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2,573
추천수 :
42
글자수 :
159,433

작성
22.10.30 18:53
조회
64
추천
1
글자
12쪽

7화. 탄식 -1-

DUMMY

해란강에 비가 올 제 다정턴 님도

해란강에 눈이 오니 그만이더라

변함없는 마음이란 말뿐이더냐

눈물로 손을 잡던 용정 플렛홈.


박향림 노래, '코스모스 탄식' (1939) 中


알고는 있었다. 여행객들이 블로그에 올려놓은 관광 후기, 용케 유튜브에 올린 영상까지. 고향 산천이 칙칙하고 다 쓰러져가는, 그러나 정겹던 판자촌에서 정비된 현대 도시로 변해간다는. 그래서 소위 말하는 ‘옛 모습’이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음을. 그리고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약간의 체념이 있었다. 이제 나에게 ‘고향’이란 더 이상 없구나. 그러나 그렇기에 차라리 후련한 감이 있었다.


앨리스의 솔직한 느낌으로 따지자면 이 공원로(公园路)는 연길만의 특색이 사라져버렸다. 여긴 무슨 ‘연변화경회계사무회사’ 따위의 한글 간판만 보자면 마포나 잠실 같은 서울의 부도심을 어설프게 흉내 냈고 검은색 대리석을 벽면에 붙인 북경연통 건물을 보면 상해, 항주 같은 ‘남쪽 동포’들의 도시 건물을 빌려와 간체로만 간판을 바꾼 모습이었다. 둘이 자연스럽게 융화되지 못하고 마치 염소 머리와 새 날개를 붙여놓은 어색한 키메라와 같은 도심 풍경이었다. 거기에다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는 초록색 버스는 재작년에 서울 갔었을 때 보던 바로 그거 아닌가?


차는 계속 달려 연변대학 앞에 도착했다. 파란색 기와를 얹고 양 옆으로는 조선족들의 생활상을 깎아낸 벽면 조각까지.


‘그래 이거야.’


앨리스는 약간의 반가움을 느꼈다. 정면으로 보이는 ‘대학성’과 상가, 앞을 거닐고 있는 학생들의 싱그러움까지. 그러나 주변에 죽을 치고 있는 공안 요원들의 모습을 보자 30여년 전의 기억의 파편이 약간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졌다.


철혁은 걸어가면서 그녀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앨리스의 얼굴에 약간의 쓸쓸함이 묻어나오는 걸 느낄 수는 있었지만 한편으론 놀라운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걸 그는 알았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든 목적지로 가는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어차피 이 짝퉁 한국 거리는 자기한테는 그 어떤 감흥도 불러일으킬 동네도 아니다. 거기에 지금 매의 눈으로 인파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공안의 타겟이 우리인지 아니면 저기 왜 10분이나 늦었냐고 남자친구에게 따지는 검은 안경의 여학생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노란색 간판의 치킨집, 비빔밥과 순대국 사진이 먹음직스럽게 붙어있는 김밥집, 그림이나 사진대신 한글과 한자로 온통 도배된 순두부집, 그리고 거리 한쪽을 잔뜩 매운 주차차로 도배된 거리를 지나 둘은 6층 짜리 아파트 단지로 들어왔다.


찌든 때, 온통 벗겨진 흔적이 가득한 선분홍색 페인트벽 그리고 초록색 페인트로 부담스럽게 도배된 문설주를 넘어 그들은 계단을 올랐다. 3층에 들어서자 문이 하나 있었다. 철혁이 문을 빠르게 네 번 두드렸다. 한 사내가 문 건너에서 중국어로 ‘누구쇼?’라고 외쳤다. 철혁이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문이 열렸다.


“아 일단 들어와요.”


사내는 이내 조선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둘이 안으로 들어오자 이 막 노년에 접어든 이 남자는 문을 닫았다. 그가 철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장경수요.”


“최민호입니다. 이쪽은 김명희씨.”


“반갑습니다.”


“얘기는 잠깐 들었소. 민호씨나 명희씨나 둘다 월간함북 소속이라고?”


“네.”


“먼길 오느라 수고했소. 여기가 어떤 동네인지는 잘 알겠지. 일단 저기에 앉아있어요. 차를 끓여오지.”


응접실 안은 깔끔했다. 철혁은 주변을 돌아봤다.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분재가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이 사내의 사진들이 여러개 붙여져 있었다. 젊은 남자가 황록색 인민복에 해방 군모를 입고 있었다. 그 다음은 그 비슷한 제복에 견장이 달려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넥타이가 달린, 흡사 한국이나 남중국의 그것과 정말 비슷한 제복, 그러나 여전한 붉은 별까지. 빛이 점점 바래져가는 사진들은 이 사내의 연배와 조금씩 바뀌어가는 듯한, 그러나 실상 그 속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이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자, 가시오갈피와 라이라크꽃차요. 원하시는대로 드시오.”


