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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님의 서재입니다.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최근연재일 :
2024.09.15 12:10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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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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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35,814

작성
24.08.22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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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8화-과거의 기억

DUMMY



“넌 어쩌다가 여기 온 거냐?”


맑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나를 보며 물었다.


“동주를 살려 준 적이 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내가 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내 것이 아닌 기억을 보고 있었다.


“뭐?”


청년이 황당한 눈빛으로 물었다.


“동주님 목숨을 구해줬다고?”

“별 대단한 건 아니다. 굶어 죽을 판이길래 물과 음식을 나눠 준 것뿐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에 청년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구명지은을 베푼 은인인데, 왜 살수가 되겠다는 거야?”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허! 그럼 사자 자리라도 하나 달라고 하지 그랬냐?”

“귀찮다. 애초에 사자를 할 만한 실력도 없고.”


이번에도 건조한 대답만 돌아오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청년이 왼쪽 볼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런데 넌 안 아프냐? 아무리 고문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라고는 해도 생니를 뽑다니.”

“참을 만하다.”


청년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여하튼 반갑다. 나는 칠 호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미소를 지으며 내미는 칠 호의 손을 맞잡았다.


“십일 호다.”


*


“크헙!”


사방에 뿌려지는 시뻘건 피.

시야에 들어온 것은 가슴이 쩍 벌어진 채 폭포수처럼 피를 쏟고 있는 우두였다.

내가 알고 있는 우두의 얼굴보다 젊어 보였기에 처음에는 그의 동생이 아닌가 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우두인지 알았다.

그는 젊은 시절의 우두였다.


“개같은!”


우두는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고서도 씩씩하게 욕을 해댔다.


“우두! 뒤로 물러나!”


내 입에서 또 나왔지만, 내가 하지 않은 말.

고개를 젓는 우두의 가슴 상체 여기저기를 누르는 손가락도 분명 내 것이었지만, 내가 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것 또한 십일호의 기억이었다.


“동주를!”


검은 피풍의를 찢어 벌어진 가슴을 싸매는 와중에 우두가 소리쳤다.

십일 호의 시선이 등 뒤로 돌아갔다. 사방에 시체가 된 군인들과 흑의인들 수 십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에는 빛이 사라진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칠호의 주검도 있었다.

시체 더미 가운데에 동주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젊은 동주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가 동주임을 알았다.

건장한 체구의 초로인. 동주는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가에는 선혈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이 확실했다.


그의 옆에는 우두보다 더 긴 얼굴에 길쭉한 코가 인상적인 사내가 피 묻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전형적인 말상. 아니 보는 즉시 말대가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얼굴의 주인공은 마면이었다.

마면은 왼쪽 팔이 어깨부터 사라져 있었다.


“우두. 왔다 갔다 하기에는 시간이 없어. 동주님과 널 한 번에 옮길 거야.”


십일 호의 말에 우두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미 혼절한 상태였다.

우두를 옆구리에 단단히 껴안은 십일 호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야행복에 흰 머리띠와 검은 머리띠를 두른 채 협봉검을 휘두르고 있는 두 사내가 보였다. 백무상과 흑무상.

그들이 합공으로 상대하고 있는 자는 군복을 입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탈속한 듯 청수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그는 흑백무상이 평생 갈고 닦은 필살의 절기를 장검 한 자루로 물 흐르듯 받아내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걸까? 저 검법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보는 이의 정신을 빼놓게 만드는 유려한 검법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때, 백무상이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백무상의 얼굴이 아니었다.


“십일 호! 당장 동주님을 모시고 퇴각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십일 호의 눈에 백무상의 어깨를 뚫고 들어가는 중년인의 검이 보였다.

십일 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백무상이 일 검을 허용한 것은 순전히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던 자신 때문이었다.

어깨에 박힌 중년인의 검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백무상이 검신을 맨손으로 덥석 잡고. 흑무상이 매서운 검기를 뿌리며 중년인을 찔러가는 모습을 눈에 담은 십일 호는 고개를 돌리며 신형을 날렸다.


