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필요하세요?
***
집으로 돌아와 대충 정리를 마친 초희는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광란의 밤을 즐기러 드라이브를 나왔다.
물론 혼자서.
“ 그래. 여자친구 아니래잖아! 골키퍼 없으면 골이 안 들어갈 리가 없잖아! ”
그녀는 쾅쾅 울리는 라디오 음악소리에 맞춰 서울의 한적한 새벽 거리를 활보했다.
이 녀석은 작년에 벤초를 보내주고 만난 아오디란 녀석이었다.
값에서 억소리가 났지만 그만큼 난 능력이 있으니깐 .
예전에 조선 시대 아씨들이 꽃가마를 타고 다닐 때 얼마나 부러웠던지 자동차에는 돈을 아끼지 않게 됐다.
거리엔 나처럼 밤이 주는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온 외로운 영혼들의 차가 보였다.
아오디, 부가리, 페로리, 마카라리 등등등.
너도 외롭냐. 나도 외롭다.
하지만 창문으로 본 그들의 차 안엔 누가가가 보조석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결국 이 거리에서 외로운 건 나혼자였다.
' 그래. 다들 좋을 때다. 1년만 지나 봐라. 어차피 다들 헤어져 있을 거다! '
난 창문 너머의 그들에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액셀을 꾹 밟았다.
마음은 이미 시속 200키로의 과속딱지를 20장이나 끊었지만 안타깝게도 차의 기름이 바닥난 상태였다. 기름마저 나의 질주를 응원해주지 않았다.
난 황급히 앞에 보이는 카센터로 차를 몰았다.
“ 가득이요. ”
“ 네 ”
목소리에서 젊음이 느껴지는 직원이 기름을 넣는 동안 심심했던 난 사색에 잠겼다.
백 년을 기다려왔지만 백 년이 지나도 나는 혼자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백 년이 지나도 나는... 혼자일까?
‘ 씨부레. 그건 신이 너무 하신 거지! ’
하늘에 대고 화풀이를 하는데 백미러로 주유를 하고 있는 직원의 실루엣이 보였다.
‘ 키도 크고, 꽤 건장하네. ’
조선시대 때만 해도 사내들의 키가 저 남자 어깨에도 못 미쳤는데. 요즘은 다들 잘 먹고 잘 살아서 그런지 대체적으로 발육상태가 뛰어났다.
하지만 그런 척박한 시대에서도 우리 도련님께서는 남달리 훤칠한 풍채로 여인네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다녀 이 소녀 무척이나 고달팠었다.
키라도 작으면 안 보이련만 키다리 풍선 인형처럼 복보적으로 길쭉해서 감히 안 볼일 수가 없었다.
“ 다 됐습니다. ”
오랜만에 도련님 생각에 추억에 젖어 있는데 주유를 마친 직원이 앞창문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 청년은 또 얼마나 잘생겼으려누. 아무리 그래도 우리 차 관장만큼은 아닐 거다.
그런 외모는 이 시대에서도 1프로 안에는 드는 외모니깐.
“ 네. 여기.. 관장님이 여긴 왜 있어요? ”
여기선 보이지 않아야 할 우돈이 보이자 그녀가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관장님은 도장에 계셔야지 이 야밤에 주요소에는 왜.
“ 아... 저는 일 하러요... ”
이제야 그녀를 알아챈 우돈이 창피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필이면 여기서 제자를 만날 게 뭐람.
제자에게만은 늘 늠름하고 듬직한 스승으로 보이고 싶었지 이렇게 돈에 쪼들려 투잡을 뛰는 초라한 모습은 보이고 싶진 않았다.
“ 그럼 내일, 아니 이따가 봐요. ”
우돈은 황급히 결제를 마치고 카드를 돌려준 뒤에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시 알아봐야 할 거 같다.
시급이 높아서 덥석 물었더니 거기가 우리 제자님이 사는 동네였다는 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 그러지말고 니랑 차나 한 잔 해요! 근처에 24시간 카페 있는데! "
역시 스토커 출신 답게 그녀는 집요하고 끈질겼다.
남은 한푼이 아까워 잠도 못자고 여기서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 와중에 커피 마실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이 여자 돈이 얼마나 차고 넘치는 걸까.
평생 편하게만 살아 온 금수저들에겐 괜히 거부감이 들어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
차우돈에게 다시 한 번 거절 당한 오초희는 집으로 향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차우돈은 지금 돈이 피룡한 상황인 거 같았다.
나를 챔피언으로 만드려고 하는 것도 다 돈 때문인지 몰랐다.
그런 이유라면 내가 못 도와줄 이유도 없었다.
' 그냥 이 참에 확 돈을 빌려줘?! '
내게 남자친구만 없지 돈을 차고 넘쳤다. 그리고 대부분이 바로 유통 가능한 현금과 금이었다.
차우돈이 내가 찾던 사람만 맞다면 못 빌려줄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고. 요즘 사람들처럼 나도 차용증이란 걸 써볼 거다.
못 갚을 시 대신 몸과 마음으로 갚는다는 파격적인 조항을 걸어서.
***
다음 날 난 특별 훈련이 시작되기 전에 차우돈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 관장님 혹시 돈 필요하세요? ”
“ 아뇨. ”
어제 들킨 게 부끄러웠던지 우돈은 시선을 피하며 끝까지 잡아뗐다.
하지만 날카로운 콧대 옆에 자리잡힌 그의 눈동자에서 갈등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돈 필요하구만. 그것도 아주 많이.
