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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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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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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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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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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6화. 연길 가는 길

DUMMY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김기림, ‘길’ (1936) 中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앨리스는 다시 눈을 떴다. 아직 하늘은 검푸른 어둠 속에 잠겨있었으나 저 멀리 노란색 빛이 스멀스멀 콘크리트 건물들을 뚫고 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진짜로 깨어나야 할 때라는 걸 느꼈다.


“일어났어요?”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철혁이 막 눈을 뜬 앨리스를 보고 말을 건넸다. 그는 막 샤워를 마친 듯 흰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는지 그의 하얀 티셔츠 역시 곳곳이 살짝 젖어있었고 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몸은 탄탄하게 균형 잡힌 근육질이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몸매가 아닌 젊은 무인의 훈련을 통해 단련된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 이 중년 여자는 그녀가 아직 싱그러웠던 시절 연인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약간의, 그러나 반드시 가라앉혀야 하는 흥분을 느꼈다. 그녀는 이윽고 고개만 까딱하고 종이를 태워 남긴 재를 하늘로 날려보내듯이 잠시 오른 욕망을 흘려보냈다.


반대로 남자는 폐경기에 막 접어든 저 여성이 그 나이 답지 않게 굉장히 젊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자가 진짜로 50이 넘은 여자인가. 차라리 30대 후반이라고 보는게 맞았다. 그녀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하기야 유명 연예인들 중에 반백살이 넘었어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미를 가진 여성들이 많지 않은가. 김 누구라든가 오 누구라든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도 딱 그런 느낌 아닌가. 그러나 그가 느끼는 감정은 거기서 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감정이라기보다는 앨리스의 미모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지금 몇시인가요?”


“이제 7시에요.”


“그렇군요. 우리가 11시까지는 가야하죠?”


“네. 아직은 시간 많아요. 어차피 차로 가면 연길까지는 50분이면 되요.”


“일단 아침은 먹어야죠. 같이 갈까요? 금방 씻을게요.”


나무 벽으로 치장된 식당은 꽉 차진 않았어도 벌써 사람들이 꽤 있었다. 벽 구석으로 음식들이 스테인리스 그릇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김치, 진미채볶음, 콩 볶음, 잡곡밥, 된장국 같은 한국 요리부터 시작해서 콩물, 만터우, 두부같이 이곳에선 응당 있어야 할 중국 요리에 계란, 햄, 빵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편하게 먹자고요. 부자연스러우면 오히려 눈에 띌 테니.”


철혁이 앨리스의 표정이 뭔가 불안해보였던지 살짝 귀띔했다.


“난 전혀 긴장하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배가 너무 고프다고요.”


앨리스는 한마디하고 바로 그릇을 집었다. 그녀는 집게를 집자마자 김치부터 접시에 담았다. 철혁은 만터우를 집었다. 제각기 원하는 음식을 담고 나서 둘은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음식은 어떤 것 같으세요?”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렇게 맛있지는 않네요. 아무리 고장의 맛이라지만. 연길에 가면 또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영국에서도 한국 음식 자주 드셨어요? 아니면 중국 요리를?”


“당신은 런던에 가본 적 없죠?”


“유럽을 애초에 여행해본 적이 없어요. TV나 유튜브로만 봤지.”


“런던에 널린 게 한국과 중국 음식점이에요. 피커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라고 들어봤죠? 영국 드라마 보신다니까 셜록 알겠죠. 그 오프닝에 나오는 동네 말이에요.”


“아, 그 광고 판으로 덮여있는 곳 말이죠?”


“그래요. 거기 말이에요. 바로 거기 근처에도 한국 요리집이 있어요. 거기만 아니라 시내 중심가 곳곳에 다 있어요. 중국 음식점은 훨씬 많고. 화교들은 물론이고 한국 사람들이 거기에 많이 살아요. 뭐 거기에 오래 사니까 대체로 풀 브렉퍼스트라고 영국식으로 자주 먹긴 하지만 그래도 내 피는 속일 수가 없죠. 종종 갔어요. 가끔 한국에 올 일이 있을때는 당연히 한국식으로 먹었고.”


