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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점퍼Jumper, 순간이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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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2.09.27 18:20
최근연재일 :
2024.06.21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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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1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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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5.

DUMMY

보존용 상자에는 당연히도, 보존용 식품들이 들어가 있었다. 오랜 기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는 종류로 넣어두었다. 구하기 쉬운 전투 식량의 종류들이었다. 생수도 따지 않은 것으로 작은 병이 몇 개인가 들어 있다. 200ml짜리 소형 플라스틱 병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위기 상황에서 갈증을 해결할 정도는 된다.


지나치게 포만감을 느끼는 식사를 하는 것도 도주 중에 못할 짓이었다.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장시간 은신을 하려면 움직임을 최소화 해야 한다. 적당히 먹고, 적당히 마신다. 죽은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했다. 지나친 소화 작용도 방해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적은 양을 천천히, 섭취하면서 열량을 보존하고 침묵한다.


상처 난 부위나 피로한 근육은 어느 정도 먹고 쉬는 것으로 달래야 했다. 리더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굴 안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완벽하게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은신처로 삼은 곳이었지만 외부와 통로가 뚫려 있다. 수풀을 헤치고 이곳까지 다다른다면 곧장 도약을 시도해야 했다.


그의 손목에는 미세한 불빛을 낼 수 있는 전술용 전자시계가 있었다. 한쪽 눈을 떠 시간을 슬쩍 확인한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몇 번의 도약과 접전. 9시를 얼마 넘지 않아 시작된 도주는 이제 9시 14분째에 이른다. 고작 그 시간 안에 무수한 일이 있었다. 지구상의 다양한 지역들을 넘나들고 대치를 하고, 몸싸움을 했다가 총에 맞았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만큼 도망을 치고 있는 리더, ‘윤민혁’이 뛰어난 역량을 가진 도주자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재빠른 상황 판단 능력은 그의 목숨을 이제까지 연명케 만들었다. 오합지졸이었을 애송이 점퍼들을 데리고 팀을 꾸리고, 여기까지 사건을 헤쳐 온 것도 그런 판단력의 힘이었다.


그는 작은 선택지에서 그리 잘못된 쪽을 고른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인생의 기로에서 큰 선택들을 잘못했을 뿐이었지. 말하자면, 애초에 점프 능력을 사용해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던 일 자체였다. 점퍼로 이루어진 범죄 팀을 꾸려서 금품을 갈취하고 사적인 유익을 누리려고 했던 결심이었다.


그 외에, 즉각적인 상황 판단들은 보통 알맞게 해나갔다. 당장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잘 벗어나고 있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숨죽인 채 결말을 기다리고 있는 꼴이었지만.


그는 동굴 속에 앉아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상상했다. 용의주도하고, 점퍼로서의 능력도 전투원으로서의 능력도 상당히 높은 베테랑이었다. 얼핏 젊은 나이로 보였는데, 상당히 호된 훈련의 시간과 격전지나 같은 실전 임무들로 다져진 모양이었다. 그가 저 나이 때에 저 정도의 행동력을 가지진 못했다.


조직에서도 아마 특수한 인물일 확률이 높았다. 사람이 그냥 키워지지는 않는다. 점퍼로서의 능력과 재능은 훈련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 외의 자질들과 움직임은 철저하게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한 사람이 타고나면서 여러 종류의 경험과 감각들을 동시에 익힐 수는 없었다.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저 정도로 배짱도 좋고, 자신같은 산전수전을 겪은 전투원을 농락할 정도의 능력이라면 조직으로서도 귀중한 인적 자원일 확률이 높았다. 만일 저런 이들이 전부라면, ‘점퍼 조직’은 점퍼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말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전설로서 점퍼들을 완벽히 제압 했어야 했다.


그가 알기로 한 시대에 ‘점퍼’라는 특수한 존재가, 고작해야 백 명을 크게 넘지 않는 정도이다. 개중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저 ‘조직’의 구성원들이 지금처럼 특수한 베테랑들이라면 다른 점퍼들을 농락하는 건 식은 죽 먹기에 가까웠다.


아마 저 정도로 움직이는 현장 인원들이 소수에, 나머지는 백업이거나 팀을 이루어야 하는 이들일 테였다. 어쩌면 그가 만들어낸 범죄 팀과도 정면 대결을 해볼만 할 지 몰랐다.


