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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님의 서재입니다.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최근연재일 :
2024.09.15 12:10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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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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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18화-점로대

DUMMY



저 새끼가 왜 여기서 나와.

급하게 고개를 숙이려다가 그러면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아서,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장태보를 불렀다.


“태보야. 손님 오셨다.”


일부러 쉰 목소리를 냈더니 목이 따끔거렸다.

엽차를 가지고 나오던 태보는 내 탁자에 찻주전자를 내려놓고는 곧장 새로 온 손님들에게 향했다.


“어서 옵쇼!”


객잔에 들어와 탁자에 둘러앉은 일행은 모두 셋이었다.

곁눈질로 얼굴을 보니, 나와 우두가 맞닥뜨렸던 그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맹(盟) 자가 수놓인 무복이 아니라 동일한 복색의 회색 장삼을 걸치고 있었는데, 가슴팍에 구름 모양이 수 놓아져 있었다.

흠. 저게 무슨 문양이지?


“아이고. 종남의 고수 분들이셨군요.”


찻주전자를 내려놓던 태보가 허리를 숙이며 굽신거렸다.

그 말을 들은 나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종남?? 조옹나암? 저 놈들이 종남파였다고?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처음으로 만난 명문 정파의 제자들.

그런데 나는 며칠 전에 그들의 손에 죽을 뻔했다.

무협 공인 기피 직종인 살수에게는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저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곳에서 이런 상태로.

나는 최대한 그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태연하게 엽차를 홀짝였다.

그럼에도 잘 생긴 젊은 놈은 자꾸 이쪽을 힐끔거렸다.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이상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눈치 빠른 태보가 잽싸게 물었다.

허리에 찬 행주에 연신 손을 닦으며 주문을 받는 자세는 글로만 봤던 점소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닭 국물을 넣은 소면과 물만두 두 접시. 요리는 남전계퇴(南煎鷄腿)로 내어 주게.”


주문은 중년인의 입에서 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뿜을 뻔했다.

음. 종남파는 역시 남전계퇴인가.


“술은 어떠십니까?”

“필요 없네.”

“네.”


아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인 태보가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왕숙! 소면 네 그릇, 물만두 두 접시, 남전계퇴 대자요!”

“알았다!”


주방에서 왕충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쯤에서 나는 자리를 피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아무리 얼굴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다고는 해도, 저들이 나를 못 알아볼 거라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아까부터 줄곧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젊은 놈의 시선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 이렇게 위축될 일도 없었겠지만, 지금 내 실력으로는 가장 어린 놈과 붙어도 금방 목이 잘릴 게 뻔했다.

빨간 점이라도 보였다면, 승부를 걸어 볼지, 어디로 도망 칠지 고민했겠지만, 내 시선이 닿는 곳 그 어디에도 빨간 점은 보이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왜 저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걸까?


그 이유야 어찌 됐건 계속 이렇게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는 더 의심을 살 것 같아서, 나는 헛기침을 하며 태보를 불렀다.


“태보야. 올라가 있을 테니 점로대가 오면 불러 다오.”


마른 안주를 닮은 주전부리를 내어 오던 태보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저기······.”


종남파의 잘생긴 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소?”


아. 씁. 들켰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처음 뵙는 분 같소만······ 뉘신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젊은 검객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실례했소이다. 나는 종남의 이대제자 채준(蔡俊)이라 하오. 귀하의 존성대명을 물어도 되겠소이까?”


무협지에서 수십, 수백 번 읽었던 전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힌 녀석은 대뜸 내 이름을 물어왔다.

목소리에서부터 자신이 종남파라는 명문 대파의 제자라는 자부심과 긍지가 넘치도록 느껴졌다.

문득 몇 년 전에 업계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대기업 사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쟁 상대를 찾아볼 수 없는 굴지의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긍심에 말끝마다 자기 회사 이름을 붙였던, 무척이나 목이 뻣뻣했던 친구였다.

채준은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지만, 그의 표정과 태도에서는 그때 그 사원처럼 무의식에서 나오는, 상대를 아래로 보는 듯한 거만함이 깔려 있었다.


잠시 대답을 고민하던 나는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 종남파의 이대제자 앞에서 존성대명이라니 가당치 않소이다. 그냥 이 아무개라고 부르시오.”


그 동안 읽었던 무협지 지식을 최대한 살려 대답한 나는 채준의 표정을 살폈다.

사문인 종남파를 추켜세워줘서 인지 녀석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소이까? 아무리 봐도 낯이 익어서 말이외다.”


그 정도 비위를 맞춰 줬으면 그냥 넘어갈 만도 할 텐데, 집요한 놈이었다.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른 기침을 하며 말했다.


“쿨럭! 몸에 병이 깊어 몇 년 째 이곳 향곡현을 떠난 적이 없소만······.”

“흠······.”


