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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 공방

버서사이-미소녀 천재 대마법사 전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디귿(D)
작품등록일 :
2022.05.12 14:41
최근연재일 :
2023.04.19 19:10
연재수 :
104 회
조회수 :
3,294
추천수 :
176
글자수 :
761,699

작성
23.04.1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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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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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102. 에필로그

DUMMY

* * *


일렁이는 횃불은 몇 안 되는 그림자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그러나 그림자와 달리 횃불에 비친 이들은 미동도 없었다. 긴 창을 들고 석상처럼 서 있는 호위병도, 투박하지만 거대한 돌의자에 앉은 사내도, 그 옆에 로브를 걸친 사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앞, 무릎을 꿇고 잔뜩 몸을 움츠려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있는 하비르와 투챤도 굳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타닥타닥 횃불 타는 소리만 넓은 공간을 울렸다. 한동안 이어지던 무거운 침묵은 돌의자에 앉은 사내에 의해 드디어 끝이 났다.


“그게 전부인가?”


사내의 말에 하비르는 속으로 한 호흡 쉬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주작이 죽었다고?”


“최후를 확인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황상 살아남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


사내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로브를 걸친 사내에게 물었다.


“현무도 그리 생각합니까?”


“불가능합니다.”


묵직하게 울리는 로브 사내의 목소리는 하비르와 투챤의 심장을 거세게 틀어쥐었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고 숨을 죽였다.


“그렇죠?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고작 칼날 산맥의 드래곤 두 마리에게 주작이 당하다니··· 저는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비르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감히 거짓말은 생각도 못 했다. 이번 출정에서 주작이 보인 행동의 목적이 배신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덧붙였을 뿐 사실과 다른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귓속을 파고드는 한마디 한마디가 불길하고 불안했다.


‘무슨 말씀이지? 그럼 주작이 두 마리의 드래곤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할 수 있다는 건가? 아냐. 분명 주작이 밀리고 있었다. 도저히 상대되지 않았어.’


“그럼··· 거짓인가?”


주작의 살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공포가 하비르를 짓눌렀다. 식은땀이 흐르고 공포에 온몸이 떨렸다. 그러나 대답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을 열어야 했다.


“천부당만부당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간신히 본능을 뚫고 입을 빠져나온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짓은 아닌 듯합니다. 감히 전하께 거짓을 고할 정도로 미련한 아이는 아닙니다.”


현무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도 압니다만··· 영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도 그렇고요.”


“아마 복귀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복귀하지 않은 이유라··· 어쩌면······.”


“저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하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녀의 뜻이니.”


사내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현무가 하비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분은 어떠신가?”


“그분이라 하시면······.”


“너와 조우했던 푸른 기운의 사내 말이다.”


하비르는 어떻게 대답할까 빠르게 머릴 굴렸다. 그러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숨김없이 솔직히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그자는··· 아니, 그분은 고요했습니다. 마치 한가롭게 날갯짓하는 나비나 느긋하고 포근하게 불어오는 봄바람 같았습니다. 눈앞에 있는데, 저와 마주 보고 있는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비르는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확실하고 정확히 각인된 바기라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정말 바람 같았습니다. 무심히 불어오다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태풍으로 돌변하는 바람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고요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센 태풍 같은······.”


“외향은?”


사내가 하비르의 말을 잘랐다.


“평범했습니다. 체격은 보통의 인간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검고 긴 머리카락에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 번도 눈을 뜨지······.”


“뭐?!”


버럭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목소리에 천장과 벽, 바닥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하비르는 두려움에 목소리를 떨며 힘겹게 대답했다.


“누··· 눈이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재차 반복된 대답에 놀란 얼굴로 현무를 바라봤다.


“아마도······.”


말을 잇지 못하는 현무의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현무의 의견을 확인한 사내는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아··· 결국 스승께서 그런 선택을······.”


‘스승? 주작도 분명 스승이라 했다. 그렇다면 전하와 주작이 그자의 제자란 말인가? 도대체 이들의 관계가 어찌 되는 거야?’


“네가 보기에 어떻더냐? 그분께서 눈이 보이지 않아 불편해 보이더냐?”


