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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님의 서재입니다.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최근연재일 :
2024.09.1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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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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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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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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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3화-담금질

DUMMY



“저건 또 뭐야?”


황당한 마음이 육성으로 튀어 나왔다.

홍점이 찍힌 곳에서 내려다 본 절벽 아래에 붉은 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이 상황이 무슨 몰래카메라 같은 게 아닐까 주변을 돌아봤을 정도였다.

드라이 아이스 뺨치는 차디찬 꽃에 이어서 이번에는 붉은 꽃이란 말인가? 꽃 주변에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을 보니, 저건 십중팔구 엄청나게 뜨거운 기운을 가졌을 게 분명했다. 냉탕 온탕을 넘나드는 상황.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무협지에는 항상 극음이나 극양의 영약이 있는 곳에는 그 반대되는 성질의 것이 주변에 있기 마련이라는 소리도 있었던 것 같다.

설마 이것도 그런 상황인 걸까?

문득 저 꽃이 만약 극양의 기운을 가진 거라면, 지금 내 뱃속에 들어 앉은 드라이 아이스의 냉기도 중화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절벽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바지를 먼저 벗어 허리에 묶은 채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몸을 사리는 것보다 먹을 수 있는 건 죄다 먹어 보는 게 오히려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이 아이스를 채취해 본 경험 때문인지 나는 피처럼 붉은 꽃을 뿌리까지 파내서 들고 올라왔다. 감쌌던 바지가 타버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열기가 대단한 꽃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자마자 나는 붉은 꽃을 뿌리채 삼켰다.

고량주를 마실 때보다 오십 배는 더 뜨거운 느낌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와. 씨바.

욕지거리가 본능적으로 튀어나왔지만, 나는 곧바로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타 죽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드라이 아이스 때의 경험을 살려 나는 불덩어리를 대맥에 돌리지 않고 단전으로 이끌었다. 경험이란 게 이래서 유용한 거다.

이미 단전에 자리잡고 있던 극냉의 기운이 극열의 기운과 충돌을 일으킬 거라 생각하고 단단히 각오를 마쳤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배꼽 아래로 내려간 붉은 꽃의 기운이 아무런 충돌도 일으키지 않고 한쪽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여러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 해답을 찾을 방법이 어디에도 없는 상황.

사지가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나는 절벽을 내려갔다.


*


“우리는 이렇게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혼자서 영약을 먹으니 좋더냐?”


마면이 허벅지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말했다.


“맛있더냐? 영약.”


우두가 내 머리통을 터트릴 것처럼 짓누르며 물었다.


“아주 좋으시겠소. 선배.”


목덜미를 물어뜯던 의족 사내가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고수가 되고 싶었습니까?”

“좋겠습니다. 선배님.”


양쪽 옆구리를 파먹고 있던 총관과 백만돌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비난의 말을 쏟아냈다.


사흘 만에 만난 명부동 친구들은 더 처절하게 나를 괴롭혔다.

금단증상이 만들어낸 환각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다들 고생이 많다.”


물어 뜯기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이 거지 같은 환각은 언제쯤 멈출까?

언제까지 시달려야 할지 감도 잡을 수 없어서 한숨이 흘러나왔을 때였다.

입에서 허연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쩌저저적.


그와 동시에 두 손으로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우두의 몸이 순식간에 얼어 붙었다.

아무리 환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도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얼음을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우두의 얼굴을 만지려는데, 이번에는 콧구멍에서 시뻘건 열기가 뿜어져 나갔다.


-퍼서석!


열기에 닿은 우두의 얼음상이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지더니 수증기를 피워 올렸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옆구리에 붙어 있는 백만돌이를 향해 한숨을 내뿜었다.

그러자 우두 때와 똑같은 허연 냉기가 뿜어지며 백만돌이를 얼리고.

다시 한번 콧바람을 불었더니 콧구멍을 태울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가 날아가 백만돌이의 몸을 와장창 깨트렸다.

그렇게 밀물처럼 밀려드는 명부동 친구들 모두를 얼렸다가 깨트렸을 때. 나는 환각에서 깨어났다.

.

.

.

“정말인가?”


일주일 만에 돌아온 점로대는 내 말을 못 믿는 눈치였다.


“상우동의 자연지기가 특출난 것은 사실이나, 그런 영약이 있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었네만.”


말 만으로는 도저히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가부좌를 틀었다.


“직접 보시죠.”


운기를 시작하자, 단전에 얌전하게 자리 잡은 두 기운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은 흰 꽃의 기운부터.

대혈을 따라 기운을 움직이자, 단전을 중심으로 차가운 냉기가 퍼져나가며 몸에 살얼음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냉기가 목 위까지 다다랐을 때부터는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렸다.

