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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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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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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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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7화. 탄식 -3-

DUMMY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에 우리는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다. 음력 삼월 초순 아직, 물속은 얼음같이 저렸다. 물을 건넌 후 내리 십 리 길을 산속을 헤매고 밭두렁과 오솔길을 걸어 동두천에 다다랐을 때는 물속에서 젖었던 옷이 오한과 더불어 체온으로 반이나 말라가고 있었다. 물속에서 날카로운 돌에 베인 내 다리와 발뒤꿈치에는 선혈이 흐른 자국이 새빨간 줄을 긋고 있었다.


임옥인, ‘월남전후’ (1956) 中


장경수가 자리를 비우자 앨리스는 다시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30여년 전 그 날은 맑은 날씨였다. 그녀는 막 북경에서 청도로 돌아온 터였다.


몇 주 전만 해도 강의실에서 서로 웃고 떠들던 동료 학생들은 이미 한때 살아있는 몸이었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부서진 채 광장에 널려있었다. 지옥으로 굴러떨어져야 할 자들은 심판자가 되어 학생과 인민을 사냥하고 다녔다. 경옥도 이 사냥놀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유혈극이 벌어지기 한참 전에 그곳을 떠났다는 사실이 면죄부를 주진 않았다. 사건이 정리될 무렵 그녀는 북경 시내의 어떤 조사실로 불려갔다. 오장육부를 면도칼로 후비는 듯한 취조가 이어졌다. 4일 새벽 1시에 정양문(正阳门) 근처에서 전차병을 끌어낸 그 놈과 같은 강의 들었지? 정확히 무슨 관계냐, 그동안 어떤 대화를 나누었느냐, 너는 당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질문 뒤에는 무조건 구타와 손찌검이 있었다. 답이 공안에 마음에 드는지 여부는 전혀 상관없었다. 오직 당의 힘을 가녀린 여자에게 자랑하기 위할 뿐. 직접적으로 사건에 연루되어있지 않다는 게 증명되고 나서야 그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오직 망가진 몸과 정신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청도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녀가 시위 주동자 중 한 명과 밥을 같이 먹는 친구 관계라는 걸 숨겼다는 이유였다. 그나마 아버지가 나서서 시(市) 부서기한테 통사정을 한 게 통했다. 출석하기까지 사흘 간의 준비 기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당에게 있어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힌 그녀가 또다시 끌려가면 과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경옥과 가족은 그 결말을 대강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날 오후 그녀는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날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옥에게 지금 혼자라도 바로 떠나야 한다고 강권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황색 잡종견은 그들의 마음은 내 알바 아니라는 듯 옆에서 무심하게 짖어대고 있었다.


“아버지. 내가 왜 혼자 가야 합니까? 아직 이틀이나 남았어요. 좀만 준비해서 같이 내려가면 안됩니까? 오빠도 그렇고....”


“같이 가면 사람이 너무 많다. 공안한테 적발되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이미 넌 조사를 받았는데 이번에 또 가면 진짜로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너가 간 거를 전혀 모른다고 할터이니 빨리 가라. 나와 니 엄마, 다른 식구들은 변명거리를 찾든지, 아니면 다른 날짜를 찾든지 해서 방법을 찾아보겠다.”


“그래도...”


“경옥아. 너라도 반드시 새 세상에서 뜻을 펼쳐야 한다. 너는 아직 어리고 할 일이 많단다. 어서 가라. 여기서도 물론이고 남쪽에 무사히 도착해도 몇 달 간은 절대 연락하려 들지 마라. 다 죽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렇게 길을 나섰다. 걸어가면서 계속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돌아보지 말라는 듯 계속 손을 휘저었다. 경옥은 이 문드러진 마음을 다잡고 결심을 할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굳어진 시멘트처럼.