현무가 물었다.


“아닙니다. 분명 눈은 감고 있었지만, 눈이 보이는 이와 전혀 다르지 않게 행동했습니다. 조금도 불편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눈이 안 보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그렇겠지. 그분이라면 그렇겠지.”


사내의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혹여··· 그분께서 도 한 자루를 들고 계시지 않더냐? 영롱한 빛이 나는 평범한 생김새의 도이다.”


이마를 짚고 축 늘어진 사내 대신에 이번에도 현무가 물었다.


“저도 그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하비르는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돌아봤다. 한참 뒤 어둠 속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야무르는 하비르의 눈빛을 알아차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여전히 허리는 깊게 숙여 앞을 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순식간에 하비르 뒤에 선 야무르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헝겊에 싼 긴 물건을 내밀었다.


“무엇이냐?”


“그자가 전하께 전하라 했습니다.”


“스승께서?”


사내-청룡은 황급히 허리를 세웠다. 동시에 현무가 로브 속에 감춰진 손을 가볍게 놀렸다. 그러자 야무르의 손에서 헝겊에 싸인 물건이 튕겨나가 빠르게 청룡의 앞으로 날아갔다. 청룡은 허공에 뜬 물건을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들었다. 이어 섬세한 손길로 헝겊을 풀기 시작했다.


헝겊을 전부 벗기자 영롱한 푸른빛이 방안을 환하게 비췄다. 은은한 빛은 횃불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몰아내며 주변을 포근하게 덮었다. 청룡의 손에 들린 ‘달’은 성천이나 바기라가 들고 있을 때보다 훨씬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말도 전하라 했습니다. 우리의 약속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증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하께서 제 말을 믿어주실 거라고······.”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후회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잊지 않으셨습니다. 스승께서 우리와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어요.”


‘달’을 보는 청룡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했다. 로브로 얼굴이 가려져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현무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심했습니다. 스승께서 직접 나서셨다기에··· 세월이 스승마저 바꿨다 의심했습니다. 허나 모두 착각이었습니다. 스승께선 전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직접 나서신 것도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그렇겠죠. 분명 그럴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그자가 전하와 현무 님의 스승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실패의 책임도 묻힐 수 있을까?’


하비르는 진한 어둠 속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희망의 빛을 봤다.


“그럼 이제 지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청룡은 ‘달’을 다시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싸며 대답했다.


“본격적인 전투 준비에 얼마나 걸릴까요?”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현무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급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준비해 주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시 한번 확신에 찬 현무의 대답에 청룡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달’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데······.”


조심스럽게 꺼내는 현무의 목소리에 청룡은 걸음을 멈추고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저들의 처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비르와 투챤은 심장에 압박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현무 뜻대로 하세요.”


긴장이 무색할 정도로 청룡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결정은 현무에게 넘어갔다. 청룡은 비교적 감정에 솔직한 왕이었다. 기쁠 때는 웃고, 불쾌한 상황에서도 감정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무는 달랐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표현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솔직한 감정인지 만들어낸 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로브로 가린 얼굴 한 번 본적 없었다. 그가 인간인지 휴곤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감정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주작과 다른 의미로 청룡과 상반된 존재였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지금까지 분위기만 놓고 보면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았다. 부하의 실수에 대해 제법 관대한 청룡이라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내릴지 감도 잡히지 않는 현무에게 선택권이 넘어갔다. 왕의 결정을 기다릴 때보다 훨씬 긴장됐다.


“너희는 임무에 실패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비행선은 두 척이나 잃고, 가져간 병력 대부분을 잃었다.”


‘결국··· 끝이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하비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계획이 한 달이나 늦춰진 것 역시 너의 실패 때문이다. 네 책임을 알고 있느냐?”


“송구합니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하비르, 너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겠다.”


‘뭐?’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다. 현무의 입에서 사형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지위 박탈 정도의 처벌이라니. 너무 놀라 하마터면 고개를 들고 현무의 얼굴을 확인할 뻔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모든 전투에서 네가 선봉에 선다. 그곳에서 네 실수를 갚아라. 투챤!”


“네, 네!”