“갑시다.”


동주 앞에 도착한 십일 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동주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괜찮다. 우두와 마면을 데리고 가거라.”


동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주의 얼굴을 바라보던 십일 호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마면을 돌아보았다.


“마면. 동주님을 업을 수 있겠나?”


십일 호의 말에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마면이 고개를 저었다.


“동주를 데리고 가라. 나는 이미 틀렸다.”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어준 마면이 흑백무상 쪽으로 걸어갔다.

십일 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마면의 팔을 낚아챘다.


“마면! 네가 남는다고 해서 바뀌지 않아! 개죽음을 당하고 싶은 거야!”


터져 나온 일갈에 마면이 눈썹을 찡그리며 십일 호를 노려보았다.

십일 호는 마면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동주를 살리고 싶으면 당신이 그를 업어! 길은 내가 어떻게든 열어 볼 테니까!”


순간, 마면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


“동주! 당신도 개소리하지 말고 마면에게 업혀!”


십일 호의 신경질적인 호통에 동주가 십일 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을 마주 노려본 십일 호가 씹어 뱉듯 말했다.


“여기서 포기할 거야? 내 동기들을 개죽음으로 만들 거냐고. 씨발.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대막(大漠)에서 구해 주지도 않았을 거야.”


십일 호의 얼굴을 노려보던 동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게 또 목숨을 빚지라는 소리더냐.”

“빚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이미 천라지망이 펼쳐졌어. 그런 배부른 소리는 살아남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퉁명스럽게 내뱉은 십일 호가 엄지로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 빚지는 게 아냐. 당신을 살리겠다고 목숨을 던진 내 동기들, 그리고 저 둘에게도 지는 거다.”


십일 호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동주가 마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부탁한다. 마제(馬弟).”

“팔이 하나 사라져서 업진 못할테니 흔들린다고 불평하지 마쇼.”


농담을 던진 마면이 칼을 바닥에 던지더니 동주를 어깨에 둘러 메며 말했다.


“부탁한다. 십일 호.”

“진작에 말을 처들을 것이지. 쯧.”


혀를 찬 십일 호가 언덕 아래로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하늘 아래, 남쪽 들판 너머에서 먼지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십일 호의 시선에 등에 깃발을 메단 기병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깃발에 적힌 글자를 유심히 살피던 십일 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랫 입술을 깨문 십일 호의 시선이 북쪽을 향했다. 얕은 구릉에서 시작한 산세가 북쪽 산맥으로 이어지는 지형이었다.


“저쪽으로!”


*


다른 평살수들과 함께 멍하니 서 있던 십일 호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동굴 위쪽에 서 있는 붉은 장포 사내가 들어왔다. 동주의 아들이었다.

그는 아래 쪽에 도열한 평살수들을 향해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 단약은 십 년 치의 내공을 단숨에 증가시켜 줄 것이다. 본좌가 남만에서 십 년간 머무르면서 터득한 비법으로 만들어낸 영약의 결정체가 바로 이 단약이다. 본좌가 누차 말했듯이, 앞으로 본동은 일개 살문에 그치지 않고 강호에 군림할 대문파로 거듭날 것이다. 이 단약은 그런 우리의 숙원을 이루게 해 줄 것이다!”


동주의 외침에 평살수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두 손을 들어 환호에 응한 동주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다들 앞으로 나와서 단약을 복용하도록!”


동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십일 호에게로 쏠렸다.


“먼저 드시죠. 선배님.”

“먼저 나가십시오!”

“선배님이 먼저 드십쇼!”


평살수들이 웃는 얼굴로 길을 열어주었다. 십 년 치 내공을 올려 준다는 영약을 앞에 두고도 그들은 서로 먼저 먹겠다고 나서기 보다는 십일 호에게 우선권을 내주었다.

호의와 존경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십일 호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안개 낀 것처럼 뿌연 시야에 동주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환한 웃음 뒤에 깔려 있는 감정은 짜증과 질투였다.


