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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점퍼Jumper, 순간이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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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2.09.27 18:20
최근연재일 :
2024.06.21 01:24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603
추천수 :
219
글자수 :
908,591

작성
22.10.0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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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7.

DUMMY

우아악!


김민서는 자취방에서 소리없이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정확히는, 비명을 지르는 실감나는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났다. 실제로 그의 성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밤 사이 마른 목으로 공기 새는 소리나 조금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헉, 헉.”


숨이 가빠왔다. 지독한 악몽은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기분이나 긴장감은 신체의 사소한 근육들에 영향을 미치고, 충분히 숨이 조여오게 만들고 호흡이 힘들 수 있었다.


“후우, 후우.”


물을 한 모금 삼킬 정도의 시간동안, 그는 침착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평안하게 방 안에서 자다가 깼을 뿐이다.


2022/4/4/AM07:35.


그의 원룸의 침대는 단촐한 싸구려였다. 하얀 매트리스 위에 얇은 이불을 대충 덮고 그 위에서 잔다. 침대 머리맡 매트리스에는 고약한 소음을 내는 디지털 알람 시계를 늘 둔다.


시계가 알리는 시간은 아침이었다.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쳐온다. 잠을 못잔 건 아니었다. 다만,


“억.”


근육통이 쑤셨다. 민서는 상체를 일으킨 상태에서 몸을 뒤틀다가, 한 10초 정도 가만히 있었다. 허리, 어깨, 팔, 알이 배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억.


그리고 다음 10초는 이 정신 나간 조직의 점퍼들을 고소를 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곧 현실성이 없는 것 같아서 접었다. 당장 현대 병력이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범죄자 점퍼들을 잡아들이는 점퍼 조직을 상대로 어떤 억제력을 발휘할 수 있겠나.


그들은 미치광이는 아니었고(잠깐 고민했다), 웬만하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순간이동이라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채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지만, 일반적인 삶에 대한 감각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제도의 테두리 안에 넣기에는 어려운 존재들인 건 분명했다. 아니 사실··· 점프라는 능력이 아니어도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한 민서로서는 그 녹록 찮은 조직에 대항할 수단이 마땅찮다.


머리가 복잡해져서 생각을 그만두었다.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가 몇 번을 멈춰서고 끙끙댔다. 침대에 한 발을 내딛다가 힘을 잃어서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잠깐 있었다.


그는, 주말동안 정말 신나게 굴렀다. 그래, 가본 적은 없지만 엘리트 운동인들이 있는 투기계 체육부에 갑자기 들어가서 참여한 느낌이었다. 아니 사실, 그것보다 조금 더 혹독했다. 일부러 신입생을 괴롭히는 고약한 선배들을 단체로 맞이한 경우여야만 비교가 가능했다.


토요일 오전까지는 몸을 쓰는 일은 아니었지만, 오후부터 직접 몸으로 격투기를 배워야 했다. 유도, 주짓수, 복싱, 무에타이. 타격기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보호구가 있었지만, 어질어질한 건 마찬가지였다.


메쳐지고, 들리고, 날아가고, 비틀리고, 조임 당하고, 맞고, 차이고, 일으켜졌다. 훈련실이라고 불렸던 공간의 바닥은 정말로 소재가 좋았다.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몸으로 주말간 억지로, 친해진 셈이었다.


홍인수, 소드 마스터라 불렸던 사내는 민서를 훈련시키는데 나름 열정적이었다. 하루에 일정 횟수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도약을 아낌 없이 쓰면서 굴려대는 터라, 당하고 있는 경험이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렸었다.


몸으로 통증이 오면 곧바로 현실임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씻고, 밥을 챙겨 먹고, 다시 누웠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오후 시간을 쓰는게 전부다. 잠깐이나마 더, 굴림 당한 몸을 좀 누이고 쉬어야 할 것 같았다.



