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사바희 님의 서재입니다.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최근연재일 :
2024.09.15 12:10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3,842
추천수 :
537
글자수 :
235,814

작성
24.08.29 12:20
조회
623
추천
17
글자
18쪽

16화-믿어라. 염라대왕

DUMMY



-퍼억!


솥뚜껑에 맞아 날아간 사내가 아름드리 나무에 부딪히더니 허물어졌다.


“받아라! 십일 호.”


나는 우두가 던진 사내의 장검을 낚아 채는 것과 동시에 몸을 회전시키며 등 뒤를 향해 휘둘렀다.


-까앙!


등을 찔러 오던 장검이 내 검에 가로막힌 사이 장검을 쥔 사내의 허벅지에 찍힌 붉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슉!

-까앙!


사내는 내 검을 막아냈지만,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의 허벅지를 찔러갔다.


-푹!

“크흑!”


허벅지에 검이 박힌 순간, 사내가 허수아비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붉은 점만 공략했는데 너무 쉽게 제압되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백무상과의 목숨을 건 싸움 때문일까? 아니면 이자의 실력이 한참 모자란 걸까?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를 포위했던 자들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상태. 모두 우두의 솥뚜껑과 오함마에 당한 자들이었다.


나는 내공을 뻗어낸 오른발로 내 앞에 주저앉은 사내의 장검을 차내고, 사내의 목에 검을 갖다 댔다.


“묻는 말에 대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살수가 하기에 적합한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이자들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내는 대답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나는 검을 든 손에 힘을 주며 재차 물었다.


“어디에서 나왔나?”

“······.”

“기다려 줄 시간 없다. 어서 말해!”


이자들은 우리와 싸우기 전에 이미 몇 번이나 호각을 불었고 지금도 산 곳곳에서 호각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곧 원군이 들이닥칠 상황.

내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다그치려 했을 때.


-퍽!


우두가 휘두른 솥뚜껑이 사내의 정수리를 후려갈겼다.

사내의 코와 귀, 입에서 피가 터져 나오더니 축 늘어졌다.


“무림맹이다.”


우두의 말에 나는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림맹이 왜? 설마 우리를 습격한 게 무림맹이라는 소리야?”

“모르겠다.”

“그런데 무림맹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오냐고?”


내 물음에 우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없다. 시간.”


나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이 왜 여기를 수색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방법도 없이 우리는 이동해야 했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대여섯 명의 무림맹원들과 맞닥뜨렸다.

우리를 포위한 그들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호각만 열심히 불어댔다.


내가 가장 약해 보이는 자를 향해 검을 뻗으며 달려나가자, 우두도 장검을 휘두르며 무림맹원들을 덮쳐갔다.

자신들 만으로는 우두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무림맹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충돌을 피했다.

하지만 우두는 그들의 예상보다 빨랐다.


-쨍강!


우두의 솥뚜껑에 장검 한 자루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앞에 있는 무림맹원의 어깨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붉은 점이 찍힌 곳이었다.


-카각!


무림맹원의 장검과 엇갈린 검면에서 불똥이 튀었다. 나는 내공을 뻗어낸 왼 주먹으로 녀석의 어깨를 후려쳤다.


-퍼억!

“큭!”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는 녀석을 재빨리 따라잡아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끄윽!”


어깨가 꿰뚫린 녀석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인지 이번에도 생각만큼 어렵지 않게 무림맹원을 제압했다.


“무림맹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검을 비틀며 물었다.


“끄으······.”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면서도 녀석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곁눈질로 살펴보니 다른 맹원들은 이미 우두가 처리한 상황.

나는 녀석의 목을 움켜쥐며 물었다.


“소속이 어디냐? 대답하면 죽이진 않겠다.”


순간, 녀석의 앳된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어리다고 죽이고 싶지 않다던가 하는 나약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굳이 죽일 생각도 없었다.


“무, 무림맹 주작단(朱雀團) 제삼검대 칠조······.”


마침내 녀석의 입이 열렸다.

무림맹 주작단?


“이곳엔 무슨 일이지?”


녀석의 불안한 눈동자가 또 한번 요동쳤다.


“두 번 묻지 않겠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녀석이 체념한 얼굴로 대답했다.


“불온세력 소탕작전에서 도주한 자들을 찾고 있었소.”

“불온세력 소탕작전? 그게 뭐지?”

“······강호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는 조직과 단체를 청소하는 작전이오.”


불온세력 소탕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무림맹이 살수 조직을 쳤다······. 무슨 범죄와의 전쟁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림맹에서 벌인 작전인가?”

“관무(官武) 합동 작전이라고 알고 있소.”

“관무 합동 작전?”