“넌 이제부터 암살대가 아니다. 하비르와 함께 선봉에 서라.”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비르와 투챤은 큰소리로 대답하며 땅에 박힐 듯 머리를 조아렸다.


“너희는 공을 세워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다쳐도 위로받지 못할 것이며, 승리의 기쁨도 함께 나누지 못할 것이다.”


‘상관없다.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목숨만 유지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분명 “제대로”라고 하셨다.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겨내고 이겨내다 보면 결국 인정받을 길이 열릴 수도 있다. 끝이 아니다.’


투챤과 달리 하비르는 현무의 말속에서 희망을 봤다. 비록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 이상의 성과를 이룬다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 판단했다.


“그래도 상관없다면 그만 물러들 가라.”


현무의 말이 허공으로 사라지자 하비르와 투챤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깊게 숙이고 뒷걸음질로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막 방을 벗어나려던 하비르와 투챤이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내가 너희를 살려두는 이유를 알겠느냐?”


“기회를 한 번 더 주시기 위함이 아니신지······.”


“맞다. 허나 그런 결정을 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너의 야망이다.”


“······.”


하비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작을 해치우려 일을 꾸민 사실을 현무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판단력은 부족하지만, 야망을 위한 너의 결단력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니 기대에 응해줬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꼭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은혜랄 것까지야··· 차라리 주작을 다시 만나지 않기나 기도하거라.”


‘무슨······.’


“어쩌면 며칠 전 네가 평생 쓴 운을 다 썼는지 모르겠구나. 허나, 다시 주작을 만나면 그런 운도 의미가 없을 테니 밤마다 기도라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알고 있다. 내 의중을 다 알고 있어. 어떻게?’


곁눈질로 투챤을 봤다.


‘아니다. 그 정도로 분별력이 부족한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니, 아니야. 지금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그저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 것만 생각하자.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지만 생각하자.’


* * *


귀곡성 같은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쉬지 않고 뱀의 협곡에 흘렀다. 말에 탄 아현 일행은 잔뜩 몸을 움츠려 소리만큼이나 거슬리는 찬바람을 힘겹게 견뎠다.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도 모자라 양옆으로 높이 솟은 절벽은 한낮임에도 햇빛을 완전히 막아주고 있었다.


옷을 여미고 몸을 잔뜩 움츠려도 해소되지 않는 추위에 결국 피아가 성천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추워 뒈지겠다! 그깟 소문이 뭐라고 마차를 포기한 거야?!”


‘헐······.’


먼저 의견을 낸 건 성천이었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한 건 피아였다.


“너도 찬성했잖아.”


“닥쳐! 시끄러워! 너 카델의 교수였다며! 그럼 학생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도 옆에서 지적하고 보완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네가 먼저 그러자고 했잖아? 사내새끼가 쪼잔하게 이제 와서 책임을 나한테 넘기는 거냐? 그런 거야?”


“아··· 아니··· 됐다.”


밑도 끝도 없는 우격다짐에 답답하고 황당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울분을 토해 마주 짖는 개처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피아에게 상식이나 합리적인 의견이 통할 리 만무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무시하냐? 야! 무시하냐고?”


성천은 상대하지 않고 말의 배를 차 속도를 냈다.


“어··· 어··· 너 이 새끼··· 자꾸 무시하지? 뒈질래? 뒈지게 맞아볼래? 언니! 저 새끼가 나 무시하는 거 봤지? 응? 내가 저 새끼 죽여도 되는 거지? 응?”


큰일을 겪은 뒤라 그런지, 성천의 정체를 알게 된 탓인지 성천을 향한 피아의 폭력성(?)이 더 진해진 것 같았다.


“그때 우리 다 같이 찬성했잖아. 그러니까 그 얘긴 그만하고 얼른 이 지긋지긋한 협곡이나 벗어나자.”


“뭐야? 언니 지금 저 새끼 편 드는 거야? 그런 거야?”


“편을 들긴 누가 누구 편을 들어. 우리끼리 편이 어딨니?”


“왜 없어? 언니는 당연히 내 편이고, 나는 언니 편이잖아.”


“그럼 성천은?”


