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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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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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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글자수 :
159,433

작성
22.10.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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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5화. 조우 -2-

DUMMY

앨리스는 두만강 앞 관광지구에 나와 있었다. 있을 거는 다 있었다. 유리 커튼으로 둘러싸인 한국식 카페는 사회주의로 나라의 빗장을 꽁꽁 잠그려 해도 관광객들의 돈은 받고 싶다는 듯이 이 밤중에도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선착장에 정박해있는 ‘도문강관광부두’는 배 양 끝을 한국식 누각으로 장식했건만 전혀 한국스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자본주의적 건축 양식의 카페와는 대조적으로 관광지구 여기저기에는 마치 거대함을 과시하려는 듯이 이곳 저곳이 회색 콘크리트 선전물로 덮여 있었다. 화룡점정이라, 거대한 모택동의 흉상은 이 영토가 누구의 발 아래 있는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확실히 각인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 괴기스런 풍광은 영하의 저녁 날씨와 단단히 결합되어 보는 이들이 느끼는 추위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작은 강변을 사이에 둔 독특한 풍경을 구경하겠다고 양쪽에서 건너온 관광객들로 이곳은 북적이고 있기에 생명력이 조금이나마 꿈틀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강변 앞 난간에 기댔다. 추위는 익숙했건만 근처를 지나가는 인민무경(人民武警)부터 옆에서 얼어 죽겠다고 재잘대는 한국인 관광객, 고구마 냄새부터 코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바람까지 모든 것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불과 30여분 만에 그녀의 한 구석에서는 20살까지 자신의 생애를 바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아련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강은 살얼음과 얼음장이 섞여 흘러가고 있었고 건너편 온성은 네온사인과 아파트 불빛이 섞여 산과 평야를 수놓고 있었다. 여태껏 한국을 찾아올 때마다 온성에서 바라본 두만강, 그리고 거꾸로 자신이 태어난 이곳에서 두만강과 저 건너편 한국을 바라보는 마음은 묘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동장군이 영하 20도의 청룡언월도로 그녀의 온몸을 마구 베어내고 있었지만 그렇게 베일수록 알 수 없는 애수는 이 상처 속에서 새로운 살이 돋아나게 하는 듯 했다.


그녀 옆에는 국경지대임을 알리는 기념판이 세워져 있었다. 기념판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도문변경(中华人民共和国 图们边境)’이 (북)중국어와 한글로 적혀있었고 그 밑에는 오성홍기와 태극기가 붙어있었다. 그 근처에 바로 붙은 경고문은 조선어와 간체, 영어로 붙어있었다.


1. 불법 월경을 엄금한다.

2. 두만강 수역에서 놀지 못한다. 밀수, 마약매매, 고기잡이 등 변경 질서와 안전을 파괴하는 행위를 엄금한다.

3. 한국쪽에 대고 말을 걸거나 촬영하지 못한다.


앨리스는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한국에서는 안내문이 거의 대부분 존댓말로 되어있었지만 이곳은 언제나 명령조였다. 공화국은 언제나 인민들에게 부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당이 지시를 하면 이 5억의 ‘동등한’ 공화국의 구성원들은 항상 따라야했다. 역시 여기다웠다.


공원에 세워진 대형 TV 전광판에는 마침 신문연파(新闻联播)가 송출되고 있었다. 이 뉴스 프로그램의 오프닝 시그널은 그녀가 이 나라를 떠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항상 뉴스 첫 꼭지에 주석 ‘동지’의 동정이 먼저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고속철도가 탈선해 수백명이 죽는 사고가 난들 희생자들의 한낱 파리같은 목숨은 주석 동지가 참나무 책상에 앉아 근엄한 목소리로 사회주의 수호에 용왕매진해야 한다고 한마디 내뱉고 녹차 한잔 쭈욱 들이키는 것에 비하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영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었고 앵커는 인민복에서 양복으로 복장을 갈아치웠지만 이 앵무새들이 내뱉는 레퍼토리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녀 뒤의 카페 스피커에서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똑같은 멜로디가 변주되면서 점점 고조되다가 절정으로 터지는 그 음악. 이런 곳에서 이 음악이 나오는건 정말로 의외였다. 앨리스는 32년 전 파리에서 본 베자르(Béjart) 발레단의 공연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 같은 연길 출신의 남자 후배가 주연이었지. 서구 무용계에 충격을 줬다는 그 애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 혜성같이 떠오른 그도 역시 앨리스처럼 어린 나이에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존재였다. 둘 다 자신들의 사고 방식과 정체성을 당이 함부로 결정하려는 것에,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반동이라는 이름 아래 싹을 밟아버리는 것에 깊은 증오를 지니고 있었다. 일가친척 없는 타향에서 둘은 서로 의지했다.


