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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님의 서재입니다.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최근연재일 :
2024.09.15 12:10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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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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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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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9화-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아

DUMMY



총관이 나간 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일단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냉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 상황이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에 자주 나오는 회귀이거나 환생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과거에 읽었던 소설에 빙의한 거였다면, 현재 상황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알고 있었겠지만. 빌어먹게도 그 중 어느 하나도 내게 해당되는 건 없다.

게임으로 치자면 가히 극악의 난이도.

회사원이었던 내 삶 또한 절대 쉬운 난이도는 아니었지만, 상황은 꽤 다르다.

회사에서 잘리면 실업자가 되면 그만이지만, 여기서는 진짜로 잘리는 거다. 모가지가.

이건 문자 그대로 죽고 사는 문제였다. 빌어먹을.


내게 주어진 유일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보는 정신을 잃은 동안 보았던 과거의 장면. 이 몸의 원래 주인, 십일 호의 기억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본 장면들이 진짜 과거에 있었던 일인지, 단순한 개꿈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그렇게 생생한 꿈을 꾼 적은 없다.

만에 하나 그 장면들이 개꿈이라 할지라도······ 딱히 참고할 만한 정보도 없는 상태.

어차피 인생은 도박이다. 베팅해 볼 패라도 있다는 게 어딘가?


냉정을 되찾기 시작한 내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이 몸의 주인이 어떤 인물인 지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평살수 십일 호.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토대로 종합해 보면, 십일 호는 일반적인 평살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만큼 상당히 특별한 인물이었다.

일단, 십일 호는 살수가 되기 전에 전대 동주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다.

대막이 정확히 어디를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막에서 조난당한 전대 동주를 살려준 인연이 있었던 듯하다.

살수가 된 이후에는, 과거 이 조직이 사라질 위기에서 자신을 희생해 동주와 간부들을 구해 냈고, 말을 잃을 만큼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도 수많은 살행에서 동료들을 구해 낸 사내.

십일 호는 가히 영웅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는 사내였다.


그 영웅이 어째서 백무상이라는 수뇌부에게 첩자 취급을 당하게 된 걸까? 그것도 잃었던 말을 되찾았다는 어이없는 이유 때문에.

백무상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명부회라는, 임원 회의 같은 회의를 열어서 내 첩자 의혹을 판결하겠다는 걸까? 마음에 안 드는 부하 따위는 그냥 죽이면 되는 것 아닌가? 애초에 갈대밭에서 백무상이 칼질 몇 번만 했으면 끝났을 일이었다는 말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던 의문은 십일 호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답이 나왔다.


내 추측으로는 백무상은 십일 호에게 강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명부동에 속한 이들 중에서 간부부터 평살수, 하물며 일꾼들까지 십일 호에게 목숨 빚을 지지 않은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들 대다수는 이미 마음 속으로 십일 호에게 강한 호감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백무상은 완벽한 기회를 잡기 위해 평살수들이 죽어 나가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냉혈한이었다.

아무리 사대사자 중 하나라 할지라도, 십일 호만큼 조직의 신뢰를 받지 못할 것이 뻔했으니, 십일호는 그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터였다.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리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가 원하는 건 쉬운 죽음보다는 십일 호가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리라. 그래야 자신이 조직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일 호가 다시 말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첩자로 엮을 생각을 한 것이고, 명부회를 통해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깎아내릴 음모를 꾸민 것이다.

가히 생긴 것 만큼이나 음흉하고 찌질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머릿속에서 정 상무와 박 부장의 얼굴이 스쳤다.

그들이 내게 했던 짓들을 곰곰히 떠올려 보니, 백무상 놈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누구도 기한 내에 가능하리라고 말하지 않았던 프로젝트를 내게 맡겼다. 업무에 있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알량한 지위를 이용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빼앗고 악성 재고 판매를 시키는 것으로 열등감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결국, 그들 또한 나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거였다.

개새끼들.


나도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눈앞에서 불길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분노는 정 상무와 박 부장, 그리고 백무상을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까맣게 타버릴 것처럼 번져나가던 분노는 종국에는 나를 향했다.

나는 왜 머저리같이 정 상무와 박 부장에게 당했는가? 왜 스스로를 변호하고 나를 도와 줄 사람들을 찾아서 뛰어다니지 않았는가? 사장이라도 찾아가서 내 결백함을 호소해야 하지 않았나? 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당하고만 살았는가?

여차하면 모가지가 잘리는 이 빌어먹을 곳에서도 그렇게 살 것인가?