“저 새끼는··· 외톨이, 쪼다, 찐따, 등신, 왕따!”


‘에효··· 걱정이다. 걱정. 얘는 도대체 언제 철이 좀 들려나······.’


아현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진심으로 피아의 미래를 걱정했다.


날씨만 생각하면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추위였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하루라도 빨리, 눈이 오기 전에 뱀의 협곡을 벗어나려 급하게 말을 몰았다. 덕분에 마차로 열흘은 걸렸을 거리를 나흘 만에 도착했다.


“이제 거의 다 온 거 맞지?”


“응. 거의 다 왔어. 앞으로 한 시간이면 협곡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아현은 드디어 협곡을 흐르는 바람으로부터, 지긋지긋한 그늘에서 벗어나 따뜻한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기분이 좋은데? 왠지 다 잘 풀릴 것 같은 기분 들지 않아?”


“히히. 나도 그래. 이제 며칠 있으면 스승님 만날 생각 하니까 무지 기분 좋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천을 죽일 듯 노려보던 피아는 사라지고 기대감에 한껏 부푼 소녀가 있었다.


‘미친년······.’


성천은 곁눈질로 피아를 보며 속으로 진저리쳤다.


‘작은 마을이라도 들려서 배부터 채워놓자. 그래야 저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지. 또 빈정상해서 날뛰면 나만 피곤해··· 응?’


“뭐지?”


“왜? 뭐 있어?”


곁에 다가온 아현이 볼 수 있도록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아현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네?”


“피아는 저게 보여?”


“응. 당연하지.”


‘짐승 같은 년······.’


성천의 눈에도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얼핏 사람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여길 정도였는데 피아는 정확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리지? 어? 다친 건가? 부상자! 부상자야!”


피아의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말을 힘껏 몰았다. 하얀 입김을 뿌리며 세 마리의 말은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아현의 눈에도 서서히 사람의 형상이 들어왔다. 이윽고 겨우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의 처참한 몰골로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먼저 성천과 피아가 기민한 동작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아현은 달리던 말의 속도를 줄이고, 말이 완전히 멈춘 뒤에야 바닥을 디뎠다. 말에 내린 아현은 성천과 피아의 부축을 받는 사람에게 급히 뛰어갔다.


“구급함! 많이 다쳤어! 구급함 좀 가져와!”


아현은 발길을 돌려 다시 말을 향해 뛰었다. 가방을 뒤져 구급함을 꺼내는 손이 떨렸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괜찮을 거야.’


전투, 전쟁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했다. 눈앞에서 사람과 비슷한 생명체가 죽어 쓰러졌다. 고통에 찬 비명이 메아리치고, 사방에서 피가 흩날렸다. 단순한 목격만으로 정신이 붕괘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직접 마법으로 화살의 방향을 바꿔 수십의 적을 즉사시켰다. 화염마법으로 수십, 수백의 적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불태웠다. 작은 짐승 한 번 죽여본 적 없는 아현에게 살인에 가까운 살생은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다.


학장의 폐교 발표 후 카델을 늦게 떠난 가장 큰 이유는 아현이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 본능의 여운이 사라진 뒤 찾아온 충격은 오랜 시간 안정을 필요로 했다. 분타와 학장, 바기라까지 그녀의 회복을 도운 결과 다행히 기일에 맞출 수 있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야. 다들 극복하고 사는 거야. 그러니 나도 괜찮을 수 있어. 괜찮아.’


주문을 외듯 지금까지 수만 번은 되뇌었을 다짐을 다시 상기하며 간신히 구급함을 꺼내 들었다. 가슴이 뛰고 엄습한 불안에 식은땀마저 흘렀지만, 다리는 움직였다. 지금은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보다 부상자가 중요했다.


아현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부상자를 치료하겠다는 일념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달렸다.


한달음에 그들 곁에 닿은 아현은 던지듯 구급함을 성천에게 넘겼다. 구급함을 받아든 성천은 절벽에 등을 기댄 부상자의 고개를 조심스럽게 들었다.


“헉!”


부상자의 얼굴을 본 순간 아현은 비명을 토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한 번도 대화해본 적은 없지만, 카델에서 몇 번이나 마주친 기억이 있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2학년··· 2학년 마법학부 선배야.”


