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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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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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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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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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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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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화. 조우 -1-

DUMMY

내 옆을 지나가는 그 남자는 연령대가 어느 정도였나? 머리카락은 어떤 형태는? 탈모였나 풍성했나? 직모였나 아니면 곱슬이었나? 그가 입고 있던 옷 색깔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나 아니면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나? 그것보다 그 사람 외에 방금 내 주변에 몇 명이 지나가고 있었나? 성별은 무엇이고 어떤 옷을 입었나?


드보크(dubok)의 시대건 스마트폰의 시대건 첩보 세계의 원칙은 언제나 동일하다. 내 주변을 철저히 의심해라. 무심코 지나간 남자가 바로 내 미간에 총알을 박아넣을 수 있다. 어제 저녁에 먹은 로스트비프에 곁들인 그레이비소스가 기름기가 많았다고 불평하는 이 10년 지기 여성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홍차에 폴로늄을 탈 수도 있다. 눈과 귀, 코를 모두 열고 있되 입은 함부로 놀리면 안된다.


기관으로부터 몇 달 동안의 기본적인 스파이 교육을 받으면서 앨리스는 ‘러시아하우스’의 발리 블레어가 된 기분이었다. 핵기밀을 습득해야 하는 평범한 출판업자. 르카레의 그 소설도 읽어봤고 영화도 봤었지. 막 노년에 접어든 숀 코네리가 그렇게 멋있어보일 줄은 몰랐다. 길거리에서 제임스 폭스가 테니스 코치처럼 하나하나 코네리에게 스파이 세계의 기본 원칙을 알려주는 그 장면. 30년 뒤 앨리스 본인이 바로 그 씬의 당사자가 되자 그녀는 더 이상 웃으면서 그 장면을 떠올릴 수 없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뒤바뀐 끝에 마침내 발을 딛은 도문의 저녁 길거리는 영하 10도가 훨씬 넘는 살을 에는 날씨였지만 분명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러나 붐비는건 살덩어리들일 뿐 이네들의 눈초리는 70여 년동안 묵혀둔 불신과 공허로 가득차 있었다. 대자보가 거리를 휘날리던 시대에서 이제는 대형 TV 전광판의 시대로 바뀌었건만 공포의 향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앨리스는 자신이 알던 그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도문강공원(圖門江公園)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편 철혁이 탄 택시가 경원에서 출발해 북창평(北倉坪)을 거쳐 40여 분만에 도착한 곳은 종성군(鐘城郡)의 군립병원이었다. 산을 뒤로 한 병원 옆에는 종성추모공원이란 이름의 실내납골당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은 함경북도 도민들의 유해를 모아 안치한 도립 추모공원이었다. 안치된 이들은 대부분 무연고자들이었다.


철혁은 복도와 복도를 넘어 가야 할 곳으로 갔다. 오늘은 참배객들이 거의 없었다. 어떤 노파가 꽃을 들고 철혁 옆을 휙 지나가고 교복입은 소녀가 봉안당 앞에 서있던 게 전부였다. 철혁은 걸음을 멈춰섰다. 철혁의 부모가 모셔진 곳이었다. 고난의 행군때 죽은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그랬듯이 이 불쌍한 젊은 부부도 원래는 무산의 어느 야산에 가매장되어있었다.


철혁은 8살 때까지 태어난 무산의 보육원에서 생활하다 종성으로 옮겨졌다. 그에게는 종성이 사실상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억력 좋은 그에게 무산에서의 기억은 분명히 있긴 있었지만 좋은 추억은 대부분 이곳에서였다.


보육원장은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보육원생들 중에 가족들의 무덤이 확인되면 거리가 얼마나 되든 사비를 들여 유해를 종성으로 옮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최소한 이 애들이 부모친척들의 무덤을 찾아볼 수는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게 이 착한 원장의 생각이었다. 철혁의 부모가 살던 연사읍(延社邑) 주민들 중에 철혁을 입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덕분에 철혁은 운좋게도 무덤의 위치를 대강 기억하고 있었다.


원장이 철혁을 처음 납골당에 데려갔을 때 그는 이 곳이 어떤 곳인지, 자기가 왜 왔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울지도 감정이 솟구치지도 않았다. 무언가 감정이 솟구쳐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어린 김철혁의 머릿 속에는 그 어떤 느낌도 떠오르지 않았다. 추억이란게 아예 없었으니까.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태어나자마자 그들을 잃은 그에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문서의 증명사진으로만 생김새를 겨우 알 수 있는 그들은 철혁에게 있어서는 애초에 정이라는게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코 내팽개칠 수 없는 존재였다. 10여년 전이나 바로 오늘이나 그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렇게까지 왔어요.”