*



조직은 비상이 걸리면 바쁘게 움직인다. 이동 거리의 제약이 없는 점퍼의 특성상, 세계 각국의 최고 난도의 상황에 파견되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그 말은, 그들이 대응할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비 점퍼 요원들의 경우엔 기지, 혹은 파견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 국가의 상황을 관리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심할 때의 점퍼들은 조금의 쉬는 시간도 없이 연속적으로 임무를 처리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가령 이런 일이었다.


“못 알아처먹어!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누군지 알아? 빌어먹을 공주야! 당신네들 나라의 자존심을 진흙탕에 처박아 주길 원해? 내가 인도적이라는 사실에 감사해! 고작 1000만 달러라고. 그것만 주면 아무 문제 없어.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고. 근데 이렇게 나오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길지 몰라!”


영국은 총리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의원내각제에 의해 의회가 있었고, 상징적인 의미로 전근대부터 이어져 온 영국 왕실이 존재한다.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나라였다.


현대에 와서도 그 왕가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다. 실권을 행사하는 건 아니었으나 외교적으로도 우호의 의미를 다질 때 충분한 국가 의사의 대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뜻에서, 미국의 어느 외딴 폐건물에 인질범이 왕실의 공주에게 총구를 들이밀고 있는 건 깨나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구멍에서 뭐가 튀어 나가는 줄 알아? 총 좋아하나? 나는 이 빌어먹을 화약 무기를 상당히 좋아하지! 종류별로 모아놓고 매일 쳐다보고 싶을 정도야! 오늘 챙겨온 건 매그넘이라고, 이 예쁜 공주님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종류야! 어디를 맞던, 한 번에!”


폐건물은 어두웠다. 내장재가 다 튀어나와 있는 콘크리트 건물의 상층부였다. 계단이나 제대로 있을까 싶은 구조였고, 뚫려 있는 창문에서는 휑한 바람이 돈다.


창문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다시 그 너머에는 황량한 사막이 보인다. 지도에도 딱히 나와있지 않은 지점이었다. 범인은 강도들이 흔히 쓰고는 하는 안면 마스크 따위를 덮어 쓰고 있었고, 눈깔과 작게 자른 입의 구멍으로 입의 일부만 드러난다.


작지 않은, 단단한 체격의 사내였다. 키가 다소 작고 몸집이 옆으로 크고 근육질이었다. 눈동자는 밝은 갈색이나 콘택트 랜즈 따위를 꼈다면, 그마저도 색이 다를 수 있었다.


범인은 묵직한 매그넘 권총을 든 채로 팔을 휘적거리며, 연극을 하듯이 건물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확히는, 의자에 묶여 있는 어린 소녀, 공주와 그가 켜 둔 카메라 사이의 공간이었다.


몸을 잠시도 가만히 두고 있지 못하는 그는 많이 흥분되어 보였다. 과장스럽게 움직이는 꼴이나, 격앙된 목소리가 그랬다. 눈빛도 다소 떨린다.


알코올이나, 혹은 마약에 취해있을 수도 있었다. 만일 멀쩡한 이성이 있다면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인질극의 규모를 알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범인은 정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낸다는 듯 끊임없이 말을 덧붙였다.


가정용의 비디오 카메라. 이제는 쓰는 사람이 많이 없는 물건을 삼각대에 거치해두고, 노트북에 연결해서 영상을 보내고 있었다.


영상의 반대편은 영국의 왕실 관계자였다.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나이인, 어린 몸집의 소녀는 잠시 방미 일정을 가졌다가 이렇게 된 꼴이었다.


즐겁고, 들뜬 분위기의 일정이었다. 영국 왕가의 이동에는 늘 경호원들이 철저하게 따르지만,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꼬마가 떼를 써서 다소 경계가 느슨해질 수도 있었다.


