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갈래?
“ 우돈.. ”
끝까지 약한 척하려 했지만 또 다시 도장에 난입한 차우돈의 그녀를 보고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는 힘껏 차우돈을 엎어쳤다.
팍!!
건장한 무언가가 바닥에 패대기 쳐지는 소리가 세 사람의 고막을 울리자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특히나 지연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인 우돈은 바닥에 얼굴을 묻고 좌절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 역시 제가 알려준 대로 하니깐 웬만한 천하장사도 다 넘길 수 있겠죠? 이게 바로 기술이라는 거에요, 기술. 하하하! ”
우돈은 그것을 변명이라고 내뱉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벌떡 일어섰다.
'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 지연아. 이건 내가 넘어간 게 아니라 내가 알려준 기술에 그냥 넘어가준 거니까. '
그런 걸로 입을 맞춰주길 바라며 오초희 회원님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똥 씹은 얼굴로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여기서 더 해봤자 불리하겠다 싶어 우돈은 주제를 바꿨다.
“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
오늘 지연이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없었다.
요즘들어 부쩍 지연이 서프라이즈처럼 등장하는 게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짠했다.
돈을 빌려준 고마운 마음에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 같아서.
“ 난 너랑 밥이나 먹을까 하고.. 훈련 있는 줄 알았으면 다음에 왔을 텐데.. ”
허나 오초희는 지연의 말에서 대단한 모순을 발견했다.
알았으면 다음에 왔을 거라고?
분명 지난 번에도 비스무리한 대사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도대체 박지연은 내가 차우돈과 매일 훈련하는 걸 언제까지 모를 작정인지는 모르겠다.
거기에 또 속아넘어가는 이 근육 바보는 또 뭐고.
“ 아냐! 막 끝났어! 그쵸? ”
동의를 구하는 듯한 차우돈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 아니요. 아직 7분이나 남았는데요. ”
물론 거기에 응해줄 내가 아니었다.
또 지금 막 끝났다고 구라치고 저 여자랑 밥먹으러 가려는 수작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미안하지만 약속은 지키고 가라.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그걸 먼저 제안한 게 차 관장 바로 너님이시잖아요.
“ 난 그냥 다음에 다시 오는 게 좋겠다. ”
그래도 눈치가 있는지 박지연이 순순히 가주겠다고 했다.
“ 나랑 밥 먹으러 왔다며! 같이 먹고 가! ”
문제는 차우돈이었다.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옆에서 계속 구질구질하게 밥밥 거렸다.
그런 그의 노력이 애잔해서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 그럼 둘이 맛있게 먹으세요. 훈련도 둘이 하시고. ”
난 이만 가줄 테니 둘이서 밥을 먹던 유도를 하던 마음대로 해라.
난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 그럼 우리끼리.. ”
지연에게 그럼 우리끼리 먹자고 하려던 우돈의 눈에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김 관장의 뒤통수가 들어왔다.
분명 훈련을 마치고 나온 오초희 회원님에게 말이라도 걸어보려는 수작일 거다.
어쩜 같이 밥이나 먹자며 데이트 신청을 할지도 몰랐다.
지금 오초희 회원님을 보내주는 건 김 관장에게 절호의 찬스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절대 안 되지.
“ 그럼 우리 같이 가서 먹어요. 모두 다. ”
결국 우돈은 지연과 오초희를 둘다 놓지 못하고 합석을 제안했다.
“ 같이 먹자고요? ”
오초희는 저 남자가 미쳤나 싶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삼각관계를 즐기는 변태가 아니고서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두 여자와의 숨막히는 식사 데이트 자처하는 강심장은 아마 이 남자가 처음일 거다.
“ 예, 같이요. 셋이. ”
차우돈은 쓸데없이 확고했다.
“ 난 괜찮은데, 그쪽은 괜찮겠어요? ”
이미 쌓아온 연륜 덕에 난 어린 불여시들을 사뿐히 즈려밟아줄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데 박지연이 과연 감당할 수 있으련지 모르겠다.
딱 봐도 표정관리를 못해서 싫은 티가 팍팍 나는데.
“ 저야 뭐... 근데 요즘 밖에 갈 곳도 없던데. ”
역시 가기 싫었는지 박지연이 그렇게 돌려 거절했다.
“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먹을래요? 근처에 맛있는 데 많던데. 배달시켜 먹죠. ”
그런 그녀를 쉽게 놓아줄 내가 아니었다.
여기서 어떻게든 빠져나가서 차우돈이랑 둘만 먹으려는 너의 속셈은 내 이미 간파했다.
밖에서 안 되면 우리 집에서 먹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 오초희 씨 집이요? ”
오초희의 얼음궁에 간다는 말에 우돈이 발작을 일으켰다.
그 날 끝까지 괜찮다며 반팔로 버텼지만 집에 돌아와서 콧물을 줄줄 쏟으며 밤새 끙끙 앓아야 했다.
근데 그 냉동창고에 또 들어가야 하다니. 벌써부터 입이 돌아간 기분이었다.
“ 예. 관장님도 가봐서 알잖아요. 엄청 넓고 비싼 거. ”
내가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건 당연 부유함이었다.
박지연도 입고 있는 옷이 죄다 명품인 걸 봐선 그리 못 사는 집안은 아닌 거 같지만 부모님이 돈이 많은 거랑 내가 많은 거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우리집에 있는 냉장고에서부터 하물며 형광등까지 모두 내가 직접 벌어서 마련한 내돈내산이었다.
