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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쿨한 다크 판타지 전문 작가의 서재

판타지 세계에서 복싱 좀 하자는데 왜 뭐가 불만이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구선장
작품등록일 :
2021.02.07 23:39
최근연재일 :
2021.03.19 00:34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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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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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6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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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10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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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5화 - 사도의 사명

DUMMY

여신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그저 희미해져가는 자신의 위상을 되찾을 동안만 그를 잡아둘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일전에도 선뜻 돌려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훌륭하게 사도로서 그녀의 위상을 빠르게 되찾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를 계속 자신의 사도로서 붙잡아두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의 강인한 자아는 신앙이 필수적인 사도로서 오래 있기에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여태까지 여신인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가 아닌, 오롯이 그 자신의 삶을 위해서 싸워 왔을 뿐이다.


[그것은 말하기 곤란하다.]

“왜? 뭐가 문제야?”

[이것을 말하게 되면 필시 그대를 원치 않는 갈등에 휘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려들어 있다고.”

[그대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아니한가?]


여신의 질문에 바스타프의 말문이 막혔다.

분명 하프오크로 전생할 걸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하프오크라는 점만 어떻게 해결되면 나쁘지 않아.”

[그대는 신앙에 헌신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 무리해서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할 필요는···.]

“확실히 신앙에 헌신한다던가 하는 문제는 흥미 없고 협조하고 싶지도 않아.”


확실하게 답하는 바스타프의 태도에 그녀의 형체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착잡했다.


이대로라면 신앙에 헌신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새로운 사도를 찾아야했다.

“근데 말이지···저번에 약속을 했잖아?”

[······?]

“내가 당신을 도와주면, 당신이 나와 교제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이야기.”


짖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바스타프였다.

“헷, 기왕 전생한 인생이라면 여신과의 로맨스도 꼭 좀 해보고 싶거든.”

[그런 불경한 마음으로 나의 사도를 자처할 셈인가.]

“당신이 요구한 거잖아?”

[······.]


신성력을 발휘하기 위해서였다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던 그녀는 바스타프 몰래 아랫입술을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물론 나도 맨입으로 ‘옛다 힘 되찾아주었으니 내 여자가 되라!’ 이런 이야기는 안 해.”

[······.]

“당신이 감동할 정도의 위업은 달성해 줘야겠지. 안 그래? 명색이 여신님인데 그 정돈 해야지.”


잠시 침묵하고 있던 여신이 고개를 저으려고 하자, 바스타프는 허공을 걸어서 여신의 뺨을 붙들고 눈을 마주쳤다.

“···말해보라고. 뭐가 되었던 어울려 줄 의향은 있으니.”

[······!]


결국 작게 한숨을 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멀리, 사막과 동토가 뒤섞인 황폐한 땅···중간계의 인간들이 용병왕국이라 부르는 곳.]

“호오. 꽤 먼 곳인가 보군?”

[그렇다. 여기서부터 가려면 드래곤 산맥을 넘어야 하는 곳이지.]


잠시 뜸을 들인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토지의 사막 어딘가의 지하에···오래 전 나를 섬기던 이들의 도시와 대신전이 잠들어 있다.]

“그걸 찾아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바스타프에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럼?”

[지금 그 도시는 마족들에 의해 점령당해, 신전은 그 추악한 자들의 마신 신앙을 위한 장소로 모독당하고 있다.]

“···마족 무리와 싸워야 한다는 소리겠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신을 보며 바스타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거, 드래곤들 보다 강한가?”

[졸개들이라면 그대가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위에 놈들은 꽤 강한가 보군.”

[그렇다. 그들은 나의 신전을 통해 마신들의 권세를 빌려 사용하고 있다. 필시 힘든 사투가 될 것이다.]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일단 용병왕국은 여기서 꽤나 먼 곳임은 분명해 보였다.

일전에 들은 바로는 남부 연맹 쪽 국가라고 했었던가.


“잠깐만, 혹시나 해서 확인하는 건데, 당신 그 도시 위치는 정확히 알고 있는 거 맞지?”

노파심에 입을 연 바스타프가 여신을 바라보면,

[면목이 없다. 위상을 잃으며 나의 기억도 상당부분···.]