내 실감 나는 연기에도 채준은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최근에 산서(山西)의 오대산(五臺山) 근처를 지난 적이 없소이까?”


아. 이 집요한 새끼.


“글쎄. 그런 기억은 없소만······.”


고개를 저은 나는 태보를 향해 말했다.


“태보야. 점로대가 오면 불러다오. 나는 올라가서 좀 쉬고 있으마.”

“네. 이따가 죽이라도 좀 올려다 드릴게요.”


태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이보시오. 기다려 보시오.”


채준이 전광석화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탁자를 가로질러 오더니 내 팔을 잡으려 했다.

그때였다.


“멈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객청을 채웠다.

모두의 시선이 객잔 입구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땅딸한 체구의 노인이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얼굴에 붉은 볼과 코를 가진 것이 왠지 술을 좋아할 것만 같은 인상이었다.

노인은 커다란 포대를 어깨에 짊어진 채, 채준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 게 좋을 겝니다.”

“왜······ 그러시오?”


채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노인이 턱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풍창(大風瘡) 환자입니다.”

“헉!”

“헛!”


노인의 말에 채준 뿐만 아니라 탁자에 앉은 일행들도 덩달아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대풍창이라니? 그게 무슨 병이었더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채준은 이미 바람처럼 다시 탁자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채준의 얼굴은 마치 더러운 오물을 본 사람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노인장. 저자가 나병(癩病) 환자라는 말씀이시오?”


탁자에 앉은 중년인이 노인에게 물었다. 그는 채준과 다른 두 젊은 제자만큼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진 않았지만, 미간에는 천(川)자가 깊게 패여 있었다.

음. 대풍창이 나병이었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는 치료 중에 누가 여기 내려오라고 했더냐! 썩 다시 방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중년인의 질문에 대답한 노인이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음.

살짝 당황했지만, 저 노인이 나를 나병 환자로 만든 이유가 있겠지.

나는 노인이 나를 곤경에서 빼내 주려 한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빨간 점이 점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노인이 바로 생문이다.


“너, 너무 답답해서 잠깐 내려와 봤습니다.”

“내가 아직 바깥 바람을 쐬면 안된다고 누차 얘기하지 않았느냐? 이제 막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건만. 쯧쯧.”

“죄송합니다.”


나는 노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계단을 올랐다.

등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들께 못 볼 꼴을 보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사과의 뜻으로 음식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주인장이셨소?”

“네. 제가 이곳 칠정객잔의 점로대입니다.”

“음.”


짧게 침음을 흘린 중년인이 물었다.


“이곳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객잔인데, 나병 환자를 들이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소?”


채준의 사숙은 진중한 어조로 점로대를 꾸짖고 있었다.

객방으로 올라와 문을 닫았는데도 점로대의 대답은 또렷하게 들렸다.


“손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친구는 치료가 끝나가는 단계라 환부를 오랫동안 직접 만지지만 않으면 옮을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기 소협께 조심하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나중에 소협이 언짢아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점로대 또한 정중한 말투였지만, 결국 그는 나중에 내가 나병 환자임을 알게 되었을 때, 채준이 소동을 부릴까 봐 말렸다는 뜻처럼 들렸다.

저 영감님.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 마는 성격 같았다.


“왕충! 돼지고기가 싱싱해서 오화육(五花肉)을 끊어 왔다. 오늘은 동파육(東坡肉)이 좋겠어.”

“어르신. 동파육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

“괜찮다. 좋은 오화육은 동파육이 제격이지.”

“알겠습니다.”


왕충과의 대화가 짤막하게 들려오고.


“식사를 하고 계시면 손님들께도 동파육을 내어 드리리다. 아. 물론 동파육 값도 받지 않겠습니다.”


점로대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결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종남파는 대풍창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거리를 벌리며 나를 마치 징그러운 벌레나 오물 보듯 했다.

그런 자들이 과연 이곳에서 계속 식사를 하려 할까?

나는 방문에 귀를 붙이고 종남파의 대답을 기다렸다.


“됐소. 우리는 그만 가 보겠소.”


그러면 그렇지. 그들의 대답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가기 전에 충고 하나 하겠소.”

“하시지요.”

“망하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객잔에 나병 환자는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대협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성대명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 귀에는 왠지 비꼬는 것처럼 들렸지만, 중년인은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종남의 장원교(張源僑)라 하오.”

“아. 알고 보니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신 종남의 풍뢰검(風雷劍)이셨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누추한 곳을 이렇게 방문해 주신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야 할 정도인데, 식사 한 끼 꼭 대접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아무리 들어도 강호의 명숙을 향한 예의와 존경이 담긴 말이었지만, 내 귀에는 점로대가 장원교와 종남파를 교묘하게 놀리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괜찮소. 마음만 받도록 하겠소. 크흠.”


