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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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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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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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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243화

DUMMY

영등포의 폐공장에서 폭음이 들린 지 15분 후, 러시아 식당 체호프의 밀실에 앉아 있던 천 지부장에게 명수가 소식을 귀띔했다. 왕 채주가 영등포에 보내 놓은 옥룡회 단원이 그 공장에서 폭발이 일어났음을 육안으로 확인했다는 전화를 걸어왔다고 말이다.


“그래. 계획대로 되었군.”


천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러시아식으로 끓인 홍차를 홀짝였다. 표정은 항상 그렇듯이 덤덤하고 무표정하였지만, 눈에서는 만족감이 흘러나왔다. 정우가 자신의 강한 질책을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급조해 낸 계획이 먹혀들어간 것이었다.


정우는 그때 오재두 경부보를 유인해 내 처리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다치지 않을 방법을 말하였다.


“우리가 혹시 대백루도 위험해지면 도주하기로 물색한 장소 중 영등포의 한 폐공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래. 하지만 드나드는 걸인이나 부랑자가 여럿 있어서 눈에 띌 위험이 큰 곳이었지. 그건 왜 말하느냐?”


“그곳으로 오재두 경부보 뿐 아니라 다른 경찰들도 다 같이 유인해 처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우가 말한 계획은 이랬다. 우선 적의 밀정인 주이한 선생을 붙잡는다. 주 선생은 자신이 민족적이고 항일의식이 강하며 개화된 애국자라 생각하는 자다. 그자를 붙잡아 끌고 온 다음에 형제들이 사실 의열단 단원이며 주 선생을 의열단에 가입시키기 위해 데려왔는데 말이 잘못 전해져서 거칠게 데려왔다고 사과한다. 주 선생이 이 공작에 넘어가 의열단에 가입하게 되는 줄 알고 협조를 약속한다면, 자세한 거짓정보를 주 선생에게 흘린다.


그 폐공장이 우리의 아지트이며, 그곳에서 우리들과 임시정부에서 온 밀사가 회합한다고 말이다. 경성 외곽의 폐공장인 만큼 경찰이 이곳을 아지트로 의심하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제보의 신뢰성을 위해 최대한 자세한 정보를 꾸며 제공하여 경찰이 신빙성 있는 정보로 믿게 만들어야 한다.


경찰이 회합에 모인 모두를 체포할 줄 알고 몰려들었다면 결국 허탕만 칠 것이다. 그러나 제보의 자세한 내용 때문에 순사를 여럿 데려온 마당에 빈 손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의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기로라도 이 일대를 수색해 성과로 포장할 만할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미끼를 던져준다.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서류 몇 개를 공장 사무공간이나 사무직원의 숙직실 안에 집어넣어 이곳이 우리의 아지트인 것처럼 가장한다. 그렇다면 놈들은 더욱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공장 내부를 계속 뒤질 것이다. 우리는 그 중 방문 하나를 안에서 걸쇠로 걸어잠그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다. 형사들은 유일하게 문이 잠겨있는 방이라면 분명 결정적 증거나 범인이 은신하고 있을 거라 판단하고 몰려들어 완력으로 문을 열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러다가 문이 거세게 열리면 바로 부딪치는 곳에 함정을 설치한다. 의자처럼 무너지기 쉬운 것을 천장까지 쌓아 놓고, 그 위에 원래 총독 암살을 위해 옥룡회에서 제작한 폭탄을 올려놓는 것이다.


충격신관을 사용하는 이 폭탄은 아무래도 사제폭탄인 관계로 충격에 대한 안전성이 떨어진다고 왕 채주에게 들은 바가 있다. 천장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 만으로도 뇌관이 폭발하기 충분한 충격을 받을 것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폭발이 일어난다면, 그 문 앞에 몰려있을 형사들의 운명이 결정됨은 명약관화하였다.


정우가 순간 참지 못해 주이한 선생과 격론을 벌인 것인 결과로 히로요시가 위험에 처했다고 화가 났던 천 지부장은, 자신에게 크게 혼이 났음에도 정우가 그 자리에서 바로 계책을 제시하자,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강한 대견스러움을 느꼈다. 정우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세게 질책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제자들 또한 “오! 그러면 놈들을 한 방에 쓸어버릴 수 있겠다!”, “좋다! 그걸로 가자!”라며 신이 났었다.


이들은 대웅전에 모여 계획에 더 살을 붙이고 주 선생을 통해 흘릴 정보를 더욱 자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 선생에 대한 납치는 그들에게 빚이 있는 코민테른 사람들에게 맡기자고 의견이 모였다.


