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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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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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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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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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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7화. 첫 만남 (2)

DUMMY

더러운 접시들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든 채 낑낑대는 종업원이 마침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둘은 이때다 싶어 그릇을 건네줬다. 그리고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홀 안을 잠시 나가자는 의도였다.


홀 안도, 통유리창으로 도배된 홀 앞 복도는 역시 환담을 나누는 사람들이 약간 있었지만 해봤자 2~3명 정도였다. 둘은 계단 구석 유리창 앞에 섰다. 연길의 야경이 검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좀 가까운 사이셨을 것 같은데 장례식에도 참석을 못하셨다니 좀 이상하네요.”


“그렇죠?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 같긴 한데.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뭐 어쩔 수가 없더군요. 거기에다 그 직후에 집에 여러 안 좋은 일들이 겹쳤어요.”


“그래요?”


“내가 왜 이런 얘기를 오늘 처음 뵙는 분에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친근감이 느껴져서요. 그냥 얘기를 하죠.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저런. 어쩌다가?”


“사고를 당하셨다는군요. 역시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런데 저도 나이가 나이니 말이죠. 어머니가 설명하시는 그 당시 상황이 논리적으로 좀 이해가 안가긴 해서 어떻게 되신건지 짐작은 가죠. 심정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 아시다시피 당의 일원인 분이 그런 선택을 하시면 가족들이 어떤 불이익을 볼지 뻔하니까 어떻게든 얼버무린 것 같은데. 이해가 가요. 그래서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실때까지도 거기에 관해서는 제가 추가적으로 추궁을 하지는 않았죠.”


“안타깝군요.”


“그 직후에 또 연길을 떠나야 했죠. 아까전에 말한대로 내몽고로. 개혁개방 중기였고 내륙 균형 개발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는데 우리도 그 중의 하나였죠.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근데 수풀이 우거진 연길에 있다가 그런 사막 지대로 이주하니 어린 나이에도 너무 힘들었죠. 그나마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 이주하셔서 외롭지는 않았다만 결국..”


“결국이라면?”


“이주한지 한 2년 지났나요? 10살로 기억하는데. 겨울이었는데 아침을 먹고나서 두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고 집을 나가시더니 그대로 사라지셨죠. 좀 친해진 몽고 사람 몇 명과 어머니가 몇 일간 찾아 헤맸는데 결국에는 한 20 km 떨어진 호숫가 근처에서 두 분이 모두 동사하신채 발견되셨다죠. 초원 한가운데였는데 어떻게 그 몸으로 거기까지 가셨는지.”


“아...”


앨리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짐작은 했지만 30년 만에 마주한 진실은 그녀의 심장을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흉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매장한 다음 없던 일로 해버렸죠.”


“어떻게 뭐라 말하기가 어렵군요.”


“그래도 몇 년 뒤에 다시 연길로 돌아왔죠. 그래서 다짐했죠. 열심히 공부하고 다시 일어서겠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온거죠.”


“그렇군요.”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죠.”


남자는 갑자기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화제를 돌렸다.


“뭐가요?”


“뭔가 선생님은 대화하기가 참 편한 상대같단 말이죠.”


“그래요?”


“뭔가 알 수 없는 익숙함이 있어요. 처음 본 사람 같지가 않은?”


앨리스 리는 이제 자신이 리경옥이라는 것을 이 남자에게 드러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진실을 알았으니 그에게도 역시 마주해야 할 고통스러운 사실이 있기 마련이었다. 조금 위험하지만 이 곳은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수밖에요.”


“당연하다고요?”


“아버지 말씀하셔서 말인데 혹시 그런 생각 안해보셨나요? 내가 그동안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것. 그것에 대한 의심. 사실 그 의심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훨씬 클 수 있다는 것.”


“갑자기 왜 그런 말을?”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런 걸 많이 깨달았어요. 수십 년간 당연하다고 본 사실. 그 사실이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뿐. 내가 경험하지 못했으면 그것에 대해 근원적인 의심을 품어야 할 수 있다는 것.”


“글쎄. 좀 복잡한 물음이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괜히 얘기한 것 같은데 앞으로는 그런 의심을 해볼 생각은 없지요. 너무 비실용적인 대화가 오간 것 같은데 말씀 고맙지만 일단 돌아가봐야겠군요.”


“잠깐만요.”


앨리스는 돌아서려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신이 그녀의 조카인지 꿈에도 모를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경옥을 쳐다봤다.


“그 막내 고모란 여자 말이죠. 그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나요?”


“그만 합시다. 내 가족도 아니고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글 쓰는 걸 좋아했다는 소녀, 그리고 제 얼굴에서 친근감을 느꼈다고 했죠. 그게 기억의 전부일까요? 장난감 탱크와 헬리콥터는 기억이 안날까요? 노란색과 갈록색이 섞였죠. 붉은 별이 가운데 박힌. 당신은 그걸 참 좋아했죠. 어느 날 6살의 당신은 그걸 실수로 밟고 넘어졌죠. 다리가 까져서 피가 철철 흘렀죠. 고중(高中)에 다니던 막내 고모는 그걸 보고 빨간 약을 발라줬지요. 주수견(손수건)을 불러주면서요. 놓자 놓자. 친구 뒤에 몰래 몰래 놓자.”


