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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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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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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28화

DUMMY

“키에에에에!!”


쿠스노기 중위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거대한 성성이가 울부짖는 것 같은 기합이 요동친다. 뒷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친구가 순식간에 제압당하는 것을 본 쿠스노기 모토스케는 앞뒤 가리지 않고 군도부터 뽑아들었다. 칼이 뽑아지는 쩌렁 소리에 정우는 바로 응전할 태세를 갖추고 쿠스노기 중위의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한다.


쿠스노기가 거세게 돌진하면서 군도를 양 손으로 잡고 위로 쳐들더니 위아래로 내려친다. 정우는 순간 몸을 틀고 뒤로 쑥 물러났다. 이 거센 기세를 막으려고 지팡이를 들어 머리를 보호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절명할 것이 뻔히 보였다. 힘이 가득 실려있는 이 검격을 받아낸 그 즉시 기세에 밀려 머리가 두동강 날 것이었다.


쿠스노기 중위는 아까의 그 동작을 다시 취하며 또 정우를 통째로 베어버리려 한다. 정우는 공격을 피한 즉시 쿠스노기 중위가 다시금 팔을 쳐올려 가슴이 빈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쿠스노기 중위는 반격을 허가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빈틈을 보인 것도 일순간, 정우가 채 지팡이를 내지를 새도 없이 다시금 위에서 아래로 배는 검격이 연거푸 날아온다.


“이놈! 도망치지 마라!”


쿠스노기 중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담벼락을 진동시킨다. 다혈질인 그는 손에 베는 감각이 전해지 않고 정우가 요리조리 공격을 피해대자 머리에 김이 솓아오른다.


바람을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군도가 허공을 가른다. 쿠스노기는 계속해서 위에서 아래로 베는 동작을 반복한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는 지극히 단순한 검격이었다. 그러나 쿠스노기의 덩치와 완력, 그리고 수도 없이 연습한 공력이 합쳐지며 엄청난 속도로 정우를 내려치고 또 내려친다.


정우는 우선 피하는 데 주력하며 기회를 노리지만, 쿠스노기의 가슴이 비는 시간이 극히 짧아서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으며 힘만 믿고 덤벼드는 자를 어떻게 상대하는지에 대해 익히 배워두고 경험한 바 있는 정우는, 당황하지도 위축되지도 않는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군! 그것도 검술이라고 익힌 것이오?”


“뭐, 뭐라?”


정우가 여섯 차례의 검격을 피하고는 여유롭게 도발적인 언사를 날리자, 쿠스노기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다.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휘두를 뿐이잖소! 하류 검법의 전형이로군! 그런 걸 누군들 못하겠소? 어느 도장에서 배웠기에 그 정도 수준이오? 제국육군은 그런 것만 가르치오?”


“이, 이놈이! 네놈을 썰어버리지 못하면 사나이가 아니다!”


쿠스노기가 일곱 번째로 검을 휘두른다. 그러나 역시 가르는 건 허공 뿐이었다.


“비겁하게 피하지만 말고 나와 실력을 겨뤄보자! 조선인들은 원래 겁쟁이인가!”


이 도발에도 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더 흥분시킨다. 평소에 짓지도 않는 비웃음까지 입꼬리에 띄운다.


“그대같이 수준 낮은 상대를 가지고 내 초식을 전개할 이유가 없어서 그렇소. 이 몸을 상대라려면 그 옛날 미야모토 무사시나 사사키 코지로 쯤 데려와야 할 것이오. 그대의 실력이란 것은 그저 하찮은 상대들만 어찌 할 수 있을 뿐, 내가 상대하기는 시간이 참으로 아까운 것이오.”


“이놈이 정말 죽으려고!”


쿠스노기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부터 매일 도장에서 갈고 닦아온 검술이 대번에 부정당하자 분노가 더더욱 폭발해버렸다. 이제 그의 눈에는 주변 환경이 들어오지 않고, 오직 가짜수염을 휘날리는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만 들어온다. 다시 “키에에에에!” 하는 괴성과 함께 쿠스노기가 달려든다.