철혁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도, 부사관 임관 후 첫 휴가를 받았을 때, 그리고 전역했을 때와 똑같은 혼잣말이었다. 올때마다 그는 스스로 이 말이 가식이라 생각했다. 그냥 할 말도, 감정도 없어서 뱉는 첫마디였다.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명령이 내려왔어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어쩌면 이제 두 분을 직접 뵐지도...”


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부모에게 보내는 전상서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망할 처지에 대한 한탄인지 자기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다.


“올 수 있으면 다시 올게요.”


김철혁은 밖으로 나왔다. 추위 속에서 봉고차 하나가 길 앞을 달리고 털가죽 잠바에 우샨카를 쓴 노인 하나가 기침을 하며 길거리를 걸어가는 것 이외에 시내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하늘은 서서히 누래지고 있었다. 저 건너 두만강도 소리도 없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온성으로 갈 때라는 걸 깨달았다. 택시 호출앱을 켰다. 차는 금방 왔다.


“저저 종간나 새끼. 오물장에 내동댕이 쳐버릴까보다.”


다마스가 깜빡이도 안 켜고 갑자기 끼어들자 열받은 기사가 걸쭉한 함경도 사투리로 한마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이 연거푸 헛기침을 하던 이 60대 남자는 오른쪽 창가를 무심코 쳐다봤다가 ‘어허’ 하면서 혀를 찼다.


“또 한건 벌어졌구만.”


철혁은 창밖을 쳐다보았다. 국도 옆으로 난 농수로 주변으로 ‘과학수사대’가 붙어있는 로디우스 2대와 쏘나타 경찰차 몇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검은 헬멧에 하얀 작업복을 입은 감식 요원들이 농수로 아래에서 무언가 작업하고 있었다. 위로는 무언가가 흰 천으로 덮여 있었고 형사들은 그 주변에서 서로 쳐다보며 뭐라 하고 있었다.


“지난주에도 고령진역(高嶺鎭驛) 근처에서 저런 걸 봤어요. 젊은 여자였던 것 같은데.”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보나마나 중공 아새끼들이나 조선족들이 저지른 거 아니겠소?”


택시 기사가 다시 한마디 내뱉었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하하.”


철혁은 더 할말이 없어 그냥 웃기만 했다.


“거의 백프로일걸. 이 국경 지대에서 그놈들 저러는게 한둘이 아니오. 지들끼리 치고박다가 죽기도 하고 엄한 우리 사람들 건드리기도 하고. 아주 가관이야 가관. 몽땅 쫒아보내든가 아니면 강변에 전기 철조망 치든가 해야지.”


“네”


“김철삼이 말이오. 그 놈은 여기 국경지대 주민들 치안 불안해하는 거에는 전혀 관심 없어요. 백두산에 중공 관광객이란 놈들 유치한답시고 거기에나 혈안이 되어있지. 막말로 남중국 자본이면 몰라. 같이 자본주의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빨갱이 짓하는 애들 돈 받아쳐먹으려고 그래? 그 놈들 농간에 넘어간거 어디 한둘이야?”


“아, 도지사 말씀이시죠?”


“그래. 뭐 그놈 사상이 원래 그쪽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 아 그거 알아요?”


“뭐가요?”


“걔 원래 예전에 로동당 부역자 출신이잖아. 그때 사회안전성, 그니까 요즘으로 치면 내무부지. 거기서 우리 같은 주민들 감시하는 짓 했잖아. 최창익하고 허정숙이 밑에서 딴따버리 한거지. 나중에 로동당이 망하고 나서 돈 받아먹은 거 들통나서 처벌받은 적도 있을걸? 근데 무슨 집행유예로 유야무야 하더니만 어떻게 하다가 나진에서 시의원하더니만 시장까지 하고 도지사까지 됐잖아? 그런 놈을 어떻게 뽑아줘?”


“전과 있으면 선고 공보물에 다 나올 텐데요?”