장원교의 헛기침을 끝으로 종남파가 객잔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점로대가 끝까지 아쉽다며 식사 대접을 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종남파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사라졌다.

와. 아무리 나병 환자가 머무는 곳이라 해도 이렇게 급하게 가나?


황당함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종남파야 어찌 되었건, 위기에서 구해준 점로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점로대는 평범한 객잔 주인이 아닌 것 같았다. 특히나,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종남파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능숙한 그의 화술은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붉은 점, 생문을 따라간 것이 내 목숨을 구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왕충아. 동파육은 나중에 하고, 오화육은 솥뚜껑 걸어놓고 구워 먹자.”

“네? 구워 먹자고요? 지금요? 장사는 안 합니까?”


왕충의 볼멘소리가 들려오고.


“오늘 장사는 그냥 접자. 태보야. 가서 두강주나 한 독 가져 오거라.”

“네.”

“그런데 현이는 아직 안 돌아온 게냐?”

“같이 저자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

“포목점에 간다고 했었는데.”

“뭐. 어디 또 방물 가게나 다루에 갔나 보죠.”


객잔 사람들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나는 침상에 앉아 마른 세수를 했다. 얼굴을 덮은 붕대 아래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점로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자칫하면 죽을 수 있는 위기였다.

새삼 백척간두에 선 것 같은 위기감이 엄습했지만,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나약하게 주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아저씨. 내려 오시라는 데요.”


그때, 문 밖에서 태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 와서 고기 드시래요.”


나는 고개를 가볍게 털며 태보를 따라 객방을 나섰다.

왕충은 객잔 마당에 놓인 앞 간이 화로에 솥뚜껑을 걸고 고기를 굽고 있었고, 점로대는 그 옆에 놓인 작은 탁자에 앉아 있었는데, 이제 막 술독의 밀봉을 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점로대가 나를 쳐다 보지도 않고 빈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점로대가 대뜸 하대를 했지만, 나도 딱히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이가 많은 건 둘째 치더라도, 그는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은인이었다.

내가 앉자, 점로대가 술을 채운 사발을 내게 건넸다.

두 손으로 받았더니 알싸한 고량주 냄새가 코를 찌르며 올라왔다.


“두강주일세.”


이게 그 글로만 보던 두강주였구나.

나는 점로대가 들고 있는 술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내 말에 점로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슬쩍 웃었지만, 딱히 대답은 없었다.

살짝 뻘줌해 지려는 찰나에, 왕충이 솥뚜껑 위의 고기를 뒤집었다.


-치익!


음. 오화육이 삼겹살이었군.

맛있는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통삼겹을 보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넘어갔다.

솥뚜껑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점로대가 말했다.


“오화육은 여러 요리에 쓰이지.”


자신의 술 사발을 채운 점로대가 말을 이었다.


“튀겨도 먹고, 삶아도 먹고, 쪄서도 먹지. 동파육처럼. 하지만 이렇게 솥뚜껑에 구워서 소금에 찍어 먹는 게 제일 맛있다네.”


동의한다.

이 영감님······. 삼겹살에 진심인 분이었네.


왕충이 솥뚜껑 위의 통삼겹을 집게로 잡더니 칼로 썰기 시작했다.

음. 삼겹살 자를 땐 가위가 최곤데······. 그러고 보니, 쌈장도 상추도 깻잎도 마늘도 없었다. 뭔가 살짝 아쉽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무협 세계관이라는 것 빼고 아직 정확히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삼겹살 맛을 보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정말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들게.”


생각에 빠져 있는 나를 향해 점로대가 사발을 들며 말했다.

엉겹결에 사발을 따라 들었더니, 점로대가 두강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역시 무림이라 그런지 이런 외진 곳에 있는 허름한 객잔 주인도 원샷이었다.

나도 따라서 사발을 들이켜자, 점로대가 말했다.


“사람도 오화육과 마찬가지라네. 농부가 될 수도 있고 상인이 될 수도 있지. 벼슬아치가 될 수도 있고 산적이 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란 말이야. 하지만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게 있기 마련이지.”


삼겹살을 앞에 놓고 이 영감님은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점로대의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삼겹살과 직업의 상관 관계가 대체 뭐란 말인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점로대가 멋쩍은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내가 또 쓸데 없는 소리를 했군. 술이나 들게.”


내 술 사발을 채워 준 점로대는 자신의 술 사발을 채우더니, 빈 사발 하나를 더 채웠다.


“자네도 들게.”

“네.”


고기를 굽던 왕충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두강주를 들이켰다.

점로대가 흐뭇한 얼굴로 왕충을 바라봤다.

왠지 모를 푸근함이 느껴졌다. 이런 걸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라고 했던가?

삼겹살을 입안에 욱여 넣는데 문득 명부동의 주점에서 처음으로 술을 먹었을 때 생각이 났다.