경악하는 점로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기운을 단전으로 회수했다. 몸의 떨림이 완전히 멎은 후, 나는 붉은 꽃의 열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얼음이 순식간에 수증기로 화하여 전신에서 피어 올랐다.

점로대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상을 목격한 사람처럼 입을 쩍 벌렸다.


“······.”


운기를 짧게 마무리하고 가부좌를 풀었다. 냉탕과 열탕을 급하게 오갔더니 살짝 현기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음······.”


침음을 흘리며 턱을 문지르던 점로대가 물었다.


“그 꽃들이 어떻게 생겼다고?”

“하나는 눈처럼 하얀 색깔에 주변 공기를 얼리게 할 만큼 강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뿌리는 어린아이 주먹만 했고요. 잎이나 줄기는 다른 잡초와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피처럼 붉은 꽃잎을 가졌고, 주변에는 아지랑이가 일 정도로 뜨거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다른 건 흰 꽃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고요.”


내 설명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던 점로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설엽초(雪葉草)······, 화령초(火靈草)······.”

“그 영약의 이름입니까?”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네만, 자네의 설명만 듣고 보면 설엽초와 화령초가 맞는 것 같네.”

“효과가 좋은 겁니까?”

“웬만해서는 구하기 힘든 희귀한 영약이지.”

“오.”

“설엽초는 빙공 계열의 무공을 익히는 자들은 전재산을 내어주더라고 꼭 구하고 싶어 하는 영약이고, 화령초는 열양(熱陽) 계통의 무공을 익히는 자들에게는 처자식을 팔아서라도 얻고자 하는 영약일세.”


와. 그런 영약을 한꺼번에 두 개나 복용했다니. 내게도 이런 행운이 찾아 오다니.

그런데 이 영감님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운 거야? 불안하게시리.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자네 몸 속에 상반된 두 기운이 모두 들어가 있는 것부터가 문제일세.”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일반적으로 한 가지 계통의 무공만 익힐 수 있는 것이 사람일세. 특히나 빙공 계열과 열양 계열은 상극에 속하는 법이라, 동시에 익힐 경우, 주화입마를 감기처럼 달고 살 수도 있다고 하지.”

“에취!”


갑자기 재채기가 나왔다.


“문제는 또 있네.”

“······뭡니까?”

“구도문의 무공에는 빙공이나 열양 계통의 무공이 없네.”

“······.”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살행의 기본. 쉽게 흔적을 남기는 빙공이나 열양공은 애초에 살수의 무공에 맞지 않다네. 자네에게 알려 준 일곱 가지 무공도 모두 특정한 기운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에 속한 것들이라네.”

“제가 먹은 영약이 구도문의 무공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내 물음에 턱을 쓰다듬으며 뜸을 들이던 점로대가 대답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다만······ 그 기운들이 기반이 된다면 구도문의 무공은 더 이상 살수의 무공이 아니게 되겠지.”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흔적도 흔적인데······ 중용을 지키지 못하는 살수의 무공이 과연 어떻게 변할 지는 나로써도 상상할 수 없네. 짐작건대, 아주 음산한 무공이 되거나 아주 패도적으로 변하게 되겠지.”

“그건 거의 마공이나 다름 없는 것 아닙니까?”


점로대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니다.

나도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꽃을 먹었다. 조각난 단전을 회복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억지로 먹었던 거란 말이다. 그런데 그 꽃 때문에 앞으로 익힐 무공이 마공화 된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먹지 않았을 텐데.


잠깐.

찬찬히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홍점이 왜 내게 두 꽃의 위치를 알려준 걸까?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했던 홍점이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점로대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빠져 있기에, 나도 턱을 괸 채, 사고를 확장해 봤다.


생로를 보여주던 홍점.

극음의 냉기를 가진 설엽초.

극양의 열기를 가진 화령초.

조각난 단전.

생로. 극음. 극양. 조각.

극음. 극양. 조각. 생로.

조각. 극음. 극양. 생로.

······담금질.


문득 일전에 점로대가 말했던 담금질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전을 접쇠처럼 겹쳐서 담금질 하는 건 가능할까?’


담금질을 하려면 필요한 것.

강한 열과 차가운 물.


“어르신. 혹시 말입니다······.”


점로대가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봤다.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 담금질 말입니다.”

“응?”

