나온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국장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천황이 내린 성단은 소만국경의 방위를 책임지는 관동군에 혼란이 일어나면 방위태세가 약화된다는 것을 이유로 내려온 게 아니었던가? 관동군이 이 사건으로 뒤집어지고 주요 인사들이 감찰조사를 받으며 보직해임에 이르면 군의 사기저하와 인사상의 공백이 발생해 전투력이 저하되었을 때 소련군이나 지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한다면 대응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국장은 자신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자들과 똑같은 소리를 했음을 깨닫고 “끄응······.”하고 불편한 신음을 내었다.


“백부님께서도 관료 생활을 오래 하셨으니 아시지 않습니까? 제일 윗선의 인사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사기저하가 우려된다느니 또는 업무상 공백이 발생할 시 대체할 사람이 없다느니 하며 책임이 무마되고 그런 자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 자리에 계속 있던 일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국장이 마지못하여 인정한다. 이는 경무국장이 30년 가까이 경찰 생활을 하며 수도 없이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일들이었다.


“아시다시피 그건 다 핑계입니다!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지지 않겠다는 전형적인 핑계죠! 그리고 괜히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뭐든 원만하게 처리해야 탈이 없다는 사고방식의 결과고요! 백부님은 항상 그런 관습을 비웃으며 범죄자의 상하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체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카하라 국장은 “그렇게 치면 난 너부터 체포해야 한다.”라고 응수하려 했으나, 히로요시가 틈을 주지 않는다.


“관동군에서 책임져야 할 자들은 지금 모두 소련의 위협을 핑계로 대고 있는데, 실제 소련이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기는 합니까? 지난 사변에서 관동군이 만주 전체를 장악했을 때, 소련군은 만주에서 적성국 군대를 마주하고 연해주와 시베리아가 위협당할 수 있는 사태에서도 월경해 관동군과 맞서지 않았습니다! 지금 소련군이 극동에 배치한 병력규모도 관동군을 어찌해볼 수 있는 규모도 아니고요! 그런데도 관동군은 소련의 위협을 내걸며 자신들을 무소불위의 존재로 만들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짓을 저질러도 책임지지 않는 조직으로요!”


그 말에 경무국장은 자연히 내지에서 활동하던 시절 겪은 군 관련 사고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육군 간부들이 민간인 상대로 형사사건을 일으켰을 때, 경찰이 초동수사를 한 후 헌병에 인계한지 몇달 후에 그 간부들이 제대로 처벌되었나 확인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용의자들은 군사법원에서 가벼운 형량만 받거나 징계위원회에서 경징계만 받고는 보직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이 사태에 대해 헌병 측에 항의하면, 그들은 절차대로 처리되었으며, 또 엄중한 시기에 중요인력의 손실을 초래할 수 없다고만 답답했다. 그 때는 시베리아 출병이 끝난지 몇년 된 시기였고 일본군이 중국 지남지방에 상륙하기 전의 시기였다. 엄중한 시기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이 부패한 놈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앞으로 더 기회가 없을 겁니다. 만주에서 관동군이 계속 대소방비 한답시고 병력과 장비를 증강하는데, 소련군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관동군과 소련군의 대치가 계속된다면, 이놈들에게 손을 댈 수가 없어집니다. 썩을 대로 썩은 자들이 계속 그 자리에 있는데 솎아내지도 못하는 거라고요. 이런 자들이 육군의 상층부에 앉아서 얼마나 더 나라를 좀먹겠습니까?”


그 말에 나카하라 국장은 한 마디로 응수했다.


“꼭 네가 애국자라도 된 듯 말하는구나? 불령선인들에게 기밀정보를 보내는 녀석이!”


그러나 히로요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제 친구가 그러더군요. 전 폐하께서 직접 훈장을 수여해야 할 정도의 애국자라고 말입니다.”


이 말에 국장은 심각한 상황임에도 갑자기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하하! 이 말은 꽤나 웃기는 농담이구나! 그게 무슨 놈의 애국이더냐?”


평소라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거세게 고함을 질렀겠지만 제법 취한 국장이기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히로요시는 진지하였다.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이 나라가 더 안전해지고 더 평안해지는 길이잖습니까? 22년 전에 메이지 천황과 가쓰라 내각은 국방상의 이유라면서 조선을 병합했죠. 대륙의 위협에 대한 완충지대를 만들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완충지대를 보호해야 한다며 만주로 쳐들어가 새로운 완충지대를 만들었죠. 그래서 제국이 안전해졌습니까? 오히려 지금 강한 적성국인 소련을 더욱 위협하고 우리를 경계하게 만들고 있는 데다가, 수천만 조선인은 물론이고 수억 중국인의 원한만 더더욱 사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조선이 독립된 국가였으면, 우리 동지인 이봉창이 폐하를 시해하려 했겠습니까?”


