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쓰고 다니는 남자
“ 네? 뭐가.. ”
갑자기 얼마가 필요하냐는 오초희의 말에 우돈이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 지금 나한테 돈 빌리려고 이러는 거잖아요. 말해봐요. 얼만데 이러는데요. ”
“ 나 이제 오초희 씨한테 돈 안 빌려요. ”
“ 왜요? 난 진짜 빌려줄 생각이었는데. ”
있는 건 돈 뿐이요, 없는 건 사랑이었기에 그녀의 금고는 언제나 차우돈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짜로 빌려준다는 말은 아니었다.
난 남자에게 눈이 멀어 내 전부를 내어주는 호구가 아니니깐. 차우돈이 나를 배신하는 날에는 이자까지 쳐서 한번에 다 받아낼 거다.
거기에 무력과 폭력이 행사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 우리 돈 얘기 말고 다른 얘기해요. 오초희씨는 집에 가면 뭐해요? ”
돈 얘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우돈이 급히 화제를 바꿨다.
“ 나야... 일하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
“ 그렇구나. 그럼 오초희씨는 무슨 일 해요? ”
실례인줄은 알지만 우돈은 그녀가 무슨 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는지 궁금했다.
“ 번역이나 글을 쓰는데요... 다른 사람들한테 얼굴을 보여선 좋을 게 없으니까... ”
“ 우아. 대단하다. 그럼 오초희 씨는... ”
그 후로도 그녀에 대한 차우돈의 시시콜콜한 질문은 끝이 없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대답을 해주긴 했는데, 돈도 아니라면서 나한테 이렇게 깊게 파고드는 이유가 궁금했다.
나한테 얻을 게 또 뭐가 있다고.
그때 국밥집 티비에서 8시 뉴스의 시작을 알리는 효과음이 들렸다.
무심코 본 화면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 저 남자 연예인병에 걸렸나. 자기가 뭐라고 가면을 쓰고 다녀. '
오초희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자연스럽게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 한국 그룹의 최재철 회장이 모교에 10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
가면은 괴상하긴 해도 꽤 좋은 일을 하는 사람 같아 마음에 들었다.
부자라면 응당 저래야 하는 법이다.
자신이 번 만큼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
나 역시 그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하기 위해 어려움에 처해있는 차우돈에게 흔쾌히 돈을 빌려준 거다.
“ 근데 저 남자는 왜 가면을 쓰고 있대요? ”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한국 소식에 대해선 완전 금시초문인지라 난 차우돈에게 물었다.
“ 아, 최재철 회장이요? 젊었을 때 집에 화재가 났다나 봐요. 그래서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자긴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어서 저렇게 가면을 쓰고 다닌대요. 한 여름에도 긴 팔만 입고 다니더라고요. ”
내 사연만큼이나 그의 사연도 절절하여 왠지 모르게 정이 갔다.
“ 그럼 저 사람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는 거네요? ”
“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서 본인도 보이길 꺼려한대요. 그래서 절대 가면을 벗지 않는대요. 사진 보니깐 학창 시절에 엄청난 미남이었던데 참 안타깝네요. ”
엄청난 미남이라는 말에 오초희의 눈에 생기가 일었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는 법. 미남을 만나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아름다움은 외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도 나왔다.
본인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도 남을 돕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분명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을 거다.
“ 그래서 결혼은 하셨대요? ”
난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어쩌면 그가 진자 보살이 말한 내 운명의 사랑일지도 몰랐다.
“ 했죠. 벌써 연세가 67세신데. ”
“ 아... ”
이 지구에 살아있는 건 웬만하면 나보다 다 연하겠지만 그래도 외모 나이가 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 미친 동안 외모에 가정 있는 67세의 연하남을 만나고 다녔다가는 신문에서 불륜이니 뭐니 듣기 더러운 스캔들만 쏟아낼 게 분명했다.
“ 근데 왜 이렇게 아쉬워해요? 설마 오초희 씨도.. ”
오초희 씨도 역시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
우돈은 자신만을 따라다니던 스토커의 변심에 몹시도 서운했다.
사람이 돈이 전부가 아닌데.
나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몸과 마음을 있는데.
착잡한 심정에 그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순대국을 괜히 수저로 휘저었다.
“ 많으면 좋죠. "
“ 역시.. ”
그녀의 확답에 우돈은 어깨가 축 쳐졌다.
역시 남자는 돈이 중요한 거였구나.
그래서 오초희 씨는 내가 돈을 빌리는 순간부터 나한테 관심이 사라졌겠구나.
“ 근데 난 굳이 필요없어요. 내가 많으니까. ”
오초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가 너무도 멋져서 우돈은 그만 그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역시 이 여자는 내가 만난 여자들 중에서 가장 멋졌다.
예쁜데 돈도 많고, 특히 마음씨는 더더욱 예뻤다.
김 관장 말대로 이런 여자가 날 좋아해준다면 그야말로 땡큐아닐까.