본 경호원 집단과 떨어져 소수의 인원을 데리고 잠시, 그리 멀리도 아닌 고작 한 두 블럭 정도의 거리를 따로 움직일 수는 있는 법이었다.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범인은 간절하게 돈이 필요했고, 눈 앞에 있는 유명인을 보고 곧바로 충동을 실행했다.


사내는 총기 애호가였고, 또 사용에 있어서도 마니아였다. 몇 번의 전과가 있었고, 제대로 된 직업이 없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약 중독 증세가 있었다.


그가 일을 벌인 건 머리에 남아 있는 약기운과 밀린 빚,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던 마약상의 협박 탓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업에 실패한지 오래 되었고, 자산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다. 마약에 손을 댄 이후로 소모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마약상에게 빚을 지듯이 외상으로 많은 양을 얻어왔다. 그것을 다시 비싼 값에 팔아 장사를 하고 본인의 필요량을 채우려던 속셈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몇 명의 범죄자 동료들이 생겼고, 다른 조직과 얽혔다. 그가 세웠던 마약 딜러로서의 포부는 망가졌고, 재고처럼 남은 약과 중독 증세, 빚더미와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협박과 납탄만 남았다.


지금 이 자리, 폐건물의 내부에 서서 영국의 고위직 공무원들에게 난리를 피우기까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이 일을 벌였던 동료들은 전부 잡히거나 어딘가 다쳐서 널브러졌다. 죽은 놈은 없던 것 같지만, 현행범으로 지독한 범죄를 저지르다 잡혔으니 비슷한 꼴을 형량으로 당할 테였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건 그 혼자였다. 그 망할 도시의 다운타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 황무지까지 묘기를 부리다시피 건물을 넘고 차를 바꿔 타고 미친 마약쟁이처럼 운전을 해서 왔다.


그가 그 도시의 토박이로, 온갖 뒷골목의 루트를 알고 럭비 선수처럼 뛰어댔으며, 몇 번의 운이 따랐기에 간신히 이런 상황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인질범은 자신이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따라 붙은 추적자들이 있지는 않는가, 자신의 요행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들로 덜덜 떨리려는 몸을 감추었다.


그런 탓에 더욱 과장된 행동과 목소리가 나온다.


1000만 달러. 한화로 100억원 근처의 돈. 그 돈만 있으면, 이 모든 짓거리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인생을 바꿀 돈을 원했다.


화면 건너편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게 보였다.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내라고 했던 계좌에는 아직 아무런 금액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미친 짓을 벌인 지 반나절. 아침에 한가로운 시간에 도심을 구경하다가 여기까지 끌려온 공주는 덕테이프로 입을 막아두었기도 하고, 심력이 소모되었는지 큰 반응이 없다.


끌고 왔던 처음에는 온갖 소리를 지르고 시끄럽게 빽빽 울어댔지만, 남자가 더 크게 소리를 지르자 움츠러들었고 힘이 다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축 늘어져 있었다.


지나친 공포감과 당황 속에서 정신적인 회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이 사건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던, 혹은 최악의 비극으로 끝나던 일단 어린 공주의 기억 속에 트라우마는 하나 자리 잡을 것 같았다.


왕실의 공주답게 예쁘게 차려 입은 어린이 용 드레스였다. 외출용으로 만들어져서 움직이기도 편했고, 그렇게까지 튀지는 않았으나 소재가 고급스럽다. 분명 명품을 만드는 장인이 만들었거나, 그런 브랜드의 제품일 테였다.


화면 너머의 영국의 장관급 인사가 얼굴을 마른 세수로 감싸 쥐는게 보였다. 대테러 정책을 수립하고 대응하는 내무부 쪽 장관이었다.


이 정신 나간 테러 인질극은 꽤나, 성공적이었고 또 기적적이었다. 도심에서 공주를 발견한 미친 마약쟁이가 총을 잘 다루고, 럭비선수처럼 잘 뛰었으며, 도시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조직원들이 있었고 그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몸을 던져서 추적자들을 막아섰다.