무협지 수백 권을 읽으면서 언제라도 한 번 쯤은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었던 세상 아닌가? 여기에서도 병신처럼 당하고 살겠는가?


분노에 가득 찼던 머릿속에서 불쑥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씨바.

여기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더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무슨 짓을 해서든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

그것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자, 못난 상급자들에게 복수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씨바. 실패한들 뒈지기 밖에 더 하겠는가?


순간, 갑자기 누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은 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 상무, 아니. 백무상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기 위해서.


*


총관이 돌아왔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총관이 아침 인사를 했지만, 애초에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

죽고 나면 잠은 원 없이 잘 수 있다.

한 때 유행했던 자기계발서에 나왔던 문구인데, 당시에는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에겐 무척이나 절실하게 와닿는 말이었다.

닷새 뒤에 당장 목이 잘릴 수도 있는데, 팔자 좋게 퍼질러 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음식을 좀 가져왔습니다.”


총관이 내려 놓은 쟁반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겼다.

워낙 생각에 집중하다 보니 배가 고픈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허기가 격하게 느껴졌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죽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총관이 침을 정리하는 동안 닭죽을 한 숟갈 떴다. 혓바닥을 굴려보니 다행히도 어금니에 끼어 있던 독단은 없어진 상태. 아마도 총관이 빼놓았으리라.

그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랬기에 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맙다는 의미로 또 한 번 총관에게 미소를 지어 준 나는 닭죽을 입으로 가져갔다.

구수하고 뜨끈한 닭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으음.”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프고 지친 심신이 스르르 치유되는 맛이었다. 이런 걸 영혼을 위한 치킨 수프라고 부르던가.

음미하듯 닭죽을 떠먹는 동안, 총관은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음식이었지만, 극심한 피로와 부상에 더해 밤새 머리를 굴려서 인지 그릇을 비울 정도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반쯤 남은 죽을 쟁반에 내려놓자, 총관이 말했다.


“아무래도 백무상이 끝장을 내려는 것 같습니다.”


걱정을 담은 노인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그냥 내가 사라져 주겠다고 하면 어떨까?”


내 물음에 총관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드리웠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질문을 던지는 총관의 눈동자에서 복잡한 감정이 읽혔다. 걱정이 반쯤, 의아함이 반의반, 남은 반의반의 반은 이해였고 나머지는 서운함 비슷한 감정이었다.

총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설령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고독은 어쩌시려고요.”


고독이라는 말이 나오자, 십일 호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단약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동주 또한 백무상 만큼 찌질한 놈 같았다.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가족같이 여겨야 할 수하들에게 고독을 먹일 생각을 했을까?


“해약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흐음······ 달포(한 달 남짓)를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뺨을 긁적이던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냥 동주를 죽여 버리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은 총관이 내 얼굴에 떠오른 장난기를 보고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흑백 사자 중에 한 명은 꼭 옆을 지키고 있는 데다가, 워낙 조심성이 많은 지라 동주님을 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만에 하나 성공한다 하더라도, 해약이 없으니 달포 안에 이 동굴 안에 있는 모두가 사이좋게 명부 구경을 하게 될 겁니다.”


총관의 말은 고독을 먹은 것이 평살수 뿐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생각할수록 백무상 뿐만 아니라 동주도 제대로 응징해야겠다는 마음이 커지고 있었다.


“음. 명부동이 단체로 명부 나들이를 간다라······ 그것도 나쁘지 않네.”


내 농담에 총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야 딱히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만······. 모두와 함께 갈 수 있으면 오히려 더 좋겠지요.”


이 영감님, 갑자기 나이 드립으로 훅 들어오시네.

총관의 농담에 나는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개죽음을 당할 순 없잖아?”

“그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음······.”


심각한 얼굴로 침음을 흘리는 총관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총관.”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는 없어.”

“······네.”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겠어?”


나는 총관을 향한 눈빛에 진심을 담았다.

백무상과 동주를 응징하고 고독을 해결하겠다는 내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편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총관은 왠지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같았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총관이 내게 보여줬던 호의적인 표정과 반응, 말투와 태도 등을 종합해 판단한 결과였다.

이건 뭐랄까? 불혹이 넘어서까지 직장 생활을 하며 여러 인간 군상을 겪어 봤기에 알 수 있는, 속된 말로 짬바에 기반한 것이었다.

앞에서는 실실거리다가 뒤돌아서면 뒤통수를 치는 박진호 같은 놈들의 면상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진심이 총관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나를 마주 보는 총관의 탁한 눈동자에 생기가 스쳤다.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나는 마주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다.

