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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점퍼Jumper, 순간이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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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2.09.27 18:20
최근연재일 :
2024.06.2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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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8,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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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6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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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23.

DUMMY

*



공부란 끝이 없는 것이다, 라고 김수정은 생각했다.


대학교의 국문학 수업을 듣는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왜냐면, 그녀는 공부가 하기 싫었다. 어지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았다니.


졸업반을 마치기 위해서 다니고 있는 학교는 지루함이 컸다. 국문학이야 적성에도 맞았고, 나름대로 좋아하는 분야였지만 주구장창 시험을 위해서 파고들어 가다 보면 질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취업 준비를 해보았지만 좋은 결과가 잘 나지 않는다는 점도 의욕 상실에 한 몫을 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라는 생각을 할 때 쯤 그녀는 그의 친구를 떠올렸다. 친구야 많이 있었지만, 이럴 때 생각이 나는 건 ’김민서‘라는 친구였다. 그야말로 앞 길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친구. 짧게 말하자면 날백수에 가까웠다.


저 녀석도 사는데!


라는 생각을 가끔 하고는 했다. 그리고 좋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나름의 위안을 받기도 했다. 그녀가 의욕 상실에 시달릴 때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걸 그는 알까. 알면 잔뜩 찡그린 얼굴로 퉁명스럽게 쏘아댈지도 몰랐다. 나름대로 진지한 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을 말해주지 않으니 전혀 모르고 또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성현대의 인문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볕이 드는 창가 자리였다. 인문대는 여러모로 조경이 예쁜 학교의 입구 근처에 자리해 있었다. 의도적으로 성현대의 배치가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정문 근처에 특히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거나 신경을 쓴듯한 정원수 따위가 있었다.


나름대로 인문대학의 멋을 살린 건지 고풍스러운 티를 낸 조각들도 건물의 외벽에서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녀는 그런 건물의 1층 강의실이었다.


나른하다. 햇살이 따스하다. 이번에 전공과목 하나와 교양 과목 두 개를 들으면 졸업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해 온 결과를 맞이하는 것이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일을 생각하면 조금 막막하기도 했다.


교수님의 강의는 잘 아는 투의 여성 분이셨고, 느릿하지만 톤이 높은 목소리로 천천히 진도를 나가고 계신다. 그녀는 반쯤은 필기를 하다가, 또 얼마간은 다른 생각을 하며 노트를 빈 채로 두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다지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이미 대학 시절의 열정은 지난 학기를 끝으로 다 쏟아내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동안 이리저리 시도해봤던 기업의 면접이나,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도 영 결과가 좋지는 않았었고···. 이대로 사회에 내던져져야 하는가. 모든 대학생들의 고민과 같은 것을 그녀는 하고 있었다.


또각, 또각.


교수님은 낮은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서 강단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발소리나 일정한 목소리 톤에, 그리고 늦봄의 햇살이 그녀를 졸게까지 만들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의 시간이라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녀는 점심으로 학식의 우동을 먹었다. 성현대의 학식은 나름대로 맛이 괜찮은 편이었다. 요즘의 물가 상승률을 생각하면 그래도 굉장히 저렴한 편이었고. 탄수화물을 소화 시키기 위해 쓰이는 신체의 내부 연료나 작용이 생각을 둔하게 만든다.


변명일 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그녀는 얼마간 수업에 집중을 하다 끝내 잠들었다. 턱을 괸 채로, 샤프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말이다.



2.


수업이 끝이 났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학우들이 분주하게 가방을 싸고, 서둘러 강의실을 나서고 있는 때였다. 수업의 반절은 놓쳐버렸다. 시험공부야 몰아서라도 할 수 있지만, 중간에 중요한 내용이 나왔다면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그녀는 뻐근한 어깨를 풀며 적당히 기지개를 폈다. 샤프 끝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다가 일어섰다. 노트나 필통 따위를 가방에 넣어 정리하고 자리를 나섰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었다. 약속이 있는 날도 아니었고, 일단 집에 돌아가야 했다.



3.


집에 돌아가는 길은 단조롭다. 김수정은 인문대학의 건물에서 벗어났다. 1층 강의실에서 나와 교정을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학교 정문 근처에 있는 버스 정류장은 버스가 조금 늦게 온다. 배차 간격이 긴 편이라··· 얼마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기다리다가, 오는 버스에 올라탄다.


띡, 버스에 올라타면 자연스럽게 찍는 신용 카드.


주위를 둘러보니 앉을만한 자리가 뒤에 있었다. 맨 앞자리는 보통 계단식으로 높게 되어 있어서 올라가기 불편한 면이 있었다. 바지를 입었지만, 굳이 힘을 쓰기보단 뒤에 가서 편하게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자연스레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산한 버스였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나이대가 꽤 있는 편이었다. 노년을 앞둔 남성.