공주는 잠깐의 야유(바깥 놀이)를 즐기려다가, 얼마 안되는 경호원과 왕비만을 곁에 둔 채 움직이다가 이런 봉변을 당했다. 왕실 인원들의 움직임은 비공식적인 것이었고, 경호원들은 만전을 기울였지만 기적적인 틈을 노려 성공한 인질범의 행동이었다.


심지어 그는 총을 맞지도 않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동료들은 다 어딘가를 맞고 널브러졌으나.


그래, 여기서 1000만 달러만 받는다면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이전보다 훨씬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이건 누군가 자신에게 준 기회가 분명했다.


라고 인질범은 생각했다.


“빨리 보내. 지금부터 1시간 내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방아쇠를 당기고 이 자릴 뜰거야! 찾아올 테면 오라지! 신원 확인도 하기 어려운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걸!”


어느 정부 부처의 회의실처럼 보이는 화면 너머의 인물들은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진정하라, 원하는 것은 들어주겠다, 공주의 신변을 보장하라, 지금이라도 올바른 선택을 하면 선처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온갖 종류의 회유책이 들려왔다. 다만 인질범은 오로지 천 만 달러, 숫자에만 올바른 대답을 들려 줄 생각이었다. 그 외의 모든 단서나 조건에는 오로지 매그넘의 방아쇠를 당길 뿐이다.


황량한 풍경이었다. 예전에 도시가 있었는지, 혹은 만들어지려다 만 건지. 사막과도 같은 배경에 모래 먼지가 불어오고, 말라 비틀어진 고목들이 뜸하게 서 있다.


석양이 지는 노을은 운치를 더했다. 누구도 감성을 느낄만한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어.”


아주 오래 기다려서, 어색하게 말 문을 튼 음성같은게 들려왔다.


인질범은 그 자리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는 공주도 있고, 폐건물은 가끔 구조가 뒤틀리며 음산한 착각을 할만한 소음을 내기도 하고, 무엇보다 연결된 영상 통화에서 소리가 났을 지도 모른다.


“음.”


뒤에서 비교적 선명한 사내의 음성이 들릴 때야 인질범은 이상함을 느꼈다. 뒤를 처다봤다.


미친. 한 사내가 폐건물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사내는 동양인이었다. 인질범은 놀라움에 반응이 느려졌다. 공주와 그만 있어야 할 자리에 외부인이라니?


공주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심지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재킷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때묻지 않은 하얀색 운동화가 이질적이었다. 패션 감각이라기보다도, 이런 황무지의 한 가운데에 보통 저런 신발이 깨끗할 수 없었다. 설령 차만으로 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바람 한 번 불고나면 먼지를 뒤집어쓰는 곳이다. 인질범과 공주도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인질범은 총기를 잘 다루는 사내였다. 지식적으로나, 사용에 있어서나 마니아였고 숙련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익혀 온 취미는 그에게 반사적인 행동을 선사했다.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권총에서 들리기에 어색할 정도의 소리다. 날아가는 매그넘 규격의 납탄은 그대로 폐건물의 콘크리트 벽을 뚫어 박살내고 날아갔다.


그 사이에 있어야 할 남자는 없었다. 분명 피를 흘리거나, 어디 사지가 한 쪽 결손이 되는 남자가 있어야 하는데.


인질범은 뒤돌아서 대각선 방향으로 쐈고, 인질범의 뒤쪽으로는 공주가 묶여 있었다. 기절한 것처럼 보였던 꼬맹이가 움찔거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매그넘의 발사음은 폭음에 가까웠다. 익숙하지 않은 자가 근처에서 들으면 공격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으브으으브!”


덕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진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영상 통화 너머의 사내들도 거의 비슷하게 경기를 일으켰다. 이런 맙소사! 오 국왕 폐하! 하나님, 지져스 크라이스트!


어린 소녀의 고생과 괴로움은 영국 공무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통화 화면의 너머, 카메라가 잡고 있는 폐건물의 모습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앵글 바깥에 있었다.