물론, 어디까지나 점퍼들의 인력에 국한될 경우였다. 저쪽은 유일하게 세계의 정상급 단체들과 연이 닿아 있는 조직으로, 굳이 따지자면 ‘공식’ 점퍼 단체에 가까웠다. 그런 다양한 단체들로부터 받는 지지와 지원들이 합쳐진다면 자신들같은 민간의 모임은 변변찮은 반항을 하기도 힘들게 분명했다.


총에 맞으면 죽는 건, 점퍼라고 다를 게 없었다.


상대가 비 점퍼로 이루어진 군대라면야, 점퍼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도망칠 수 있겠지만 상대편에 어느 정도 전투가 가능한 점퍼가 어설프게라도 섞여 있다면, 일반적인 전술도 충분히 점퍼에게 유효했다.


점퍼 한 명이 붙잡기라도 하고, 제압한 다음에 수면 가스라도 살포해서든 뭐든, 어떤 방식으로든 의식만 잃게 만들면 일단 점프 능력은 봉인되는 셈이었다. 그러고 나면 끝이다. 점퍼로서의 세세한 능력과 상관없이, 어쨌든 다른 점퍼가 몸에 손을 대고 재밍만 걸고 있으면 밀실에도 일반인처럼 갇혀서 갖은 꼴을 다 당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왕년에 점퍼로서 활약했다. 지금처럼 한국 태생의, 군인 출신으로 다양한 특전사 부대를 돌고 이후에는 다양한 세계의 전장들을 용병으로 전전했다. 돈을 좇았고, 그 과정에서 점프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며 적진을 농락했다.


다양한 전투 기술과 실전 경험을 쌓았고, 제 3세계 같은 곳에서는 나름의 명성도 얻었다. 그저 그 정도로는 조직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증언도 목격자도 제대로 남지 않는, 낙후된 지역의 전장터에서 벌어진 일들이기에. 점프 능력으로 어떤 사회적인 영향을 크게 미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영향력이 점차 커져, 용병으로서 개입한 국가에서 그를 주시하며 특별한 전력으로 취급하고 전황의 역전을 위해 사용하려 했을 때 조직의 구성원이 찾아 왔다.


낙후된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나라의 수뇌부와 연결될 즈음이 되면 조직과 연이 닿은 어떤 단체의 정보 기관에는 걸리게 된다.


당시의 그는 20대의 혈기로 움직이는 사내였고, 무엇도 거칠 것이 없었다. 전장에서는 언제나 승리만을 거두어 왔었고,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었다. 다치게 할 수도 없었고.


전사, 용병으로서도 상당한 수준의 엘리트였고 비교적 뛰어난 편의 군인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체격적으로도 밀릴만한 구석이 많지 않았고. 그가 점퍼로서의 능력이 개발된 건 10대 후반, 17세의 일이었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능력을 사용한 건 당연히 20대에 군인으로서 실전에 투입되면서 부터였고.


점퍼로서의 능력도 그다지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던 그는 그야말로 초인처럼 굴었었다. 제 3세계, 아프리카 중부 전선의 악몽으로까지 불리웠다. 2000년대 초반 무렵의 일이다. 그리고 그때, 그 장소에서 점퍼 조직의 추적자를 만나서 몽둥이 앞의 개처럼 바닥을 기게 되었었고.



*


아프리카 중부. 미켕 공화국(가상).


뜨거운 열사의 대지였다.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 흙먼지를 마시면서,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는 것이 일상인 땅.


서방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국가의 민족주의자들은 괴상한 사상과 종교를 앞세우며 과격파로 일어섰다. 나라의 군부 일부와도 결탁을 해서 땅을 절반으로 갈라 먹으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해외 선진국으로부터 받아 왔던 원조와 물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쟁의 물자로 사용되었다.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국제 연합 기구와 선진국들은 내전의 초반부터 개입하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국가의 수뇌부가 자신들의 힘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었다.


전쟁의 흐름은 그들의 판단이 오만했음을 드러냈다. 내전이 장기화 되어갔다. 한반도의 3배 정도 되는 땅에서 전선이 길게 확장된다. 힘없는 민간인들, 부족원들로 나누어져 평야에서 따로 살아가던 부락들이 불에 타거나, 전쟁의 폭력에 휩싸여 사라졌다.


