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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활극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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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A
작품등록일 :
2019.07.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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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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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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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DUMMY

정우는 택시 운전석에서 오재두 경부보가 내린 그 순간, 옆의 주리처럼 머릿속이 하예질 뻔했다.. 대백루가 지척인데 하필이면 저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평소 냉혹하게 사무적인 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진 것을 보아, 주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알 것이라고 직감하였다. 실로 절체절명의 위기가 눈 앞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때, 오 경부보가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력거꾼으로 변장한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이 바로 앞에 있는 걸 전혀 모른다는 것을 깨닫자, 갑자기 생각이 급속도로 휘몰아쳤다. 그의 머릿속에 지금의 위기를 절호의 기회로 바꿀 계획이 생각나 버렸다.


정우는 바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주리에게 나직히 시간을 끌어달란 말을 남기고, 전혀 관계없는 인력거꾼인 척 앞으로 향했다. 몇 걸음을 가도 오 경부보가 그를 보지 않자, 정우는 대백루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문 안으로 뛰어든 정우는 “여, 왔냐?”하고 반겨주는 형제들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을 보고 하늘이 도왔다고 느꼈다.


“당장 순사복으로 갈아입어! 오재두 놈이 바로 근처에 있다!”


“뭐, 뭐라고?”


정우의 갑작스런 말에 하나같이 당황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지금 주리가 시간끌고 있어! 민호는 빼고!”


오재두 경부보는 민호의 얼굴도 알고 있다. 민호를 투입할 수는 없었다. 형제들은 당장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정우의 지시고 또 하도 다급하게 말하다 보니 일단 지하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곳에 은밀히 보관된 순사 제복들이 급하게 몸에 입혀졌다. 1-2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문을 열고 오 경부보에게 맞서는 주리를 보고 있는 정우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야! 이게 무슨 일이야! 저놈이 냄새를 맡은 거야?”


민호가 다그치듯 물었지만, 정우는 도무지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 말을 한 때가, 오 경부보가 주리의 가는 팔을 무자비하게 붙잡았던 그때였기 때문이었다. 순간 뛰쳐나가서 저 망할 자식을 떼려눕히고 주리를 구출하려는 충동을 이기려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다행이 형제들이 다 갈아입고 뛰어나왔다.


“저놈을 여기로 끌고오면 되는 거지? 뭔 핑계를 대도 상관 없지?”


그 질문을 한 재호는 다 계획이 있는 것 같았다. 잡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말에, “좋았어!’와 함께 형제들이 뒷문으로 향했다. 대백루에서 순사들이 우르르 나왔다는 증언이 나오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옆 골목에서 튀어나온 변장한 형제들은 호각을 불며 오 경부보에게 달려갔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오 경부보를 경찰 사칭범이라고 선언했다. 순간 어이가 없어 저항을 못한 오재두 경부보는 즉석에서 결박당하고 용수가 씌워진 채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이야, 이거 상상 외의 월척인데!”


같이 긴장한 채로 상황을 지켜보던 민호가 환호작약했다. 그들을 목전까지 추적하고 정우를 한번 경찰서에서 조사하기까지 한 오재두가 이런 식으로 잡힐 지는 생각치 못하였다. 그들이 바로 내일로 잡아둔 계획보다 하루 일찍 끝장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우는 떨리던 심장이 바로 가라앉음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오 경부보에게 팔이 비틀린 주리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 가냘픈 몸으로 그자의 힘을 견뎌야 했으리라 생각하니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당장 뛰쳐나가 주리를 껴앉아 준 뒤 다친 곳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주리가 다른 형제들을 따라 골목길로 사라질 때까지 참아야 했다. 혹시라도 모르니 이 대백루와는 아무 관련도 없게 보여야 하니까.


그리고 때마침 천 지부장과 혜월 스님이 뒤에서 등장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갑자기 왜 순사로 변장하고 나간 게냐?”


천 지부장은 관련된 보고를 전혀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정우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정우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혜월 스님은 크게 놀라 입을 벌렸다.


“아미타불! 실로 큰일 날 뻔하였구나! 세존께서 도우심이라!”