한때 사랑의 감정까지 느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동생은 여성에게 연애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 반대였지. 그래서 앨리스와 그는 영혼의 친구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 어린 천재 발레리노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은 그를 너무 일찍 지고 만 전설로 기억하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는 단순한 전설이 아닌 아련한 추억인 것이었다. 추억에 잠시 잠기면서 앨리스는 옅은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 미소에는 기쁨과 슬픔, 애틋함과 회한, 희망 그리고 절망이 섞여 있었다.


철혁은 강변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 망할 추위는 견딜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유쾌한 요소는 아니었다. 국경을 넘기까지 그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올 수 있었지만 이 여자를 찾는 게 쉽지가 않았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공원 카페건 광장이건 강변 난간이건 간에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중국어, 한국어가 마구 뒤섞여서 고막을 찌르고 있었다. 다들 잠바 모자를 쓰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거기에다 이 반복되는 클래식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짜증나게 만든다.


그때 그는 귀도리를 하고 있던 한 여성이 난간에 서서 강 건너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았다. 찾았다. 사진 그대로였다. 철혁은 그녀 옆으로 다가가 똑같이 난간에 서서 강변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이 내뱉었다.


“두만강을 보니 뱃사공이 노를 젓고 있더군요.”


여자는 그 말을 듣고 바로 응수했다.


“흘러간 그 옛날에 말이죠?”


철혁은 다시 말을 꺼냈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읊는 풍경에 대한 감상과 같았다.


“강 언덕에는 단풍이 물들고 있고요.”


이 중년의 여인은 다시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눈물진 두만강에는 밤새도 울고 있지요.”


철혁은 그녀를 쳐다봤다. 앨리스 리도 역시 이 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신원확인을 할 때 어떤 때는 이런 구식 방법이 가장 정확하기 마련이었다.


“김철혁입니다. 일단 최민호라 부르시죠.”


“리경옥입니다. 지금은 우선 김명희라 합시다.”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군요.”


“그래요? 그쪽은 아주 어려 보이시는데요.”


철혁은 생각했던 것보다 이 여인의 한국어 어휘나 억양이 아주 정확한 것에 살짝 놀랐다.


“뭐 그쪽보다 훨씬 어린 건 맞긴 맞죠.”


“이제 막 20대 중반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제 아들 뻘이시네요.”


“춥지 않으신가요?”


“뭐 이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워낙 익숙해서. 제시간에 오시긴 했군요.”


“저도 별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하루 종일 서있는 게 유쾌한 건 아니죠.”


“일단은 호텔로 가면서 얘기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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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21화. 책임 회피 23.04.30 27 1 7쪽
36 20화. 유혹 23.04.09 27 1 7쪽
35 19화. 심문 23.03.26 41 1 7쪽
34 18화. 체포 23.03.12 32 1 7쪽
33 17화. 첫 만남 (3) 23.02.26 36 1 7쪽
32 17화. 첫 만남 (2) 23.02.19 28 1 10쪽
31 17화. 첫 만남 (1) 23.02.12 31 1 9쪽
30 16화. 시작 23.02.05 35 1 8쪽
29 15화. 전조 23.01.29 46 1 7쪽
28 14화. 그림자 23.01.22 40 1 7쪽
27 13화. 시비 -2- 23.01.15 39 1 9쪽
26 13화. 시비 -1- 23.01.08 40 1 9쪽
25 12화. 망중한(忙中閑) 23.01.01 52 1 11쪽
24 11화. 의심 22.12.25 51 1 8쪽
23 10화. 가창조국 +2 22.12.18 57 1 10쪽
22 9화. 방사능 녹차 22.12.11 61 1 13쪽
21 8화. 계획 -3- 22.12.04 66 1 10쪽
20 8화. 계획 -2- 22.11.27 60 1 9쪽
19 8화. 계획 -1- 22.11.20 60 1 10쪽
18 7화. 탄식 -3- 22.11.13 64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9 1 13쪽
16 7화. 탄식 -1- 22.10.30 65 1 12쪽
15 6화. 연길 가는 길 22.10.23 66 1 19쪽
14 5화. 조우 -3- 22.10.16 65 1 14쪽
» 5화. 조우 -2- 22.10.10 65 1 8쪽
12 5화. 조우 -1- 22.10.09 6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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