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뭘 하재!
***
모두를 경악하게 한 마동순 공중부양 사건은 마동순이 실수로 반동을 잘못 타서 자기가 날아간 걸로 마무리되며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허나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차우돈을 속이기란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유도에 전념했던 그는 이것이 그저 반동을 잘못타서 생길 수 있는 힘이 아니란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저것은 우연이 만들어낸 기적이 아니라 하늘이 주신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 오초희 회원님. ”
우돈은 집에 가려던 오초희를 몰래 붙잡았다.
로이가똥을 입은 그녀는 오늘따라 유독 빛이 났다. 어쩌면 김 관장의 말대로 그녀는 굉장히 유복하게 자란 온실 속 화초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 화초가 사실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 시가 총액 10억짜리의 난초였다면.
난 그 난초를 온실 속에서 꺼내줄 의무가 있었다.
“ 저요? ”
뜻밖에 대시를 받은 오초희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뻐했다.
‘ 역시 이 남자 나한테 관심 있는 거라니까! ’
그가 먼저 나를 불러준 건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인 거 같다.
이게 다 나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틈새를 노려 말을 거는 거 아니겠나.
자칭 연애학 박사 오초희는 오차 99퍼센트의 결론을 내놓고 혼자 두 볼을 붉혔다.
" 네. 잠시 저랑 얘기 좀.. "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원장실이었다.
도장에 있을 땐 워낙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녀서 자세히 못봤는데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보니 역시나 차우돈은 끝내줬다.
몸도 좋은데 얼굴까지 훌륭하니 화딱지가 나서 확 껴안아주고 싶었다.
확실히 백년을 기다렸다 만난 보람이 있었다.
“ 오초희 회원님, 혹시 운동 몇년 하셨어요? ”
차우돈이 뜬금없이 운동 경력을 물어왔다.
“ 저는.. 숨 쉬기 운동이 다인데요. ”
“ 말도 안 돼... 그럼 유도가 이번이 처음인 거에요?! ”
차우돈이 격하게 놀라며 물었다.
“ 그렇죠...? ”
만일 차우돈이 유도장 관장이 아니었다라면 이번생은 물론이고 평생 유도와 벽을 쌓고 살았을 거다.
내가 원래 던지고 구르고 격한 운동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 대박. 혹시 계속 운동해볼 생각 있으세요? ”
차우돈이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나만큼이나 신난 얼굴로 물었다.
“ 있..죠? ”
“ 그럼 우리 함께 해요! ”
차우돈이 감격한 얼굴로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런 그의 포로포즈에 난 몹시도 당혹스러웠다.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이렇게나 빨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길 요청할지 몰랐다.
외로웠던 지난 백 년의 기다림은 이른 봄날에 눈송이가 녹아버리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엄마, 나 드디어 이 사람과 결혼하려나봐!
“ 좋아요. ”
난 그의 손을 잡고 두 볼을 코스모스의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수줍게 대답했다.
“ 그럼 내일부터 잘해봐요! 미래의 유도 챔피언님! ”
미래의 유도 챔피언 후보 오초희.
마동순을 멀리 던져버릴 때부터 그는 알아봤었다. 오초희 회원님은 기술은 없지만 타고난 힘이 웬만한 선수들을 능가한다는 것을.
이런 사람에게 기술만 입힌다면 챔피언은 따 논 당상이었다.
오늘부터 그녀를 제자로 삼아 아마추어 유도 대회의 꿈나무로 키워볼 작정이었다.
“ 네?! 어째서..! ”
마음은 이미 결혼식장에 들어가 있던 오초희가 팔로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원초적인 힘에 의해 책상이 갈라질 듯 요동치자 차우돈은 자신의 안목에 대해 매우 흡족해 했다.
역시 이 여자다.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내 다음 후계자.
“ 아까 마동순 회원님을 날릴 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상태라면 두 달, 아니 한 달이면 챔피언 벨트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그 꿈, 저와 함께 이루시죠! ”
마동순은 이 도장에서도 1티어에 속하는 실력자였다.
체급도 탁월했지만 바닥에 다리를 짚고 뚝심있게 버티는 그 무게중심이 다른 아마추어 선수들에 비해 유독 뛰어났었다.
헌데 체급에서도 한참 밀리는 이 여자가 마동순을 단숨에 꺾어버린 거다.
이런 인재는 두 번 다신 나오지 않을 하늘이 내린 신인이었다.
그걸 놓치는 스승은 미련 곰탱이라 해도 할 말 없을 거다.