관이라면 관아, 즉 공권력을 의미한다. 공권력과 무림이 합동해서 살수 조직을 친 것이다. 그 말인즉슨, 흑백무상도 관 아니면 무림맹에 속한 자들이라고 봐야 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이 산에 지금 얼마나 많은 인원이 투입된 거지?”

“주작단 오개 대요.”

“그게 몇 명인데?”

“백 오십은 될 거요.”


백 오십이나 되는 인원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

주작단원의 말을 듣는 와중에도 호각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목을 졸라 기절시킨 후, 바닥에 내려놓았다.


“빨리 움직여야 겠다. 가자!”


우두와 나는 최대한 호각 소리가 들려오는 쪽의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고 움직였지만, 호각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중에 어딘가에 숨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다가 도망갈 구멍도 없이 꼼짝없이 갇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좋지 않다.”


우두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올라가고 있다. 자꾸. 위로.”

“그게 왜······? 음······.”


무심결에 질문을 던졌던 나는, 우두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산중에서 자꾸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건 갇혔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이른바 토끼 몰이.

호각 소리에서 멀어지려고만 했던 게 이런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 앞에 보이는 바위 뒤편은 가파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낭떠러지 아래에는 시커먼 색의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 어디에도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갇혔다.”


어째서 나는 방향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호각 소리만 피해서 도망친 걸까?

또 다시 내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밀려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우두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숨자. 저기.”


우두가 가리킨 곳에는 덤불이 있었는데, 우두의 덩치도 가릴 수 있을 만큼 무성했다.


“저기 숨었다가 포위망을 뚫고 내려가자고?”


내 물음에 우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감수해야 할 작전이지만, 지금은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상황.


우리는 덤불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덤불에 들어오자마자 우두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야명주가 들려 있었다.


“넣어 둬라.”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네가 갖고 있어.”

“받아라.”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우두가 야명주를 내 품에 집어 넣었다.


“그러니까 이걸 왜 주냐고-읍!”


말을 하는 와중에 솥뚜껑이 내 입을 막았다.

우두가 눈동자만 움직여 덤불 밖을 가리켰다.


-삐빅! 삐비빅!


짧은 호각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우리가 서 있던 곳에 무림맹원 셋이 나타났다. 가슴에 쓰인 맹(盟)자는 같았지만, 복장이 주작단원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주작단원들은 장검을 등에 메고 있었던 것에 반해 이자들은 장검을 모두 허리에 차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왠지 풍기는 느낌 또한 다른 무림맹원들과는 달랐다.

셋 중에서 하나는 중년인이었고, 나머지 둘은 스무 살 전후의 청년이었는데, 모두 잘 벼려진 검 같은 느낌을 풍겼다.

어디서 저런 자들이 나타난 것일까?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사숙. 여기도 없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해서 정말 그자들을 잡을 수 있는 겁니까?”


두 청년 중, 더 어려 보이는 청년이 중년인에게 물었다. 사숙과 사질의 관계인 모양이었다.

중년인이 대꾸했다.


“호각 소리의 방향을 따져보면 이리로 온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청년이 어깨를 으쓱이자, 또 다른 청년이 혀를 차며 말했다.


“사제. 사숙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죄송합니다.”


사제라 불린 청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입을 다물었다.


“사숙. 설마 저기로 뛰어내린 것은 아닐지요?”


청년의 물음에 중년인이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무림맹 주작단의 토끼 몰이는 생각보다 교묘한 면이 있다. 팔괘에 기반한 진법을 응용한 거라, 몰이의 대상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하지. 우리는 호각 소리의 방위를 예상해서 먼저 여기에 온 것이니······, 그들도 곧 도착하거나······ 이미 근처에 와 있을 수도 있다.”

“근처에 말씀입니까?”

“······그래.”


응?

청년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중년인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나는 그가 턱짓으로 우리가 숨어 있는 덤불을 가리키는 모습을 보았다.

들켰나?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두 청년이 허리에 메고 있던 장검을 뽑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진짜 들킨 건가? 아니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덤불이라도 찔러보려는 심산인 걸까?

내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두 청년이 장검을 앞세운 채, 정확하게 내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시벌.


속으로 욕을 하며 뛰어나가려 하는데, 우두가 나보다 먼저 뛰어 나갔다.

덤불 속에서 소대가리가 튀어나왔는데도, 세 사람은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우두는 말없이 주작단원에게서 빼앗은 장검을 앞으로 겨눴다. 나는 장검을 빼들고 그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섰다.

살아서 이 산을 내려가려면, 눈앞에 있는 셋을 상대로 이기는 방법 밖에 없다.

나는 장검을 거머쥔 상태로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빨간 점. 빨간 점. 빨간 점.


내 두 눈동자는 예의 그 붉은 점을 찾고 있었다.