고작 수 개월에서 일년 여 만에 수십 개의 부락이 초토화 되었고, 몇 개의 도시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수천 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수십만 명의 피난민, 피해자들이 생겼다. 군인들을 제외한 민간인들만의 피해였다.


전쟁이 장기적으로 흐를 조짐이 보이자 선진국 세력에서 부랴부랴 외력으로 들어왔고, 그 사이에 당시에도 존재했던 '점퍼' 조직이 있었다.


기이한 소문 탓이었다. 내전의 양측 진영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괴현상이 있다는. 순간이동에 대한 소문이었다. 전장에 참여한 군인들 사이의 입소문으로 퍼지는 사실이었고, 대부분 전쟁 중의 충격으로 만들어진 환각, 헛소문으로 치부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건 헛소문이 아니었다. 실제로 누군가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을 선보이며 전장에서 활약을 했으니. 전과로 보자면 '활약'이었지만 인도적이나, 정상적인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범죄에 가까운 행위였다.


한 명의 용병이 신출귀몰하게 내전의 전장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상대 진영을 학살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존재는 한 명인지, 팀인지, 여럿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쿠데타군 측과 정부군 측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눈에 띄는 전과와 생존자들의 헛소리에 가까운 증언이 반복되자 각 진영의 수뇌부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그리고 그들의 정보가 타국의 첩보 요원을 통해 각국으로 흘러 들어갔고, 단체에 연계된 점퍼 조직에게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


미켕 공화국, 정부측 중앙 사령부 관사.


미켕의 수도 바야니에 위치한 사령부 관사는 나름대로 멀끔한 편의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해외 자본의 투자를 통해 만들어진 건물은 나름대로 좋은 자재로 지어졌고, 신식의 내장재들로 채워졌다.


가만히만 있어도 익숙치 않은 이라면 줄줄 땀이 흐르는 지역이라, 전체적으로 창문이 크고 환기가 잘 되는 구조였다. 복도 전체가 개방적인 테라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정사각형 건물의 내부에 정원이 있고 외부로도 잘 조경된 마당이 보인다.


마당의 중앙에는 물이 흐르는 분수가 있다. 외국의 장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먼 땅까지 와서 지은 물건이었다. 정교하게 솟아오르는 형태의 석재 조각상의 끄트머리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고, 분수를 채우며 주변의 바람을 만든다.


건물 내부, 사령관실.


통창이 바깥으로 열려 있었고, 대리석 같은 톤의 인테리어인 방이었다. 사령관실이라지만 가구들은 단출한 편이다. 검소하다 싶은 작고 깔끔한 집무용 테이블에 서재와 자료들을 넣어두는 다양한 수납 가구들. 소파 두 개와 그 사이에 놓여진 길다란 회의용 탁자.


작은 냉장고와 벽걸이 에어컨 두 개. 넉넉히 일개 소대가 들어와서 보고를 해도 괜찮을 만한 공간이었지만, 별로 채워지진 않았고 빈 공간이 많았다. 관실을 쓰는 지휘관의 성격이 반영이라도 된 듯한 모습이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공기 속에서, 한 사내가 불려와서 서 있었다. 그는 미켕인이 아니었다. 약간 까무잡잡하게 피부가 타 있었지만, 아프리카 계의 인종들과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는 동양인이었다. 황인종. 개중에서도, 한국인.


대머리에 체격이 다부진 사내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국적도 불분명한 군복을 입은 사내다. 별 든 것이 없는 전투 조끼를 대충 걸치고 있다. 오른팔의 팔뚝에는 정부군 소속의 용병임을 뜻하는 공화국기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 윤민혁은 20대 중반의 청년이라기엔 노안이었다. 아프리카의 전장에 어울리는 밝은 톤의 황토색 군복. 그는 정부군의 사령관, 코이맛 따센 대장을 앞에 두고도 그다지 조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외부인이라고 하지만 군례나 상식을 비추어 봤을 때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행동거지였다.


사령관, 코이맛 대장은 그런 점에 대해서 크게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이 콧대 높고 실적도 좋은 용병은 시건방지고 교만했다. 물론 그만한 전장에서의 실력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다루기에 여간 까다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용병군 부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정규 부대에 끼어서 활동을 하다가, 종래에는 자신 혼자 특별 소대처럼 움직이며 갖은 전장을 종횡무진하는 존재였다. 그가 보여주는 전장에서의 실적들은 믿기 힘든 정도의 수치였다. 어떤 극악한 전장에서도 그 혼자 생환해왔고, 적군에는 늘 중대 규모 이상이 투입되어야 기대할만한 유의미한 피해를 주었다.