“ 이건 아니죠! 지금 제 모습 안 보이세요? 이렇게 우아한데! 이렇게 예쁘고 가녀린데! 뭐..뭐요? 미래의 유도 챔피언?! "
하도 어이가 없어 얼굴이 시뻘개진 오초희는 원장실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내 살다살다 이런 망언은 처음이었다.
나한테 같이 차 한 잔 마시자는 남자는 많았어도 같이 유도 챔피언을 준비해 보자는 남자는 차우돈이 유일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
다음 날, 마동순은 외관상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근육이 놀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남은 두 달 중 몇 주는 상처 회복에 허비해야 할 거다.
고로 오초희를 향한 우돈의 열망은 더욱 거세졌다.
이제 믿을 건 오초희밖에 없었다. 앞으로 남은 두 달 동안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 챔피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 날부로 그녀를 향한 우돈의 역스토킹이 시작되었다.
“ 하시죠. 제가 잘 알려드릴 게요. ”
“ 됐어요. ”
" 저 한번 믿어보세요. 이래봬도 한국대학교 유망주였으니깐요. "
" 그쪽이나 하시라고요, 챔피언! "
그의 제안이 영 탐탁지 않았던 오초희는 이제 그를 피해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좋은 그라도 챔피언이란 험난한 산을 오르면서까지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한테 밥 먹자는 한 마디도 안 하는 남자 때문에 내가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겠냐고.
굳이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남은 생은 많았다. 백 년도 기다린 거 다시 몇십 년을 기다린다고 손해볼 것도 없었다.
***
수업 내내 언제 말을 걸까 기회를 엿보고 있던 우돈은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노려 그녀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 나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나만 믿고 따라와요. 한번 해요, 우리! "
“ 나한테 자꾸 뭘 해보재! ”
계속 도돌이표처럼 되돌아가는 대화에 결국 참았던 화가 터져나왔다.
내가 너와 하고 싶은 건 유도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므흣하고 야릇한 무언가가 하고 싶은 거다.
근데 왜 자꾸 나한테 가당치도 않은 유도를 들이미냐고! 이게 남자가 여자한테 할 소리야?!
그렇게 오초희는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도망치듯 도장을 빠져나왔다.
차우돈을 만난 지 단 삼일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
그렇게 오초희의 유도장 결석은 이틀이나 지속되었다.
오늘이면 오려나 그녀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우돈은 결국 진짜 스토커라도 되는냥 그녀의 집을 찾아나서는 만행을 저지르게 됐다.
이번 챔피언 벨트는 다른 놈에게 절대 빼앗길 수 없었다. 이건 나에게도 하늘이 내려주신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 가수길 A 빌리지로 가주세요. "
그는 택시 기사님께 회원 등록 서류에서 봤던 주소를 말씀드렸다.
택시가 멈춰선 곳은 왜 연예인들이 자주 출몰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보는 것마다 괜히 비싸보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비싸보이는 건물 앞에서 택시가 멈춰섰다.
" 역시 비싼 데 사네. ”
우돈은 그녀를 만나기도 전에 벌써 기가 죽었다.
이렇게 잘사는 여자가 힘든 체육인의 길로 들어서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도 난 오초희가 아니면 안 됐다.
***
그녀의 집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우돈은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띵동.
평소 흔히 듣던 벨소리일 뿐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녀와 마주하기 50초 전. 물세례를 퍼붓지만 않아도 다행이겠다.
“ 누구세요. ”
차우돈이 찾아왔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던 오초희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가 차우돈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닫아버렸다.
‘ 여긴 왜 또 찾아온거야! 또 유도하자고 하려고?! 에라이, 소금 바가지나 먹어라! '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봐서 좋긴 한데 저 입에서 나올 말들은 너무도 지긋지긋했다.
그 놈의 유도! 유도! 유도!
이렇게 가녀린 여자에게 같이 운동이나 하자는 무뢰배 자식 같으니라고.
신체 건장하겠거니 하고 좋아했더니 이 남자 완전 운동밖에 모르는 바보멍청이었다.
“ 오초희 회원님. 문 좀 열어보세요! 잠시 얘기 좀 해봐요! 오초희 회원님!!"
그녀가 순순히 열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우돈이 시끄럽게 소리치며 문을 두드렸다.
이러다 까다로운 이웃들의 민원을 폭주하겠다 싶어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문을 열어야 했다.
“ 일단 조용히 하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오세요! ”
달갑지 않지만 차우돈을 집안으로 초대하고 그녀는 거실에 가서 꺼져 있는 보일러를 틀었다.
이러지 않으면 다들 골병이 들 정도로 추워하니 나름의 배려가 필요했다.
이 얼음궁에 오랜만에 체온을 가진 인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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