천 지부장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지만, 거의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대견함이 떠오른다. 그는 제자의 일처리에 지극히 만족하였다.


“잘 해 주었다. 예상 못한 낭보로구나. 하마터면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날 뻔하였건만, 기지를 발휘해 누구도 피해 보지 않고 잘 처리해 주었다. 원래 어제 처리할 놈이었지만, 오늘 처리해도 달라지는 것 없겠지.”


천 지부장은 곧장 왕 채주를 불렀다. 지부장의 부탁에 왕 채주는 고개를 숙이고 조직원들을 불러 지하로 내려가 뭔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뒷골목으로 나온 정우는,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띄운 주리를 보자마자 와락 껴안아 버렸다. 그녀가 오 경부보에게 끌려가지 않고 자기 품 속에 따스히 있다는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대성공이에요, 대성공! 그 나쁜놈, 이제 질질 끌려가서 영원히 얼굴 안보게 되었어요!”


주리는 정우 품 속에 안긴 채 펄쩍펄쩍 뛰어 댔다. 가장 위험한 적수를, 집요하기 짝이 없는 적을 대번에 제거하게 되었다. 그것도 자신이 놈에게 끌려가지 않고 시간을 끄는 공을 세우면서. 꽉 껴안고 있던 정우가 풀어주자마자 기쁨을 주체 못하고 바로 “예에에에!” 하며 신나서 방방 뛴다. 엄청난 해방감에 당장 이 나라가 독립되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와중, “아!”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잡는다.


정우는 놀라서 주리의 세라복 소맷자락을 걷어 보았다. 오 경부보가 비튼 자리에 든 시퍼런 피멍이 눈에 들어왔다. 밝아졌던 정우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놈. 가만두지 않겠어.”


그래서 정우는 한참 오 경부보를 놀려대던 민호 옆에 나타나서 으름장을 놓았다. , 할 말이 아주 많을 거라고. 한 순간에 한인애국단 경성지부 청년들에게 붙잡힌 경부보는 막 사로잡혀 우리 안에 갇히게 된 맹수처럼 격렬히 반응했다. 핏발선 눈이 그들 모두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재갈 물린 입에서 짐승과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리 발악하여도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가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사방에서 조여오는 억센 팔들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천 지부장과 혜월 스님이 그 앞에 나타났을 때, 재갈에 막혀 터져나오지 못하는 고함이 더 커져만 갔다. 오 경부보는 이제 모든 걸 다 알았다. 죄다 한패였다. 그가 외무성 기록에서 확인한 위험한 불령선인 장백대호 천남건이자 이른바 코지마 히데오, 자칭 카라스마 준이치로 백작과 미쓰이 사토시 사장, 두 청년을 외숙부 한 참의에게 소개해 준 영험한 스님이라던 일본 승려 묘엔. 그리고 진작 처리하지 않은 게 뼈저리게 후회되는 사촌여동생 주리. 붙잡힌 다음에야 이걸 모두 깨닫게 되었으니 끓어오르는 분기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참으로 유감이네요, 오라버니.”


주리가 나타나 찬바람 부는 목소리로 오 경부보를 주시한다. 주리를 본 순간 오 경부보가 최후의 힘까지 다 짜내 달려들려 했지만, 역시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전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이제까지 한 짓거리 전부! 고모부님과 고모님이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하고, 그 많은 사람들을 고문실에서 끔찍히도 괴롭히면서 죄책감 하나 못느낀 업보가 엄청난데, 그걸 그냥 넘어가는건 법도가 아니죠. 안 그래요?”


썩을 년! 목을 비틀어주고 말겠다!


경부보의 증오 가득한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지만, 주리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한때 꺼림칙하고 두렵기까지 했던 사촌오라비는, 이제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사람 여럿을 해친 야수라도, 우리 안에 있는 한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못한다. 설령 그 야수가 우리에서 풀려나와 덮쳐와도, 마찬가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었다.


입에 발동이 걸린 주리는 한 바탕 퍼부어주고 싶었으나, 천 지부장의 목소리가 가로막는다.