“이 두 기운만 있으면 속성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


*


원래 점로대가 생각했던 담금질은 각심공으로 차근차근 단전과 혈맥을 안정화시킨 다음, 살심의 경지로 나아갈 즈음에 조각난 단전을 겹치고 진기로 수없이 두드리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 단계를 거치면 평심의 경지에 이를 때쯤이면 내 단전은 과거 어떤 때보다 단단해 질 거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점로대 기준으로 평심까지 사 년, 역대 문주들 평균이 팔 년 정도 였으니, 늦어도 십 년 안에는 단전의 담금질을 끝낸다는 것이 점로대의 계산이었다.


솔직히 그의 계획을 들은 후에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십 년이나 이 오지에 틀어박혀서 수련만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십 년이면 이미 오십을 넘긴 나이가 된다.

어느 세월에 십 년을 더 기다린다는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홍점이 가져다준 기연은 속성 담금질이 가능하게 해 줄 열쇠인 셈이었다.


점로대가 가져온 맛대가리 없는 벽곡단을 우적거리며 씹어 넘긴 나는 폭포 아래로 헤엄쳐 갔다.

단전을 담금질 하는 일에 폭포 아래 만큼 적합한 장소는 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 점로대도 딱히 반대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부좌를 튼 상태로 내리 꽂히는 폭포 물을 온몸을 받아내며 나는 먼저 붉은 꽃이 가졌던 열양의 기운을 해제했다.


-치이이익!


순식간에 피부에 닿는 물이 수증기가 되어 피어 올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폭포수 때문인지 용암처럼 뜨거운 열양지기도 꽤 견딜만 했다.

임독양맥을 타고 달리기 시작한 열양지기에 머리가 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열양지기를 단전으로 다시 갈무리하는 것과 동시에 빙한지기를 개방했다.


-쩌저저정!


뜨거웠던 몸이 삽시간에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북극의 한기가 전신을 내달렸다.

열양지기로 인해 혼미해졌던 정신이 번쩍하고 제자리를 찾았다.

떨어지는 폭포수가 내 머리와 어깨 위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자란 것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을 때.

나는 대맥을 돌아다니던 빙한지기를 단전으로 도인했다.


-쩌엉!


열양지기로 인해 흐물흐물해졌던 단전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치이익!

-쩌엉!

-치이익!

-쩌엉!


나는 무아지경에 빠진 채, 두 기운을 운용하며 담금질을 이어 나갔다.

과연 이 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 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결과가 내가 바라던 것이라는 걸 믿기로 했다.

허공에 뜬 채 내려다보고 있는 내 몸의 배꼽 아래에 찍혀 있는 붉은 점이 점점 더 강한 빛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폭포. 단전. 담금질. 성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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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화-담금질 24.09.15 170 7 12쪽
33 32화-절벽 기연 24.09.14 206 10 14쪽
32 31화-개백정 훈련소 24.09.13 215 9 13쪽
31 30화-무공종합선물세트 24.09.12 230 8 13쪽
30 29화-영약이 있다면 24.09.11 240 10 18쪽
29 28화-협객과 자객 +2 24.09.10 270 13 16쪽
28 27화-협객도 아니고 대협도 아니다 +1 24.09.09 287 14 16쪽
27 26화-밤새도록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1 24.09.08 308 11 14쪽
26 25화-그 잡놈이 대체 누굽니까? 24.09.07 352 12 17쪽
25 24화-당황과 분노, 그리고 공포 24.09.06 359 15 14쪽
24 23화-이름 하나는 기막히게 지었네요 24.09.05 379 15 17쪽
23 22화-하늘을 죽인다 24.09.04 412 15 16쪽
22 21화-호의를 베풀어 주신 이유 24.09.03 414 14 16쪽
21 20화-뭐라고요? 24.09.02 447 15 13쪽
20 19화-삼계탕 24.09.01 493 13 14쪽
19 18화-점로대 24.08.31 536 16 20쪽
18 17화-개고기 잘하는 집 24.08.30 590 16 14쪽
17 16화-믿어라. 염라대왕 24.08.29 623 17 18쪽
16 15화-강해질 거다 24.08.28 672 19 14쪽
15 14화-비싼 거로 사 주십시오 24.08.27 695 19 14쪽
14 13화-코끝이 시큰해졌다 24.08.26 716 17 17쪽
13 12화-혼란의 도가니탕 +1 24.08.25 729 17 15쪽
12 11화-운기조식 +1 24.08.24 761 18 16쪽
11 10화-이번 작전명은 +1 24.08.24 813 15 18쪽
10 9화-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아 +1 24.08.23 909 17 20쪽
9 8화-과거의 기억 +1 24.08.22 1,000 17 17쪽
8 7화-구했다. 나도. +2 24.08.21 1,120 19 16쪽
7 6화-귀동(歸洞) +1 24.08.20 1,149 20 16쪽
6 5화-빨리 죽어 +2 24.08.19 1,184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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