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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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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연재수 :
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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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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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글자수 :
159,433

작성
23.01.0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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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2화. 망중한(忙中閑)

DUMMY

“허참. 요즘은 여기서 이런 것도 만드는구만.”


최덕철은 진열대에 놓인 화이트애프리콧 브랜디 병을 보며 중얼거렸다. 은은한 노란색과 주황빛이 섞인 액체가 마치 수입산을 연상시켰다. 거기에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 그것도 필기체로 ‘White Apricot Brandy’라 써져있는 라벨은 ‘나는 기회만 된다면 한국산이 아니라 수입산이고 싶소’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 했다.


그래봤자 라벨 한구석에는 한국어로 제조지가 적혀있었다. ‘함경북도 회령시 장무동 팔을천로 132’. 요즘 회령시에서 자기네 특산물인 백살구로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좀 밀어준다는데 그거인 듯 했다. 음료 주류 코너에는 죄다 백살구 브랜디 아니면 무슨 백살구 주스에 엑기스 이런게 널려있었다. 심지어 보존 식품 코너에는 백살구 잼까지. 좀만 더 있으면 백살구에 깔려죽을 판이었다.


하나로마트에는 채소를 사러 온 80대 노인부터 시작해서 일찍 퇴근하고 소주를 몇병 사가려는 중년 노가다꾼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진열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신선하고 품질 좋은 야채를 사려고 하면 지역 재래시장보다는 여기가 차라리 나았다.


최는 그러나 신선한 채소나 사려고 나진에서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온게 아니었다. 사실 그는 인스턴트 식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육포부터 시작해서 참치캔, 컵라면, 과자, 스팸, 그리고 음료수에 약한 도수의 술까지 그는 카트에 온갖 제품을 박아두고 있었다.


저 먼발치서 중국어가 들려왔다. 동북쪽 억양이었다. 최덕철은 순간적으로 말이 들리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회령이 아무리 북중국인들 천지라지만 저들을 그냥 놔둬도 되는지, 아니면 자기에게 볼일이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20대들로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걸로 봐서는 시내 공장 지대에서 일하는 외노자들인 듯 했다. 그들은 최 쪽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반대편 정육 코너로 가고 있었다.


“16만 4천 7백원입니다.”


엄청난 양의 식료품에 일일이 바코드를 찍어댄 계산원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함경도 억양이긴 했으나 그녀는 조선족이었다. 최가 카드를 주고 그녀는 탁탁 카드를 긁었다. 서명을 하고 최덕철이 영수증을 달라고 하자 이 젊은 아가씨는 말없이 종이를 뜯어 건넸다.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최는 마트 앞 주차장으로 낑낑대며 걸어갔다. 그리고 회색 폭스바겐 페이톤의 트렁크에 식료품들을 비닐봉지째 넣었다. 엄청난 북방의 추위에 그는 ‘씨팔’이라고 한마디 내뱉었다.


10만밖에 안된다지만 그래도 도시는 도시였다.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길거리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코트로 옷을 여미며 거닐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 한국 최북단 지역의 무서운 추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샨카나 군밤장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도로에도 트럭, SUV, 세단 가릴거 없이 차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특히 화물 트럭들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시가지 바로 근처의 국경 세관으로 갈 채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최의 차도 역시 세관 방향으로 향했다.


국도와 세관 사무소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잠시 병목 현상이 벌어졌다. 북중국으로 가려는 화물 트럭들이 좌회전을 하지 못해 끝없이 줄지어져 있었다. 그런데 온성이나 아니면 저 멀리 혜산, 의주면 몰라도 통상적으로 회령은 이 정도로 막히지는 않는다. 뭔가가 더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앞에 경찰차와 국경경비대 마크가 붙어있는 밴 몇대가 도로 양옆으로 서 있었다. 견광봉을 든 국경경비대원들이 트럭, 승용차 가리지 않고 멈춰세우고 있었다. 최의 차례가 되었다. 아직 앳되보이는, 그리고 추위에 얼굴이 새빨갛게 얼어붙어있는 대원이 창문으로 다가왔다. 최덕철은 창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쇼.”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십시오.”