“내 생각에는 넌 여기 있으면 위험할 것 같다. 놈이 여기 온걸 보니 후지무라 중위 등을 통해 경찰도 이 사건을 안 모양이다. 그런 이상 이 일대에서 놈들의 수색이 있을 것이다.”


주리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오 경부보는 대로변에서 난리를 쳤고, 자기 얼굴을 본 행인들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추적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내일 진행할 계획대로 하거라.”




주리가 전달받은 도주 계획은, 천 지부장이 형제들과 오 경부보를 영등포에서 처리할 계획을 시행하는 동안 자신은 대백루에서 남은 짐을 다 챙겨 먼저 정동의 소련 총영사관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후 다 같이 소련 총영사관에 모여 하루를 보내며 동태를 살핀 후 야음을 틈타 인천으로 빠져나간다는 게 계획이었다. 대백루는 정체가 들통나면 바로 경찰이나 헌병에 공격당할 취약성을 가지고 있지만, 국제법에 따라 소련 영토로 인정되는 총영사관이라면 일시적으로라도 안전한 피난처가 될 수 있었다. 총영사관에 잠시 머무는 문제는 천 지부장이 이트킨 소련 총영사와 만나 합의한 사항이었다.


주리는 오 경부보의 최후를 보고 싶었다. 존경스러운 고모부와 고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넣은 패륜아, 뜻 있는 사람들을 무표정하게 고문해온 그의 최후를 눈 앞에서 똑똑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마당이었다. 자신이 안전해야 모두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


“주리 데리고 먼저 가 있겠습니다.”


정우가 주리를 혼자 보낼 리가 만무했다. 천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해 허가하였다. 하지만 오 경부보에게 할 말이 많다고 한 정우는 그대로 갈 생각은 없었다.


정우가 오 경부보에게 시선을 돌린 직후, 퍽 하는 거센 소리가 일어났다.


그의 주먹이 뒤로 치켜올라갔다가 앞으로 힘차게 내질러진 것이었다. 오재두의 면상을 노리고. 오 경부보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고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을 토했다. 입에 물린 재갈이 선홍색으로 물든다.


“내가 이 이상으로 뭘 할 수 없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오.”


이게 정우가 오 경부보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주리도 야멸찬 감정을 담아 마지막 말을 전한다.


“앞으로 다신 볼일 없겠네요. 잘 가시길 빌게요.”


그리고 주리는 몸을 획 돌려 정우를 따라 골목길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오 경부보의 얼굴에 다시 용수가 씌워지고, 형제들이 그를 질질 끌고 갔다. 경부보는 지치지도 않고 몸에 힘을 주고, 입에서 거센 말을 퍼부으려 신음했다. 무의미한 짓이라도 하고 싶었다. 안 그러면 이 자리에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용수에 눈 앞이 가린 채 끌려가며 계단을 따라 어디론가 내려가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을 다 내려와 얼마간 더 끌려갔을 때, 용수가 확 벗겨지며 시야가 돌아왔다. 그는 한 방에 들어와 있었다. 백열전구 하나만 비치는 방이었다. 마치 그가 용의자를 바닥에서 굴리던 경찰서 취조실 처럼.


취조실과 차이점이라면, 천장에 쇠로 만든 고리들이 잔뜩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푸줏간에서 막 도살한 고기를 걸어두는 그런 고리였다. 그리고 그 고리 중 하나에 묶여있는 물체를 본 순간, 오 경부보가 몸을 거세게 뒤틀었다. 밧줄 하나가 고리에 걸려 있었다. 원을 동그랗게 그린 채. 그의 머리로 들어가 목을 조이기 딱 좋은 크기였다. 밧줄 아래에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재두 경부보.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부 법률에는 강상죄가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그것 외에도 네놈에게 적용할 죄목은 아주 많다.”


천 지부장이 싸늘하게 말한다. 제자들은 그 말투가 어떨 때 나오는 말투인지 잘 안다. 상하이에서 여러 차례 백범 선생의 지시로 시행한 밀정 처단때에 들을 수 있는 억양이었다.