붉은 점만 보였다면 주작단원들을 상대했을 때처럼 당장 달려들었을 텐데, 왜 아직 안 보이는 거냐?


그 붉은 점의 정체가 상대의 약점인지, 아니면 내가 살 수 있는 생로인지는 아직 명확치 않다. 우두와의 비무에서는 분명히 약점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운기조식을 가능케 해준 걸 보면 생로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었다.

약점이건 생로건 간에 문제는 눈앞에 있는 세 사람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게 붉은 점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두도 뭔가를 느꼈는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가만히 놈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투항할 생각은 없나?”


중년인이 두 청년의 몇 걸음 뒤쪽에서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나?”


내 반문에 가장 어려 보이는 청년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정신 나간 놈이 있었군. 우리가 너희 살수 놈들을 잡는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가당치도 않다.”

“그냥 보내주면 이제 개고생은 안 해도 되지 않나?”

“미친놈이냐?”

“미친놈이면 보내 줄 거냐?”

“하!”


나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끊임없이 붉은 점을 찾았다.

하지만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로 붉은 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두와 나를 찬찬히 살펴보던 중년인이 우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만만치 않은 상대지만, 너희 둘이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다.”

“네. 사숙.”

“네.”


두 청년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둘 중에서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고 오똑한 콧날을 가진 미남형의 청년이 장검으로 우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쪽은 내가 맡겠다.”

“제가 맡으면 안되겠습니까? 사형.”

“너는 저 흉측하게 생긴 자를 먼저 처리하고 오거라.”

“쯧.”


뜬금없이 외모 공격이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어린 놈의 장검이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학!


놈의 장검 끝에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일렁였다.

등골에 소름이 쫙하고 돋게 만드는 섬뜩한 기운의 검기였다.


시펄. 이거 반칙 아니냐?

무슨 어린 놈이 이렇게 강력한 검기를 뿌리는 거냐?

녀석의 검기는 백무상의 검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와. 진짜 너무하네.

얼마나 됐다고 또 죽을 고비냐?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전신을 지배한 저릿한 감각과 함께 나는 바닥을 굴렀다.


-싸학!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내가 숨어 있던 덤불이 갈라지며 바닥이 훤하게 드러난 게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다시 한번 바닥을 굴렀다.


-슈학!


섬뜩한 검기가 아슬아슬하게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가자, 온몸에 소름이 일어났다.

그래. 이 정도 소름이면 보일 만도 하지 않냐!

마음 속으로 절규를 내질렀지만, 야속하게도 붉은 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일하게 믿었던 구석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백무상과 붙었을 때와는 다르게 붉은 점이 보이지 않으니, 도무지 어디를 어떻게 방어하고 공격해야 할 지 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래서는 승산이 없다.

이렇게 죽는 건가.

뭐 제대로 해 본 것도 없는데 이렇게 끝난다고?

서글픈 엑스트라의 삶이란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배신감과 당혹감의 자리를 절망감이 대신하려 하기에, 나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강해지겠다고 다짐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이렇게 나약하게 쓰러질 수는 없다.


-쐐액!


독사처럼 따라붙는 어린 놈의 장검을 마주 보며, 내공을 주입한 검을 치켜 들었다.


-따다다당!


그저 검을 갖다 댄 것만 같았는데, 연달아 금속성이 터져 나오고.


-쨍강!


내 검이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다.

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놈의 장검이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순간, 내 의도와는 상관 없이 무릎이 자동으로 접혔다.

뒤로 넘어지는 와중에 장검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놈의 두 번째 검초는 바닥에 꽂혔다.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이 세상으로 온 뒤에 가장 많이 사용한 절초, 나려타곤을 시전하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놈은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계속 바닥을 구르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쯤 되니, 내 의지로 구르는 건지, 내 몸이 알아서 구르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무렴 어떻겠는가? 죽지만 않으면 될 것을.


살짝 정신을 놓고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덜컥 멈춰 섰다.

튀어 나온 바위에 몸이 걸린 상황.

아. 좆됐다.

더 구르지 못해 상체를 일으키는데, 장검이 날아왔다.

자꾸 간발의 차이로 공격이 빗나가 짜증이 난 모양인지 검신에 흉흉한 검기가 서려 있었다.


이건 못 피한다.

꼼짝없이 죽었다는 생각과 함께 한 많은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순간.


-푸욱!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솥뚜껑에 장검이 깊이 박혔다.

손이 뚫리면서도 장검을 잡아버린 우두가 어깨로 어린 놈을 들이 받았다.

하지만 놈은 장검을 놓아버리더니 훌쩍 뒤로 물러나며 우두의 공격을 피해 버렸다.


“뭐 이런 무식한······.”


어린 놈이 짜증을 담은 눈으로 우두를 노려봤다.