“ 그래도 거긴 너무.. ”
“ 그래요. 가죠. ”
우돈이 너무 춥다며 거절하려던 찰나, 발끈한 지연이 오기를 가지고 그녀의 초대를 승낙했다.
" 그럼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 "
지연이 가겠다고 하자 우돈도 군말 없이 탈의실로 향했다.
그는 아침에 입고 온 옷 대신 지난 겨울에 갖다 논 두꺼운 후드와 패팅 점퍼를 꺼내입었다. 그리고 지연이 몫으로도 넉넉한 잠바 하나를 챙겨 나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시베리아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 너 감기 걸렸어? ”
낮기온이 24도인 이 가을 날씨에 혼자만 오버하는 우돈을 보며 지연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감기에 걸려도 패팅은 심하게 오버스러운 거 같은데..
“ 아니. 가보면 알아. 그 집이 비싸긴 더럽게 비싼데 난방이 잘 안 되거든. ”
***
그렇게 삼청동으로 가는 택시를 앞에 두고 두 여자는 알게 모르게 다시 기싸움을 벌였다.
“ 그쪽이 앞에 타세요. ”
오초희는 차우돈과 나란히 앉기 위해 박지연을 앞좌석으로 보내려 했다.
“ 언니가 앞에 타세요. 언니네 동네 가는 건데. ”
반대로 박지연은 나를 앞으로 보내려 잔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 그럼 내가 앞에 앉을게요. 둘이 뒤에서 편하게 가세요. ”
허나 눈치 없는 근육 바보의 활약으로 나와 박지연이 나란히 뒷자석에 앉게 됐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우린 서로 등을 돌린 채 창문만 바라 봤다.
‘ 너는 이게 편안해 보이냐? ’
백미러로 차우돈의 앞머리가 보이길래 한껏 노려봤다.
차라리 내가 앞에 탈 걸.
이렇게 뻘쭘히 가느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휴대폰으로 배달 음식을 여러개 주문했다.
치킨에 족발에 등뼈찜까지. 박지연의 식성이 어떻건 무조건 고기였다.
내가 까마득히 어렸을 때에는 그렇게 고기가 먹고 싶어서 내 손목을 물어뜯기도 했었더랬다.
“ 다 왔습니다. ”
다행히 배달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차우돈은 이미 한번 와봐서인지 문을 열기 전에 패딩 지퍼부터 단단히 채웠다.
그리고 따로 챙겨온 패딩 하나를 지연에게 건넸다.
“ 너도 이거 입어. 여긴 남극이거든. ”
무슨 농담이냐고 하려다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지연도 순순히 패딩을 위에 걸쳤다.
그래도 집이 추워봤자 얼마나 춥겠다고.
그렇게 만만히 생각했다가 오초희가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에 그만 폐가 얼어붙는 줄 알고 식겁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이 어는 거 같아 입을 벌리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아무리 비싼 곳이라도 이곳에서 절대 살고 싶지 않았다.
***
다행히 몸을 녹일 수 있는 따듯한 요리들이 연달아 도착했고, 난 추워하는 인간들을 위해 보일러를 최대한으로 올려줬다.
인간은 허약해서 조금만 추워도 금방 얼어죽고 마니깐. 난방비 폭탄을 물지언정 이 가녀린 생명의 비명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 다 고기네요? ”
박지연이 내가 주문한 음식들을 보고 탐탁지 않은 얼굴로 딴지를 걸었다.
고기가 뭐 어때서. 네들이 고기라고는 주인댁에서 먹다남긴 뼈다귀로만 끓여먹는 사골국이 전부였던 그 시절의 눈물 젖은 유례를 알고나 하는 소리냐.
하여간 요즘 것들은 배가 불러서 문제였다.
“ 샴페인 마실래요? ”
그리하여 저 까탈스런 여자를 혼내주고자 고히 아껴두었던 샴페인을 꺼내들었다.
이 샴페인으로 말하자면 일단 겁나 비쌌다.
웬만한 양주보다 몸값이 더 나가 유럽의 귀족들이 정말 마음에 드는 이성을 꼬실 때에만 겨우 사준다던 황금보다 귀한 술이었다.
문제는 이 술이 어찌나 달콤하고 황홀하던지 생각없이 먹다 보면 인간도 네 발이 달렸다는 걸 증명하는 진귀한 현상이 벌어지곤 했다.
어디 박지연의 밑바닥은 얼마나 다채로울지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 샴페인이요? ”
고기에는 반응이 없던 박지연이 술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 네. 덩 페리냥이요. ”
물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덩 페리냥이랑은 차원이 다르지만.
여기에 내가 뭘 탔을지는 님들의 심신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비밀로 해두겠다.
“ 저도 그거 자주 마시는데. 잘 됐네요. ”
“ 이걸 자주 마신다고? "
그럴 리가. 이거 한 병에 몇백은 하는 건데.
나도 비싸서 잘 안 마시는 술을 자주 먹는다고 하니 박지연의 말이 어딘가 구라 같았다.
알고보면 이 여자 완전 입벌구 아니야?
어쩜 저 명품들도 모두 메이드 인 코리아일지도 몰랐다.
" 예. "
사실이건 아니건 박지연은 끝까지 새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어색하게 시작된 술자리는 덩 패리냥의 위력으로 단 30분 만에 50년지기 고향친구를 만난 듯 정겹고 푸근해졌다.
그래서일까. 차우돈이 50년지기 친구에게나 해야 할 말들을 나에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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