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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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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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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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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프롤로그

DUMMY

“하늘땅 모두 회명(晦暝)한 속에 백금 같은 달빛만이

백설로 오백 리, 월광으로 삼천 리,

두만강의 겨울밤은 춥고도 고요하더라.”


김동환, ‘국경의 밤’ (1925) 中


2022년 겨울. 대한민국 함경북도 온성시 남양동.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북중국) 국경검문소.


시린 북방의 겨울밤이 살을 파고들어왔다. 온몸이 뒤틀렸다. 뿜어져나오는 입김은 자신의 열기를 마지막으로 자랑해보겠다고 새하얗게 밤공기를 잠시 떠다니다가 이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저기 찔러대는 이 추위를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코트를 다시 한번 여미어보지만 소용없었다. 두만강의 밤은 그렇게 여인을 매섭게 휘감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을 감싸고 있는 건 칼바람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하늘이시여.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다시 이곳으로...”


칼바람이 불어대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적이 다른 두 도시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바로 온성(한국)과 도문(북중국)이다. 한만국경(韓滿國境) 최북단을 연결하는 다리는 총 3개가 있는데 하나는 차량용, 또 하나는 철교,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만 다닐수 있는 작은 인도교다.


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무실 형태의 대한민국측 검문소에서 출국심사를 받고 이 다리를 건너면 저 멀리 개선문 모양, 그러니까 꼭대기에 오성홍기가 걸려있고 개선문 윗부분은 주황색으로 짙게 페인트칠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는 국장과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팻말이 간체로 아주 크게 붙어있는 북중국 측 입국심사용 검문소가 자리잡고 있다.


마치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반항할 생각말고 오성홍기와 공산당 앞에 고분고분 복종하라는 듯 위압적인 생김새의 이 검문소. 백미터밖에 안되는 이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체제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건물이 잘 증언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문소 앞에는 초저녁에도 양 도시를 오가는 보따리 장사꾼들로 북적이고 있다.


앨리스 리, 아니 지금은 여권에 써져 있는 대한민국 국민 김명희로 행세해야 하는 이 중년 여인은 하필이면 바로 이 보따리꾼들 행렬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러는 바람에 앨리스는 1시간 넘게 동안 입국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덜 번잡한 회령이나 무산 검문소를 통해 북중국으로 건너가려 하면 입국에 걸리는 시간이 훨씬 줄었겠지만 그러면 오히려 공안이 철저하게 입국자들을 하나하나 스크리닝하기 쉬웠다. 엄격한 심사를 뚫고 북중국 입국에 성공한다 해도 문제였다.


몇 달 전 무산을 통해 인민해방군 병사 하나가 무장한 채 한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그 근방에 북중국 국경경비대가 쫙 깔려있어 언제 불심검문에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북중국에서 공안의 불심검문을 거부하는 순간 바로 체포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꼬인다. 차라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공법으로 수많은 인파 사이에 끼어들어 대도시로 침투하는게 주목을 덜 받는 일이었다.


“그 코트 아주 좋구만, 아즈마이(아줌마). 연길이던 온성이던 이 근방에선 구하긴 힘든데. 한국인인 것 같은데. 나진이나 청진에서 오셨나? 아니면 서울?”

“한국 맞소. 나진에서 왔어요.”

“그럴 줄 알았어. 같은 함경도 말을 쓴다 해도 옷차림만 보더라도 조선 아니. 미안하오. 아직도 한국보다 조선이란 말이 익숙해서. 한국 사람인지 우리 동포들인지 구분이 된다고.”

“거 아즈바이(아저씨)는 그러면 어디 사는거요? 도문(투먼)?”

“연길(옌지)이지. 가봤소?”

“나진 사는 사람이 거기 단 한번도 안가봤겠소? 옛날에 가봤지.”

“그럼 조양천 알겠네. 기장(공항) 있는데.”

“알기는 알지요. 요즘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많이 좋아졌어. 아빠트도 좋고. 방문할일 있으면 한번 와보고.”

“뭐 그러죠.”

“근데 아즈마이는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뭐랄까 차라리 연예인 하는 사람 같다고. 허허.”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당연하지. 아즈마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이대에서는 정말 미인이라고. 여튼 무슨 일로 이 밤중에 도문에 오려는거요?”

“여기 사는 중국인 친구와 만나서 저녁을 먹으려고요. 그 친구가 강을 건너는 것보다는 한국 사람인 제가 여기로 오는게 차라리 더 쉬워서요. 하루 자고 가야죠.”


영락없는 보따리상 차림인 중년 조선족 사내가 기나긴 기다림에 심심했는지 앨리스에게 말을 너무 많이 걸고 있었다. 앨리스는 이 수다쟁이의 질문 세례에 태연하게 맞받아치고 있었다.


나진 출신이란 건 거짓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앨리스는 함경북도건, 함경남도건 함경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연길에 가본 건 맞다. 엄밀히 말하면 그 이상이다.


사실은 앨리스의 고향이다. 그러니까 바로 저 사내와 같은 조선족이었다는 소리다. 한때는. 이제는 조선족도, 한국인도 아닌 저 멀리 수천킬로 떨어진 런던에 사는 영국인이지만.


