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 별로에요?
“ 내가 그 여자를 선택했을 땐 말이야 그만큼 똑똑하기 때문에 뽑야. 그 여잔 자기가 누울 자리 못 누울 자리는 잘 아는 여자야. 그런 여자가 네 머리채를 잡았으면 네가 잡힐 만큼 예의가 없었던 거 아니겠어? ”
회장은 아내를 사랑하진 않지만 전적으로 신뢰했다. 하여 박지연의 알량한 거짓말에도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 전 억울해요, 회장님! ”
“ 억울하면 나가. 여기에 널 붙잡을 사람은 없으니까. ”
회장이 문을 가리키며 냉정하게 말했다.
“ 제 도움이 필요하신 거 아니었어요? ”
박지연의 건방진 말에 회장이 픽 소리내 웃더니 이내 주절거리는 그녀의 턱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지연은 오늘만 벌써 두번째 벽치기를 당했다. 그것도 한 부부에게.
이제보니 주현미의 벽치기 스킬은 모두 회장에게 배운 것이었다.
“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 네가 도움이 필요해서 나한테 온 거라는 걸 잊지마. 아니면 내가 까준 네 빚부터 천천히 받아줄 테니까. ”
" 죄송합니다... “
턱을 잡힌 지연이 복화술로 자신의 잘못을 빌자 회장은 그제야 손에 힘을 푸고 그녀를 나줬다. 그리고 나중을 위해 그녀에게 당근을 주기로 했다.
“ 자기가 이렇게 굴면 내가 못되게 굴어야 해서 너무 속상하잖아. 그러니까 다신 이러지 않기로 해요. 알았지? ”
회장이 눈을 맞추며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애틋하고 달콤하던지, 지연은 방금 전 자신이 당했던 수모는 싸그리 잊어버리고 그를 더 갈구하게 됐다.
회장의 마음에 들 수만 있다면야 자신의 몸을 절벽으로 내던질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녀가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 반지도 만족한듯 푸른 빛을 발광하며 더욱 불타올랐다.
# 오초희네 집
기어코 차까지 얻어 마신 우돈은 그래도 아쉬워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이 집에서 1박한 경험도 있겠다, 오늘 밤 하루만 더 신세 진들 잘못될 건 없어 보였다.
현재 시간 저녁 10시 30분. 시간도 늦었는데 설마 집에 가라 하진 않겠지.
“ 이제 집에 가보세요. 저도 할 일이 많아서요. 내일까지 보내야할 번역본도 있고 글도 써야하고. ”
“ 아... 그렇죠. 오초희 씨도 해야할 일이 있겠죠... ”
우돈이 끝까지 꾸무적거리며 쇼파에서 간신히 일어났다.
아쉽게도 그는 더이상 이 집에 머무를 핑계거리를 생각해내지 못했다.
“ 그래도... ”
“ 가세요. 롸잇 나우. ”
오초희는 혹시 그가 나가는 문을 몰라서 이러는 걸까봐 나가는 길을 친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갈 거에요! 갈 건데...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가 있으니까 그것만 하고요. ”
우돈이 오늘 이 집에 찾아온 이유는 쓸쓸한 그녀를 안아주기 위해서였다. 더도 말도 덜도 말도 딱 그것만.
“ 아, 빨리 하고 가요. ”
그를 상대하기 귀찮았던 오초희는 대충 팔을 벌려 그에게 다가갔다.
처음 안겼을 땐 설레기만 했던 가슴이 다른 여자를 보러 갔다온 몸에 안기니 감흥이 반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느낌이라면 차우돈 대신에 최 회장 품에 안기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거다.
“ 오초희 씨, 이제 나 별로에요? ”
자신에게 안긴 오초희가 묵석처럼 반응이 없자 우돈이 근심어린 얼굴로 물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안아주면 얼굴에 홍조를 띠고 수줍게 웃어줬는데, 사람이 변한 건지 사랑이 변한 건지 오초희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 차 관장이 별로는 아닌데, 다른 여자 졸졸 따라다니는 남자는 진짜 별로에요. ”
결국 오늘 차우돈이 별로였단 소리였다.
“ 그래도 나 밥 먹다 말고 여기로 달려왔는데.. ”
“ 아니죠. 애초에 그 여자랑 밥 먹으러 가면 안 됐죠. 차 관장님 연애 안 해봤어요? 어떻게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몰라. "
오초희는 연애 경험이 전무한 자신마저 아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우돈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요. 가도 오초희씨 허락 받고 갈게요. ”
“ 아니죠. 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차 관장 선에서 잘라야죠! ”
이 남자를 가르치려면 최소 3년은 걸릴 거 같았다.