*


“흡!”


가쁜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희미한 조명에 비친 울퉁불퉁한 바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또 어디인가?


“정신이 드십니까?”


호롱불 빛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나를 향해 돌아앉았다.

짙은 주름과 저승꽃으로 뒤덮인 얼굴의 총관이 나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위험한 상처는 없었습니다.”


왜 또 이 영감님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 걸까?

설마 이것도 이 몸의 주인인 십일 호의 기억인 걸까?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머릿속이 꼬여버린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윽!”


온몸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나는 다시 바닥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고개만 살짝 들어서 시선을 내려보니, 흉터로 가득한 내 나신 위에 침이 빼곡히 꽂혀 있는 게 보였다.


“사흘은 더 누워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총관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통증으로 보아 이건 현실인 듯했다.


“내일은 약을 좀 지어 오겠습니다.”


총관의 말투는 시종일관 정중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을 담은 걱정과 따뜻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그와 십일 호가 어떤 관계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총관과 평살수의 관계는 아니었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어딘가에 꽂아놓은 침 때문인지 혀와 입술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뭐. 어차피 그는 내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을 테니까.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총관이 걱정 섞인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든 닷새 안에는 최대한 기력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영감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리고, 표정은 왜 그렇게 비장한 건데요?

닷새라니? 왜 닷새여야 합니까?


묻고 싶었지만, 혀가 움직이기는커녕 입도 열리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총관이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흑 사자가 사흘 뒤에 복귀할 거라고 기별이 왔습니다.”


흑 사자? 흑무상? 그게 왜요?


“백 사자가, 흑 사자가 돌아오면 바로 명부회(冥府會)를 열자고 했는데, 우 사자와 제가 마 사자가 돌아온 후로 미루자고 했습니다.”


마 사자면 마면일 텐데······. 십일 호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마면이 맞는 걸까? 분명 우두는 내가 아는 우두의 젊은 시절로 보였지만, 백무상의 얼굴은 내가 아는 것과 달랐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명부회는 또 무슨 소리일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총관의 수심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십일 호 님이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상태라는 핑계로 최대한 미뤄 보려고 했습니다만, 마 사자의 복귀가 닷새 정도 뒤로 예상된다는 소식이 입수되는 바람에······, 동주께서 마사자가 돌아오는 날 명부회를 열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뭐라고요?

명부회가 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숨을 몰아쉬며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빌어먹을 침이 횡경막 근처 어딘가에 박혀 있는 건지 갑자기 사레가 걸려서 마른 기침이 튀어 나왔다.


“쿨럭! 쿨럭! 커헉!”


기침을 할 때마다 몸에 박힌 침들이 찌릿한 고통을 퍼트렸다.

와. 진짜. 뭐가 이렇게 아픈 거냐.

전신을 내달리는 고통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기침을 해대자, 총관이 낭패한 얼굴로 내 가슴 어림에 꽂혀 있던 침 몇 개를 뽑았다.


“푸후!”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된 내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와. 뒤질 뻔했네.”

“······!!”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에 총관의 주름진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마, 말을······? 백 사자의 말이 정말 사실이었던 겁니까?”


총관이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백무상이 무슨 말을 했다는 걸까?

질문을 던지려던 나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 영감님에게 십일 호가 하대를 했는지, 존대를 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말을 한 걸 본 상황에서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다만, 내 말투가 십일 호와 다르다면 이상한 의심을 사게 될 수도 있는 일.

그때 문득, 정신을 잃은 동안 보았던 십일 호의 과거가 떠올랐다.

십일 호는 우두와 마면에게 반말을 하며 친구처럼 대했다. 하물며 동주에게조차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막말을 퍼부을 정도였다.

십일 호는 애초에 형식과 예절을 엄격하게 따지는 인물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어, 언제부터 다시 말을 하시게 된 겁니까?”


나는 총관의 주름진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한줌의 적대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순수한 반가움을 담고 있었다.