“네놈은 천륜을 어기고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배신한 뒤 적에 빌붙어서 숱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네 부모이신 진사 어른과 여사님께서도 불인하고 불의하고 불효하고 불충한 네놈을 구명하실 의사가 없다고 밝히셨다. 너에게 심판을 내려 달라고 아우성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진저. 따라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널 처단하는 바다.”


천 지부장의 사형선고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오 경부보가 취조실에서 용의자를 다룰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오 경부보를 깔아보는 눈에는 일말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유언 정도는 들어주도록 하지.”


눈짓으로 재갈을 벗기라고 신호하기 무섭게,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소리가 안을 뒤흔들었다. 부러져 튀어나온 피에 물든 앞니와 함께. 엄청난 수위의 육두문자가 오재두 경부보의 입에서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가히 최후의 발악이라 할 만하였다.


“어떻게 그런 어르신들 밑에서 저딴 놈이 나왔지?”


명수가 선비의 표상이었던 오세창 진사를 떠올리며 혼잣말한 그 순간, 오 경부보의 눈이 희번득거렸다.


“그런 어르신들? 그 병신새끼들? 맨날 성인 말씀이 어쩌고 인의예지가 어쩌고 삼강오륜이 어쩌고나 하며 내가 하고 싶은 거 못하게 하던 그 늙어빠진 놈들? 거지같은 아랫것들에게 호구처럼 굴던 그놈들? 다 뒈져버리라 그래! 지금은 근대화의 시대다! 힘만 있으면 하고 싶은 거, 얻고 싶은 거 다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시대란 말이다! 강상윤리가 어쩌고 어째? 맨날 사람 묶어두기만 하는 게 어째? 내가 왜 그딴걸 지켜야 하는데? 내가 왜 그딴 놈들을 부모랍시고 공경해야 하는데? 왜?”


“저, 저런 미친놈!”


말을 꺼낸 명수가 혀를 내두르고, 재호가 옆에서 “죽기 전에 무슨 말인들 뭣해?”라고 비웃는다.


오 경부보의 고함은 멈추지 않는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자유롭게 살았다!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는 꼰대들을 엿먹이고 내가 되고 싶은 게 되었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인의니 예의범절이니 뭐니 하는 후지고 전근대적인 가치관 따위 쓰레기통에 넣어버리고 진정한 근대인이 되기를 택했단 말이다! 이런 근대화의 시대에는 인이 어쩌고 의가 어쩌고 성인 말씀이 어쩌고 하면서 자기 손해보는게 당연하다는 구는 새끼들이 병신 육갑떠는 놈들인 거다! 난 네놈들 같이 병신같고 거지같은 인생을 사는 새끼들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았다! 고작 네깟 새끼들이 떠들어 대는 시대착오적인 헛소리에 내가 오냐오냐 할 것 같으냐!”


오 경부보는 자신이 살아날 확률이 0임을 지금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장백대호 천남건이 그를 살려주질 않을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목숨을 구걸할 생각도 없었고,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데로, 말하고 싶은 대로 자신이 구축한 논리를 퍼부어서 저들이 반박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는 꼴이라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그들은 화를 내기는 커녕 어이없다는 감정을 드러내거나, 또는 입꼬리에 냉소를 흘릴 뿐이었다. 화를 낼 가치도 없어 보인다는 투였다. 그때 오 경부보를 더 미치게 만드는 자가 있었다. 깊은 연민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 혜월 스님이었다.


“우리가 참 구시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라 치겠소.. 근데 왜 그대는······.”


스님이 입에서 작은 탄식을 한다.


“우리의 선고에 왜 이리 시끄럽게 반박하려 애쓰는 것이오?”


“엿같으니까 그렇다, 왜!”


오 경부보의 이글거리는 눈이 스님을 쏘아본다. 스님은 여전히 슬픈 눈을 한 채 그 눈을 정면에서 받아낸다.


“그러니까 어째서 그렇게 느끼오? 그대가 그렇게 자기 가는 길이 제대로 된 길이라고 확신했다면, 우리가 강상윤리를 언급하는 말은 그저 옆에서 파리가 날아다니는 무의미한 소리라고 여겨 버리면 될 것인데, 왜 성내고 욕하고 화내는 것이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중놈아!”


“그대 마음 한 구석에 후회는 없었소?”