그 말에 국장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륙의 위협을 사전에 대처하려면 조선 병합이 불가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건 압니다. 일본이 차지하지 않으면 러시아나 다른 열강이 차지하고 우리 본토를 직접 위협할 비수가 되리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래서 러시아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조선을 통째로 삼키려 했습니까? 그저 금광 채굴권과 항구와 조차지만 원하지 않았습니까? 러시아 이외에 다른 열강이 조선을 차지하려고 했습니까? 그 때의 구미 열강들은 이미 식민지 경쟁을 다 끝낸 시점입니다. 집어삼켜서 별다른 이익도 없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요. 일로전쟁 종결 후에 조선을 그대로 놔두었다 해도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합병이라는 최악의 수단으로 원한만 잔뜩 만들지 않았습니까? 국민의 세금을 조선의 문명개화와 치안유지라는 이유로 쏟아붇는데 총독부 재정은 늘 적자지 않습니까? 이른바 불령선인이 언제 테러를 저지를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나카하라 국장은 “그때는 먹지 않으면 먹히는 시대였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그 말은 히로요시가 입에 담기도 전에 반박해 버려서 할 말이 없어졌다.


히로요시는 말을 끝내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조선 독립에 대한 제 견해애 백부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총독과 관동군사령관을 그대로 두기에는, 백부님의 살아온 인생이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평생 이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싸워 오셨지 않습니까? 평생 공명정대 네 글자를 새기고 살아오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폐하가 종이쪽 하나 내렸다고 이제까지 살아온 걸 다 헛된 일로 만드실 겁니까?”


국장은 “감히 폐하의 성지를 종이쪽이라고 하다니!”라고 고함을 지르려다가 말았다. 히로요시의 말이 그의 가슴에 뭉쳐진 응어리를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멸사봉공과 공명정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왔다 자부했다. 그것이 현인신인 폐하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국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꼴은 뭔가? 총독과 관동군사령부가 아편밀거래 범죄조직과 유착관계를 이룬 것을 수사하려다가 내지로 쫓겨다시피 발령나고 아무 힘도 못쓰게 되었다. 국가가 자신에게 보상해 줄거라고는 생각치도 않았다. 멸사봉공은 철저히 자신을 멸하고 공적인 것, 즉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니. 그러나 그 멸사봉공을 실천하였는데, 그걸 실천하지 않는 자들 때문에 무력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그럼에도 국장은 히로요시의 말을 바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더러 불령선인들과 손잡으라는 거냐? 나더러 국가의 범죄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국가의 적과 손을 잡으라는 거냐?”


히로요시는 이에 물러남 없이 지적했다.


“백부님도 조직범죄 수사 하실때 야쿠자들을 정보원으로 삼으셨잖습니까?”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조직범죄 수사를 발판으로 수사실적을 쌓아 온 그는 군소조직들이 사고를 치지 않는 한에서 뒷세계의 정보원으로 사용해 더 거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들을 파괴해 왔다. 이를 위해 그 조직들을 건드리지 않고 협력자로 삼는 방법도 많이 써 왔다. 어디까지나 경찰의 감시하에서 사고를 치지 않는다는 전제였지만.


“군소 조직들과 협조해서 수사한다고 생각하시면 괜찮을 거에요.”


그 말에 국장은 그래도 토를 단다.


“네가 있는 조직이 그냥 작은 야쿠자조직이냐? 국가전복을 꿈꾸는 놈들이?”


“우리는 그런 거 생각 안합니다. 상하이 정부는 독립만 되면 우리나라의 체제가 천황제건 공화제건 상관 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국장은 다시 반박하려 하나 히로요시가 고개를 숙인 채로 들어온다.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으시면 안 됩니다.”


히로요시가 가까이 다가와 더 간곡히 말한다.


“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가장 큰 책임을 맡은 자들이 책임에서 도피할 수 없다고요! 백부님의 인생을 바보취급해버린 놈들에게 한방 먹일 수 있다고요!”


그 말이 순간 국장의 마음을 움직이고 말았다. 바보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누군지 아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자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유치장에 집어넣고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던 나카하라 가즈오가, 바보취급을 당한 채 자리에 앉아 줄담배나 뻑뻑 피우고 조카 집에서 술주정이나 부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국장은 히로요시의 태도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조카가 자신 몰래 불령선인 범죄자들에게 협조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괘씸하고 또 괘씸하였다. 그러나 조카는 지금 너무나도 진실되게 말하고 있었다. 조카에게서 또 그를 속이거나, 무언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꾸며 말하는 그런 태도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의 유년 시절에 아버지 없던 시절에 아버지 역할을 해 준 큰아버지에 대한 존경, 그리고 그의 인생에 대한 존중과 애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조카의 호소에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네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구나.”