장경수가 직접 쟁반을 들고왔다.


“향이 좋군요.”


앨리스가 말을 꺼냈다. 그건 진심이었다.


“좋지? 작년 가을에 향토특산물박람회 갔다가 사온거요. 청도만산업육성단지라고 얼마 전에 소년궁 옆에 세웠거든.”


“아, 소년궁 옆에 그런게 세워졌군요.”


“아줌마도 소년궁은 가봤던 모양이요?”


“네, 가보기는 했었죠.”


소년궁. 그것은 그녀에게 단순한 어린이 회관이 아니라 그녀의 어린 시절 그 자체였다. 앨리스가 7살이 되었을 때 대륙 북부를 휩쓴 광기가 마침내 끝났다.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시대는 연변에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무용, 미술, 노래, 문학 창작, 다양한 활동 소조는 어린 나이부터 예술과 지식을 갈망하던 그녀에게 새로운 이정표였다.


그러나 광기가 끝나고 소조 활동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이 자유가 왔다는 것을 의미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제1중학교에 있을 때 그녀는 수업을 들으면서 느꼈다. 모주석이란 사람은 왜 존경을 받고 있는가? 그녀는 학교와 당에서 말하는 모주석의 ‘중대한 과오’라는게 단순히 과오라는 단어로 치부될 수준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앨리스-경옥은 가족들의 입을 통해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북방을 착취자 장개석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이 지도자의 ‘대단한’ 정책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대약진을 한다면서 사람들의 채워지지 않는 배는 뒤로 약진했다. 그녀의 작은 할아버지도 그렇게 돌아가셨다.


얼마 후에는 봉건 잔재와 썩어빠진 머릿 속을 정화시키겠답시고 홍위병들이 연길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때려부쉈다. 동포들은 살기 위해 조선인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다. 족보는 불태워졌고 조선과 관계된 것을 조금이라도 숨겼다가 들켰다면 남은 건 오직 조리돌림과 죽음뿐이었다. 주덕해 선생은 연변의 동포들을 위했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조리돌림 당했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은채 타지에서 외롭고도 비참하게 죽었다. 이 10년간의 광기가 겨우 지나고 당에서는 뒤늦게 공덕비를 세워줬댔지만 그가 그렇게 죽어간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경옥의 가족은 그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자식들에게 알려주려 애썼다.


한복을 입은 선생은 경옥과 친구들 앞에서 모주석은 공산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공이 크다고 했다. 그런데 수많은 인민을 굶어 죽게 만들었으면 그 당이 존재해서 무엇하겠는가? 왜 그 당과 소위 혁명을 위해 분투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택동이 모델로 삼는다는 레닌과 스탈린은 대체?


그 시절 경옥은 교실 뒷 켠에 걸려있던 레닌, 스탈린, 모주석, 등소평의 사진을 보면서 의문이 어느 순간에 분노로 바뀌고 있던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위대하다면 왜 우리 가족들 중에 죽은 사람이 있는가? 그때 그녀는 고작 12살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당 아래 자라온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을 내보이는 것이 어떤 위험을 불러올지 어린 나이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이 자라고 자라 눈덩이처럼 굴러간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 경옥에서 앨리스가 되었다. 그녀는 장경수의 말에 다시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인민공원 옆의 그 호텔 때문이지?”


“네, 영사관에서 주최하죠.”


철혁이 툭 내뱉었다.


“그나마 여기 연길에서 행사를 하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요. 북경이었으면 경계가 훨씬 삼엄했을 테니까. 여긴 애들 장난이야. 북경은 요즘 시기에 이 정도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게 불가능에 가깝다고. 올해가 좀 이상해. 양회까지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북경은 경계가 삼엄하잖아. 내가 4일 전에 갔다왔잖아. 시내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과 기차를 다 일일이 검문하더라고. 지금도 이런 판인데 2~3주 남았을 때는 어쩌겠어. ”


“뭐 생각보다 제약 사항이 많지는 않더군요.”


“여기 올 때 철도로 안 왔소?”


“택시 타고 왔죠. 괜히 기차로 타고 오면 골치아플 수 있어서요.”


“잘 생각했었네. 그게 옳아. 어차피 이 나라의 모든 철도망은 다 감시가 삼엄해. 그리고 북경이 유별나긴 해도 연길이라고 한국이나 남쪽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안돼. 봐봐. 대학 정문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감시카메라가 몇대 있는지 세어봤소?”


“건물에 한 두개씩 최소한 스무 대 정도는 되더군요.”


“그러니까. 저 멀리 서녕부터 북경, 심양, 목단강까지 이 나라는 철저하게 공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는데 혈안이 되어있다고. 있지도 않은 인민의 적으로부터 공민을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사실은 당의 적이겠지. 그리고 당이야말로 공민들의 적이라고. 이 망할 놈들이 수십 년동안 인민들을 착취하고 있어. 온 공화국을 첨단 장비로 채우는데 그게 인민을 위하는게 아니라 오로지 인민을 감시하려는 용도 뿐이라고. 그런데 공산당을 이렇게 도와준 게 누군지 알아요?”