그 말에 오 경부보는, 일순간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대도 반가의 자제요. 아무리 성인 말씀이 듣기 싫고 외면하고 싶더라도 그것 안에서 생활해 왔었소. 더 나은 길을 택할 수도, 더 좋은 길을 택할 수 있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오. 거기에 대해 진정 후회가 없었소이까? 나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배신한 것이 진정 잘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소이까?”


불현듯 오 경부보의 굳어진 심장에 일순간 날카로운 아픔이 전해져오는 것 같았다. 머리에 피가 몰리고 생각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것조차도,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최후까지 남아있던 자그마한 양심의 조각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면, 저들에게 진정 패하는 것이 된다.


“닥쳐! 닥쳐, 땡중놈아!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거기에 또 뭘 토를 단단 말이냐!”


스님은 한숨을 쉬고 물러난다.


“그대에게 필요한 건 처벌이 아니라 마음을 돌보는 것이었던 것 같소. 하지만 너무 늦었구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스님 뒤로, 천 지부장이 냉혹하게 말한다.


“성학의 가르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람을 규정하지. 서양 물을 헛들이킨 놈들은 그 관계성에 폭력이니 억압이니 속박이니 구속이니 하는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들을 붙이는데, 딱 네놈 같은 자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모르는 건 하나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과 의와 예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속박이라며 자유를 찾겠다고 어쩌니 하다가 언젠가 옆에 아무도 없게 된다는 걸 말이다. 바로 네놈이 그 꼴이 아닌가?”


그 말을 하는 천 지부장은 웃지 않았지만, 형제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비웃음이 흐른다. 살해당하더라도 부모가 아랑곳하지 않을 자식. 장례식장에서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자. 그게 그들이 보는 오재두 경부보의 모습이었다. 오 경부보는 그 시선들에 복장이 터져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낸다.


“시끄러운 새끼들! 죽이면 죽일 것이지 뭔 지랄이야! 빨리 내 목을 저기 걸기나 해라! 네놈들 면상 따위 더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아, 그래. 목숨 구걸은 안해서 좋네.”


민호가 이죽거리고는 다른 형제들과 그의 몸을 잡는다. 오 경부보의 몸이 의자 위에 올려지고, 얼굴에 천으로 만든 자루가 푹 씌워진다. 그의 목에 밧줄로 만든 올가미가 조여진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혜월 스님이 입을 열었다. 경멸과 조롱의 시선이 가득한 청년들, 그리고 냉혹한 시선으로 쏘아보는 천 지부장과 달리, 스님의 눈에는 연민의 빛이 띄었다.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의 악업을 지은 사람이, 그것을 씻기도 전에 명을 달리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출가인으로서 그래도 마지막이나마 기회를 주고 싶었다.


“무간지옥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다른 사람을 꺼내주고 싶은 마음을 먹는 그 순간, 지옥의 화염이 극락정토의 연꽃으로 바뀌오. 마지막으로 참회할 생각 없소?”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모멸찼다.


“엿이나 쳐먹어! 저주나 쳐받아 이 새끼들아! 다 죽어! 다 죽어버리라고!”



참회를 거부하는, 최후까지 오기를 부리려는 그 태도에 결국 스님도 한탄 섞인 “아미타불.”과 함께 고개를 돌리고 만다.


“집행해라.”


천 지부장의 한 마디에 형집행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대석이 의자를 거칠게 차 버린다. 고리에 묶인 밧줄이 팽팽해지고, 꺼억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몸이 거칠게 뒤틀리고 경련한다.


1분 후, 극한의 괴로움 속에서 흔들리던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사체는 옥룡회 단원들이 내렸다. 오재두의 죽음을 확인한 그들은 옷을 잘라 벗겨내며 신속하게 해체 준비를 시작하였다. 왕 채주가 천 지부장에게 교수대를 준비해 달라고 한 이후로 계속 갈고 있던 식칼을 들고 손수 나선다. 그의 남은 육신조차도, 이 과정을 통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리라.


그런데 처형을 집행한 이들이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소련 영사관으로 출발한 정우와 주리가, 오 경부보보다 더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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