우두와 백만돌이, 의족사내.

이제는 목숨을 빚진 사람들.

우두는 내가 명부동의 원래 뜻을 이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게 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이유라고 했다.


‘죽인다. 악인. 돕는다. 약자.’


악인을 죽이고 약자를 돕는다.

이게 명부동의 원래 뜻이라고 했으니, 창립 이념 같은 것이리라.

살수 조직의 창립 이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협객 느낌이라 위화감이 들었지만, 우두가 거짓말 할 일은 없을 테니, 진짜라고 봐야 했다.

명부동이 의협살문 같은 그런 조직이었다는 말인가?

명부동에 관한 건, 나중에라도 좀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삼겹살을 씹으며 나는 일단은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고독, 아니. 마약의 후유증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였다.

아직 딱히 금단증상 비슷한 건 찾아오지 않았지만,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 폭탄을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칫하면 금단증상으로 인해 백치가 될 수도 있는 상황.

이 고비를 넘지 못하면 명부동의 뜻이건 뭐건 간에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당장은 어디 갈 곳도 없으니 일단은 이곳에서 머무르며 금단증상에 대한 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총관과 왕충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간 재워 주시고 먹여 주시고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특히나 그 개고기 죽은 최고였습니다.”


나는 왕충에게 엄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총관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에, 방을 나올 때 챙겨 나온 야명주를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걸로 객방을 얼마나 빌릴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 식사와 빨래 같은 것도 포함해서요.”


내 물음에 점로대와 왕충이 동시에 대답했다.


“세 달.”

“일 년.”


나는 황당한 얼굴로 점로대를 돌아보았다. 왕충도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점로대가 시선을 피하며 먼산을 바라봤다.


“반 년으로 하시고, 나머지는 이 소저와 태보에게도 나눠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지. 커험!”


점로대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야명주를 품에 넣었을 때였다.

왕충이 잘 익은 삼겹살을 건네며 말했다.


“많이 먹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잖나.”


음.

그래 지금은 회복에만 집중하자.


나는 삼겹살을 씹으며 두강주를 들이켰다.

삼겹살에는 소주가 국룰이지만, 두강주도 꽤 잘 어울렸다.

나는 다른 생각은 잊고 술과 고기에 집중했다.

전력질주를 해서는 멀리 달릴 수 없다.

일단은 나 자신을 먼저 다독거릴 필요가 있었다.

.

.

.

“정말 맞습니까?”


왕충이 오화육을 씹으며 물었다. 점로대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맞네.”


왕충이 탁자에 엎드린 채, 코를 골고 있는 이대로를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정말 이 친구가 맞냐고 묻는 겁니다.”

“맞다니까 그러네.”

“혹시 잘못 보신 건 아닙니까? 저 친구 몸 상태를 보시고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단전은 조각 났고, 혈맥은 뒤틀리고 좁아진 상태란 말입니다. 게다가 이미 마약이 골수까지 미쳤습니다. 저런 친구가 어떻게 점로대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왕충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다가 두강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점로대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어이가 없네만······ 맞네. 저 친구의 뒤통수에 찍힌 홍점(紅點)이 지금도 선명하게 보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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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협객도 아니고 대협도 아니다 +1 24.09.09 287 14 16쪽
27 26화-밤새도록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1 24.09.08 308 11 14쪽
26 25화-그 잡놈이 대체 누굽니까? 24.09.07 352 12 17쪽
25 24화-당황과 분노, 그리고 공포 24.09.06 359 15 14쪽
24 23화-이름 하나는 기막히게 지었네요 24.09.05 380 15 17쪽
23 22화-하늘을 죽인다 24.09.04 412 15 16쪽
22 21화-호의를 베풀어 주신 이유 24.09.03 414 1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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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점로대 24.08.31 537 16 20쪽
18 17화-개고기 잘하는 집 24.08.30 590 16 14쪽
17 16화-믿어라. 염라대왕 24.08.29 623 17 18쪽
16 15화-강해질 거다 24.08.28 672 19 14쪽
15 14화-비싼 거로 사 주십시오 24.08.27 695 19 14쪽
14 13화-코끝이 시큰해졌다 24.08.26 716 17 17쪽
13 12화-혼란의 도가니탕 +1 24.08.25 729 17 15쪽
12 11화-운기조식 +1 24.08.24 761 18 16쪽
11 10화-이번 작전명은 +1 24.08.24 813 15 18쪽
10 9화-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아 +1 24.08.23 909 17 20쪽
9 8화-과거의 기억 +1 24.08.22 1,001 17 17쪽
8 7화-구했다. 나도. +2 24.08.21 1,120 19 16쪽
7 6화-귀동(歸洞) +1 24.08.20 1,150 20 16쪽
6 5화-빨리 죽어 +2 24.08.19 1,184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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