“당연히 나오지. 근데 뽑아줬잖아.”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 심리를 이용해 먹은 거지. 다른 정치한다는 애들이 북남격차 해소하고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하나로 만들겠다 이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할 때 얘는 남조선, 아니 남한 애들이 우리 함북 도민들 먹을 거를 가져가고 있다. 내가 되찾아주겠다. 우리가 번 거는 우리가 쓰는게 당연하지 않겠냐. 이렇게 한거지. 그게 먹힌거야. 사실 나도 잠깐 혹한 적도 있었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혹하기 쉽죠.”


“그 손님은 그런데 고향이 어디요? 같은 함북이지?”


“네. 무산입니다. 떠난 지는 좀 오래됐지만요.”


“아 무산. 나에겐 정말 잊지 못할 동네요. 나는 원래 회령인데 젊었을 때는 거기 광산에서 일했거든.”


“그러셨군요.”


“진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철광석만 캐내고 겨우 숨줄만 붙이고 살았소. 동료 중에는 죽은 애들도 있고.”


“예전이면 고생 많으셨겠네요.”


“내가 로동당이 아니라 지금 이 대한민국 아래서 사는게 감사한건 그래도 일한 만큼 벌 수 있다는 거요. 무슨 얼어 죽을 사회주의 낙원. 돈은 돈대로 제대로 안주고 그렇다고 쉬게 해주지도 않아. 어떤 놈들이 어디 저기 동구라파 얘기 끌고 와서 사회주의는 그래도 휴식은 제대로 할 수 있었냐고 하지 않는데 무슨 개소리야. 그 시절에 우린 혹사는 혹사대로 당하고 말 그대로 착취당했다고 그게 무슨 사회주의 낙원이야. 그래서 남한 애들 거들먹거리는거 마음에 안들어도 멸공통일시켜준거는 정말 고맙게 여긴다고. 아직도 좀 젊은 놈들 중에 북조선 시절이 좋았니 하면서 헛소리 하는애들 그 시절로 돌아가면 그런 소리가 나올까? 손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요. 저는 그 시절 이후에 태어나서 거기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하하 뭐 그러면 할 수 없고. 그런데 종성에 뭔 볼일이 있었나 봐요?”


“네. 뭐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철혁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하자 기사는 금방 흥미를 잃어버린 듯 침묵했다. 그러는 사이 차는 어느새 온성 시내로 들어섰다. 남양역(南陽驛) 앞에서 기사는 차를 세웠다.


“자 25,000원입니다. 자동 결제니까 그냥 내리시고.”


“감사합니다.”


역 광장 앞은 택시가 줄지어져 있었고, 코레일 사무소 건물은 좌우 측면에 뭔가 어울리지 않게 ‘KTX를 타고 최남단 해남까지!’라는 문구와 함께 바다 위를 달리는 KTX 열차 사진이 붙어있는 전광판이 떡하니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다.


CU 편의점의 처녀들은 유리벽 안 가판대에 앉아서 마요네즈 섞인 참치 삼각김밥과 누런색 도리토스를 씹고 광장을 걷고 있는 행인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편의점 옆으로는 명태매운탕, 영채김치같은 함북 요리 말고도 웬 뜬금없이 400킬로나 떨어진 남쪽 함흥식, 그러니까 사골 고은 허연 국물에 선홍색의 새뽀얀 선지 덩어리 몇 개와 구멍 숭숭 뚫린 두부 몇 개, 채 썰은 우둔살을 얹었다는 그 가리 국밥을 전문으로 한다는 단층의 식당 몇 군데가 있었다.


바로 그 옆에는 새로 출시되었다고 소고기 패티 위에 얹힌 트러플 향을 넣은 일반 버섯과 베이컨 사이에 회갈색 소스가 줄줄 흐르는 햄버거 사진을 유리창 전면에 딱 부착한 버거킹 가게이고 정면으로는 4차선짜리 차량 통행 전용 다리와 행인용 다리가 나란히 붙어 강 건너 중화인민공화국 세관으로 갈 수 있었다. 여기가 바로 국경도시 온성의 모습이었다.


철혁은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냈다. 그리고 인파에 섞여 강변 다리로 나아갔다.


작가의말

드보크: 비밀리에 특정 장소에 묻어둔 무인함. 무기, 지령문, 공작금 등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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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1화. 의심 22.12.25 51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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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7화. 탄식 -3- 22.11.13 64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9 1 13쪽
16 7화. 탄식 -1- 22.10.30 65 1 12쪽
15 6화. 연길 가는 길 22.10.23 66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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