피아도 성문 앞 전투에서 활을 쏘던 얼굴을 떠올렸다.


“맞아. 나도 본 적 있어. 근데 왜······.”


“일단 도와! 위독해.”


성천은 급히 몸을 바닥에 뉘고 상의를 찢었다. 피에 절은 옷이 사라지자 지독한 상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여기 눌러! 더! 더 세게!”


아현과 피아가 상처 주위를 강하게 눌렀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젠장··· 틀렸어.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장 죽는다해도 뭐라도 해야 했다. 구급함을 열어 지혈제를 상처에 뿌리고 붕대를 뭉쳐 상처를 눌렀다.


‘검에 의한 상처다. 도대체 누가··· 설마, 그들이? 완전히 물러간 것이 아니었나?’


지혈제도 효과가 별로 없었다. 더 이상 손 쓸 도리도 없고, 이대로 숨이 멎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쿨럭! 쿨럭!”


부상자는 울컥 피를 연거푸 토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피를 토하는 중에 정신을 차렸는지 초점 없던 눈이 아현 일행을 천천히 훑었다.


“아··· 알려야 해······.”


“괜찮아요? 정신이 들어요?”


“누구? 누가 이랬어?”


‘누가?’


아현은 놀란 눈으로 성천을 봤다.


‘사고가 아니라는 거야?’


“기··· 잌목··· 지키고··· 있어··· 쿨럭! 쿨럭!”


부상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기침과 함께 또 한 번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고? 누가?”


성천은 다그치듯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애처로운 부상자에게 너무 모진 행동으로 보였다.


“차··· 차자··· 버서사······.”


아현과 성천, 피아는 동시에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성천의 품에 안긴 부상자의 숨이 끊어지고 몸이 축 늘어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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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후기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23.04.19 25 0 -
» #102. 에필로그 23.04.19 20 0 22쪽
103 #101. 작별 인사(1부 마지막) 23.04.18 12 0 23쪽
102 #101. 전후(戰後) 사정(5) 23.04.17 31 0 12쪽
101 #100. 전후(戰後) 사정(4) 23.04.16 17 0 14쪽
100 #99. 전후(戰後) 사정(3) 23.04.15 19 0 15쪽
99 #98. 전후(戰後) 사정(2) 23.04.14 19 0 14쪽
98 #97. 전후(戰後) 사정(1) 23.04.13 19 0 16쪽
97 #96. 카델 침공(29) 23.04.12 23 0 16쪽
96 #95. 카델 침공(28) 23.04.11 18 0 14쪽
95 #94. 카델 침공(27) 23.04.10 21 0 12쪽
94 #93. 카델 침공(26) 23.04.09 21 0 14쪽
93 #92. 카델 침공(25) 23.04.08 20 0 14쪽
92 #91. 카델 침공(24) 23.04.07 16 0 13쪽
91 #90. 카델 침공(23) 23.04.06 17 0 14쪽
90 #89. 카델 침공(22) 23.04.05 26 0 12쪽
89 #88. 카델 침공(21) 23.04.04 18 0 11쪽
88 #87. 카델 침공(20) 23.04.03 16 0 14쪽
87 #86. 카델 침공(19) 23.04.02 16 0 11쪽
86 #85. 카델 침공(18) 23.04.01 20 0 13쪽
85 #84. 카델 침공(17) 23.03.31 15 0 13쪽
84 #83. 카델 침공(16) 23.03.30 15 0 12쪽
83 #82. 카델 침공(15) 23.03.29 20 0 16쪽
82 #81. 카델 침공(14) 23.03.28 18 0 14쪽
81 #80. 카델 침공(13) 23.03.27 19 0 11쪽
80 #79. 카델 침공(12) 23.03.26 18 0 12쪽
79 #78. 카델 침공(11) 23.03.25 18 0 14쪽
78 #77. 카델 침공(10) 23.03.24 18 0 14쪽
77 #76. 카델 침공(9) 23.03.23 19 0 13쪽
76 #75. 카델 침공(8) 23.03.22 2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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