바로 옆 테이블에는 80은 넘어보이는 노인 2~3명이 앉아있었다. 인생의 황혼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함경도 억양은 그 우렁참을 더해줬다.


“그러니까 장관에 그 놈을 앉히면 안됐다니까?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장관직을 주면 어떡해? 진짜 그 쪽에 경험이 있는 사람을 앉혀야지 말이야. 그러니까 이 사단이 났지.”


“아니 장관 중에 교수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그리고 경험도 경험이지만 생각이 올바른게 더 중요하지.”


“그럼 걔가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얘긴가 자네?”


“그럼 아니야?”


“그 놈은 빨갱인데?”


“또또 그 소리. 그럼 나도 빨갱이란 말인가? 이 친구 남쪽에서 너무 오래 살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건가? 친구보다 사상이 더 중요해?”


“아니 내가 언제 자네더러 빨갱이라 했어? 왜 갑자기 이렇게 오해를 해 이런 이런. 아니 또 안경에 김이 서렸네. 어이쿠!”


노인이 안경을 닦으려다 실수로 닦개를 떨어트렸다. 앨리스는 바로 주워서 그에게 건넸다.


“젊은 아가씨. 고마워요.”


“아닙니다 하하.”


“남녀 둘이 여기 놀러온거요? 연인 사이는 아닌 것 같고. 가족인가?”


“아유. 저흰 직장 동료 관계에요. 출장 때문에 같이 왔죠.”


“아 그래요? 그런 것 같았어. 나이를 보아하니 모자 관계도 아닌 것 같았지.”


“어르신들은 여기 놀러오신건가요?”


“그렇지. 효도 관광이요. 연길 갔다가 용정까지 가는 일정이요. 그쪽은 어디로 가는거요?”


“저도 연길 갑니다.”


“그런데 거 아가씨는 고향이 어디요?”


“네. 회령입니다.”


“그렇구만. 난 부령이요. 쌍포라고 바다 접한 곳인데. 들어보셨소?”


“이름만 들어봤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꼭 가봐요. 옛날에는 진짜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제는 많이 개발됐어.”


“거기서 쭉 사셨나요?”


“아니. 돌아온건 이제 20여년밖에 안됐어요.”


“이제 그 얘기 하려는 모양이구만.”


옆에서 친구로 보이는 또 다른 노인이 그럴줄 알았다는 어투로 끼어들었다.


“내가 올해 아흔 하나요 아흔 하나. 난 50년간 남한에서 살았어요. 46년에 누님 찾아 단신으로 월남했거든. 반세기만에 고향으로 돌아온거지. 파릇파릇한 소년이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이 되어서야 고향 흙을 밟은 거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6.25 사변 벌어져서 참전하고 돈벌고 자식들 키우고 또 통일 되니까 북에 남은 가족들 만난건 좋았는데 또 그사람들까지 늘그막에 내가 먹여살렸어야지. 그래도 우리 함경도 사람들 강하잖아? 굳센 마음으로 이 평지풍파를 다 버텨낸거지.”


“이 사람아. 반세기나 서울에 살았었으면 남조선 사람이지. 어찌 함경도 사람이 되는 거야? 낄낄.”


술에 취한 옆의 그 노인이 낄낄댔다.


“에이 시끄러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술맛 떨어지게. 미안해요. 이 친구는 원래 내가 월남할 적에 고향 친구였어. 전쟁 났을 때 쟤는 인민군이었고 나는 국군이었지. 난 죽은 줄 알았어. 그 말야 이북에서 사람들 엄청 굶어죽었다는 뉴스 보고 난 가족들도 죽었을 거라고 체념했으니까 말이오. 97년에 부령으로 돌아오고 혹시나 해서 찾아봤어. 아, 그런데 이렇게 살아있더라니까. 지금도 가끔 저런 헛소리 하잖아.”