나카하라 국장이 장고 끝에 신음을 토하듯 말했다. 그 말에 히로요시는 얼굴이 환해지며 환호작약할 뻔했다.


“지금 당장 우리 지부장님과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레코드를 어떻게 전달받을지 직접 논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국장의 결심을 잠깐 흔들리게 했다. 그 사람 속을 긁어대는 편지와 말투의 천남건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게 여간 신경거슬리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방도도 없기에, “네 맘대로 하거라.”하며 애꿏은 빈 병이나 다시 들이켜보려 한다.


히로요시는 곧장 소련 총영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영사관 직원 몇 명을 거쳐간 후, 천 지부장과 통화가 연결되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무슨 돌발상황이라도 발생한 건가?


“저, 지부장님. 지금 전 백부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 말에 천 지부장의 목소리에 당혹감과 놀람이 섞인다.


-뭐? 그건 무슨 말인가? 자세히 설명해 보게!


지부장의 다그침에, 히로요시는 백부가 처한 상황, 그리고 백부를 통해 레코드를 이누카이 총리대신에게 보내서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을 쌍으로 뒤짚어 엎어 버린다는 자신의 계획을 전달했다.


잠깐 침묵이 흐른 후, 만족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네, 히로요시 군. 참으로 훌륭해. 지금 자네 백부님과 통화하고 싶군. 바꿔드릴 수 있나?


수화기 너머의 천 지부장은 예상하지 못했던 절호조의 기회가 들어오자 흡족함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절차상의 문제를 감수하고서라도 총리대신에게 직접 내부고발을 한다면, 사태를 일파만파로 확대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히로요시는 수화기를 대단히 굳어진 얼굴의 백부에게 내밀었다.


“통화하시겠습니까?”


국장은 불편한 신음을 한번 토해내고, 건내준 수화기를 잡았다.


“여보시오.”


-이거. 이거. 국장 나리. 본인의 공조수사 요청을 받아들여주실 줄은 몰랐소이다. 그대의 변화에 크나큰 감축을 드리는 바요.


여전히 신경거슬리는 말투였다. 국장은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한데 천남건이 이런 말투로 응대하니 확 역정을 내버리고 말았다.


“계속 그딴 식으로 말하면 협조는 없을 줄 아시오!”


이 말에는 천 지부장도 다소나마 당황했는지, 태도가 바뀐 것을 느꼈다.


-미안하오. 습관이 된 말투라. 조심하겠소.


“그 망할 놈의 레코드를 내놓을 방도나 말하시오.”


-일단 우리 쪽에서 히로요시 군을 통해 레코드를 넘겨주는 건 좀 어렵소이다. 지금 헌병이 우리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고 있소. 그 구역 일대가 통제중이라오. 지금 헌병이 이곳에 돌아다니는 사람마다 닥치고 검문해대는 통에 우리가 나다니기가 쉽지 않소. 우편으로 전달했다가 소포가 사라지는 것도 좀 우려가 되는군. 그래서 부탁하건데, 그쪽이 직접 와 줄수 있겠소? 레코드가 진본인지도 확인시켜줄 필요도 있으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라면 헌병도 어찌할 수 없는 신분 아니오?


나카하라 국장은 이놈이 어딜대고 오라가냐냐며 역정을 내고 싶었지만, 그 레코드가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기에 또 불편한 신음만 낸다.


“알겠소. 어디로 가야 하겠소?”


-체호프라고, 백계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러시아요리점이 하나 있소. 비밀리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도 있으니, 거기서 한 오전 12시경에 봅시다. 식사하러왔다 하면 의심받지 않을 것 같소.


“알겠소. 내일 거기로 가겠소.”


-같이 가벼운 식사라도 합시다. 그곳 러시아요리가 꽤 괜찮다오.


“참 뻔뻔스럽기도 하군!”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불령선인 강도두목과 식사라니! 나카하라 국장은 이 뻔뻔스러울만치의 대범함에 화가 치솟는 동시에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왔는지 속으로 한탄하였다.


-식사하기 불편하다면 차라도 대접하겠소. 어차피 논의할 걸 논의하려면 시간도 좀 필요한데, 우리 쪽에서 손님대접도 제대로 안하기는 조금 그렇잖소?


“차건 식사건 필요없소! 레코드만 확인하고 받겠소!”


-그러고 싶으시다면 그러시구려. 나도 통화 오래하면 곤란하니,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합시다. 대신, 반드시 혼자 오시오. 국장과 히로요시 군 이외에 다른 사람이 온다면, 이 거래는 없는 걸로 하겠소. 그럼 이만.


그 말 직후 통화가 끊겼다. 경무국장은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짜증을 냈지만, 히로요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백부님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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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227화 +6 20.11.20 261 9 17쪽
226 226화 +6 20.11.18 260 1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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