그는 내 계획에 꼭 필요한 할 사람이었다.


“먼저 물어볼 게 몇 가지 있어.”

“말씀하십시오.”

“명부회에서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우두 외에 또 있을까?”

“마 사자는 십일 호 님의 편을 들어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총관이 내 편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나에게 보여 주는 눈빛이나 행동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만약 이게 연기라고 한다면 아카데미 연기상이라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두는 비록 생긴 게 좀 많이 특이하고 말은 어눌하지만, 그가 나를 형제나 친한 친구처럼 대한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마면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 본 적이 없다.

마면이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내 작전의 성공 확률은 크게 요동친다.


“마 사자는 십오 년 전 그날부터 십일 호 님께 빚을 갚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흑진 작전?”

“네. 마 사자는 그날 십일 호 님이 자신의 목숨을 다섯 번 구했다며, 그 중 한 번만이라도 빚을 갚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요. 이 얘기는 이 동굴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음.”


그런 사연이 있었군.

일단 우두와 마면은 내 편이라는 소리.


“좋아. 흑무상은 어때?”


내 물음에 총관이 고개를 저었다.


“흑 사자는······ 십일 호 님의 편에 서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백 사자보다 더 암계에 능한 사람이 흑 사자입니다.”

“내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그런데······ 흑백무상은 어떻게 명부동에 들어온 거지?”

“동주께서 남만에서 돌아오실 때, 함께 왔습니다. 동주께서는 이미 그들을 공석이던 흑백무상 자리에 낙점한 상태셨습니다.”

“남만?”

“흑진 작전 이후에 전대 동주께서 동주님을 남만에 피신시키셨습니다. 아무래도 중원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셨으니까요.”


뭔가 내가 모르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지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흑백무상은 끝까지 나를 첩자로 몰겠군.”

“그렇겠지요.”

“결국 최종 판단은 동주가 내리게 되겠지?”

“네.”

“내가 첩자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겠군.”


자조적인 말에 총관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 또한 동의한다는 뜻.

어쨌든 명부회는 내 예상대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임원회의나 주주총회 같은 회의체였다.


“만약에 말이야.”

“네.”

“흑백무상 중에서 하나가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지?”

“네에?”


듬성듬성한 수염만 남은 총관의 아래 턱이 바닥에 닿을 것처럼 툭 떨어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를 들어 내가 백무상에게 비무를 신청해서 그를 죽여 버리면 백무상 자리가 비는 거잖아. 그럼 우두와 마면만 내 편을 들어 준다면 쪽수에서 밀릴 일은 없지 않나 해서.”

“원칙적으로야 그렇긴 합니다만······.”


총관이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백 사자를 무슨 수로 이긴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총관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주며 대꾸했다.


“우두를 좀 불러줘.”


*


“보자고? 나.”


우두가 들어오자, 좁은 동굴 안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새삼 우두의 덩치가 크게 느껴졌다. 현대 같았으면, 분명 올림픽에서 메달 몇 개는 족히 땄을 피지컬이었다.

침상에 앉은 채로 고개를 쳐들고 쳐다보고 있으니, 우두가 침상 옆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제야 나와 시선의 높이가 비슷해진 우두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우두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뭔데?”


내가 우두를 불러달라고 한 것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였다.

십일 호의 몸으로 눈을 뜬 이후,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 본 싸움은 적묘 사냥이 전부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십일 호의 무위는 고수라고는 절대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중년인을 몰아 붙였을 때 보였던 그 붉은 점들.

그것이 뭔지, 어떤 상황에서 보이는지, 또 그 점들을 이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왠지 그 불가사의한 붉은 점들이 내 명줄을 쥐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를 공격해 줬으면 해.”


내 말에 우두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꺼끌한 수염이 난 턱을 긁적이던 우두가 말했다.


“죽을 텐데?”


뭐라고?

우두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못 쓰잖아? 내공.”


음. 설마 했는데 진짜 내공을 못 쓰는 거였군.

총관이 단전과 혈맥에 무슨 변화가 없냐고 물었던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나?

하긴, 말을 잃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당했으니 단전이 남아났을 리가 없을 터였다.

단전이 박살 났으면 내공을 쓸 수 없다는 건 상식인 거고.


“후······.”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왔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도 없는 일.

다시는 만년 과장 이대로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나 아니었던가?

애초에 내공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백무상을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우두를 향해 말했다.