주리는 그걸 보며 “어떡해! 어떡해!” 하며 발만 동동 구른다. 정우는 계속 쿠스노기가 휘두르는 군도를 물 흐르듯 잘 피하며 쿠스노기를 의도한 대로 흥분시키고 있었지만, 무공을 모르는 주리가 보기에는 정우가 완벽히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무공을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무공만 할 줄 알았다면 정우 오빠 도와서 당장 저 고릴라 같은 놈을 상대했을 텐데!



방금 전까지 우에스기 중위의 정신을 산란하게 하여 정우가 제압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며 자부심에 차 있었던 게 너무나도 부끄럽다. 저들의 대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하였다.


그때 주리는 무심코 옆을 보고 “히익!”하고 기겁했다. 정우에게 뒤통수를 맞고 기절한 줄 알았던 우에스기 중위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던 것이었다. 권총집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자. 이를 악물며 군도를 빼든다.


“모토스케! 나도 간다!”


우에스기 중위가 고성을 내지르며 칼을 꽉 잡았다. 그때 주리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았다.


“에잇!”


주리는 길가의 돌멩이를 잡고 우에스기 중위의 뒷통수를 냅다 후려쳐버리고 말았다.


퍽!


“어억!”


우에스기 중위는 뒷통수에 다시 가해진 격통에 눈 앞이 캄캄해지고 별이 보였다. 주리는 그때 사람을 때린다는 감각이 이런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손에 전해지는 떨림이 처음으로 휘두른 육체적 폭력의 흥분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해치려 마음억었다는 것 자체에서 온 두려움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우에스기 중위는 결국 그 자리에 다시금 고꾸라져버리고 말았다. 선명한 피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게 보였다.


“망할 년! 이놈을 처리하면 너도 썰어버리고 말겠어!”


쿠스노기 중위가 그 광경을 보고 고함을 내지르고 정우를 계속해서 내리친다. 주리는 우에스기 중위가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막았지만, 정우가 쿠스노기 중위의 맹렬한 공격에 수세를 취하는 현실은 변하는 게 없어서 다시금 가슴 졸인 채로 싸움을 지켜본다.


그때, 이 대결에 제3자가 끼어든다.


“선배님! 가만히 계셔주십쇼!”


주리는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미나모토 신이치 중위가 골목 저편에서 뛰어나와 권총집에서 14년식 권총을 꺼내든 것이었다. 미나모토 중위의 총이 불을 뿜는다면, 정우의 운명은 그대로 끝장나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안 돼에!”


주리는 총구가 바로 근처라는 것도 잊고 달려들려 했다. 눈 앞에서 정우가 총을 맞아 피흘리는 순간 쿠스노기 중위의 검격이 그를 내리치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나 미나모토 중위는 총을 쏘지 못했다. 쿠스노기 중위가 흥분상태에 빠져들어 눈 앞의 정우를 베는데만 집중한 나머지 미나모토 중위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이었다.


미나모토 중위는 쿠스노기 선배에게 오발할 까봐 총구를 이리저리 왔다갔다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저도 갑니다!”하고 군도를 빼어들고 만다.


이때 주리는 미나모토 중위의 앞을 확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서 군도가 섬짓하게 빛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우가 2:1의 불리한 지경에 처하는 걸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득하였다.


“비켜!”


“못 비켜요!”


주리는 미나모토 중위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칼을 휘두르진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자신을 산 채로 잡아가야 어떻게 정보가 누출되었고 누구에게 누출되었는지 토설해 낼 수 있으니까.


미나모토 중위는 주리가 자신을 막고 서자 그 어린 얼굴이 증오감으로 부들부들 떤다. 주리가 정보누출의 범인이라는 후지무라 중위의 추리를 계속 반신반의하던 그였다. 아오야기 중위의 약혼녀로 자신보다 8살은 어린데도 쭉 형수님이라 부르고 공대해온 사람이자,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어여쁜 약혼녀 타마쨩이 좋은 언니이자 친구라고 쉬지도 않고 칭찬한 사람이 주리였다. 그런 주리가 존경하는 선배들의 뒷통수를 쳤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인만큼 주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배신감이 크고 또 컸다.


미나모토 중위의 손가락이 주리를 향한다.