“자네가 고생했다 해도 고향에 남은 우리들 만했겠어? 자넨 그래도 남쪽에서 큰 기업 간부로 은퇴하고 돈도 많이 벌었잖아. 자식들도 손자도 다 성공했고. 우린 말이야. 저놈의 협동농장에 매여서 평생 땅이나 파고 살았다고. 나도 어디 함흥이나 청진으로 가서 입당을 해서 간부를 하든 뭐하든 성공하고 싶었는데 아 씨팔 가족 중에 월남자가 있다고 아무런 기회도 안 줬잖아. 그렇게 해가지고 40여년을 허송세월했지.”


“아 어르신도 집안에 월남자가 계셨군요?”


“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둘째 형님이 전쟁 때 월남하셨어요. 그때 청진에 계셨는데 국방군이 거기까지 들어왔잖아. 그때 내려간 거라고. 고향에 남아있던 우리는 전혀 몰랐지. 그냥 죽은 줄 알았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됐더라고. 그러니까 순식간에 우리가 동요계층이 된거야. 솔직히 처음에는 원망도 많이 했어.”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그런데 또 웃기는게 뭔지 알아요? 형님 덕분에 또 우리가 나중에 그나마 좀 허리펴고 살게 됐다고. 50년만에 알고 보니까 그 양반이 나중에 미국으로 이민 갔거든. 뉴요크로. 세탁소 했다가 나중에 식료품 사업으로 엄청 돈 많이 벌었다고. 거기 사는 조선 사람 아무나 대고 형님 이름 대면 다 알걸? 나중에 통일되고 우리와 다시 상봉하고 나서는 가족들한테 경제적으로 재원을 많이 줬다고. 가족들 고생시킨 죄를 씻어야 한다면서. 집도 다시 지어주고. 직업도 구해주고 다 해줬어. 이러니까 원망을 하기도 그래.”


“이 친구 형님하고 나하고 잘 알았지. 휴전 직후 그 해 겨울이었지. 어느 날인가 서울에 남대문 시장통을 돌아다니다가 아 어디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거야. 이 친군줄 알았는데 형님이었어. 아유 깜짝 놀라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으니까 얘기를 한거야. 청진에서 국군 따라서 내려왔다고. 그 양반 처음에 남한에 와서 의지할 수 있는 고향 사람이 나밖에 없었어. 나도 없는 살림에 밥도 주고 일자리도 어떻게 좀 알아봐주고 했다고. 그래 71년이었나 나중에 또 어떻게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말린 적도 있었어. 이제 이 타향에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성공할지 장담도 못하는 미국으로 가서 뭘 어떻게 하겠냐고 말야. 그런데 성공했잖아.”


“전쟁도 겪으시고. 그래도 다 이렇게까지 오신게 다행이죠.”


“아, 전쟁은 잊을 수 없지요. 난 7사단에 있었소. 지금 어디냐 그 덕천으로 옮긴 그 부대 말이요. 평남 덕천. 난 낙동강 전투에도 참가했고 그해 10월에 평양 수복하고 얼마 뒤에는 청천강까지도 가봤어요. 중공군 밀고 들어왔을 때 피눈물 흘리면서 도로 내려왔잖아. 그러다가 재북진해서 개성 찍고 사리원 찍고 평양에 1년만에 또다시 입성했는데 아 이거 염병할 3~4달만에 또 다시 중공군한테 밀려났잖아. 글쎄 두번이나 평양을 잃었다니까. 두 번 말이야. 그 뒤에 뭐 피의 능선, 양덕 고지에서 밀고 밀리다가 휴전 맞았어. 밴플리트가 어떻게든 39도선에서 더더욱 밀고 우리 고향까지 올라갔어야 했어. 그랬으면 40년간이나 허송세월할 필요가 없었잖아. 이제 다 옛날 얘기지만.”


“50년만에 만나서 이 친구와 회포 풀다가 알게 되었지만 나도 그 양덕에 있었잖아. 52년 9월 그때.”


“그랬지. 이 친구와 나는 서로 총부리를 들이댄 셈이요. 통일된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모를 얘기들이요.”


“그래도 통일은 됐으니 다행이네요.”