최는 거리낌없이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 대원에게 건넸다. 면허증에는 수년전 찍은 그의 얼굴이 붙어있었다.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운전면허증이었다. 단지 이름이 ‘최영춘’으로 되어있을 뿐. 아무리 국내라 해도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활동하는 것이 이로울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경비대원은 손에 들고 있던 PDA 비스무리하게 생긴 기계에 신분증을 인식시켰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확인되셨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요?”


“이 근방에서 발생한 살인 용의자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경관은 수배 전단을 보여줬다. 용의자의 몽타주가 섬뜩하게 그려져 있었다. 젊은 남성이었다. 인상은 한국인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아뇨, 본적이 없습니다. 언제 벌어진 일이요?”


“어제 오후 수구포역 근처입니다. 혹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보신다면 꼭 신고해주십시오.”


대원은 거수경례를 했다. 최는 창문을 닫고 다시 달렸다. 이는 국경변의 일상이었다. 압록강변이건 두만강변이건 최가 국경 지대를 방문할때마다 꼭 한번씩은 의례 겪는 일이다. 신원미상의 시체가 발견되고 반대로 신원미상의 용의자가 거리를 활보한다. 살인 용의자일수도 있고 간첩일수도 있고 마약 운반책일수도 있다. 그리고 국경경비대는 이를 토벌하는 걸 버거워한다.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근무지는 경흥이었다. 그곳은 러시아와 붙어있었다. 같은 국경 도시 지역이긴 해도 그 동네는 훨씬 치안이 좋았다. 애초에 두만강 하류라 범죄자나 불법체류자가 강을 건너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고.


차는 강을 따라 금생(金生)역 부근을 지났다. 마침 무궁화호 열차가 역을 출발해 고령진(高嶺鎭)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최의 폭스바겐은 그와 동시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꾸불꾸불한 산길을 지나 차는 멈춰섰다. 산꼭대기에 산장이 하나 있었다. 사실 이 1층짜리 낡아빠진 집은 산장이라는 멋있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이 근방을 장식하는 예전 북조선 시절 질릴만큼 지은 소위 조선 주택보다는 조금 클 뿐이었다.


최덕철은 봉다리를 두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이제 막 40줄에 접어든 것 같은 동양계 사내가 얼굴을 살짝 드러냈다.


“Who are you?”


“한국어로 해. 한국어 잘만 구사하면서.”


“회령이 원래 이렇게 추운 동네인가?”


“얼어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확인 완료.”


“낡아빠진 방법이긴 하지만 옛 방식만큼 확실한 확인 방법이 없다고 앤디. 일단 좀 들어가자고. 아무리 내가 여기 오래살았어도 추운건 추운 거다.”


최는 봉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가구라 할 건 없었다. 나무 책상, 책상에 놓인 노트북 몇 개, 의자와 간이 침대가 전부였다. 일부러 불을 키지 않은 듯 했다. 방 안은 어둑어둑했다. 앤디라는 사람 외에 같은 동양인 2명이 산장 안에 있었다. 한명은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다른 한명은 간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저기는 조지, 마이클. 다 한번 봤겠지.”


“그럼.”


둘은 최를 보고 목례를 했다. 그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이제야 왔군. 너무 늦었는데.”


앤드류가 가볍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들 정말 오랜만이군. 런던의 그 화려한 곳에 있다가 이 최악의 오지까지 오니 힘들겠어.”


“전혀. 여기보다 더한데도 많았는데 뭘. 자네가 칭하이 지방을 가봤으면 여기가 오지란 소리 전혀 못해. 그런데 배고프군.”


“한국어 실력이 나날이 느는군. 내가 봐도 서울 출신이라고 착각하겠어.”


“그게 우리 기본 소양 아닌가. 그리고 우리 생김새를 봐봐. 이 동네에서 한국인, 중국인 행세하면서 할 줄 아는게 영어밖에 없다면 말이 되나.”


“한국인은 물론이고 중국인이 봐도 자넨 조금 이국적인 얼굴이야.”


“서부 지방에서 왔다고 하면 되지.”