여러 개의 전장을 오가면서 지치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빨랐다. 그에게 있어서 이 용병은 기이한 존재였다. 정체가 무언지 알 수 없는 외국인. 심지어 그로서는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극동 아시아의 나라 출신. 일본 옆의 반도로 기술 수준이 좋은 나라이고, 휴전 중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국제 정세상. 그러나 그 이상의 일들은 아는 바가 없다. 그는, 대장이 처음으로 만난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두 번쨰로 만난 한국인과 그를 소개시켜 주기 위한 자리였다.


후웅.


하고, 바람이 일거나 미약하게 공간이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돋기도 한다. 이상한 느낌에 그 자리를 처다보면,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사람이 나타나는 현상을 바라보게 된다.


"뭐."


라고 그가 외쳤다. 그는 평정을 잃을 생각은 없었다. 그럴 자신도 없었다. 이 땅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그의 능력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종류의 시련들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능력은 이 땅의 주민들이 짐작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그가 생각하기에 아마 이 아프리카 중부의 국가에는 '점퍼'라는 인종들이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음을 놓았었다. 이런 오지에 틀어박혀서 자신이 전장에서만 능력을 사용한다면 진실을 알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거기다가 적극적으로 그 목격자들을 줄여나간다면 말이다. 그는 피비린내가 나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며 거침없이 굴었다. 총을 들고 있는 모두가 그것을 타인을 해하기 위해 사용하고 싶어 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무기를 들었을 때 어떤 비틀린 인간들은 꼭 그것을 생명, 개중에서도 사람에게 겨누곤 한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정신적으로 싸이코패스라 불리는 부류였다. 그럴지도 모른다. 윤민혁은 자신에게 많은 것들이 결여 되어 있다고 느꼈다. 일단 공포감은 남들보다 둔한 편일지 모른다. 점퍼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일부러 전장에 자신의 몸을 던져 넣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으니.


또한,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다른 점퍼를 마주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포감은 적었지만 놀라움은 있었다. 또한 적었지만 없는 것도 아니기에, 소름이 돋는 일도 있다. 그는 뜬금없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동류의 인종에게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한 사령관을 처다본다. 당연하게도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 사람 좋은 미소를 때때로 지어 보이는 코이맛 대장은 그에게 있어서도 다루기 쉬운 상대였다. 언제나 실적만을 보여주면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조건들을 맞춰 주었으니까. 정부군 측이 가진 재원이 풍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실적에 따라 두둑한 보너스도 챙겨주는 편이었고.


신뢰한 적은 없었지만 배신감과 비슷한 종류를 느끼는 것도 같았다. 자신이 판단했던 스스로의 판단력에 대한 배신감일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이런 상황을 선사하다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밝혀져도 되는 것일까. 그동안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비밀이었고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못할 사실이었던 순간이동의 능력이 백주 대낮의 눈앞에서 이용되었다. 코이맛 대장은 언제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사람 좋은 웃음. 정이 많은 흑인이었다.


코이맛 대장이 능숙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자네를 찾는 이가 있어서 불렀네. 혹시 이 사람과 관련이 있다면, 자네도 뭐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길 바라네. 먼저 만나봤지만 나쁜 조직의, 나쁜 사람은 아니라네."


그 뒷말, 혹은 말에 숨겨진 함의에는 이런 문장이 숨겨져 있었다. '자네가 나쁜 사람일 수는 있겠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점퍼는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사내였다.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있었을까. 20대 후반, 혹은 30세 근처의 나이일지 몰랐다. 동양인이었고, 각진 챙 모자를 쓰고 그 아래로 눈빛을 빛낸다. 자신처럼 군복을 입고 다니는 사내였다. 다부진 체격에 두꺼운 몸통. 격투로 눈앞에서 붙는다고 해도 그다지 자신은 없는 체격이었다. 기술적인 부분이야 어느 쪽이 뛰어날지는 미지수였고.


흔들림 없는 자세나 동작의 기세로 보면 상당한 수준의 운동을 익힌 사람처럼 보인다. 전투가 가능한 점퍼라면 자신과 같은 조건이었다. 점퍼로서의 특수 능력은 어느 쪽이 더 뛰어날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할만한 비교 대상이 마땅치 않았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점퍼들과 많이 마주해 본 종류의 인간이라면 자신이 밀릴 확률이 높았다. 전투나 기술이란 단련과 또 비슷한 이들끼리의 실전에서 갈고 닦아지는 것이었으니.