“하긴 그렇지. 그런 사람이 워낙 많아서 말이지. 북조선이 있을때만 해도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 근데 아즈마이. 내가 한가지 조언을 하겠소. 한국 사람들이 도문이나 연길이 마치 한국과 같다고 생각하고 조심성 없게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과 여기는 완전히 다른 동네요. 길게는 말 안하겠소. 얼마전에도 한국인 하나 크게 곤란하게 된거 봤는데. 여튼 여기서 조심해서 행동하시오.”

“그러죠.”

“그리고 검문소 나오면 친구란 사람에게 반드시 데리러 오라고 연락하시오. 조금만 시간 지나도 아즈마이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위험해지니까.”

“어차피 가서 친구에게 전화 치, 아니 걸어야죠.”


순간적으로 앨리스는 모골이 송연했다. 그녀는 전화를 ‘건다’고 하지 않고 ‘친다’고 무심코 내뱉을 뻔했다. 전화를 친다는 말은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이 쓰는 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이 보따리 상인은 앨리스가 무슨 단어를 내뱉으려 했는지 못들은 듯했다. 지금 앨리스 앞에서 떠드는 이 자가 정말로 평범한 보따리 상인일까 아니면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앨리스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진짜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일반인이라고 한들 앨리스의 말에서 수상함을 느끼고 공안에 찔러넣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앨리스는 내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 곧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지름길일 수 있음을 이미 뼛속에 새겨놓고 있었다.


그것은 앨리스만이 아닌 저 보따리상, 그리고 이 검문소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일종의 생존성 트라우마이다. 그 트라우마 앞에서 그녀는 실상 평범한 중년 여성에 불과하다. 아무리 지난 몇 주 동안 훈련을 받았다 한들 말이다.


“이제 좀 줄이 빠지는구먼 아즈마이. 여튼 구경 잘하고 돌아가시오!”


조금씩 움직이면서 만담을 하는 동안 어느새 앨리스는 이 위압감을 자랑하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공항과 마찬가지로 일렬로 늘어서 있는 입국심사대에는 인민무경 제복을 입은 심사관들이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입국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천장에 붙어있는 파란색 바탕의 스크린 화면에 흰 글자로 공민(자국민), 외국인으로 각 섹터가 구분되어 있었다.


아까 전까지 말을 나누던 사내는 공민 줄인 옆줄로 빠지고 마침내 앨리스는 심사관 앞에 섰다. 이 젊은 남자는 여권을 유심히 보고 오른쪽에 놓인 컴퓨터로 무언가를 열심히 입력하고 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앨리스에게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하얀색 터치스크린이 앨리스 앞에 놓여있었다. 열손가락 지문을 등록하란 의미였다. 그녀는 지시대로 했다. 스캐닝이 끝난다. 심사관이 동북식 중국어 억양이 섞인 영어로 질문을 했다. 앨리스는 그 형편없는 영어가 정말 듣기 괴로워서 감히 지적하고 싶을 정도였다.


“방문은 이번이 처음?”

“예스.”

“방문 목적은?”

“여행.”


갑자기 심사관 옆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더니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중국말로 ‘네’, ‘네’만 연발하고 있었다. 앨리스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은 모든 물질을 탄소로 바꿔버릴 듯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


이 자리에서 바로 도망갈까?’, ‘공안이 나를 넘어뜨리면 어떻게 대응하지?’ 그녀의 뇌는 오만가지 생각과 대응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심사관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몇 초간 컴퓨터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리고 여권에 도장을 찍고 앨리스에게 건네줬다. 앨리스 오른쪽에 설치되어있던 출입대가 열렸다. 심사관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일단 이렇게 입국은 성공했다. 앨리스의 긴장감이 너무도 헛될 정도로.


그녀는 그렇게 36년만에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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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20화. 유혹 23.04.09 27 1 7쪽
35 19화. 심문 23.03.26 40 1 7쪽
34 18화. 체포 23.03.12 32 1 7쪽
33 17화. 첫 만남 (3) 23.02.26 36 1 7쪽
32 17화. 첫 만남 (2) 23.02.19 28 1 10쪽
31 17화. 첫 만남 (1) 23.02.12 31 1 9쪽
30 16화. 시작 23.02.05 35 1 8쪽
29 15화. 전조 23.01.29 45 1 7쪽
28 14화. 그림자 23.01.22 40 1 7쪽
27 13화. 시비 -2- 23.01.15 39 1 9쪽
26 13화. 시비 -1- 23.01.08 40 1 9쪽
25 12화. 망중한(忙中閑) 23.01.01 52 1 11쪽
24 11화. 의심 22.12.25 51 1 8쪽
23 10화. 가창조국 +2 22.12.18 57 1 10쪽
22 9화. 방사능 녹차 22.12.11 61 1 13쪽
21 8화. 계획 -3- 22.12.04 66 1 10쪽
20 8화. 계획 -2- 22.11.27 60 1 9쪽
19 8화. 계획 -1- 22.11.20 60 1 10쪽
18 7화. 탄식 -3- 22.11.13 64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9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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