“일단 뭘 좋아할지 몰라서 최대한 당신네들 입맛에 좀 맞춰보려고 했어. 한국 음식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최가 책상에 비닐 봉투를 거칠게 던졌다. 옆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던 조지가 살짝 움찔한 눈치였다. 최덕철은 봉지 안에서 사온 것들을 꺼내 분류하기 시작했다. 마이클이 다가와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무슨 소리야. 우리 김치 좋아해.”


“그래? 다행이군. 내가 먹으려고 좀 사왔는데.”


“그거 말고 뭘 가져왔는데.”


“어디 보자, 육포에 우유, 빵, 스팸, 과자.”


“스팸?”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영국에선 악몽이지만 이래도 여기선 스팸이 소울 푸드라고. 맛들이면 알거야.”


동양인의 얼굴을 한 영국인 셋은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댔다.


최와 앤드류는 단단히 무장하고 다시 산장 바깥으로 나왔다. 두만강과 건너편 용정촌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바로 앞 한국 쪽 국도는 이 시간에도 화물차와 승용차의 불빛이 얽혀 아스팔트를 수놓고 있었다. 엔진소리 경적 소리, 사이렌 소리, 가끔 지나가는 기차 소리 외에 들리는 건 도도히 흘러가는 두만강 물결이었다. 반대편 마을은 불빛이 간간히 보였지만 정적에 잠겨 있었다. 앤드류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강변 상황을 감시하면서 24시간 넘게 죽치고 앉아있어야 하는거군. 그 남녀 커플이 올때까지 말이야. 참으로 쉽긴 쉬워.”


“경치나 쭉 감상하라고.”


“이쪽으로 안올 수도 있지 않나?”


“일단 약속은 바로 이 지점으로 했어. 그나마 제일 여기가 경계가 허술한 지역이더군. 무경이 순찰하는 횟수가 그나마 적어. 설령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면 바로 이동하면 되고. 거리가 얼마 안되니까.”


“여기서 만일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가 이 지점에서 처리할수도 있지.”


“국경을 넘을 필요도 없지. 자네 명사수잖아.”


“그래, 뭐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때 탈레반들이 나를 공포의 하자라인이라 불렀지. 어디서 그놈들 머리를 꿰뚫어버릴지 모르니까.”


“이름만 들으면 누가 자네 원래 출신을 감히 상상할 수 있겠나?”


“본래 어디서 왔든 간에 나는 이제 조국의 충실한 군인이지. 게다가 매 일요일마다 교회도 나간다고. 모스크는 발길을 끊은지 수십년이야.”


“여기 와보니까 어떤가? 칸다하르보단 쉬운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지. 아무리 쉬운 곳이래도 실수해서 죽으면 거기서 끝이야. 어디에서든 방심하지 않고,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행세하는게 내가 여태껏 살아남은 비결이다.”


앤드류는 담배를 바닥에 짓이겨 껐다.


작가의말

망중한(忙中閑): 바쁜 가운데 잠시 여유가 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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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9화. 심문 23.03.26 40 1 7쪽
34 18화. 체포 23.03.12 31 1 7쪽
33 17화. 첫 만남 (3) 23.02.26 36 1 7쪽
32 17화. 첫 만남 (2) 23.02.19 27 1 10쪽
31 17화. 첫 만남 (1) 23.02.12 30 1 9쪽
30 16화. 시작 23.02.05 34 1 8쪽
29 15화. 전조 23.01.29 45 1 7쪽
28 14화. 그림자 23.01.22 39 1 7쪽
27 13화. 시비 -2- 23.01.15 38 1 9쪽
26 13화. 시비 -1- 23.01.08 40 1 9쪽
» 12화. 망중한(忙中閑) 23.01.01 52 1 11쪽
24 11화. 의심 22.12.25 50 1 8쪽
23 10화. 가창조국 +2 22.12.18 56 1 10쪽
22 9화. 방사능 녹차 22.12.11 61 1 13쪽
21 8화. 계획 -3- 22.12.04 65 1 10쪽
20 8화. 계획 -2- 22.11.27 59 1 9쪽
19 8화. 계획 -1- 22.11.20 59 1 10쪽
18 7화. 탄식 -3- 22.11.13 63 1 11쪽
17 7화. 탄식 -2- 22.11.06 58 1 13쪽
16 7화. 탄식 -1- 22.10.30 6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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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5화. 조우 -1- 22.10.09 6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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