“···그리고 그 사막이 넓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


고개를 숙이는 여신의 모습을 보며 바스타프는 머리를 긁으며 골치아픔을 느꼈다.

드넓은 사막에서 모래 속에 깊이 파묻힌 폐허를 찾아내라니.

확실히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뭐, 알았어. 조만간 기회가 되는 대로 그쪽으로 가 봐야겠군.”

[······!]


예상 외로 쉽게 결정하는 모습에 동요한 그녀가 손을 뻗어 당황한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대 혼자서는···.]

“알고 있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기사왕국이 되었건 어나더 블러드가 되었건···친구들을 사귀어서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야겠지.”


단순히 맘에 안 드는 녀석을 패주는 것과 어머니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바스타프의 삶의 첫 목표가 정해졌다.

다름이 아닌 여신과의 교제를 위해 여신의 성지를 되찾아 준다는 원대한 목표가.

[설마 욕정 따위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그대는 정말 기이한 존재다.]

“남자는 대체로 이런 거야.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걸. 당신이 후에 남성 신도들을 모을 생각이라면 특히나.”

[······.]


*


날이 밝았다.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난 바스타프는 이미 일어나서 몸을 풀고 있는 어나더 블러드의 전사들을 보고 멈칫했다.

“이봐. 당신들은 항상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가?”


슬그머니 근처에서 단창을 들고 기초 연습을 하던 하프엘프에게 질문을 던지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오늘처럼 공격이 있는 날이면 다들 이런 식이지.”

“과연···주체를 못 하겠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바스타프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복수라는 것은 마치 모래가 든 과실과 같아서, 입에 넣고 씹기까지는 무척 달콤하고 향긋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에 넣고 씹어 삼키게 되면 안에 든 모래가 터져 나와 입 안을 타고 먹기 전보다 더 큰 고통과 허무감을 선사했다.

“당신도 무언가 사연이 있어서 여기 있는 건가?”

“···듣고 싶어?”

“······.”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하프엘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는 인간에게 노예로 팔려와 날 낳기까지 2명의 아이가 생겼지만 모두 강제로 낙태 당했지.”

“······!”


생각보다 더욱 끔찍한 이야기에 바스타프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으니.

“···결국 나를 낳은 후에 그것이 들켜서 주인의 부하라는 놈들에게 강제로 당한 뒤, 잘게 토막이 나서 가축의 사료가 되었다더군.”

“자네, 이름이?”


분명 복수는 모래가 든 과실이다.

하지만 여기 모인 전사들 모두가 이 하프엘프 청년과 비슷한 사정을 품고 있는 것이라면···.

“바리드. 그냥 바리드야.”


이름을 말하면서도 성씨는 없다는 것처럼 넘긴 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이름을 말하면서도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리드. 난 바스타프다. 자네의 어머니 일은···.”

“위로는 됐어. 당신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바스타프는 뜨끔했다.

멧서도 그러했지만, 이곳의 복수자들에게 있어 바스타프는 이레귤러였다.

하지만 바리드는 선뜻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뭐가 어찌 되었건, 자네는 이렇게 동포들의 복수를 위한 혈투에 동참하기 위해 여기 와 있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응원을 받은 셈이야.”

“아.”


엉겁결에 악수를 하면서도 바스타프는 그에게 뭐라 말을 해 줘야 좋을지 난처했다.

하지만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전사들은 움직일 때가 되었다.

“자! 가자! 피를 볼 시간이다-!”


늑대인간의 포효소리와 함께 어나더 블러드가 행동을 개시했다.


정보대로 상단이 지나다니기엔 적합하지 못한 덜 포장된 샛길을 통해 나귀들이 이끄는 짐마차 행렬이 밍기적 밍기적 길을 타고 있었다.

짐마차에는 상품이 분명한, 철창에 갇힌 이종족들이 줄줄이 실려 있었다.


행렬을 이끄는 상인들과 용병들은 입을 열지 않고 조용했다.

상품인 이종족들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낌새가 보이면 눈을 부라리며 위협해서 조용히 시키기까지 했다.


숲 속, 아니 동물이 있을 법한 모든 곳은 그들에게 있어 적진이나 다름 없었다.