우두가 손에 박힌 장검을 빼내며 내게 물었다.


“괜찮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두의 전신에 크고 작은 검상이 나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느라 우두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꽤 강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약관의 청년. 산전수전 다 겪은 우두가 밀리라고는 예상치 않았다. 그런데 상처투성이가 된 우두를 보니 내 예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우두야. 괜찮아?”


우두가 피가 흐르는 손으로 뺨에 묻은 피를 닦으며 대꾸했다.


“없다. 문제.”


가까이에서 보니 우두의 오른쪽 어깨에 주먹만한 구멍이 난 것이 보였다. 옆구리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야! 너 정말 괜찮은 거냐!”


나는 우두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소리쳤다.

우두가 내 손을 잡으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쳐라. 도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를 두고 어딜 가란 말이냐!”


내 반발에 우두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때, 우두와 싸우던 놈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사제. 싸움에 임해서는 절대 검을 놓지 말라고 했던 사부님 말씀을 잊었느냐?”

“검을 놓지 않았으면 저 소대가리의 어깨에 맞을 뻔했단 말입니다.”


어린 놈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일단 저자들부터 정리하고 그 얘기는 다시 하자꾸나.”


어린 놈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더니, 뒤로 물러났다.

사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쉰 청년이 우두와 나를 마주 보고 섰다.


“당신들한테 딱히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니, 빨리 끝내 주도록 하지.”


녀석이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우두의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뛰어라. 저 아래.”

“너는!”

“가마. 뒤따라.”

“같이 가자.”

“가라. 먼저.”

“같이 가자고!”


답답한 마음에 우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을 때.


-쐐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장검이 날아왔다.

순간, 갑자기 우두가 내 허리춤을 움켜 잡더니 번쩍 들어올려 달리기 시작했다.

우두의 등을 베는 검의 충격이 나에게까지 전달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우두의 손아귀에서 버둥거리는 것 뿐이었다.


나를 들고 달리는 우두의 코와 입에서 선혈이 울컥 흘러나왔다.

검격을 온전히 등판으로만 막아낸 결과였다.

낭떠러지를 향하는 우두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을 때.


-푸욱!


장검이 우두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하지만 우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낭떠러지 끝에 다다른 우두가 나를 보며 웃었다.


“믿어라. 염라대왕.”

“우두우우우!”


우두의 손을 떠나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며 나는 보았다.

급류 위에 찍힌 붉은 점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를 중단하고자 합니다 +1 24.09.16 34 0 -
34 33화-담금질 24.09.15 170 7 12쪽
33 32화-절벽 기연 24.09.14 206 10 14쪽
32 31화-개백정 훈련소 24.09.13 216 9 13쪽
31 30화-무공종합선물세트 24.09.12 230 8 13쪽
30 29화-영약이 있다면 24.09.11 240 10 18쪽
29 28화-협객과 자객 +2 24.09.10 271 13 16쪽
28 27화-협객도 아니고 대협도 아니다 +1 24.09.09 288 14 16쪽
27 26화-밤새도록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1 24.09.08 310 11 14쪽
26 25화-그 잡놈이 대체 누굽니까? 24.09.07 352 12 17쪽
25 24화-당황과 분노, 그리고 공포 24.09.06 360 15 14쪽
24 23화-이름 하나는 기막히게 지었네요 24.09.05 380 15 17쪽
23 22화-하늘을 죽인다 24.09.04 412 15 16쪽
22 21화-호의를 베풀어 주신 이유 24.09.03 415 14 16쪽
21 20화-뭐라고요? 24.09.02 448 15 13쪽
20 19화-삼계탕 24.09.01 493 13 14쪽
19 18화-점로대 24.08.31 537 16 20쪽
18 17화-개고기 잘하는 집 24.08.30 590 16 14쪽
» 16화-믿어라. 염라대왕 24.08.29 624 17 18쪽
16 15화-강해질 거다 24.08.28 672 19 14쪽
15 14화-비싼 거로 사 주십시오 24.08.27 695 19 14쪽
14 13화-코끝이 시큰해졌다 24.08.26 716 17 17쪽
13 12화-혼란의 도가니탕 +1 24.08.25 730 17 15쪽
12 11화-운기조식 +1 24.08.24 761 18 16쪽
11 10화-이번 작전명은 +1 24.08.24 813 15 18쪽
10 9화-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아 +1 24.08.23 909 17 20쪽
9 8화-과거의 기억 +1 24.08.22 1,001 17 17쪽
8 7화-구했다. 나도. +2 24.08.21 1,120 19 16쪽
7 6화-귀동(歸洞) +1 24.08.20 1,150 20 16쪽
6 5화-빨리 죽어 +2 24.08.19 1,185 18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