그녀 외에는 앞자리의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 중학생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버스의 맨 뒤쪽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작은 체구의 여성 하나. 옆에 있는 성현대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하나 뿐이었다.


이대로 버스를 타고서, 시내를 지나 한 10분 여 정도 가면 집 근처에 다다른다. 서울, 그것도 집이 있는 인근에 대학교를 합격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대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아침마다 수업 시간에 맞추기 위해 갖은 분주함을 다 떨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사실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하루종일 학교에 있기 위해 나서려면 나름대로 시간이 필요한 건 맞았지만. 지방에서 학교를 다닌다거나, 편도로 한 시간이 걸린다거나 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처지였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를 생각해보면 훨씬 여유롭게 학교 생활을 마쳤다.


학교 강의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창가로 시내를 바라보았다. 점심 지나서, 한 네시 쯤을 지나고 있다. 시간은. 늦봄의 한낮은 여유롭고 한가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분주해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목적을 갖고 걷고 있는 사람들. 유리창 너머로 풍경들을 구경하다 보면 금세 집에 도착하게 된다.


한 네, 다섯 정거장 정도를 지나서 그녀가 내릴 정류장이 코앞이었다. 멍 때리다가 놓칠 뻔한 것을, 서둘러 하차 벨을 눌렀다. 곧 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서고, 그녀가 내렸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언제나 익숙한 듯 지나다니는 동네는 별다른 사건도 없다. 그녀가 사건을 바란다는 건 아니었지만. 일상적인 삶 속에서 다소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열정적으로 달리고 있는 와중이라면 이런 생각도 하지 않겠지.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은 그녀의 몸도 둔하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뭔가가 있었으면, 조금 더 나았을까.


버스에서 내려 익숙한 거리를 지난다. 등에는 백 팩을 메고, 적당한 바지에 후드를 걸친 차림이었다, 오늘은. 화장도 피부를 정리하는 정도로만 하고, 안경을 쓴 채다. 집을 나설 때도 서둘러 나섰고 금세 돌아왔다. 운동화를 신은 채 터벅터벅, 집을 향해 걸으면서 입이 벌어졌다.


“연애라도 했으면.”


과연 나았을까. 과연 삶의 의욕에 도움이 되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무언가 집중할 때 연애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쏟을 수도 없었다. 그동안은 학교를 잘 졸업하고, 취업을 위한 준비들을 위해 달리느라 놓치고 있었지만 억지로나마 한 걸음 쉬게 된 지금은 다시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툭, 내쉬며 짧은 골목을 지나 어느새 도착한 집에 들어섰다. 아버지, 어머니랑 같이 살고있는 집은 날 때부터 살던 단독 주택이었다. 낡았지만, 친근하고 그리운 공간.


수정은 가로막는 대문에서 손에 익은대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비빅, 하고 빠르게 누르고 닫자 기계음이 들리며 철문의 잠금장치가 풀린다. 그녀는 그대로 손을 대고 다가서서 어깨로 밀듯이 누르며 집에 들어섰다.



*



옌 쩻 티아마는 태국인 여성이었다.


왜소하고 작은 체구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흠칫 움츠러들면 보호 본능을 자극할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성이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검은 머리를 등에 닿게끔 길러놓고 다닌다.


비교적 동남아인은 아시아의 선진국이나, 다른 서방 나라들에 비해 경제 수준이 낮을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물론 개중에도 사람 나름이었고, 편향적인 동남아 국가들의 개인 재산 지표는 일부 압도적인 부자들의 존재 또한 시사하고 있었지만.


동남아의 부는 국가적인 재분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일반적인 민주주의, 선진국 국가들보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은 권력층이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대다수의 하층민들이 지나치게 가난한 모습을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개중에 옌 쩻 티아마는 부유하게 태어난 편은 아니었다. 태국은 외국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민족, 부족 간의 신분 차가 있었고 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개중에서 그저 그런 소수 민족 출신이었던 그녀는 본국에서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재산이라고 해봐야 부모님께서 물려주실 낡은 집 한 채. 그리고 그 안의 가재도구들 정도. 일을 해서 벌면 돈이야 벌 수 있었지만, ’가난의 굴레‘라고 할만한 것을 끊을 만큼 획기적인 벌이를 버는 것은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안타깝게도 특별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점퍼‘였다.


안타깝게도, 라고 표현한 일은 그녀가 단순히 그 재능을 살릴만한 지식이나 부가적인 능력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녀는 작고 여린 체구를 가졌다. 그리고 별다른 재주나, 단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는 큰일을 도모 해볼 만한 정보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삶이 변하게 된 계기는 비교적 최근의 것이었다.


