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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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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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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8
추천수 :
42
글자수 :
159,433

작성
23.01.22 17:29
조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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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7쪽

14화. 그림자

DUMMY

저녁을 먹은 장경수는 집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오후 6시도 안됐지만 이미 한밤중이나 마찬가지였다. 약해 빠진 전구에서 빛이 쥐꼬리만하게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목매단 시체마냥 단지 대롱대롱 매달려있을뿐 복도를 밝히는건 역부족이었다. 그는 아직은 건강한 눈에 의존해 이 어두운 계단을 헤쳐 나갔다.


거나하게 먹었으니 힘이 솟았지만 계단을 계속 오르며 장경수는 자신의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느꼈다. 알고는 있었지만 몸뚱아리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정신도 조금씩 썩어간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입에서 ‘에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2층을 오르자 이웃집 문이 열리고 장과 비슷한 나잇대의 노인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는 마침 현관 앞에 놓인 택배 상자를 가져가려 한 것이었다. 장경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반가움 반, 핀잔 반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어디서 뭘 또 그렇게 술마시고 오는거요?”


“김형. 술 마시는게 뭐 어때서 그래?”


영하의 복도 날씨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라도 하듯 김의 입에서 새하얀 겨울 입김이 뿜어져나오자 거기에 마치 대응이라도 하려는 듯 장의 입에서는 입김 대신 술냄새가 풍겨나왔다.


“요즘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어제도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 들어왔잖아? 우리 나이에 술 너무 마시면 몸뚱아리가 썩는다니까?”


“괜찮아. 혈검사에서 정상으로 나왔으니까.”


장경수는 손사레를 쳤다.


“혈검사만 문제야? 대장 검사. 뇌 검사. 심장 검사. 검사해야할데가 한둘이 아닌데? 혈관만 건강하다고 방심하면 안된다.”


아주 자신감있는 장의 태도에 김 노인은 매우 걱정스런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 사람이 오늘 왜 그래? 내 건강은 내가 잘 안다니까? 자네도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운동이라도 해.”


“오늘은 또 누굴 만난거야?”


“너무 관심이 많아. 이웃간에 사이 좋은게 좋아도 너무 파고들면 안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시정부 공무원이 계속 여길 왔다갔다하잖아. 며칠 후가 소비절이라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노인들에게 소비권을 나눠준다고. 나도 받았는데. 근데 자네 집만 계속 비어있으니까 그 사람 계속 오잖아. 아까 전에도 와서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갔다고.”


“그 인당 30원짜리 소비권 말야? 얼마 되지도 않는걸 나눠주겠답시고 왜 여기까지 와? 그 정도 액수로 판촉 활동한다고 소비가 증가하겠어? 걔네들도 할 일없으니까 이 겨울에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아니 그래도 돈 생기면 좋지 않아?”


“그거 가지고 얼마나 구입하면 구입한다고. 나 그런거 없어도 돈 많아.”


“에이, 그렇다고 또 돈 자랑해.”


“나한테 계속 얻어먹으면서 왜 또 그래?”


“그래 이참에 내일 아침이나 좀 사주지?”


“그 말 나올줄 알았다. 결국 그러려고 계속 말을 꺼내온거 아닌가. 안될거 뭐 있겠나. 7시?”


“7시.”


“그래. 빨리 들어가.”


집 안으로 들어온 장은 TV를 틀었다. 그는 위성 방송으로 한국 텔레비전을 보는 걸 좋아했다. 물론 엄연히 불법이었지만 그걸 가지고 트집잡힌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연변방송이나 CCTV는 전혀 재미가 없었다. 허구한날 각 고장의 발전 정도나 선전하고 사고나 재난 같은 좀 재미가 있을 것 같은 건 요 근래 거의 보도를 안한다. 작년에 난주(란저우)에서 홍수가 나 당국이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고 시위가 벌어지자 당의 해결책은 재난을 보도 안하면 되는 것이었다. 46년전 당산 지진때도 그렇고 대처 방식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마침 6시 내고향이 방영되고 있었다. 어제는 충남 서천에서 김 만드는 걸 보여주더니 오늘은 함남 풍산에서 양치기들이 양 치는 걸 보여줬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자기 같은 노인들이었다. 딱 한명, 이제 막 군대 갔다 온 21살짜리 애가 나오기는 했다. 풍산 전체라면 몰라도 합포리 일대에서 자기 또래 양치기는 단 한명이래나? 구 남조선 지역보다 구 북조선, 특히 시골 지역이 고령화에다 인구 감소가 대단하다는데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2주전에 나온 그 태천이라고 했나 인구 1만명이 위태위태하다고 방송에 나오더만.