천 지부장이 가레예프에게 코민테른의 벨릭과 클린턴을 잠깐 빌려달라고 부탁할 동안, 형제들은 폭탄을 챙겨들고 영등포로 향했다. 이들은 2년 전에 백범 선생이 보낸 편지를 비롯해 아직 파기하지 않은 서류 몇 개를 가지고 가서 한때 공장 숙직실이었던 방에 숨겨 놓았다.


그리고는 공장장의 사무실로 들어가 문 바로 옆에 의자들을 층층히 쌓고는, 맨 위에 조심조심 폭탄을 올려놓았다. 사제폭탄의 낮은 신뢰성 때문에 이들은 폭탄을 올려놓은 뒤 의자의 탑이 삐걱거리기라도 할 까봐 잔뜩 긴장했었다. 다행이 의자는 안정적으로 쌓였고 맨 위에 올려진 폭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형제들은 문의 걸쇠를 잠그고 창문을 통해 한명 한명씩 빠져나갔다. 이것으로 함정 설치가 끝났다.


정우는 이를 통해 오재두 경부보를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지만, 오 경부보가 주리를 잡으려고 혼마치까지 오는 예상 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 덕에 오 경부보를 예정한 시일보다 하루 먼저 사살할 수 있어서 함정이 더 필요없어지긴 했지만, 소련 총영사관으로 도피한 현재 구태여 함정을 해체하려고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오 경부보와 같이 그들을 추격하던 형사들도 같이 사라져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방금 무슨 얘기였소?”


천 지부장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일본말로 물어본다. 명수는 천 지부장과 같이 대화하는 그를 의식해 러시아말로 보고한 것이었다.


“아, 우리 일 얘기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오.”


능숙한 일본어로 돌아온 대답에 지부장을 향해 매우 미심쩍다는 눈초리가 지나간다.


“하던 얘기 계속 하십시다.”


지부장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경무국장 나리.”


천 지부장을 상대로 노려보듯이 마주보는 그는, 바로 나카하라 가즈오 경무국장이었다.


어떻게 조선 관내 모든 일본 경찰의 최고 책임자가, 불령선인 강도단의 두목과 마주하고 있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하루 전 저녁으로 돌아간다.


오재두 경부보가 대백루 지하창고에서 교수형을 당하고, 정우가 주리와 함께 관동군 장교 넷과 사투를 벌이던 그날, 히로요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철도국의 자기 자리에 출근해 있었다. 백부가 자신을 체포하려고 결심했다면, 어디 있든 잡히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아는 마당에 대원들과 함께 행동한다면 오히려 대원들에게 심한 민폐를 끼칠 터였다. 무공을 못하고 체력도 그리 좋지 않은 그가 같이 있다면 짐만 될 뿐이었다.


그런 고로 그는 다소 긴장한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철도국 업무를 보았다. 혹시 순사가 들어오진 않을까 사무실 문이 열리기만 해도 신경쓰이긴 했지만, 하루종일 사복경찰이건 제복경찰이건 사무실에 오는 경찰은 없었다.


정기연락을 위해 점심나절에 옥룡회에 전화를 걸었을 때야, 모두 다 소련 총영사관으로 도피했다는 사실을 왕 채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히로요시는 왕 채주가 알려준 번호로 총영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천 지부장과 통화할 수 있었다.


-날세. 그쪽은 별일 없나?


“아무 일 없습니다. 다들 무사합니까?”


-정우가 조금 다친 것 뺴고는 괜찮네.


“다쳐요? 정우가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사정이 좀 있네. 크게 다친 건 아니니 걱정 말게. 경찰이 움직일 기미는 없는가?


“아직까진 아무도 안왔습니다. 백부님이 절 체포하려 했다면 진작 체포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방심하진 말게. 우린 항상 자네의 도피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네.


히로요시는 이미 체포를 각오한 몸이었다. 지부장의 제의는 고마우나 그것 때문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말을 전했다. 지부장은 마음 바뀌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며, 상하이로 가기 전에 한번 보자고 하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오후에도 아무 일 없었다. 철도국 사무실은 늘 그렇듯 분주하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히로요시는 퇴근하여 하숙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천장절인 관계로 철도국에는 필수인력만 남기고 천장절 행사에 참석한 후 쉰다. 그 틈을 타 정든 형제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숙집 방의 전구 스위치를 올린 순간, “헉!”하고 숨을 몰아쉬며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왔냐? 우리 불령한 조카!”


그의 12첩 다다미방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그의 백부, 나카하라 가즈오 경무국장이었다.


“배, 백부님! 왜 여기 계세요?”


히로요시가 하도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지나가다가 들렀다, 이놈아! 큰아버지가 되어서 조카 방도 못들어가느냐?”