“이 망할 년! 타마쨩은 널 친자매로 여기고 있어! 내지로 돌아가기 전에 또 조선에 와서 너와 놀고 싶다고 노래하듯이 말했다고! 그런데 우리를 이딴 식으로 배신해? 아오야기 선배님과 약혼한 것도 의도적인 거였냐? 타마쨩과 친해진 것도 의도적인 거였냐? 대답해 봐!”


미나모토 중위는 주리가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돌아보기 힘든 문제를 꺼내들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그 둘은 사심 없이 자신을 대한 사람들이었다. 그 귀여운 눈망울을 하고 코맹맹이 소리로 “아우아우!”하며 허둥지둥대는 타마코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 충격에 얼마나 얼굴을 일그러트릴지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들의 선의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 아래에 묻어두었을 뿐, 결코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리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선다.


“두 사람에겐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타마쨩과 친해진 것은 어떠한 의도도 없었어요! 이건 하늘에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변명이라고 욕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닥쳐! 저놈을 쓰러트리고 네년을 손봐주고 말겠다!”


애초에 주리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던 미나모토 중위는 노성을 지르고 달려들 기세를 취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으악! 선배님!”


미나모토 중위가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쿠스노기 중위가 “으윽!”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그 육중한 덩치를 주체하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것이었다.


주리가 미나모토 중위를 가로막고 있던 바로 그때, 정우는 쿠스노기 중위가 의도한 바대로 움직이게 하였다. 그의 공격을 피하며 담벼락 쪽으로 계속 물러서던 정우는, 이제 회피는 마지막이라고 느꼈다.


“키에에에에!”


으례 그 원숭이 같은 괴성과 함께 무자비한 검격이 날아왔다. 이 검격은 허공을 가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우의 몸을 가르며 반으로 갈라놓지도 않았다. 쿠스노기의 군도는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을 내리치고 말았다. 불똥까지 튀기면서.


“어엇!”


쿠스노기는 순간 당황했다. 온 힘을 실어서 내리친 군도가, 내리친 만큼의 반작용으로 돌로 쌓은 벽에 부딪치자마자 거세게 튕겨나가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적인 당황함이, 쿠스노기 모토스케의 운명을 결정했다.


“커헉!”


숨이 막힌 사람의 신음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려친 군도가 튕겨나와 가슴이 빈 그 순간, 정우의 지팡이가 명치를 찌르고 들어왔다. 명치를 찔린 쿠스노기 중위가 심각한 고통에 숨을 잠깐이나마 못 쉰 그때, 정우는 그의 왼쪽으로 쑥 하고 빠져나왔다. 쿠스노기 중위는 숨 막히는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정우가 한발 더 빨랐다.


정우의 지팡이가 쿠스노기 중위의 뒷통수를 무서운 속도로 가격했다. 한 차례가 아닌 여러 차례를. 쿠스노기 중위를 기절시키려면 그 정도의 가격이 필요했다.


쿠스노기 중위가 쓰러져 버리자, 미나모토 중위의 눈에 불이 일어났다. 미나모토는 앞을 가로막는 주리를 거세게 밀쳐버리고 달려들었다.


“꺄악!”


바닥에 나동그라진 주리였지만, 얼굴에는 안도감이 스쳐지나갔다. 정우가 둘을 동시에 상대할 위기는 벗어난 것이다.


미나모토 중위는 순식간에 도약, 정우를 향해 날카로운 찌르기 공격을 가한다.삽시간에 가해진 세 번의 찌르기가 정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사실상 동시에 세 검격이 날아들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우는 그보다 한발 더 앞섰다. 첫 번째 찌르기와 두 번째 찌르기를 휙 하고 회피한 후, 세 번째 찌르기를 지팡이를 휘둘러 받아쳐 버렸다. 정우는 무기를 쨍 하고 맞부딛치자마자 미나모토 중위의 완력이 쿠스노기 중위만큼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굳이 상대를 흥분에 휩싸이게 만들어 실수를 유도할 필요가 없어졌다.


정우의 초식이 급속도로 전개되었다. 재차 찌르기를 가하려던 미나모토 중위의 군도는 이곳저곳에서 현란하게 치고드는 지팡이를 막으라 정신이 없어졌다. 그저 나무로 만든 것인줄만 알았던 지팡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무게감이 전해지자, 미나모토 중위가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히 보였다.