“허무했다니까. 솔직히 다 포기하고 있었거든. 한 3~40년은 더 갈줄 알고. 96년도에 내가 65세였어요. 막 퇴직 할 때였는데. 갑자기 소식이 들려오는거야. 우리도 폴란드처럼 될줄이야. 그래 반세기만에 고향을 가봤는데 부모님이야 돌아가신지 오래됐고 남은 형제 자매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고. 그래 이 친구는 용케 살아있더만. 그래서 중공 새끼들..."


“어허. 자네 말 너무 많이 해.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여기 한국 아니라고 이 친구야.”


인민군 출신이라는 옆자리 노인이 여태까지와 달리 ‘중공 새끼’라는 말을 듣자 갑자기 진심으로 정색을 하며 말렸다. 고향 친구의 걱정에도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뭘 그렇게 겁을 먹고 그래. 우리 같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 잡아가서 뭐하겠어.”


“그래도 조심해. 한국말 알아듣는 사람 천지다 여기.”


앨리스와 철혁은 그들의 만담을 겉으로는 무표정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이 머릿속을 조여오는 불안감, 그리고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제 그들 앞에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적한 곳으로 갈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앨리스, 우리 이제 슬슬 가야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아 그래요.”


철혁이 손목 시계를 보이면서 살짝 재촉했다. 둘은 노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했다. 두 노인은 손을 들며 가볍게 화답하더니 이내 둘이서 계속 술을 마셨다.


호텔 입구 앞에는 이미 택시들이 몇 대 서있었다. 현대 엘란트라가 대부분이었고 한 대는 폭스바겐 제타였다. 철혁이 문을 열어 앨리스에게 안쪽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철혁이 연변대학으로 가달라고 하자 기사는 미터기를 누르고 호텔 정문 앞에서 좌회전하더니 가야하(嘎呀河)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당신들 한국에서 왔지요?”


머리를 빡빡 깎아 빛이 서려있는 중년 택시기사도 역시 조선족이었다.


“맞아요.”


철혁이 대답했다.


“연길은 처음이요?”


“처음은 아니에요.”


“오랜만에 가는구만.”


“뭐 그렇게 볼 수 있죠.”


“무슨 일로 가는거요?”


“출장 가요.”


“뭐 그렇겠지. 오늘 새벽에만 해도 이미 연길을 2번이나 왕복했는데 다 한국인이었어요. 이제는 우리 조선인이나 한족보다도 한국 사람들 얼굴을 더 많이 볼 지경이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죠. 바로 옆인데.”


“연길 요즘 많이 달라졌어요. 시내에 있는 백화상점 가봐요. 얼마전에 현대화한 곳이 있는데 저 한국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아요.”


“백리성 말씀이신가요?”


“아유. 아는구만.”


“이따가 한번 가보죠 하하.”


가야하 다리를 건넌 택시는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하더니 어느새 터널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산자락을 지나고 있었다. 앨리스는 서서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가움과 아련함이 가슴 한구석에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안한 즐거움이었다. 차 안에 설치된 음악 플레이어에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뭔가 익숙했다. 철혁은 그 노래가 얼마 전 종편에서 하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온 거라는 걸 깨달았다. 작년에도 잠실 구장 갔을 때도 타이거즈 응원단에서 이거 불렀지 아마.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이거 목포의 눈물 아닌가요?”


“아 젊은 사람이 이 노래 알아요? 혹시 지루하면 라지오 틀게요. 그게 더 지루할수 있긴 한데.”


“아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젊은 세대들도 이거 아는 사람 많아요. 얼마 전에 한국 방송에서도 나왔거든요. 야구 응원가기도 하고.”


“아 그거? 나도 알아. 우리도 위성 안테나 깔고 한국 방송 볼거 다 봐요. 합법은 아니지만 다 눈감아주거든.”


“이 노래가 인기가 많나 보죠?”


“80년대 후반부터 남선(남조선) 노래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시작했거든. 옛날 것부터 시작해서 그때 인기있던 노래들까지 전부. 북선(북조선) 노래만 지겹게 듣다 보니 새롭단 말이지. 그러다가 90년대 후반에 이제 남선 북선이 의미 없어지고 남쪽 출신 사람들이 막 여기로 오게 됐지. 그래서 한국에서 온 가수인데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 여튼 그 여성이 연길 노래 경연 대회에서 이걸 불렀어요. 그러면서 이것까지 인기를 얻은 거야. 뭐 그게 없어도 요즘 위성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 언젠가는 알았겠지.”