저들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다.


우웅.


인질범은 기묘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먼지로 범벅이 된 몸. 흥분이 가라앉지 않고 화약과 폭음으로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간 상태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소리와 진동이었다.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총성 때문에 귀가 먹먹한 상황에서 무언가 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덜커덕.


“왓 더!”


인질범은 이번에는 반응이 빨랐다. 자신이 지금 유령을 보고 있나? 약 때문에 환각을 보는 건가? 일말의 의심이 들면서도 일단 들려오는 소리에 재빠르게 돌아보았다. 삼각대에 거치해둔 카메라가 앞으로 넘어졌다. 영상 통화의 장면이 막혔다.


-오 제발. 무슨 일이야. 천만 달러는 지금 보냈다네!


아직 켜져 있는 노트북에서 당황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바라마지 않던 대답이었지만 인질범은 계좌를 확인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는 갑자기 이동을 한 사내가 있었다. 아까까지 뒤 편, 그의 대각선 쪽으로 서 있던 사내가 소리도 없이 영상 장비들의 옆에 서 있었다.


사내가 매그넘을 든 뻐근한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아니, 들어올리려 했다.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이 더 빨랐다.


우웅, 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재킷을 입은 동양인은 마술처럼 눈 앞에서 사라졌다. 턱, 하고. 누군가가 아주 오랜만에 그의 어깨를 짚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간만에 누군가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이봐. 자네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도와주도록 하지. 인생엔 가끔 여유가 필요한 법이야(Dude, I can help you to stop this shit. Every life needs a space.).”


친근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인질범이 영국의 왕족을 인질로 잡고 매그넘을 들고 있는 데다가, 약간의 마약 기운까지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 내용이 제대로 들릴 수도 있었겠다.


“Xxxx!”


보편적인 쌍욕을 뱉으며 인질범이 상체를 뒤틀었다. 다소 몸싸움을 해서라도 상대의 몸에 매그넘 총구를 박아넣고 방아쇠를 당길 셈이었다. 그는 힘이 아주 좋은 편이었고, 성공할 확률이 높은 머릿속의 계획이었다.


우웅.


그리고 그다음 순간 그가 바라본 건 마약을 할 때나 떠올릴 법한 상상 속의 상황이었다.


후와아악, 하고 거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는 시야로 먼저 인식을 했다. 꿈인가? 수천 피트는 되어 보이는 상공이었다. 아래로 넓은 황야의 전경과 그 너머의 도시까지 보였다.


그리고,


몸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떨어지기 시작하자 절대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으어어어어어어.”


바람과 저항 때문에 덜덜 떨리는 몸이 턱을 제대로 벌리지 못하게 만든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프리 다이빙은 패닉에 패닉을 더한 것과 마찬가지다. 극한의 스릴은 심장을 거칠게 자극했다.


“커어어어.”


어떻게 된 일이지, 라고 인질범은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떨어지는 몸의 감각이 자신의 정신을 일깨웠다. 자신은 고도 높은 상공에 혼자 있었다. 성대에서 말이 아닌 비명이 튀어나왔다.


바람에 나부끼며 방향이 이리저리 뒤틀렸다. 팔다리도 움직이면서 자세를 잡지 못했다. 몇 바퀴인가 빙글빙글 돌면서,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갔다. 사람이 떨어지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는지는 모른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떨어지는 것처럼 느꼈다.


드디어 자신이 지옥에 온 것일까? 인질범은 찰나에 그런 생각을 했다.


멋대로 풀리는 손아귀에서 매그넘은 어느 순간에 날아가버린 지 오래였다.


사내는 떨어진다. 황야의 상공에서. 바닥으로.


죽음이 가까워 올 때 누군가 말을 거는 게 들렸다. 이미 몇 번을 돌아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꼴이었지만 이상하게 말소리가 잘 들렸다.