“누군데요?”


“누구겠어. 공화국의 남쪽 형제하고 한국이지. 미국도 그렇고.”


“무슨 뜻이죠?”


“국제 시장에 이 공산당을 끌어들인 게 당신네 자유 세계라고. 소비에트 련방 견제하겠답시고 미국이 공화국과 수교했잖아. 남중국 사람들도 말이야. 모택동 죽고 나더니 여기 뻔질나게 왔다갔다 하면서 공장 세우고 돈 벌어갈 궁리나 했지. 89년에 인민들이 광장에서 학살당할 때도 여러나라들이 잠깐 비난하는 척 하더니 수억명의 시장을 잃을 수는 없다고 결국 입을 씻었지. 합작 사업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게 뭐야 공산당이 대놓고 기술 빼가겠다고 광고했는데도 그랬다고. 나도 군에 있어 봤고 사업도 해서 잘 알아요. 여기에 회사를 세우려면 무조건 당이나 군 소속 기업소들과 같이 합작을 해야해. 기술 교류도 의무고. 바보 같은 남중국과 서방 애들이 그걸 넙죽 받아먹었잖아. 경협이 중요하다면서 그 결과가 뭐야. 자기들이 기껏 키워놓은 기술들이 몽땅 여기로 흘러들어오고 이제 공산당은 그걸 발판 삼아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어. 그것들이 무기가 되고 정보 교란 장치가 되서 당신네들을 겨냥하고 있어. 얼마 전에 저 그리스의 전국 전력망이 마비됐던 사건 있잖소? 아줌마가 잘 알겠네.”


지난 여름에 테살로니키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가 정체 불명의 해커의 공격을 받아 마비된 적이 있었다. 그 덕에 그리스 전국에 한동안 정전이 있었지. 유럽 전역이 떠들썩했다. 공식적으로는 범인이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다지만 터키가 그 짓을 한거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아, 터키에서 했다던 그거 말이죠? 여기서도 아시네요.”


“왜 모르겠어. 그런데 그 토이기 해커들 양성해주는게 누군지 알아? 여기 국가안전부라고. 그리고 그 국가안전부가 쓰는 장비나 소프트웨어들이 다 어디서 나온 건지 알아? 남중국과 미국 회사들의 원천 기술이잖아. 풋. 그 세계적인 기업들. 바보같은 놈들. 대승적으로 활동하겠다고 우리 공화국과 협력한 결과야.”


장경수는 맹렬하게 뜨거운 라일락 차를 들이켰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북쪽 나라의 앨리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4월 말 쯤 연재 예정입니다. 23.04.21 17 0 -
공지 다음주 일요일 쯤 연재예정입니다. 23.04.02 24 0 -
공지 다음 주 일요일 쯤 연재될 예정입니다. 23.03.18 14 0 -
공지 이번주 일요일 연재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23.03.03 46 0 -
37 21화. 책임 회피 23.04.30 27 1 7쪽
36 20화. 유혹 23.04.09 27 1 7쪽
35 19화. 심문 23.03.26 41 1 7쪽
34 18화. 체포 23.03.12 32 1 7쪽
33 17화. 첫 만남 (3) 23.02.26 36 1 7쪽
32 17화. 첫 만남 (2) 23.02.19 28 1 10쪽
31 17화. 첫 만남 (1) 23.02.12 31 1 9쪽
30 16화. 시작 23.02.05 35 1 8쪽
29 15화. 전조 23.01.29 45 1 7쪽
28 14화. 그림자 23.01.22 40 1 7쪽
27 13화. 시비 -2- 23.01.15 39 1 9쪽
26 13화. 시비 -1- 23.01.08 40 1 9쪽
25 12화. 망중한(忙中閑) 23.01.01 52 1 11쪽
24 11화. 의심 22.12.25 51 1 8쪽
23 10화. 가창조국 +2 22.12.18 57 1 10쪽
22 9화. 방사능 녹차 22.12.11 61 1 13쪽
21 8화. 계획 -3- 22.12.04 66 1 10쪽
20 8화. 계획 -2- 22.11.27 60 1 9쪽
19 8화. 계획 -1- 22.11.20 60 1 10쪽
18 7화. 탄식 -3- 22.11.13 64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9 1 13쪽
» 7화. 탄식 -1- 22.10.30 65 1 12쪽
15 6화. 연길 가는 길 22.10.23 66 1 19쪽
14 5화. 조우 -3- 22.10.16 65 1 14쪽
13 5화. 조우 -2- 22.10.10 64 1 8쪽
12 5화. 조우 -1- 22.10.09 64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