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버틸래?
“ 아, 그 여자요. 대게 어려보였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어. 안녕하세요. ”
주절주절 떠들던 데스크 직원은 그 스토커를 발견하고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 역시 이상해.. ’
그녀는 이번 스토커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그녀의 패션을 보고 알아차렸다. 무슨 중세시대 귀족 아가씨께서 행차하신 줄 알고 무릎 꿇고 인사할 뻔했다.
“ 차관장님한테 스토커가 있다고요?! ”
오초희가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차우돈의 생김새를 보고 진작 눈치 했어야 했는데. 벌써부터 스토커를 달고 다니다니 골치아팠다. 그 진드기는 또 어떻게 떨어트려야 할까.
넓은 치맛자락에 감춰진 그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김관장은 그녀를 쓰윽 보더니 데스크 직원에게 입모양으로 이 여자냐고 물어봤고, 직원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네. 있어요, 스토커... ”
바로 너 님이요.
“ 오케이. 알았습니다. ”
수업 시간이 다가온 관계로 그녀는 일단 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무서운 스토커에게서 벗어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동안 멍해 있었다. 아무래도 저 여자는 자기가 그 스토커인 줄 모르는 거 같았다.
“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요? ”
김관장이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처음에 차관장의 말을 들었을 땐 그저 예쁘장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요즘 보기 드믄 자연미인이었다.
코도 너무 높지도 않고 적당히 오똑해서 오히려 더 눈에 뛰는 자연미인은 아마 모든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자 어제 연관장이 했던 철없는 소리가 생각났다.
‘ 그러면 저야 땡큐죠! ’
어제 나한테 붙었던 스토커를 부러워하던 연관장이 참 철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런 여자가 매일 나를 보러 와준다면 그야말로 땡큐 아닐까.
***
오늘도 오초희를 떼어버리기 위한 차우돈의 스파르타 훈련은 계속됐다.
“ 오늘은 낙법에 대해서 배워볼 거에요. 포인트는 턱을 가슴에 당겨붙여서 뒤통수가 땅에 부딪히지 않게 하는 거에요. 자, 보세요. ”
차우돈이 멋들어지게 후방 낙법을 선보인 뒤 수강생들에게 따라해보라고 시켰다.
오초희는 등이 바닥에 닿기 전에 온몸에 힘을 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면 몸이 바닥을 닿는 순간 바닥에 금이 갈 거다. 다들 인간들이 놀라지 않게 힘조절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 오초희 회원님 잘하시네요. ”
분명 낙법치곤 어정쩡한 자세였음에도 차우돈이 다가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감격한 얼굴로 박수까지 쳐대는 그의 행동 덕분에 도장 안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 뭐야, 벌써 넘어온 건가. ’
자고로 남자들이란 관심이 있는 여자의 주위를 맴돌며 어떻게든 말이라도 걸어보려 안달복달한다고 들었다. 게다가 환심을 사기 위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백퍼센트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넘어오면 어떻게 하라고.
갑자기 쑥스러워진 난 자그만한 손바닥으로 불그스름한 얼굴을 감췄다.
“ 자, 그럼 낙법을 응용해볼게요. 제가 엎어칠 테니까 낙법으로 안전하게 떨어지면 되는 거에요. 그럼 시범 조교로는... ”
다들 차우돈에게 엎어치기에 당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기대하는 얼굴로 침을 꿀떡 삼켰다. 하지만 난 여기서만큼은 몸을 사렸다.
침대에 내던져지는 건 좋아도 차가운 바닥에 엎어쳐지는 건 그리 로맨틱한 장면이 아니었다. 그런 생고생을 하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런 건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에게 맡겨 두는 걸로.
“ 오초희 회원님이 하는 걸로 할 게요. ”
그런데 차우돈이 도장을 밝히는 형광등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딱 집었다.
“ 저..요? ”
“ 네. 오초희 회원님이 여기서 가장 낙법을 잘하는 거 같아서요. ”
차우돈은 스토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나긋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그녀를 지옥으로 초대했다.
이 엎어치기야 말로 유도의 근본이 아니겠나. 그렇게 수십 번, 수백 번을 내쳐지다 보면 아무리 끈질긴 스토커라도 정신이 바짝 들어 도망갈 수밖에 없을 거다.
“ 네... ”
그의 살인미소에 오초희는 결국 무대 중앙으로 끌려나갔다.
“ 제가 넘길 테니까 오초희 회원님은 후방낙법으로 떨어지시면 되십니다. 자, 그럼.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우돈은 오초희의 팔을 잡고 그대로 엎어쳤다.
“ 헙! ”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마쳤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차우돈의 파워에 오초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무슨 남자가 이렇게 힘이 세! '
날 내치는 그의 풀파워에 난 그만 눈물을 찔끔 흘리며 감동에 빠져버렸다.
차우돈 그는 딱 내가 원했던 몸이었다. 이렇게 강인하고 센 사람만이 나를 감당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감동만 하고 있다가 결국 차우돈이 꼭 주의하라던 뒤통수를 바닥에 쾅 박아버렸다. 다행히 바닥 아래 두꺼운 매트가 깔려 있어서 고통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 우리 오초희 회원님께서 잠시 실수하셨나 보네요. 자, 그럼 이제 둘씩 짝지어서 낙법과 엎어치기 연습해볼게요! 오초희 회원님은 계속 저랑 하시고요. ”
차우돈의 말에 주위에서 벌처럼 엥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관장님은 왜 저 여자랑만 하는 거야? ”
“ 몰라. 관장님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야? 저런 말랑깽이가 뭐가 좋다고! ”
우돈의 의도와는 달리 그것이 오초희에 대한 편애로 비춰지며 그녀는 유도장의 공공의 적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중심엔 아마추어 대회 해비급 챔피언을 노리는 마두순이었다.