혀 꼬부라진 소리로 넋두리하듯 말하는 경무국장의 자세는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잘 익은 수박처럼 시뻘개지고 늘 힘이 들어갔던 동공은 풀려 흐느적댔다. 빳빳하게 다린 경찰 정복의 맨 윗 단추가 풀어져 대단히 흐트러져 보였다. 그의 손에는 반 이상 내용물이 사라진 정종 한 병이 잡혀 있었다.


“술 드셨어요?”


“그래, 이놈아! 마셨다! 진탕 마셨다! 지로하고 너 때문에 마셨다!”


나카하라 국장은 그러고는 술병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는 무기력함에 휩싸여 총독에게 일일보고도 하지 않고 집무실을 나와 배회하다 평소 가지도 않는 술집에 들어가 홧술을 확확 들이키고는 아예 술병까지 들고 온 것이었다.


백부는 조카에게 삿대질을 하며 잔소리를 퍼붓는다.


“이놈아! 왜 불령한 놈들과 어울려서 이 큰아버지 속을 썩여? 내가 국가의 충량지재라 되라고 너에게 몇 번을 말했냐? 근데 말은 예 예 알겠습니다 하면서도 뒤로는 안그러고 있었다 그거지? 너 같은 불효한 놈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 내가 널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데, 이놈아! 넌 제국대학에, 그것도 법학과 나오고, 고등문관시험 떡하니 합격한 놈이야! 그런데 나라를 위해 일하지는 못할망정 나라를 망치려는 놈들과 같이 있어? 그러다가 벌 받는다, 이놈아!”


히로요시는 술 취한채 넋두리를 하는 백부를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어제 분노 속에서 보여준 논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여느 취객처럼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며 삿대질을 하는, 기대를 저버린 아들을 대하는 한 사람의 가장만 있을 뿐이었다. 평소 철저히 엄격하고 단련된 모습만 보여준 백부였기에, 이런 모습을 보자마자 코가 시큰해지고 눈에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백부님. 하지만 전······.”


히로요시가 공손히 무릎끓고 앉아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지만, 취한 국장은 역정이다.


“시끄러 이놈아! 변명 듣고싶지 않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네 큰엄마하고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큰아버지 뒤통수나 치고 말이야! 난 멸사봉공과 공명정대를 평생의 표어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런 내가 너 체포할지 말지 때문에 속 썩이고 말이야! 엉?”


히로요시는 취한 백부의 지청구를 얼마든지 받아주겠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최소한 오늘 자신을 체포하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웠다.


그런데 국장이 뜻밖의 말을 한다.


“근데 말이다. 내 속을 더 썩이는 게 뭔지 아냐? 네 말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게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이 나라가 붕괴된다면 아래에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부터라고 하지 않았냐! 네가 말해놓고 까먹었냐?”


국장은 그러고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는 것이었다. 히로요시는 백부가 자신의 뜻을 이해해 준 것을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망가진 백부의 모습을 보고 슬퍼해야 할지 잠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 넌 모를 게다! 총독 각하하고 관동군사령관이 어떤 작당질을 했는지 말이야! 그리고 제놈들 작당질을 젊은이들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지놈들만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어! 멸사봉공을 입에 담는 자들이 앞길 창창한 친구들에게 멸사봉공하라고 하고는 지들은 안하고 있다 이거야!”


히로요시는 국장이 왜 이런 넋두리를 하는지 몰라 눈만 꿈쩍대었다. 그러나 바로 무슨 일인지 눈치를 챘다.


“혹시 저번에 들려들었던 그 관동군의 비밀자금 운송 건 때문인가요? 관동군이 아편밀매조직과 손잡은?”


“그래 이놈아! 네가 그 망할 불령선인 두목놈 불러서 들려준 그거! 그 거래에 총독도 연관되어 있었어! 총독 각하는 관동군사령부와 작당해서 그 아편거래하는 놈들에게 더러운 돈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고!”


“예? 그게 정말입니까?”


히로요시도 이건 처음 듣는 얘기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래! 내가 다 알아냈다! 근데 이거 가지고 총독 각하를 어쩌진 못해. 그거 도청해서 얻은 정보거든. 이거 가지고 각하를 체포하려 했다가는 내가 모가지당해. 근데 그거 말고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 했다. 내가 잘한 거냐? 못한 거냐?”


국장은 그러고 또 낄낄 데다가 남은 정종을 벌컥 들이키고 넋두리를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더 속 썼고, 더 열 받는건 뭔지 아냐?”


히로요시는 이것도 알 턱이 없어서 “뭔데요?”라고 반문한다.


“글쎄 말이다. 해군 쪽에서 이걸로 책임자 처벌하라고 주장하는데, 그러지 말고 좋게좋게 가자던 분이 계셨다. 누구냐고? 바로 천황폐하시다!”