태국인이라지만, 세계 전도와 위치 좌표 정도만 있으면 어느 나라든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단순한 노동을 반복해서 획기적인 돈을 벌 수 없었지만, 지도나 값싼 전자 기기를 얻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이용해서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일상적이고 지루한 삶 속에서 그녀가 가지던 작은 취미라고 할 수도 있었다. 여행에서 체류비나, 항공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디이든 가고 싶은 곳, 명소나 지방의 위치 값 정도만 파악한다면 그녀는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먹는 것 또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 간편하게 해결했다. 집에 있는 먹거리를 도시락처럼 들고 다니면서 먹으면 될 일이다. 그녀가 가진 건 태국화(바트)지폐 뿐이었지만, 단순히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데 돈은 필요 없었다.


작고 담이 약한 그녀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곳을 돌아다니는 건 조금 힘든 일이었지만, 나름대로 경치가 좋고 소문이 났다는 곳들은 다 돌아다녀 보았다. 비교적 사람이 적은 외곽을 걸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식이었다.


그렇게 수 차례, 수십 차례, 어느 정도 몸이 자라고 혼자서 다니게 됐을 무렵부터 점프를 이용해 자기만의 세계 여행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소에서 다른 점퍼를 만나게 되었다.


’윤민혁‘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남성이었다.


그녀가 그를 만난 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 근처였다.


그때 그녀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사막의 한적한 자리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멀리로 피라미드 형태의, 피라미드가 보인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집에서 쉴 때 쯤, 태국에서 저녁 시간을 활용해서 온 것이었다. 한창 한낮의 뜨거운 뙤약볕이 사막을 달구고 있는 오후 시간. 이집트는 그런 낮 시간이었고.


인적이 드물고, 그냥 멀리로 피라미드의 뒤편이 보일 뿐인 시내와 반대편 방향의 황무지. 그녀는 그런 곳에 적당히 자리를 깔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길다란 치마에 샌들을 신은 채로 다리를 모으고 팔짱을 그 위에 얹고서 말이다.


가만히 피라미드를 바라보면서, 저 물건은 대체 언제 지어진 걸까, 역사란 뭘까, 나라란 뭘까, 곧 자신이 태어난 땅이나 혹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을 무렵 누군가가 다가왔다.


“여.”


굵직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작고 왜소한 체구의 그녀는 성인 남성을 감당할만한 힘이 없었다. 어설프게 시비라도 걸린다면, 그녀로서는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다. 얽히지 않고, 자극하지 않고.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점프 능력을 쓰면 그만이었다. 다만 이곳은 어디에도 시야를 가릴 곳이 없는 황야의 벌판 한가운데라는 게 조금 문제였지만. 정 위험하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순간이동을 하겠노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아가씨. 아까 여기에 갑자기 나타났지ท่านหญิง ท่านเพิ่งมาปรากฏที่นี่หรือ?”


그녀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여상스러운 말투로 물어본 말이었으나, 그 속뜻을 살펴보면 그녀의 비밀을 건드릴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났다, 라는 말은 보통 어딘가에서 뜬금없이 온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러나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순식간에 위치를 옮길 수 있는 순간이동의 능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녀가 여태껏 가리고 감추어왔던 비밀을 다른 사람한테 들킨 적은 없다. 설마 그 얘기를 하는 걸까.


옌은 짐짓 모른 척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최대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말투를 하려 애를 썼다. 공격적이어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러나 대개의 경우, 불의한 자들이 악의를 품고 다가온다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악행을 저지르게 마련이었다. 그저 최소한의, 자구책에 가까웠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두 가지였다. 눈앞에 갑자기 말을 건 사내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과, 혹은 그녀가 남몰래 감추는 비밀을 목격했을 경우. 어느 쪽이던, 수가 틀리면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는 마음으로 그냥 점프를 써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여기는 이집트의 한복판이었고, 자신은 그 행적조차 알 수 없는 태국인이었다. 눈앞의 동양인 사내가 뭐라고 하던 알 게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문득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눈 앞의 사내는 그녀가 누구인 줄 알고 그녀의 모국어로 말을 걸었는가.


동양인 사내가 다시 말했다.


“대충 찍었는데 태국인이 맞았군. 내가 아는 동남아 계열 언어는 태국어뿐인데. 아니면 영어를 좀 할 줄 아나?”


그녀는 물론 영어에는 소질이 없었다.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학교에서도 열의를 갖고 공부를 한 편은 아니었다. 입을 열기에 앞서, 그녀는 자신의 바보 같음을 탓했다. 멍청하게 대답을 하지 말 걸 그랬다. 입을 다물고 있었으면 애초에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텐데. 처음 만나는 동양인이 자신이 어떤 나라의 사람인 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뇨···.”