그러거나 말거나 풍산은 장경수가 조만간 정착해 남은 생애를 보낼 계획을 세운 곳이었다. 해발고도 1500미터가 넘는 고원에 드넓게 펼쳐진 침엽수림. 그 곳을 노니는 양떼와 스라소니 그리고 사슴. 그리고 동북과 다른 자유의 맑은 공기. 장은 여유가 생길때마다 비자 발급 비용은 개의치 않고 풍산을 즐겨 찾았다. 지금은 단순한 방문객이지만 1~2년만 이 짓을 더 하면 그 다음은 저 공기 좋은 개마고원에서 별장을 짓고 생활할 테다.


사실 그는 멀쩡한 정신과 별개로 몸이 지쳐가고 있었다. 생각해보건데 자유화 사업은 굳이 여기에 남아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한국에도 조선족 많은데 이 사람들 잘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연길 같은 번잡스러운 도시에서 살고 싶지 않다. 가끔 애들 보러 청진 같은데 가면 되고. 철도가 없어서 교통이 좀 불편한 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운전을 할 수 있으니 지방도 타고 국도 타고 고속도로 타면 되고 운전이 여의치 않으면 풍산 공항에서 터보프롭 타고 가면 된다. 제주항공 같은 거 타면 고속버스와 비슷한 가격으로 얼마든지 함흥이나 청진까지 갈 수 있다.


“흐흐, 갈 수 있으면 빨리 가야지. 죽기 전에.”


6시 내고향 다음은 뉴스, 바로 그 다음은 한국인의 밥상이었다. 한국 뉴스야 고속도로에서 10중 추돌사고가 났네, 국회의사당에서 누가 최루탄을 터트렸네 하는 얘기가 가감없이 보도되니 재밌다. 한국인의 밥상이야 말할 것도 없지. 조선 요리야 여기 연길에서 먹는 거와 별반 다를건 없다만 함경도 요리와 전라도 요리가 같을 수는 없지. 연길에서는 삼남 음식을 먹기가 매우 힘드니까 TV로라도 그 동네 친구들이 어떻게 먹는지 알아봐야 할 것 아닌가.


장이 즐거운 상상을 하는 동안 아파트 입구 한구석 주차장에는 낯선 검은색 둥펑 세단 한 대가 계속 서 있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더 거무스름해진 차는 정말 시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과연 차가 서있는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차량 안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내는 인내심 있게 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스마트폰으로 듣고 있었다. 추위 속에 엔진도 켜지 않은 채 그는 오로지 두터운 파카에만 의지해 이 북방을 지배하는 동장군의 호통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나눠주다만 소비권 다발이 얼어붙은 채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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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21화. 책임 회피 23.04.30 27 1 7쪽
36 20화. 유혹 23.04.09 26 1 7쪽
35 19화. 심문 23.03.26 40 1 7쪽
34 18화. 체포 23.03.12 31 1 7쪽
33 17화. 첫 만남 (3) 23.02.26 36 1 7쪽
32 17화. 첫 만남 (2) 23.02.19 27 1 10쪽
31 17화. 첫 만남 (1) 23.02.12 30 1 9쪽
30 16화. 시작 23.02.05 35 1 8쪽
29 15화. 전조 23.01.29 45 1 7쪽
» 14화. 그림자 23.01.22 40 1 7쪽
27 13화. 시비 -2- 23.01.15 38 1 9쪽
26 13화. 시비 -1- 23.01.08 40 1 9쪽
25 12화. 망중한(忙中閑) 23.01.01 52 1 11쪽
24 11화. 의심 22.12.25 50 1 8쪽
23 10화. 가창조국 +2 22.12.18 56 1 10쪽
22 9화. 방사능 녹차 22.12.11 61 1 13쪽
21 8화. 계획 -3- 22.12.04 65 1 10쪽
20 8화. 계획 -2- 22.11.27 59 1 9쪽
19 8화. 계획 -1- 22.11.20 59 1 10쪽
18 7화. 탄식 -3- 22.11.13 64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8 1 13쪽
16 7화. 탄식 -1- 22.10.30 64 1 12쪽
15 6화. 연길 가는 길 22.10.23 65 1 19쪽
14 5화. 조우 -3- 22.10.16 65 1 14쪽
13 5화. 조우 -2- 22.10.10 64 1 8쪽
12 5화. 조우 -1- 22.10.09 6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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