어나더 블러드의 전신은 엄연히 ‘동물 폭력단’으로 유명했던 ‘무대포동’이라는 폭력집단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최대 무기 중 하나가 바로 시궁창 쥐들을 시작으로 비둘기와 맹금류 등을 모두 총괄하는 방대한 정보망이었다.

즉 이런 숲 속에 사는 생물들 중 반절은 어나더 블러드의 정보원이라는 뜻.

자칫해서 소리를 냈다가 들키면 기다렸다는 듯이 어나더 블러드의 복수귀들이 떼로 몰려와 그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다진 고기나 피걸레로 만들어 놓을 게 뻔했다.


어떻게든 눈에 안 띄려고 마차 바퀴에도 가죽을 덮어 소리를 줄이고 수레도 말 대신 얌전한 나귀들로 끌도록 했다.


본래는 철창 위에 천을 덮어야 했지만 얼마 전 천을 덮어놓은 사이 탈출을 시도하던 드워프가 한 명 있었던 탓에 천은 덮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렬을 이끌고 있는 와중, 푸드득 하는 소리가 한 용병의 귓가에 들려왔다.

“······!”


흠칫한 용병이 그쪽을 바라보면, 웬 비둘기 한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서 부리로 자신의 날개를 손질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꿀꺽.


그것을 발견한 다른 용병들도 마른침 삼키는 소리를 내며 상인들에게 손짓으로 조심하라는 신호를 주었다.

이런 외진 숲속에 비둘기가 혼자서, 그것도 하필 행렬 바로 옆에 다가와서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이건 이미 걸렸다는 뜻이었다.


조심스럽게 소리를 죽이고 검을 뽑아 든 용병들이 행렬 바깥을 극도로 경계하며 움직였다.

이미 놈들은 와 있을 터.

그저 자신들이 습격하기 좋은 타이밍을 고르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젠장 젠장 젠장할-!”

“이, 이봐?! 무슨 짓을 하려는···?!”

극도의 긴장감을 버티지 못한 한 신참 용병이 씹어뱉듯이 외치며 석궁을 조준했다.

놀란 동료 용병이 그만두라고 팔을 뻗어 가로막아 보았지만,


“죽어라! 죽으라고 이 망할 조류 새끼야! 어나더 블러드고 카프틴이고 나발이고 우린 무섭지 않다고-!?”

“야 이 미친놈아! 그 입 안 닥쳐?!”


실랑이 와중에 쏘아진 석궁의 볼트가 비둘기가 앉아 있던 나무 줄기에 꽂히자, 흠칫한 비둘기가 휙하고 날아오른다.

다행히 비둘기가 맞지 않았음을 확인한 고참 용병이 안도하는 순간,

그의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

“잡았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붉은 것이 피임을 알아채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25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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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화 - 피는 피로 씻는다. 21.03.12 33 0 11쪽
» 25화 - 사도의 사명 21.03.10 36 0 11쪽
25 24화 - 어나더 블러드, 입단(2) 21.03.09 35 0 11쪽
24 23화 - 어나더 블러드, 입단(1) +1 21.03.08 42 2 12쪽
23 22화 - 밀서 전달 21.03.06 45 1 12쪽
22 21화 - 다크엘프 마을, 도착 21.03.04 37 1 11쪽
21 20화 - 로터스 오브 헬(2) 21.03.03 41 1 11쪽
20 19화 - 로터스 오브 헬(1) 21.03.02 38 1 12쪽
19 18화 - 하프오크 밀사(3) 21.03.01 48 1 11쪽
18 17화 - 하프오크 밀사(2) +2 21.02.26 77 2 14쪽
17 16화 - 하프오크 밀사(1) 21.02.25 66 1 13쪽
16 15화 - 거세의 멧서 21.02.24 56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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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3화 - 왕립 검투대회(3) 21.02.22 52 1 12쪽
13 12화 - 왕립 검투대회(2) 21.02.19 61 1 13쪽
12 11화 - 왕립 검투대회(1) 21.02.19 63 1 11쪽
11 10화 - 신분은 쟁취하는 것 21.02.17 76 1 11쪽
10 9화 - 대장장이 보그렐 21.02.16 62 1 12쪽
9 8화 - 스틸 스타터(3) 21.02.15 66 1 11쪽
8 7화 - 스틸 스타터(2) 21.02.12 65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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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5화 - 뜻밖의 곤란 21.02.10 93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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