‘ 왜 부럽냐. 부러우면 지는 거야, 아가들아. ’
이미 악독한 시기와 질투 속에서 수백 번을 살아남은 오초희는 그들의 날이 선 눈빛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게 무서웠으면은 애초에 차우돈을 찾아 이 도장에 오지도 않았을 거다.
“ 자, 회원님 이리 오세요. ”
우돈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악연을 단념시키겠다는 일념하에 이를 악물고 오초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 네! ”
오초희는 그런 그의 손길을 두 손 들고 환영했다.
비록 엎어쳐지는 건 삭신이 쑤시는 고단한 일이었지만 그와 몸을 맞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그렇게 오초희는 수십 번을 내쳐지면서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고, 차우돈의 계획은 오늘도 실패했다.
***
수업이 끝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복도에 나왔는데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저 여자 옷 좀 봐. 자기가 무슨 공준 줄 아나. ”
“ 그러니깐 말이야. 생긴 거 봤어? 저런 애들이 이 남자 저 남자 다 꼬시고 다닌다니깐. ”
“ 야, 너라면 저런 말랑깽이를 좋아하겠냐. 자고로 여자한 푸근한 게 제격이지! ”
다른 인간들보다 청력이 좋았던 난 그 모든 소리를 흡수하고 가소로워했다.
늘 패자들이 뒷말이 많은 법이니까. 오늘의 승자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 못 들은 걸로 해주겠다.
그렇게 넘어가주려 했는데.
퍽.
뒤에서 누군가가 강력한 어깨빵을 날리고 스쳐지나갔다. 지금껏 당해본 어깨빵 중에 가장 우직하고 묵직했다.
물론 간에 기별도 안 오는 고통이었지만 자존심은 상했던 난 어깨빵을 날리고 간 마동순을 노려봤다.
내가 힘을 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반사적으로 어깨에 힘을 줬으면 아마 저 여자의 어깨가 박살났을 거다.
'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감히 어른한테! '
요즘 TV에서 자꾸 말세 말세 하길래 또 어떤 비관주의자가 헛소리를 퍼트리나 하고 넘어갔는데 어린 놈의 자식이 어른의 어깨를 치고도 사고 한 마디 없는 걸 보면 지금이 딱 말세였다.
“ 어이! ”
난 그런 박대를 참을 만한 인성 좋은 위인이 아니었다. 이유없이 당하는 건 예전이면 족했지 계급 제도가 사라진 현대에선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나의 근엄한 부름에 씩씩하게 앞장서던 마동순이 멈춰 서 뒤를 돌았다.
“ 나요? ”
그녀는 네가 감히 나한테 덤비겠냐는 시건방진 얼굴이었다.
사돈 남말하고 계시네. 너야 말로 진짜 나한테 덤비시려고? 너처럼 겁을 상실하고 내 머리채를 잡은 뤼우신이란 여자는 이 손가락 하나만으로 전치 10주가 나왔다.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알아서 사과해라.
“ 일로 좀 와보지. ”
난 어른답게 검지 손가락 하나를 까딱이며 마동순을 불렀다.
“ 왜요. 뭐 어쩌라고요. ”
마동순과 그녀의 동료들이 고개를 빳빳히 치켜들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쪽수로 밀어부치면 자기들이 이길 거라 생각했던 모양인데 또 나의 1 대 17 전설을 말해줘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 방금 내 어깨 부딪혔는데. ”
난 어깨빵으로 찌그러진 드레스의 어깨뽕을 가리키며 그녀의 잘못을 알렸다.
“ 댁이 거기 있는 줄 난 몰랐죠. 미안하게 됐습니다. ”
마동순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버릇없게 고개를 까딱했다.
‘ 이 계집 양아친가? ’
지금까지 살면서 난 이런 부류의 인간들을 많이 봐 왔다. 자기 힘만 믿고 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자기 멋대로 휘두르려는 못된 양아치들말이다. 마동순 또한 여리여리해 보이는 내 신체를 보고 만만하다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감히 18세기 한정판 중에 한정판인 내 옷에 이런 흠집을 낸 것이고.
“ 다음부터 주의 좀 해주시죠. 당하는 사람은 기분 더러우니까. ”
“ 그럼 나도 부탁 하나만 합시다. 그쪽이 무슨 이유로 여기에 온지 모르겠는데, 우리 관장님께 꼬리치면 재미없을 줄 아쇼. ”
마동순의 경고는 꽤나 어이없었다.
“ 꼬리를 쳐? 내가? ”
오늘 한 일이라곤 바닥으로 내쳐진 일밖에 없는데 내가 차우돈한테 꼬리를 쳤다고?
아무래도 마동순은 진짜 불여시들의 꼬리를 관람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 여시처럼 꼬리를 휘둘렀다면 지금쯤 내 옆엔 네가 아니라 차관장이 있었을 거다.
어디 진짜 구미호처럼 꼬리 아홉 개를 휘둘러줘?!
나이는 걔나 나나 비슷해서 쌓아온 마력도 비슷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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