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선 안 될
“ 가자. ”
더는 들을 것도 없겠다 싶어 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당이 반지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걸로 봐선 여기도 가짜였다. 진짜 무당이라면 내 반지의 영험한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 왜요. 굿을 해야 한다잖아요! ”
저 근육 바보가 또, 또 쓸데없는 근성을 보이고 있었다. 이쯤되면 매순간마다 자신이 바보임을 증명하는 꼴이었다.
“ 차 관장님, 나 믿죠? ”
내가 물었다.
“ 아니요. ”
어제 덜 맞았는지 차우돈의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다.
나를 안 믿어도 믿는 척 좀 하라고!
“ 믿어요. 왜냐면 차 관장이 나에게 1억 오천만 원이나 빚을 지고 있으니까. ”
치사하게 돈 얘기를 꺼내고 싶진 않았지만 돈이 아니면 차우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거 같았다.
적어도 돈의 관계에 있어서 난 갑이고 그는 내 명령을 들어야 하는 을이었다.
“ 믿어볼게요.. ”
그제야 차우돈이 강한 상대를 앞에 둔 강아지마냥 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 오케이. 그럼 박지연 씨 데리고 5분만 나가 있을래요? ”
난 아직 이 무당과 할 말이 남아있으니까.
“ 왜요? ”
“ 그냥 5분만 나가 있어요! 내일까지 1억 5천 못 가져올 거면! ”
그제야 차우돈이 뺀질거리는 입을 닫고 자리를 피해줬다.
드디어 이 방안에 나와 가라 선녀를 모신다는 사기꾼만이 남았다.
“ 선녀님께서 그렇게 사람 운명을 잘 보신다고요. ”
“ 내가 아니라 선녀님이 보시는 거지. ”
그 선녀가 몇살이나 먹은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말이 짧았다.
이래보여도 내가 오백년을 하고도 며칠을 더 살았는데.
나에게 편히 반말을 하려면 적어도 천년 묵은 구미호 정도는 데려와야 할 거다.
“ 그럼 나한테서 뭐가 보이는데요? ”
“ 최근에 새로운 도전을 했을 거 같은데. ”
가라 선녀는 명확한 예측을 내놓기 전에 추측성 멘트를 던지며 나를 떠봤다.
이 질문에 노라고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이런 데 오는 사람들 대부분 다가올 변화에 대해 묻고자 오는 거니까.
“ 몸이 허약하네. ”
" 아닌데요. 저 엄청 건강한데요. "
내가 허약한 거면 차우돈은 오늘 내일 하는 목숨이겠다.
" 아니, 네가 모르는 가족력이 있어! 조만간에 심하게 아플 거니깐 조심하라고! "
그새 또 말이 달라졌다.
미안하지만 내 가족력은 500년 전에 내 대에서 끊겼다.
“ 애정운은 대체적으로 좋네. ”
“ 아닌데?! 엄청 안 좋은데! ”
지금 애정운이 바닥을 쳐서 외로움에 치를 떨고 있는데 무슨 개소리야!
애정운이 대체적으로 좋았으면 내가 지금 박지연을 데리고 여기에 왔을까.
“ 아니, 앞으로 좋아질 거라고!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렇게 포기하고 나가려는데 무당이 한마디가 나의 뒷덜미를 잡고 주저앉혔다.
“ 근데 아가씨도 조상님이 매우 노하셨네. 요즘 산소에 가긴 가고? ”
하다하다 이젠 나에게까지 조상님을 걸고 넘어졌다.
무당집만 오면 우리의 조상님은 도대체 왜들 그렇게 화가 나고 배가 고프신지 모르겠다.
“ 안 가요. ”
출생 신분 상 내 조상님들의 묘지는 그저 어느 들판이었을 뿐, 제대로 된 묘지는 쓸 수 없었다.
그것이 미천한 신분의 비애였다.
이 무당은 그걸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
“ 그럼 안돼! 그래서 조상들이 노하신 거야! "
" 그래서 뭐요. "
" 얼른 추모제도 지내주고, 밥도 올리고 그래야지! ”
“ 그건 얼만데요. ”
“ 자, 보자... ”
그러면서 무당은 내 옷차림을 쭉 스캔했다.
루이가똥에 발레치아에 로치까지. 딱 봐도 내가 돈 많은 호구처럼 보였을 거다.
돈이 많은 건 맞는데 미안하지만 내가 호구는 아니었다.
“ 2장이면 내가 잘 해줄게. ”
“ 2장이면... 이백..? ”
여긴 뭐만 하면 백단위란다.
“ 그거 가지고 어떻게 조상님들의 한을 풀겠다고! 2천이야, 2천! ”
무당이 손가락 두 개를 내 눈앞에 들이밀며 2천을 외쳤다.
2천이 무슨 남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리고, 이 무당 뭔가 이상했다.
정작 문제가 있어서 온 박지연한테는 백단위를 불렀으면서 구경 온 나에게는 천단위를 부른다?
이게 진짜 누굴 차우돈같은 호구로 보나!
“ 아가야. ”
아무리 많아봤자 나보다 한참 어린 거 같으니 편하게 말을 놓았다.
“ 아가씨 지금 뭐라고 했어? 아가? ”
열렬히 2천을 외치던 광기어린 무당의 눈동자에서 드디어 탐욕이 사라지고 인간만이 느낀다던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너처럼 2천에 눈이 돌아간 사람은 오랜만이라 무척 당혹스러웠다.
“ 아가야. 이렇게 다른 인간들 등쳐먹으면 나중에 천벌 받아. ”
이 언니가, 아니 너의 먼 조상님뻘인 사람이 조언해주건대 그렇게 남을 속여 재물을 갈취한 인간들의 말로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만 알아둬라.