청도역까지는 인파에 묻혀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열차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일조(日照)까지 달렸다. 일조에 도착하자 근처 가게에서 절단기를 샀다. 안동위(安东卫)까지는 택시 기사에게 남은 돈을 모두 주고 달리게 했다. 그녀는 이곳에 잠시 머무른다든가 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이 바로 남쪽으로 가는 날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경옥은 이곳을 찾았었다. 매년 애국심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당국은 신입생들을 전방으로 보내 단기 군사훈련을 시켰다. 자본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한다는 위대한 인민해방군이 어떻게 최전방에서 오늘도 고생을 하는지 그들은 알아야 했다.


그녀가 올 봄에 방문했던 이 곳은 크게 바뀐 곳이 없었다. 길을 건너고 개울을 건너자 먼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폐가에 숨어들었다. 조용해지자 다시 나왔다. 수수밭을 걸어가자 손전등을 들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정찰 부대였다. 엎드렸다. 온갖 벌레가 몸을 물어뜯어도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눈을 피해 철조망 앞에 이르렀다. 전기 철조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낙엽 소리인지 사람이 걷는 소리인지 모를 투닥투닥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때 오른쪽을 바라보자 개구멍이 보였다. 작은 여자 한명이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갈대밭이었다. 그리고 앞은 강이었다.


경옥은 쭈그린 채, 그러나 계속 달렸다. 지뢰가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잡히면 죽는 것보다 못한다. 탈출에 성공하든가, 아니면 몸이 산산조각나 짐승의 먹이로 뱃속에 들어가든지, 혹은 물에 빠져 이름도 없는 썩어가는 살덩이로 수침하(绣针河)를 떠돌다가 황해 바다 아래로 가라앉든가 셋 중 하나뿐이었다.


한참 헤엄치다보니 사이렌이 울렸다. 뒤쪽에서 고함치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서치라이트가 바로 그녀 옆을 지나갔다. 총탄이 날아오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팔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에 뭔가 질척거렸다. 가슴에 뭔가 부드러운 것이 부딪히는 것도 느껴졌다. 진흙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물이 아닌 바람의 감촉만이 느껴졌다. 육지였다. 총탄 소리는 멈춰있었다. 바로 앞에는 철조망이 역시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공기는 달랐다. 온 몸이 젖은 경옥이 두리번거리다 보인 것은 불빛으로 가득 찬 초소였다. 그리고 그 초소는 그녀에게 익숙하던 오성홍기가 아닌 완벽한 빨간 바탕에 좌상단 한구석에는 파란색 바탕의 직사각형이, 그리고 그 안에는 새하얀 태양이 수놓여진 깃발이 있었다. 청천백일만지홍기(青天白日滿地紅旗)였다. 갑자기 그녀에게 정통으로 서치라이트가 비쳤다. 경옥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확성기로 우렁찬 만다린, 그러나 북경과는 확실히 억양이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항 의도가 있으면 양손을 높이 들고 초소 앞으로 걸어오시오!”


그렇게 당이 증오를 불어넣던 저 자본주의의 무리로 달려들어갔을 때, 그리고 내려온 초병들이 담요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경옥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진흙과 모래가 얼굴에 완전히 뒤덮인 채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기쁨과 슬픔, 안도감과 비참함, 기대감과 두려움, 구원자를 만난 반가움과 가족들과의 이별에 대한 서러움이 모조리 섞여 온 몸을 뒤덮었다. 그녀는 웃고 싶었고 또 오열하고 싶었다.


“안심하세요, 아가씨. 우리는 중화민국 국군입니다.”