“ 그냥 주위에 여자만 없으면 돼죠. 웬 거지같은 첫사랑만 달고 다니지 않으면 전 언제든 오케이입니다. ”
하지만 차우돈은 그녀의 기준에서 이미 예선 탈락이었기에 다시금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웬 거지같은 첫사랑을 달고 다닌다는 남자가 마치 자신인 것만 같아서.
그 첫사랑을 위해 오초희 씨에게 돈을 빌리고 울기만을 종용한 것만 같아서.
그는 식어버린 순대국 홀짝이며 지나간 나날들을 후회했다.
***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니 도대회 출전 신청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돈은 아직도 그녀의 출전 여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오초희 씨가 마동순을 날려버리고 건장한 형님들과 7 대 1로 싸워서 이긴 건 맞긴 맞는데, 괜히 대회에 내보냈다가 다치기라도 하는 날엔 두 발 뻗고 못 잘 것만 같았다.
같이 대회에 나가자고 꼬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를 어쩐담.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리
그의 헛된 고민을 방해라도 하듯 때마침 관장실 전화가 울렸다.
< 여보세요. >
< 전 한국 일보 이지금 기자라고 합니다. >
< 네. 기자님께서 어쩐 일이세요? >
그녀는 우돈도 몇번 인터뷰했던 기자였다.
< 이제 도대회 예선 신청이 시작됐잖아요. 그래서 관장님을 취재하고 싶은데. >
< 저를요? >
< 네. 관장님께서도 나가서 우승했던 대회잖아요. 후배들을 위해 조언해주신다 생각하고 인터뷰 한번 해주시죠. >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이지금 기자의 서글서글한 미소가 눈에 선했다.
< 네. 그러죠 뭐. >
< 그럼 내일 유도관으로 찾아갈게요. >
후배들을 돕는다는 생각에 우돈은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고, 이지금 기자는 바로 다음 날 도장으로 찾아왔다.
하필이면 수업이 있는 4시 타임에 맞춰서.
“ 안녕하세요, 관장님! ”
그녀는 혼자만 온 게 아니라 사진을 찍어줄 카메라맨도 함께였다.
“ 제가 곧 수업인데... ”
우돈은 미리 정확한 약속 시간을 잡지 않은 자신을 자책했다.
이러면 회원님들이 불편해 할 텐데.
“ 잘 됐네요. 그럼 전 저기 구석에서 훈련하는 모습 찍고 있을 게요. "
이지금 기자와 카메라맨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구석에 자리를 잡고 촬영을 시작했다.
하는 수없이 우돈은 그러라 하고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회원님들께 양해를 구했다.
“ 오늘 한국신문에서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요. 다들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
“ 그러세요. 우린 상관없으니까. ”
다른 회원들은 모두 괜찮다고 했지만 오초희는 카메라를 보고 좌불안석이었다.
‘ 내 얼굴이 나가면 안 될 텐데... ’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까딱하다간 실험실 쥐가 되어 평생 주사바늘에 꽂혀 살 게 될 거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우린 최대한 얼굴을 들어내지 않고 숨어 살아야 했다.
물론 신문에 나간다고 해서 바로 신변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았다.
“ 오초희 씨, 왜 그래요? ”
그녀의 난처한 얼굴을 읽고 우돈이 다가와 물었다.
“ 나 사진 찍히면 안 돼요. 알죠? ”
그녀가 근심어린 얼굴로 속삭였다.
" 알았어요. 나만 믿어요. "
여기서 유일하게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던 우돈은 굳은 얼굴로 이지금 기자에게 다가갔다.
“ 죄송한데요. 저희 회원님들 중에 얼굴 나오는 걸 싫어하는 분들이 계셔서요. ”
“ 걱정마세요. 최대한 차 관장님 위주로 찍을 테니깐. 나중에 모자이크 처리도 해드릴게요! ”
역시 말이 잘 통하는 기자였다. 이래서 우돈은 그녀가 요청하는 인터뷰를 거절하지 않고 늘 수락했던 거다.
“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확답을 받고 우돈은 수업을 계속 진행했고, 이틀 후 발행된 기사에는 차우돈과 모자이크 된 회원님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다만, 그 날도 열외 판정을 받고 창가에 혼자 멀찌감치 빠져 있던 오초희만은 모자이크의 연막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기사를 본 최재철 회장이 가면 속에서 요묘하게 미소지었다.
“ 어디 갔나 했더니 이런 곳에 숨어 있었네? 우리 공주님. ”
어쩐 일인지 화상 때문에 늘 끼고 다니던 장갑을 벗은 그의 손은 잡티 하나 없이 희고 곱기만 했다.
***
이른 아침 기사를 확인하다가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오초희 부리나케 차 관장에게 뛰어갔다.
“ 내 얼굴 안 나오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나만 믿으라며! ”
역시 이 남자는 얼굴만 잘생기고 몸만 좋았지 나머지 면에서는 뭐 하나 건질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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