“예?”


이때 히로요시는 실수 하나를 했다.


“히로히토가요?”


형제들과 맨날 천황의 본명을 불러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 말에 국장은 얼굴이 무섭게 굳어지며 윽박지른다.


“이놈아! 아무리 불령해졌기로소니 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이 불경하고 불충한 노옴!”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어요. 그러니까, 폐하께서요?”


히로요시가 순간 졸아들어서 사과하고 호칭을 폐하로 정정한다.


“그래. 폐하께서 그러셨다! 폐하께서 이 사건을 조용히 덮고 다치는 사람 없게 하라고 하셨다! 아니 정정해야겠군! 그 돈 옮긴 젊은 장교들에게만 책임을 묻자는 성단을 내리셨다! 그러자고 폐하께서 총독 각하에게 성지를 보내셨어!”


청년장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지는 다들 암묵적으로 짐작한 바였다. 그저 중위에 불과하며 참모부의 하급 참모나 경비대 중대장에 불과한 자들이었다. 일이 잘못될 시 꼬리를 잘라버리기에는 적당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리하라는 결정을 천황이 내렸단 말인가?


“난 말이다. 폐하께서 황공하옵게도 성단을 내리셔서 사안에 관여하실 때는 항상 깊은 뜻이 있으신 것으로, 모든 것을 이 나라의 최고통치자이시자 현인신으로서 공명정대하게 판단하실 것으로 생각했다. 이 제국의 정의를 바로 세우시기 위해 내리시는 것이 폐하의 성단이라고 생각했어!”


국장의 취한 얼굴에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울분이 드러난다.


“근데 이게 어찌된 일이냐? 어쨰서 폐하꼐서는 이 말도 안되는 사태의 진정한 책임자들을 벌하시지 아니하시고, 그저 청년 네 명에게 감당하지 못할 책임을 지게 하신단 말이냐? 시중의 극우라는 사상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간신배들이 폐하의 눈을 흐리고 있어서란 말이더냐? 그런데 그리한다면, 폐하께서 그런 간신들에게 휘둘릴 정도로 범부에 불과한 분이셨단 말이냐? 현인신이 아니라? 대체 내가 이걸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이냐?”


나카하라 가즈오는 피를 토하듯 절규하고는, 목을 축이려 술병에 입을 가져다대었으나 이미 다 마셔버린 뒤였다. 물이나 술로 축이지 못한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리고 난 더 이 사건을 파해칠 수도 없다! 난 조만간 경무국장직에서 치바현 경찰부장으로 보직이 변경될 게다! 내 후임자가 누가 되던간에 이걸 파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난 평생 범죄와 맞서며 이 나라의 질서와 평안을 지킬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눈 앞에서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걸 막지도 못하게 되었단 말이다! 내가 이런데 안 마시고 배기겠느냐!”


히로요시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분노가 마음 속에서 조용히 끓어오름을 느꼈다. 백부는 비록 가는 길은 너무나도 달랐지만, 사심 없이 국가에 봉사하고 현인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을 인생의 길로 삼아 왔다. 그래서 히로요시는 백부를 면전에서 적대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의 마음이 진심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데 쇼와 천황은 그런 백부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분명 군의 주요 인사들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안배가 이 결정에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이 명백히 일어난 범죄를 숨겨주고 책임자들을 면책시키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러나 이것은 평생 사법정의의 실행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죄가 있으면 모두 체포하여 죄를 묻는 것이 천황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보국하는 것이라 믿어 온 백부를 배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평소의 근엄함은 다 사라지고 이렇게 술에 취해 망가져 한을 토하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백부를 보게 되었다. 눈물이 치솟을 것 같았다.


되갚아주고 싶었다. 천황이 되었건 우가키 총독이 되었건.


그런데 그 와중에, 히로요시는 계획 하나가 생각나 버렸다.


“백부님. 그렇다면 말입니다.”


히로요시가 눈이 풀어진 채로 “응?”하고 반문하는 백부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총독하고 관동군사령관을 쌍으로 엿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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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228화 +8 20.11.21 262 11 17쪽
227 227화 +6 20.11.20 261 9 17쪽
226 226화 +6 20.11.18 260 10 20쪽
225 225화 +12 20.11.15 267 11 19쪽
224 224화 +10 20.11.14 261 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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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222화 +8 20.11.08 263 11 19쪽
221 221화 +8 20.11.04 259 10 14쪽
220 220화 +12 20.11.01 261 10 15쪽
219 219화 +8 20.10.30 263 9 16쪽
218 218화 +4 20.10.27 263 10 14쪽
217 217화 +12 20.10.25 26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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