"당신은··· 순간이동 능력자인가···."


첫 마디로 어떨지 모르는 물음이었다. 점퍼가 내뱉기에도 어눌한 말이었다. 윤민혁 역시 점퍼였지만 그가 다른 존재를 처음 맞닥뜨리기에 나오는 바보 같은 투의 질문이었다. 상대방, 기세가 날카로운 청년이 씩 웃더니 익숙한 모국어로 대답했다.


"너와 같지. 윤민혁. 그동안 미켕 국내에서 개같이 구르면서 참 많이도 일을 벌였더군. 전쟁터에서 헌신하는 점퍼가 용인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넌 그 이전에 범죄를 너무 많이 저질렀어."


모국어라 함은, 그와 같은 한국인이 내뱉는 한국말이었다. 익숙한 외형의 동양인은 동향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점퍼'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뉴스 따위의 것이었다. 그가 점프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해가 되는 미해결 사건들. 그리고 그런 사건들에 뒤이어 이어지는 해결 소식들. 그 과정이 뚜렷하지 않고 상식선에서 설명할 수 없는 과정들이 도리어 그에게는 무엇보다 확실한 정황이었다.


그가 살아가는 한국에 비슷한 능력을 가진 '점퍼'들이 있음에 대한. 그리고 그런 사건들을 바라보며 반면교사 삼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군인으로서 충분한 훈련을 받고, 커리어를 쌓고 해외에서의 실전 작전에 투입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터넷 따위를 하릴없이 떠돌다 보면 그런 소문 같은 정보글들이 올라오곤 했다. 대부분은 어느 미치광이가 할 짓이 없어서 정보의 바다에 싸지른 쓰레기 글들로 보지만, 실제적으로 능력을 보유한 그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도시 전설이었다.


순간이동자와, 그런 이들을 잡아내는 비밀 조직에 대한 이야기.


그는 아마 높은 확률로 그것이 사실이리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랬기에 이렇게 먼 곳으로 와서 누구에게도 소식을 알리지 않고 일을 저질렀던 것이고.


그는 자신의 칼을 휘두르기를 즐겨 하는 쾌락주의자였다. 말했듯,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뇌의 어느 부분이 망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전쟁을 즐기기 위해 전쟁터를 찾았고 그것에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더 큰 불길을 일으키기 위해 움직였다. 전쟁의 양측 진영을 옮겨가면서, 다른 신분으로 말이다.


정부측에는 한국군을 전역한 퇴역 군인으로서, 실제의 신분을 사용했고 반란군 측에는 동남아의 사설 군사 단체에서 경력을 쌓은 한국계 필리핀인으로 활동을 했다. 실제 신분을 사용한 이유는, 어차피 고용 측에는 자신이 벌이는 갖은 범죄 행각들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이었던 탓이었다. 점프 능력과 마찬가지이다. 목격자가 없다면 전할 사람이 없게 된다.


발이 없는 말도 전달자가 있을 때 거리를 넘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끔찍하게도, 온갖 준비나 예상을 뚫고 도시 전설처럼 들리던 무언가를 마주해야 했다. 분명 그를 잡으러 온 추적자이리라. 그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지만 이미 그렇게 단정지었다. 상대의 행동거지나 기세에서는 이미 그런 낌새가 보이고 있었다. 결코 좋은 일로 찾아온 이는 아니었고, 자신이 그런 일로 누군가를 맞이할 만큼 착한 일을 벌인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윤민혁은, 다음 순간에 도망가려 했다.


했다, 라고 말함은 그 시도가 실패에 끝났음을 의미한다. 제대로 상황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편을 옮겨 가며 수개월의 내전 중에 필요 없는 살상을 저지르고 민간 피해를 발생시킨 일이 어떻게든 누군가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괴물 같은 실적을 내는, 어떤 용병이 있고 그가 있는 곳에는 기이한 현상이 늘 벌어진다는 내용도 같이.


도약의 발동은 순식간이다. 다른 제스쳐도 필요 없었다.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그는 예비 동작 없이 곧바로 이동하는 법을 익혔다.