“이번 작전 때, 갑자기 말문이 트였어.”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총관은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감격한 얼굴이었다.


“이게 몇 년 만입니까! 장장 십오 년 만입니다! 이제 이 늙은이는 당장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아직 어색하군. 입안에 밤송이를 넣은 것 같아.”

“금방 적응되실 겁니다.”


총관은 흐뭇해 죽겠다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다른 변화는 없으십니까? 단전이나 혈맥에 무슨 변화가 있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단전? 혈맥? 왜 갑자기 이런 걸 묻는 거지?

내가 무표정하게 쳐다보자, 총관이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했다.


“십일 호 님이 말을 잃으신 건, 흑진 작전 때, 다쳤던 단전과 혈맥 때문이었으니, 말을 되찾으셨다면 분명 다른 곳에도 곧 변화가 있으실 겁니다.”


흑진 작전이라는 말이 또 나왔다.

우두에게서 들었던, 흑진 작전 때 동주와 우두, 마면을 구했다는 말에서 유추해 보면, 내가 봤던 그 그 장면이 바로 흑진 작전인 듯했다.

천라지망을 뚫고 동주와 나머지 둘을 살리기 위해 십일 호는 무인으로써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던 모양이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내 대답에 총관의 얼굴에 실망감이 살짝 스쳤지만, 그는 애써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을 되찾으신 것만으로도 뭔가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전과 혈맥은 반드시 회복되실 테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마시고 기다려 보시지요.”


이 몸은 원래 내 것이 아니니,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총관은 자기 몸보다 내 몸을 더 걱정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총관에게 따듯한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솔직히 그간의 시간이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해. 모두가 다 뿌옇고 흐리게 남아 있어.”


나는 어차피 십일 호의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랬기에 정신을 잃은 동안 엿보았던 과거의 기억 속에서 동주의 아들, 현 동주가 단약을 나눠주던 장면을 참고해 말했다.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마도 다친 심맥 때문에 그러셨을 겁니다. 지금은 어떠십니까?”

“많이 선명해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 영감님이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이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봐야 했다.


“명부회를 왜 열겠다는 거지?”


대뜸 명부회가 뭐하는 건지 물어볼 수 없었기에 나는 일단 이번 명부회의 개최 목적을 물었다.

명부회라는 말에 밝았던 총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백 사자가 십일 호 님이 작전 중에 말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게 왜?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백 사자의 주장으로는 십일 호 님이 그 동안 말을 할 줄 알면서도 숨겨 왔고······ 그 이유가 외부 세력의 첩자 노릇을 해 왔기 때문이라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애초에 숨기지도 않았지만, 말을 하는 걸 숨겼다고 첩자라는 모는 것 도대체 무슨 논리인가?

황당함에 말문이 막힌 와중에 총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명부회의 안건은 평살수 십일 호의 첩자 의혹에 대한 판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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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화-협객도 아니고 대협도 아니다 +1 24.09.09 287 14 16쪽
27 26화-밤새도록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1 24.09.08 308 11 14쪽
26 25화-그 잡놈이 대체 누굽니까? 24.09.07 352 12 17쪽
25 24화-당황과 분노, 그리고 공포 24.09.06 359 15 14쪽
24 23화-이름 하나는 기막히게 지었네요 24.09.05 379 1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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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화-호의를 베풀어 주신 이유 24.09.03 414 14 16쪽
21 20화-뭐라고요? 24.09.02 447 15 13쪽
20 19화-삼계탕 24.09.01 493 13 14쪽
19 18화-점로대 24.08.31 536 16 20쪽
18 17화-개고기 잘하는 집 24.08.30 590 16 14쪽
17 16화-믿어라. 염라대왕 24.08.29 623 17 18쪽
16 15화-강해질 거다 24.08.28 672 19 14쪽
15 14화-비싼 거로 사 주십시오 24.08.27 695 19 14쪽
14 13화-코끝이 시큰해졌다 24.08.26 716 1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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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화-귀동(歸洞) +1 24.08.20 1,149 2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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