초병들은 경옥을 부축했다. 그녀 주변으로 완전 무장한 장병들이 둘러쌓여있었다. 그녀는 어느 막사 안으로 인도되었다. 탁자와 의자, 사무 용품들이 놓여있었다. 탁자에는 계란과 돼지고기가 담긴 죽 그리고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전투복을 입은 채 그녀 앞에 앉은 중년 사내는 자신을 방첩 장교라 소개했다. 질문에 사실대로 답하되 혹시 자신의 말투나 질문이 불쾌하면 언제든지 말하라, 시정하겠다고 친절히 말을 건낼 때 그녀는 그동안 익숙했던 무력 집단의 행태와 너무나 달라 당황스러웠다. 그런 당황스러움은 또다시 일어났다. 막 질문을 하려 할 때 같은 고향 사람인지 그 옆에 서 있던 하급 장교에게 웃으면서 말을 할 때 경옥은 순간 이게 대체 중국어가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잠시 생각을 해보니 그것은 광동어였다. 말로만 듣던 남방 출신을 생애 처음으로 조우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윽고 사내는 다시 완벽한 만다린으로 조사를 이어나갔다.


“성명은?”


“리경옥.”


“민족?”


“조선족.”


“현 거주지는?”


“산동성 청도시 시북구 정주로 2”


“출생지는 어디죠?”


“길림성 연길시 문화촌....”


“조선족이면 본적을 알고 있나요?”


“조선 함경북도 회령시...”


“직업은?”


“대학생”


“어느 대학이죠?”


“북경대학.”


“흠...”


방첩 요원의 질문 세례는 이어졌다. 가족 관계는? 왜 월남했는가? 이번 6월에 북경에서 일어난 사태와 관련이 있는가? 등등 조사는 몇 시간 동안 이뤄졌다.


그 다음 벌어진 일들은 주마등과도 같았다. NSB 요원이 나들이 명목으로 구경시켜준 남경의 국립고궁박물원과 중정기념당 그리고 상해 동방명주와의 첫 조우.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간 북경자유대학에서 북경대와 똑같은 레플리카 건물들을 봤을 때의 그 이질감과 반가움. 영국 비자가 나왔을 때의 그 기쁨. 경흥에서 만난 브로커로부터 가족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을 때의 실망감. 그토록 출판을 거절당하던 희곡이 노팅힐 북샵의 전시대 한쪽에 걸려있는 걸 보았을 때 흘리던 눈물. 금발이 매력적이던 연인과의 오랜 연애가 파국으로 끝나버렸을때의 그 씁쓸함.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처음으로 BBC에 방영됐을 때 그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을때의 그 희열. 모든 것은 그렇게 지나왔다.


장성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라. 아버지의 원대로 30년이 지나 그녀는 저 지구 반대편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직업적으로 성공했다. 만인들의 존경을 얻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은 영어권에서 언제나 화제였고 그녀가 각본을 쓴 드라마는 영국뿐만 아닌 전세계로 수출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혹자는 그녀의 필력과 상상력, 사실성이 닥터후같은 SF 드라마나 팅커테일러솔저스파이같은 첩보 드라마를 능가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성공을 거두었든 그녀는 혼자다. 고향과, 가족과 영원히 이별한 외로운 실향민이다. 연단에서 박수 갈채를 받을 때도, BBC 스튜디오에서 드라마를 촬영하며 배우들과 티타임을 가지며 웃을때도, 런던의 중국계 교민들과 수다를 떨때도 그녀의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쓸쓸함이 있었다.


장경수가 다시 차를 가져왔다. 이 순간들은 언제나 머릿 속을 휘감았다 깨져버리는 것이 운명이다. 또다시 그녀는 씁쓸한 추억에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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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18화. 체포 23.03.12 31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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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17화. 첫 만남 (2) 23.02.19 27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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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5화. 전조 23.01.29 45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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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9화. 방사능 녹차 22.12.11 61 1 13쪽
21 8화. 계획 -3- 22.12.04 65 1 10쪽
20 8화. 계획 -2- 22.11.27 59 1 9쪽
19 8화. 계획 -1- 22.11.20 59 1 10쪽
» 7화. 탄식 -3- 22.11.13 64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8 1 13쪽
16 7화. 탄식 -1- 22.10.30 6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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