확실히 여자를 다루는 솜씨에 있어선 최 회장쪽이 훨씬 능숙했다.
만약 그가 차우돈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적어도 내 앞에선 박지연에게 아는 척도 안 했을 거다.
그리곤 뒤로 가서 박지연에게 선물공세를 하며 달래주겠지만 절대 내가 알게 하진 않았을 거다.
“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화 풀어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
“ 잊지 말아요. 차우돈씨 심장은 평생 내꺼라는 거. 그거 어기면 진짜 재미없어요. ”
오초희는 다시 한번 그 날의 계약에 대해 그를 상기시켰다.
그날 차우돈은 반지의 비밀을 듣는 대신에 그의 심장을 나에게 바치기로 약조했다.
만약 그 약속을 어긴다면은 박지연은 물론이고 차우돈도 재미없을 거라는 것만 알아뒀음 좋겠다.
***
지연은 다음 날도 등록도 하지 않은 유도장에 출근했다.
“ 우돈아, 얘기 좀 해. ”
그녀는 특별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오초희가 탈의실에 들어간 사이를 노려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여기서 해. ”
우돈은 오초희를 의식하며 어떻게든 지연과 둘만 있는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렇다고 지연이 밉거나 싫은 건 아니었다.
지연을 보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아련한 감정이 넘나들었지만 딱 거기까지만 하고 싶었다.
“ 저 언니가 신경 쓰여서 그래? ”
지연이 오초희가 들어간 탈의실을 노려보며 물었다.
“ 응. 그러니까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줬으면 좋겠어. ”
“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
지연이 상처받은 얼굴로 물었다.
“ 내가 뭘 어쨌는데. ”
“ 너한텐 나 하나뿐이었잖아. 날 위해선 모든지 해줬잖아. 근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사람이 변해? ”
“ 나도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너 말고도 소중한 사람들이 많더라. ”
“ 그래서 나 말고 다른 여자한테 가겠다는 거야? ”
“ 나도 이제 다른 사람 만날 때도 됐잖아. 내가 언제까지 너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
“ 그래서 내가 너한테 왔잖아. 이제 네 마음 받아주겠다고. ”
예전이면 듣고 싶었던 그 말이 우돈은 그닥 달갑지 않았다.
“ 이젠 모르겠어. 내가 너랑 만나서 행복할지. 넌 내가 아니라도 만날 사람 많잖아. ”
“ 무슨 소리야. 나한테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
지연은 지금까지 이 한 마디로 힘들어서 떠나려는 우돈의 마음을 잡아뒀었다.
비록 지금은 사정이 있어 널 사랑하지 못하지만 나에겐 너 하나뿐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 몇 년을 끌어왔다.
“ 그 말 정말이야? ”
하지만 이제 우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난 번에 만났던 사채업자의 말로는 지연이가 그동안 여러 남자들을 거쳐가며 도움을 받아왔다고 했다.
심지어는 빚을 깎아주는 대신에 그 사채업자랑 함께 밤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람의 말을 백퍼센트 믿을 순 없겠지만 그가 주장은 소름끼칠 정도로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그의 말이 거짓이라면 지연이는 무슨 일로 1억이란 빚을 지게 됐을까.
또 지연이는 어떻게 1억이란 빚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 한 적 있니? ”
또 거짓말.
“ 우리 이제 그만 하자. ”
우돈은 이제 그녀의 거짓말에 질려버렸다.
지금은 이렇게 거짓말로 내 발목을 잡아도 조금만 지나면 또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갈 게 뻔했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는 딱 여기까지인 듯싶다.
“ 네가 다른 여자한테 가면 나 죽어버릴 거야. ”
감언이설이 통하지 않자 지연은 다른 방식의 접근법을 택했다.
“ 야, 박지연! ”
“ 네가 날 버리면 나 확 죽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
박지연이 되도 않는 이유로 차우돈을 협박하고 있을 때, 때마침 환복을 마친 오초희가 탈의실에서 나오다가 둘의 대화를 엿듣게 됐다.
박지연이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 같은데.
“ 죽어요, 그럼. ”
“ 네? ”
지연이 인상을 굳히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 죽을 거라면서요. 그럼 죽으라고요. 지금까지 그런 말 한 사람들 중에 진짜 죽은 사람은 내가 별로 못 봤거든요. ”
500년 이상을 살면서 오초희는 자신의 목숨을 도구로 사용해 다른 사람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려던 못된 사람들을 많이 봐 왔었다.
물론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흐지부지 넘어가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과연 박지연은 어떤 유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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