리정성의 얼굴은 순간 사고가 정지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몇 초간 그녀를 쳐다만 보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한마디 꺼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왜 나한테서 익숙함을 느꼈는지 알겠나요?”


타겟의 표정은 굉장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곧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경옥 고모?”


“그래...많이 컸구나.”



...아나운서가 그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그의 전신에는 지금 어마어마한 해일이, 거대한 경련이 지나가고 있다....


황지우,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1985) 中



철혁은 앨리스와 리정성이 시야에 사라지는 바람에 살짝 불안감을 느꼈다. 특히나 연길시에서 한국과의 교류 업무를 맡았다는 중간 관리직 공무원 아줌마는 뻔한 말을 하느라 그를 계속 붙들어매고 있었다. 괜히 아까전에 두부 요리 맛을 칭찬했다 싶었다. 그는 연거푸 주스만 들이켰다.


“그러니까 요즘 이런 국제 갈등은 결국 미국 놈들 때문에 이런 게 아니겠어요?”


성이 황씨라는 이 여인은 아까전에는 러시아가 흑룡강 국경 지대를 불안정하게 하고 있다며 핏대를 올리더니 이제는 미국으로 화제를 전환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그럼요. 미국식 자본주의가 세계를 타락시키고 있어요. 로씨야까지 사회주의를 버리게 만들더니 온갖 잡탕들이 섞여 가지고 나라를 망치고 있잖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국민 소득만 보면 나름 잘 전환이 된 것 같은데.”


“단순히 경제 지표만 올라가는게 전부가 아니죠. 한번 보세요. 출산율은 줄어들고 동성애자들은 늘어나죠. 우리 공화국은 조금 사는 게 뒤떨어질 지는 몰라도 인민 간 화합, 건강한 문화에 있어서는 미국과 구라파, 로씨야 같은 나라보다는 훨씬 살기가 좋죠.”


“예. 그런가 보네요.”


“내가 그래서 한국이 이해가 안간다는 거에요. 왜 자꾸 미국에 붙으려고 하는거죠?”


“정치가들이 그렇게 하는거죠.”


“우리들끼리야 동포 정신으로 서로 이해하지만 한국 정치인들이나 미국놈들이나 참 이상해요. 솔직히 얘기하면 몇 년 전에 저 어디냐 그 미싸일 기지 설치하려고 했던데.”


“안변 말인가요? 함남 안변?”


“그래요 안변. 예전에는 강원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하튼 왜 소용 없는 짓을 해서 우리 공화국과 조선, 아니 한국 사이를 갈라놓느냐 이거죠. 지금이 무슨 전쟁하는 시기도 아니고.”


“양국 간 관계가 요즘 몇 년 간 서먹서먹하긴 했죠.”


“지금 정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확히는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에 대해서?”


“글쎄요. 제가 태어난 나라니까 당연히 애국할 수밖에 없겠죠?”


“함경도 분이시죠?”


“맞아요.”


“그러면 그때는 대한민국이 아니었잖아요?”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하자면 그래요. 그때는 아직은 조선이었죠. 그런데 그 시절 기억은 하나도 없어서요.”


“참 조선이 없어진 게 안타까워요. 우리가 항미원조 전쟁때 구해줬더니 50년도 안되서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니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저야 그 직후에 태어나서 비교를 할 위치가 아니죠.”


“그래도 어른들이 얘기하는 건 있을거 아닌가요?”


“계속 물어보신다면야. 어떤 분들은 마음껏 차타고 입을게 많아지고 먹을게 많아진 게 좋다고 하시더군요. 확실히 북조선 시절에야 고속도로는 고사하고 함흥과 평양을 잇는 도로조차 포장이 안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백두산과 개마고원도 차만 있으면 고속도로나 국도로 언제든지 갈 수 있거든요.”


“다른 얘기는 없나요?”


“일자리를 스스로 구해야 하고 해고가 될 수 있다는게 불만인 분들도 계시죠.”


“그거에요.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물건으로 생각한다니까요. 시장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도 시장은 다 있어요. 등소평 동지가 개혁 개방 초기에 그랬거든요.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고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고요.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같은게 아니에요. 차이점은 인민을 생각하느냐 아니냐는 거죠. 자본주의는 오직 일부 계층만 부를 독점하는 거고 사회주의는 궁극적으로 전 인민에게 부를 나눠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결국 승리하는 것이라고요.”


“뭐 저는 이런 이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지라. 그냥 저희가 원래 하는 것처럼 함북 도민들과 연변 동포 간 교류 확대에나 관심이 있어요.”


“그게 우리 공화국 정부에서 은혜를 베풀어주니까 가능한 거죠.”


무성의하게 답을 해주던 철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시 홀 안으로 들어오는 앨리스와 리정성의 모습이었다. 둘의 눈빛에서 철혁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앨리스는 철혁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깐 얘기 좀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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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첫 만남 (2) 23.02.19 28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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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6화. 시작 23.02.05 35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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