“ 무엄하다! 어디 가라 선녀님께!! ”
무당이 제단에 올려놓았던 오방기를 들고 나를 위협했다.
진짜 무속인의 오방기는 약간 무섭긴 한데 가라 선녀의 오방기는 문방구에서 파는 색종이를 보듯 별 감흥이 없었다.
“ 어디 그 선녀한테 물어봐라. 나를 아는지. ”
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무당의 눈을 빤히 노려봤다.
대게 다른 인간들은 무당의 눈이 매섭다며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그게 다 귀신에 홀린 눈이라서 그런 거다.
진짜 신을 모시는 자들의 눈에는 그런 살기 따윈 보이지 않는다.
인간을 사랑하여 이 땅에 내려온 신의 눈이 분노와 살기로 일그러질 일은 없으니까.
“ 네 년은 곧 죽을 거란다! 살고 싶으면 무릎을 꿇고 싹싹 빌라 하신다! ”
“ 그래? 그건 또 얼마를 가져와야 하는데? ”
내가 죽을 거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게 거짓말이면 진짜 재미없을 줄 알아라.
“ 그래! 내일까지 사죄를 올리지 않으면 평생 네 인생을 저주한다고 하시니 얼른 2천만 원 가지고 와!! ”
“ 너야말로 똑똑히 들어. 내일까지 내가 죽지 않으면 네가 죽게 될 거야. 난 똑똑히 경고했어. ”
혹 내 경고를 귓등으로 듣고 흘릴까 난 친히 무당의 눈에 눈을 맞추고 진중하게 경고했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선 인간의 피가 필요했다.
이미 죽은 몸에 억지로 영혼을 붙잡아 두려면 매개체가 필요한 거다.
허나 내 목숨 하나 부지하자고 무고한 인간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의 피를 찾아헤매기 시작한 거다.
조상까지 끌어들이며 잘 되길 바라는 인간의 마음을 이용한 사기꾼이라면 왠지 내가 찾던 피가 맞는 거 같다.
***
첫번째 무당에게 지대한 실망감을 받고 쉴 새 없이 연 관장이 소개해준 두번 째 무당에게 찾아갔다.
이번엔 화곡동에 사는 진자 보살이었다.
그녀는 가라 선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젊었다. 기껏해야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같았다.
화장만 안 했다면 미성년자인 줄 알았을 거다.
“ 가져선 안 될 물건을 가져서 그렇다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네요. ”
역시나 진자 보살은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술술 풀어냈다.
반지의 존재까지 느낀 거라면 신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 혹시 최근에 생긴 물건이 있으세요? ”
보살의 물음의 우돈이 지연을 바라봤다.
“ 그게.. ”
박지연은 훔친 반지의 주인인 내 눈치를 살피는 거 같았다.
난 끝까지 모른척하며 그녀에게 진실을 고백할 기회를 빼앗지 않았다.
어디 네 죄를 자백해 보거라.
“ 가령 반지라던가. ”
이 보살 보소. 정확히 맞췄다. 오랜만에 진정한 신의 사자를 만난 거 같아 기뻤다.
“ 그러게. 지연이 너 이 반지 뭐야? 못 보던 건데? ”
차우돈이 박지연의 손에서 빛나고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며 물었다.
얼마 전까지 빚 때문에 맘고생하던 아이가 새로 샀을 리는 없고. 이런 비싼 반지를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걸까.
“ 아는 사람이 선물해줬어... ”
박지연의 주장에 반지 주인은 조용히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너 아는 사람은 맞는데 그 반지를 선물해준 기억은 없었다.
물론 그게 시중에 파는 다이아몬드 반지랑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난 내 반지가 풍기는 기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뭔가 음휼하면서도 껄쩍지근한 것이 확실히 내 반지가 맞았다.
“ 그 반지 선물해준 사람이 누군데요? 거기서 엄청나게 악독한 기운이 풍겨져 나오는데. ”
뭘 또 악독까지야.
이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피곤한 거다. 내가 숨기고 싶은 걸 다 알아채서.
“ 있어요.. 아는 사람.. ”
무당에 물음에 박지연은 그렇게 둘러댔다.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다.
“ 이 반지 때문이라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우돈이 무당에게 해법을 물었다.
“ 일단 반지부터 빼야죠. ”
“ 안돼요! 절대 못 빼!!! "
무당의 조언에도 박지연은 손을 등 뒤로 감추며 완강히 거부했다.
저게 반지가 가진 힘이었다. 고귀한 자태로 인간의 탐욕을 자극해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거.
지금 박지연도 저 반지를 가지고 싶어 눈이 돌아간 상태일 거다.
그러니깐 송장 상태가 돼서도 손에서 못 빼는 거고.
하여간 인간의 탐욕이란 이렇게도 어리석다.
“ 빼야 합니다. 안 그러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 ”
무당이 재차 그녀에게 경고했다.
“ 그래. 지연아, 내가 더 좋은 반지 사줄 테니깐 일단 빼자. ”
그리고 차우돈이 박지연에게 반지를 선물하겠다는 프러포즈식 발언을 듣게 됐다.
차 관장, 네가 왜 박지연한테 반지를 사줘?
그 반지 그냥 박지연한테 공짜로 줄 테니까 나한테나 사달라고!
“ 싫어! 이 반지는 내꺼야!! 다들 건들지 마!!! ”
주위에서 만류할수록 박지연은 표독스러운 얼굴로 발악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섭던지 차우돈마저 움찔하며 감히 손도 못 대고 있었다.
“ 반지는 안 되겠고. 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요? 굿이라던가. ”
3대 기독교 신자께서 이젠 제 입으로 굿을 하겠다며 신을 배반했다.
그들은 눈앞의 위기에 급급해서 해답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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