정우는 침착함을 유지한채 미나모토 중위가 반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이곳저곳에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공격이 실패하고 기선을 제압당한 미나모토 중위는 계속해서 반격할 기회를 노렸지만, 정우가 원호를 빙빙 그리며 쏟아붓는 초식이 그걸 허용하지 아니하였다. 미나모토의 검법은 이미 정우가 천 지부장에게 배운 봉법에 말려들어 버렸다.


“으으으······.”


미나모토 중위가 손이 저려옴을 느낀다. 얼굴에 질리는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도 만주사변에서 이런 식의 근접전을 치러 본 적이 있었지만, 동북군벌 병사들은 대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기만 하다가 그의 찌르기에 다 당했었다. 아니면 벌벌 떨다가 칼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항복하거나. 그런데 이 가짜수염 단 조선인은 그의 공격을 막아내었을 뿐더러 반격의 기회를 완전히 봉쇄해버리는 것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수세에 중위는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정우는 미나모토 중위의 검에 힘이 약간이나마 떨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지팡이가 대응이 반박자 늦은 상대의 손을 퍽하고 가격하였다.


“아악!”


그 거센 일격에 중위가 비명을 질렀다. 군도가 쨍그랑 하고 땅에 떨어졌다. 정우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또 다시 날아든 지팡이가 미나모토의 왼쪽 정강이를, 그 다음으로는 오른쪽 허벅지를 가격했다. 급작스러운 격통에 미나모토 중위의 다리에 힘이 빠지며 그 자리에 무릎꿇고 말았다.


아픈 와중에도 권총집으로 손을 가져다대려 했지만, 정우의 지팡이가 그걸 허용해 줄 리가 만무했다. 다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일어난다. 정우는 미나모토 중위가 고통으로 마비된 틈을 타 역시 14년식 권총을 권총집에서 빼내어 버렸다.


“이······. 망할 놈!”


미나모토 중위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굴욕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불령선인 범죄자에게 대결에서 지고 이렇게 제압당해 무릎꿇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정우는 주리를 밀어 넘어뜨린 그의 머리에 선배들처럼 지팡이를 휘둘러 줄까 하고 생각했지만, 더 이 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싶진 않았다. 이 자의 약혼녀인 후루데카 타마코가 얼마나 귀여운지 주리가 신나게 말해준 기억이 있던 까닭이었다.


정우는 품 속에서 혜월 스님의 수면제 환약을 꺼내어, 미나모토 중위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아픔에 저리던 중위의 몸에서 통각이 잠들고,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몸을 털고 일어난 주리가 다가와, 잠 속으로 빠져들기 전의 그의 의식에 마지막 말을 전했다.


“타마쨩에게 전해주세요. 언니가 정말 미안하다고. 언젠가 반드시 사과하겠다고요.”


“전해줄까······. 보냐······”


미나모토 중위는 원망 가득한 말을 끝으로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정우는 주리의 얼굴에 안쓰러움과 죄책감이 뒤섞인 표정이 나타남을 보았다. 정우 그 자신이 예전에 거울 속에서 본 그런 얼굴이었다. 깊이 교류하고 감정을 나눈 사람을 배신해야 하는 임무에서 늘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념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괜찮니? 서두르자.”


정우는 주리의 손을 잡고 빨리 이곳을 떠나려 했다. 관동군 장교들의 고함소리가 이미 근처에 다 들렸을 것이다. 으슥한 골목에서 진행되었기 망정이지 대로변에 더 가까이 있었다면 경찰이건 헌병이건 다 몰려왔을 터였다. 주리도 빨리 상념에서 벗어나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 않았을 때였다. 순간 들린 발소리가 그들을 막아세웠다. 발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린 순간, 그들은 보았다. 오른쪽의 담장 위를 가볍게 뛰어다니며 그들을 앞지른 그자를. 그들 앞에 휙 하고 날아들듯이 내려와 앞을 가로막은 그 자를.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 그리고 한주리 양.”


그가 차갑기 이를 데 없는 눈을 하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주변의 공기가 그가 내뿜는 살기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당신들은 지금부터 아무데도 못 가오.”


정우는 올 것이 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 앞을 날아들듯 내려와 가로막은 그자는 후지무라 토비자루 중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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