턱, 하고. 떨어지는 그의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잡았다. 그의 팔을 감싸듯이 단단히 잡은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가깝다.


“바람 좀 쐬니 기분 좋지?”


이런 미친. 빠르게 다가오는 지상과, 변하는 풍경과, 거친 바람 소리와, 팔다리가 나부끼는 자유 낙하 속에서도 반박을 하고 싶어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 같은 작은 소리와 진동 다음에 그는 눈을 감았다 뜨는 것처럼,


어둠을 발견했고


“커헉!”


거친 숨을 토해내며 정신을 차린 곳은 땅바닥이었다.


으어어어억! 괴성을 지르며 인질범은 땅바닥을 짚었다. 자신이 아직도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팔다리를 저으며 움직였다.


철컥.


동양인은 인질범의 곁에 서 있었다. 그런 인질범의 휘젓는 오른 팔을 잡아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수갑을 꺼내 옆에 있는 철 기둥과 연결 시켰다.


철그덕. 인질범은 휘두르던 오른팔이 걸리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처다봤다. 자신은 아직 살아 있었다. 몸도 멀쩡했다. 케챱이 되지도 않았다.


인질범과 동양인 사내가 나타난 곳은 어느 도시의 뒷골목 같은 장소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그늘져있고, 외부로 다니는 낡은 철제 계단이 있으며 대형 쓰레기통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사위는 어둡다. 인조적인 가로등, 형광등 불빛만이 뒷골목을 채우고 있었고 하늘은 컴컴했다. 저녁 노을이 보이던 그곳과는 전혀 다른 곳인 모양이었다.


인질범의 오른팔은 철제 계단에서 튀어나온 비교적 얇은 철 기둥에 묶여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끊어낼 답이 나오지 않는 구조물이었다.


사내는 실성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청년을 처다보았다. 동양인, 젊고, 깨끗한 옷차림에, 여유로운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기분 전환이 됐는가 모르겠군. 여기서 잠시만 머리 좀 식히고 있으면, 절차대로 처리해 줄 거라네. 마음만 바꿔 먹으면 언제나 또 견뎌 볼 만한 게 인생이야.”


뒷말은, 이 영국 공주 납치범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겪게 될 고난에 대한 당부였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톨스토이의 명문이었다. 만일 범죄를 멈추고 사회적 합의 하에 대가를 치룬다면, 그에게 그 이상의 혹독함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그 또한 그 이상의 괴로움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했고.


동양인 청년은 눈빛이 영 돌아오지 않는 인질범을 뒷골목, 그러니까 런던 시내의 어느 인적 드문 자리에 내버려 두고


사라졌다.


귓가를 울리는 미약한 진동과 소리, 기이한 느낌에 인질범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겪은 건 믿기 어렵게도 전부 현실이었다. 꿈이나, 환각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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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0. 22.10.14 95 2 19쪽
23 19. 22.10.14 101 3 15쪽
22 18. 22.10.14 98 2 17쪽
21 17. 옥상에서의 이야기 +4 22.10.13 131 2 27쪽
20 16.(2) +2 22.10.12 122 3 15쪽
19 16.(1) 22.10.12 118 2 15쪽
18 15. 22.10.11 122 3 25쪽
17 14. 22.10.11 124 3 20쪽
16 13.(2) 22.10.09 138 4 13쪽
15 13.(1) 22.10.08 167 4 13쪽
14 12.(2) 22.10.08 191 4 14쪽
13 12.(1) +3 22.10.07 235 3 15쪽
12 11. 22.10.07 257 4 27쪽
11 10. 22.10.04 277 7 16쪽
10 9. 22.10.03 285 8 12쪽
9 8. 22.10.02 331 7 17쪽
» 7. +2 22.10.02 385 9 22쪽
7 6. 22.10.01 429 10 19쪽
6 5. 22.09.30 535 9 18쪽
5 4. +2 22.09.28 718 1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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