머릿속으로 당장 떠오르는 먼 곳을 도착지로 삼았다. 뇌파가 무언가를 작동시키며 맞물려 돌아가듯 기능이 발휘된다. 가상의 컴퓨터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했다. 그가 상상하는 점프의 이미지는. 점프를 할 때마다 느껴지는 미약하고 이질적인 에너지가 그의 신체 주위를 맴돈다. 한 호흡이 끝나기 전에 도약은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 상대가 먼저 사라졌다. 그는 눈앞에서 상대방을 놓쳤다. 시야에서 벗어 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감이 크고, 체격 역시 작지 않은 사내였으나 환각처럼 순식간에 모습이 없어진다. 그는 그 현상을 잘 알고 있다.


턱.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미 자신의 뒤에 나타난 상대가 왼쪽 어깨에 두터운 손을 얹었다. 왜인지 모르게 불길한 감촉이었다. 그는 이때 '재밍'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점퍼가 다른 점퍼에 대해 점프를 무효화 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윤민혁의 머릿속이 오작동을 일으켰다. 뇌파로 움직이는 가상의 컴퓨터는 동작 도중에 다른 신호를 받아들여 혼선을 일으켰다. 도약은 무효로 돌아갔다. 그는 떨림을 느끼며 다시 한번 도약을 발동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말소리가 그에게 들렸다.


"우리는 목숨을 빼앗는 조직은 아니라네. 고문에도 취미는 없고. 짧은 정신 교육 후에, 목줄만 걸고 풀어주지. 그다지 괴롭지 않을 거야."


굵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무력감을 느꼈다.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다음 상황에 대한 짐작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 순간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몸에 익혀진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점프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면, 일단 격투로 끌고 가야 할 일이었다.


그는 점퍼였지만 동시에 노련한 전쟁꾼이기도 했다. 어지간한 이들로는 그의 근접전을 버텨내지 못하리라. 그리고 불행하게도, 상대는 어지간한 편이 아니었다.


어꺠에 손이 얹힌 채로 윤민혁이 몸을 돌리려 했다. 그대로 어깨를 빼내며 반 회전 하면서 상대의 팔뚝 위로 자신의 팔을 놓아 붙잡고, 오른손으로 짧게 턱을 노리려 했다. 회전하는 몸의 위력을 그대로 실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격투기 종류를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듯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챙을 눌러 쓴 동향인은, 그리고 조금 더 나이대가 있는 양반은 격투기를 익힌 모양이었다. 그는 윤민혁이 몸을 돌리려 하자 그대로 무게를 실어 상대의 어깨를 눌러 제압했다. 자세가 무너지자 회전이 온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억지로 움직여서 턱을 노리려는 손보다, 상대의 제압기가 더 빨랐다. 선 자리에서 반 회전을 하는 것보다 상대가 한 걸음 스텝을 밟아 뒤를 점하는 긴 움직임이 먼저 끝났다.


윤민혁의 움직임에 맞추어 왈츠를 추듯이 등 뒤로 돌아 같이 돈다. 그대로 윤민혁의 오른쪽 잽은 허공을 노리고 움직이게 되었고, 상대방이 어깨를 눌러 목을 비우고 그 사이로 팔뚝을 넣는다. 이어지듯 팔뚝으로 목을 졸랐다. 윤민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눌러 목을 보호하려 했지만 상대방의 흐름이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힘도 강한 편이었다. 기어코 고개 사이에 목을 잡아 경동맥을 압박한다. 다른 팔도 어느새 빼서 초크를 잠그며 힘을 준다. 윤민혁이 기절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깔끔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이런 류의 속도와 깔끔함을 보이려면, 결국 비슷한 동작이 가능한 레벨의 운동선수를 섭외해야 했기에.


운동에 낯선 문외한이 보기에는 초인적이라 부를만한 움직임들이었다.


"컥."


윤민혁은, 목이 굵고 다부진 체격이다. 그러나 그런 장정이 결국 혈류를 압박당하자 얼마 버티지 못했다. 졸린 목 사이로 숨 하나를 간신히 뱉었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점퍼가 도약을 할 때도 일시적으로 시야를 잃어버리지만, 당연히 도약의 순간은 아니었고 실신의 순간이었다.


*

duncan-kidd-Cju-BkSkM1k-unsplash.jpg

뭐... 작 중 이미지와는 크게 관련 없지만 전쟁 느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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