“ 편하게 말씀해보세요. 얼만데요. ”
혹시 듣는 귀를 의식할까 하여 그에게 슬며시 내 귀를 내어줬다.
이건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니깐 맘 편히 얘기해보시라고요.
“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친척 일 도와준 거에요. ”
우돈은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자존심을 지켰다.
돈, 그게 정말 많이 필요하지만 제자에게 돈까지 빌리는 파렴치한 놈이 될 순 없었다.
그 사실이 나중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날 이렇게 오해할 거다.
차우돈이 오초희에게 돈을 받아먹고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거다. 어쩐지 마동순을 재치고 그 여잘 애제자로 삼더니만.
원래 이 쳬육계가 연예계 만큼이나 추잡하고 더러운 소문이 많았다.
“ 진짜? 나 거기 사장님이랑 꽤 오래봤는데. 가서 물어나 봐야겠다! ”
“ 아, 좀! 그냥 모른 척 해주면 안 돼요? 왜 그걸 자꾸 케물으려고 합니까! ”
관장 체면이 말이 아니었기에 우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원망을 토로했다.
설사 내가 돈이 필요해서 투잡 아르바이트 좀 했다 치자.
봤어도 모르는척 조용히 응원해주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닌가. 왜 그걸 당사자 앞에서 티를 내서 민망하게 만드냔 말이다!
넌 돈이 궁해본 적이 없어서 궁한 자의 초라함을 몰라서 이러는 거지?
“ 돈 빌려주려고요. ”
그녀가 뭘 그런 걸로 큰소리를 내냐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돈 빌려주려고 아는 척 하는 건데. 이정도면 아는 척 할 자격이 있지 않나?
“ 뭐, 뭐 얼마나 돈이 많아서 그러는데요! 얼마나 빌려줄 수 있는데요! ”
오초희가 하도 돈자랑을 하자 우돈이 침을 튀기며 물었다.
어디 한 오천 만원 정도는 쉽게 빌려줄 수준은 되는 모양이지?
“ 관장님이라면 내가 10억까지는 땡겨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정도면 되려나? ”
“ 10..10억이요?! 그..그걸 그냥 빌려주겠다고요? ”
워낙 큰액수인지라 우돈은 말까지 떨렸다.
이제부터 이 여자를 스토커가 아니라 여왕님으로 모시며 충성을 맹세해야 할 거 같았다.
나한테 10억을 준다잖아. 10억!!!
“ 그건 내 맘. 아무튼 얼마나 필요한데요? ”
“ 1억 3천 7백 2십만 원이요. ”
우돈이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한 액수를 요구했다. 그게 지연에게 남아 있는 채무액이었다.
“ 뭐야. 금액이 왜 그렇게 깔끔하지가 못해. 그냥 1억 5천. 오케이? ”
“ 오..오케이. ”
우돈은 평소 쓰지도 않는 영어까지 써가며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려 노력했다.
이걸로 지연이 앞에 달린 빚도 끝이었다.
그럼 지연이도 맘 편히 하고 싶은 음악만 하며 살 수 있을 거다.
“ 자, 그럼 원장실에 가서 계약서 작성하시죠. ”
오초희가 원장실을 가리키며 앞장섰다.
대충 액수를 합의 봤으니 이제 남은 건 문서화시키는 작업이었다.
구두계약이 얼마나 쓰잘때기 없는지는 과거 30년 전 지인에게 천만 원의 손해를 보며 뼈저리게 느껴봤다.
' 마리 이 망할 계집아. 내 돈 떼먹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냐? 너도 이젠 60이 다 되어가겠구나. 죽을 땐 죽더라도 내 돈은 갚고 죽어라! '
아직도 그 여자 생각하면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 지속적으로 안방 벽을 수리해줘야 했다.
이 놈의 시멘트는 왜 그렇게 약한지 그냥 한번 툭 쳤을 뿐인데 금이 가고 뚝뚝 떨어지더라.
“ 계약서요? ”
그저 공짜로 빌려주는 거로 생각했던 우돈은 당황해서 물었다.
' 설마 이 여자 불법 대부업잔가? 그래서 돈이 저렇게 많은 건가? '
드라마에 나오는 그들의 이미지가 워낙 흉흉한지라 우돈은 덜컥 겁부터 났다.
이러다 제 날에 갚지 못하면 아무도 없는 야산에 끌려가게 될지도 몰랐다.
아님 단 한달만에 이자가 원금의 3배가 되는 기적을 맛볼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내겐 달리 돈 나올 곳도 없었다.
온갖 우려와 공포 속에서 우돈은 어영부영 원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갑의 자리에 앉은 초희는 능숙하게 미리 생각해온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상환 기한은 넉넉하게... 1년으로 할게요. ”
“ 그게 넉넉한 겁니까! ”
우돈이 세상물정 모르는 그녀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내가 1년 동안 죽어라 벌어도 기껏해야 5천만 원이 다일 거다.
헌데 1년 안에 1억 5천만 원을 만들어 오라니. 이 여자 악던 사채업자가 분명했다.
“ 너무한가? 그럼 3년? ”
어차피 받을 생각도 없었던 그녀는 되는 대로 불러재꼈다.
“ 그건... 어떻게든 해볼게요. ”
앞으로 3년. 안 먹고, 안 입고, 안 잔다는 마인드로 모으면 불가능할 일도 아니었다.
까지 것 3년 동안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돈만 벌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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