그녀는 적당히 대답하면서도, 상대와 자신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상대의 말은 신경쓰지 않고 생각대로 점프를 할 셈이었다.


“태국어를 할 줄은 알지만 네이티브는 아니라서 말이야. 아쉽구만.”


사내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느꼈는지, 한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띄운 채 더이상 다가오지는 않았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거리는 점프를 쓰지 않아도 순식간에 다가가 제압이 가능한 거리이다. 상대가 반응이 빠른 점퍼라면 모르겠지만.


옌은 일단 사내의 행동거지나, 말을 침착하게 살피며 기다리기로 했다. 이대로 대화로 얌전히 돌려보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점프를 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완벽하다. 그저 잠시 놀란 일이 있었다며 생각하곤 침대에서 잠에 들면 될 뿐이다.


남자, 윤민혁은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비슷한 차림이었다. 국적은 잘 알 수 없는, 적당히 주변과 맞춘 빛깔의 군복을 베이스로 두터운 외투 따위를 걸친 차림이다. 사막에서 하고 있기엔 지나치게 두꺼운 복장으로 보였지만, 적어도 언제나 준비된 상태로는 보였다. 물론 군인으로서의 준비였다.


사교적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기엔 심하게 어려워 보이는 복장이다. 더군다나,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다면 말이다.


그녀는 조심스런 기색으로 천천히 답했다.


“어···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남자의 태국어 발음은 능숙했다. 첫 마디는 ’점프‘에 대해 들켰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차였지만, 차분하게 들어보면 외국인이라고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발음이었다. 그녀로서는 다소 볼 일이 적은 동양인이 태국어를 그렇게 구사하고 있으니 어색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용건은 아까 그게 다인데. 갑자기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느냐고. 그 얘기를 하고 나면 조금 더 할 얘기가 있다네.”

“···예?”


옌은 집요하게 모른 척을 했다. 어차피 상식 바깥의 일이었다. 그냥 눈을 꾹 감고 시치미를 떼면, 상대 역시 헛것을 보았나 한 채 넘어갈 테였다. 열사의 땅에서 아지랑이 따위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태양 빛 아래에서 공기가 굴절되어 보인 셈 치면 될 것이다.


“모른 체를 하는 군.”


후욱, 하고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옌은 점프 에너지에 민감한 편이었다. 다소 멀리에서 이루어지는 도약도 잘 파악하고, 그것들로 일어나는 현상 또한 감각적으로 잘 감지한다. 그녀로서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녀 외에 다른 이가 앞에서 점프를 하는 건 처음 본 일이었으니.


물론, 당시에 옌이 스스로가 감각적이라는 걸 알지는 못했다. 다른 이들은 옌이 느끼는 것만큼 선명하게 점프를 느끼지는 못한다. 그녀는 물리적인 거리로 따지면, 반경 약 수백m 안에서 이루어지는 점프까지 코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감지했다.


JE에 대한 감각이 둔한 다른 이들과 비슷한 정도라면, 2, 3km내에서 이루어지는 점프 또한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점프는 대략적인 위치와 방향을 추측할 뿐이었다. 보통 그 정도 거리가 떨어지면 JE에 대한 감지를 ’시야‘라고 친다면 눈이 가려지는 수준의 조건이었다. 옌은 다른 점퍼들에 비해 시야 너머의 것을 바라보는 특수한 체질을 갖고 있었다.


윤민혁, 당시에 이미 중년의 한창을 지나던 행색이었던 그가 눈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옌의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야호.”

“악!”


옌은 무식하게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놀란 탓이었다. 그녀는 평생 점프라는 능력을 감추기 위해, 마음 속의 공간 하나를 따로 비워 놓고 살아야 했다. 어떤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말도 조심해야 했고, 때로는 그녀 혼자서 움직일 때처럼 하지 않도록 행동도 조심해야 했다.


’공간 도약‘, ’순간 이동‘이라는 초능력은 그녀의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가 날 때부터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춘기 무렵 그녀가 능력을 자각했을 때부터 생겼던 비밀이었다.


뙤약볕 아래서 윤민혁은 흐르는 땀을 손수건 하나를 꺼내 닦으면서 이야기했다.


“날이 덥군. 오래 이야기하기는 힘든 곳이야. 혹시 자리를 바꿔서 다음 이야기를 할 생각이 생겼나?”


윤민혁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옌은, 담이 작았지만 마음 한 켠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던 아가씨는 그 말에 고개를 무심코 끄덕여버렸다. 그것이 그녀와 윤민혁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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