“물론 내가 죽을 만큼 위험한 공격을 하라는 소리는 아니야. 다만, 실전처럼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살벌하고 실감나게. 음. 쉽게 말하면 실전에 가까운 비무나 대련이라고나 할까? 이해가 가나?”


동주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려 보기도 전에 우두에게 맞아죽기 싫었기에, 나는 최대한 쉽게 설명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두가 물었다.


“때린다. 죽지 않게?”


우두의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답답했지만, 일단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두는 어려운 수수께끼를 만난 듯, 묘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슷해. 하지만 직접 때려서 숨만 붙여 놓거나 어디를 부러트리는 것도 안 돼. 여기 팔, 다리 이런 데 부러뜨리면 안 되고, 여기 머리, 가슴, 배, 이런 데도 터트리면 안 된다고. 알겠지?”


나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필사적으로 설명했다. 흑백무상을 상대할 비장의 한 수를 찾기도 전에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온몸의 뼈가 부러져 반 병신이 될 상황은 어떻게든 피해야 하니까.

내 말을 듣던 우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아. 이거 불안한데.


“왜 그러는 거지? 갑자기.”


우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우두의 눈을 마주보며 대답했다.


“내 십일장생이라 불리게 된 이유를 알아?”


내 물음에 우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죽지 않지. 활강시는.”


우두의 대답에 나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내공도 못 쓰는데, 십오 년이 넘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나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우두가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싫어한다. 활강시. 염라대왕이.”


어린아이나 할 법한 대답이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어쩌면 우두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르니까.

나는 커다란 우두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나도 한때는 그런 줄 알았는데······.”


우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내 얼굴을 보고 있던 우두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좋다. 그 얼굴.”

“웃으니까 네 얼굴도 보기 좋다. 우두.”


이를 들어내며 웃은 우두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간다.”


응? 우두야? 뭐라고? 잠깐만. 야! 잠깐만!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진짜로 솥뚜껑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우두의 손바닥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와. 씨바. 저거 맞으면 머리가 납작해 질 거다.

욕지거리가 입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에. 등골에서 찌릿한 전기가 흐르며 고개가 저절로 뒤로 빠졌다. 내 의도와는 상관 없이 반사적으로 나온 움직임이었다.

갈대밭에서 중년인이 날린 검기를 피했던 때에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십일 호의 몸은 갑작스러운 기습을 본능적으로 피하는 능력을 지닌 건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좀 더 확실해 졌다.

그렇다면 승산이 조금은······.


-철썩!


그때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반사적으로 공격을 피하려던 내 머리가 침상 옆에 붙은 동굴 벽에 막힌 순간. 우두의 솥뚜껑이 내 싸대기를 직격한 것이다.

와. 이 무식한 새끼.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시야가 급격히 기울더니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히죽거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두의 오른쪽 어깨에 얼핏 붉은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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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협객도 아니고 대협도 아니다 +1 24.09.09 287 14 16쪽
27 26화-밤새도록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1 24.09.08 308 11 14쪽
26 25화-그 잡놈이 대체 누굽니까? 24.09.07 350 12 17쪽
25 24화-당황과 분노, 그리고 공포 24.09.06 358 15 14쪽
24 23화-이름 하나는 기막히게 지었네요 24.09.05 379 15 17쪽
23 22화-하늘을 죽인다 24.09.04 411 15 16쪽
22 21화-호의를 베풀어 주신 이유 24.09.03 414 14 16쪽
21 20화-뭐라고요? 24.09.02 447 15 13쪽
20 19화-삼계탕 24.09.01 492 13 14쪽
19 18화-점로대 24.08.31 536 16 20쪽
18 17화-개고기 잘하는 집 24.08.30 589 16 14쪽
17 16화-믿어라. 염라대왕 24.08.29 623 17 18쪽
16 15화-강해질 거다 24.08.28 672 19 14쪽
15 14화-비싼 거로 사 주십시오 24.08.27 695 19 14쪽
14 13화-코끝이 시큰해졌다 24.08.26 715 1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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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화-이번 작전명은 +1 24.08.24 812 15 18쪽
» 9화-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아 +1 24.08.23 909 17 20쪽
9 8화-과거의 기억 +1 24.08.22 1,000 17 17쪽
8 7화-구했다. 나도. +2 24.08.21 1,118 19 16쪽
7 6화-귀동(歸洞) +1 24.08.20 1,149 20 16쪽
6 5화-빨리 죽어 +2 24.08.19 1,184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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