고속도로는 부르하통 강변을 왼쪽에 두고 뚫려있었고 택시는 화물차, SUV를 잇달아 추월하면서 연길을 향해 총알같이 달리고 있었다. 앨리스는 계속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연을 말하면서 세상 좋아졌다 소리만 반복하며 혼잣말을 하던 기사의 어조가 살짝 바뀌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 고장이 발전하는 건 좋은데 그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기사의 살짝 뜬금없는 소리에 계속 침묵하고 있던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의미죠?”


“한족이 너무 많아졌어. 그거 알아요? 올해 들어서 연길시에 우리 동포들 사는 비율이 20프로 밑으로 내려간거.”


“그건 처음 듣는 소리네요.”


“연길 뿐만 아니라 연변 전체가 그래. 룡정, 훈춘, 돈화 다 이제 동포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특히 연길은 여기저기 건설하고 일자리가 많아진다니까 주변 지역에서 한족들이 더 많이 몰려오고. 강만 하나 건너면 바로 한국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러면 다 한국으로?”


“당연하지. 그쪽도 아실 테면서. 당신네도 함경도 사람들 아니오?”


“그렇죠.”


“온성에서 강 건너왔을 것 같은데. 내가 장담해요. 적어도 온성 사는 사람들 중 3분의 1은 우리 동포들이야. 내 사촌도 거기 사는데 말이야. 온성만 그러겠소? 특히 나진이 엄청 많지.”


“안타깝군요.”


“연변에 사는 동포들이 줄어드는거? 당연하지. 우리가 이 땅을 다 일구면서 살아왔는데. 벼도 안 자라는 척박한 땅을 기름진 벌판으로 바꾼게 우리 조선 사람들이었소. 그래서 이렇게나마 살게 된 거지. 그런데 그런 땅을 버려두고 간다니 마음이 아파. 누구는 우리 민족의 터전으로 돌아가는게 뭐가 문제냐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여기서 나고 자랐어요. 애국하고 애당하며 살아야지.”


“애당이요?”


앨리스가 살짝 격양된 감정에 되물었다. 철혁이 그녀를 살짝 쳐다보자 앨리스는 알겠다는 듯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기사는 음악 소리에 파묻혀 그녀의 말에 감정이 실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듯 했다.


“물론. 내가 민족은 조선이래도 공화국 공민이지 않소? 여기서 태어났으면 당연히 공화국과 당에 충성해야지. 공산당의 은혜로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온거 잖아요. 당이 아니면 어떻게 연길까지 고속렬차가 개통했겠어. 당이 이곳 백성들의 생활까지 신경을 써주니 가능한거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농촌이라고 신경도 안쓸걸?”


이 기사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저 손님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내면의 불안감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당에서 주입하는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였다. 둘은 이 불쌍한 남자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점히 박힌 시골집과 농토만 보이던 풍경에서 점점 공장 창고가 보이더니 2층집, 3층집에서 이내 콘크리트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길 시내에 거의 들어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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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3화. 시비 -2- 23.01.15 39 1 9쪽
26 13화. 시비 -1- 23.01.08 40 1 9쪽
25 12화. 망중한(忙中閑) 23.01.01 52 1 11쪽
24 11화. 의심 22.12.25 50 1 8쪽
23 10화. 가창조국 +2 22.12.18 56 1 10쪽
22 9화. 방사능 녹차 22.12.11 61 1 13쪽
21 8화. 계획 -3- 22.12.04 65 1 10쪽
20 8화. 계획 -2- 22.11.27 59 1 9쪽
19 8화. 계획 -1- 22.11.20 59 1 10쪽
18 7화. 탄식 -3- 22.11.13 64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8 1 13쪽
16 7화. 탄식 -1- 22.10.30 64 1 12쪽
» 6화. 연길 가는 길 22.10.23 66 1 19쪽
14 5화. 조우 -3- 22.10.16 65 1 14쪽
13 5화. 조우 -2- 22.10.10 64 1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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