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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귿 공방

버서사이-미소녀 천재 대마법사 전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디귿(D)
작품등록일 :
2022.05.12 14:41
최근연재일 :
2023.04.19 19:10
연재수 :
104 회
조회수 :
3,298
추천수 :
176
글자수 :
761,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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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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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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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101. 작별 인사(1부 마지막)

DUMMY

* * *


불타 없어진 성문의 흔적이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다. 겨울 문턱의 찬바람이 성문을 넘어 거칠게 흘러들었다. 성문 앞에 모인 교수와 학생들은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어디로 간다고?”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앞일은 좀 쉬면서 생각해 보려고. 넌? 너도 고향으로 돌아가?”


“아니. 학장님께 추천서 받았어. 왕국에 있는 무관학교에 들어갈 생각이야. 수준은 조금 안 맞겠지만, 내 실력으로 아직 무관이 되긴 무리라서··· 너희들은?”


“우리도 추천서 받았어. 다만 너랑 달리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려고. 카델 출신인데 왕국에 자리 하나 없겠어?”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학생들은 각자 앞일을 공유하며 서로의 무운을 빌었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안샬은 리암이 짊어진 커다란 배낭을 가리키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뭐긴! 내 짐이지.”


“그러니까 이걸 왜 다 메고 있냐고요! 마차 없어요? 그동안 급여 받은 건 다 어쩌고 그래요? 정 궁하면 내가 빌려줄까요?”


“또 까분다!”


제 몸집보다 큰 배낭을 메고도 리암의 움직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팔로 안샬의 목을 감았다.


“아악! 학생들도 보고 있는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 포기! 포기!”


“창피한 걸 아는 놈이 지치지도 않고 까부냐?”


겨우 풀려난 안샬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목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다.


“진짜 뭐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정 할 거 없으면 나랑 같이 우리 고향에 가요. 알죠? 우리 아버지 영주인 거. 선배 오면 최고로 대우해줄 수 있어요.”


“말은 고맙다만··· 수련이나 할까 싶다.”


“수련이요? 얼마나 더 무식해지려고요? 지금이면 충분하지······.”


리암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지만, 그 안에 숨은 표정을 안샬은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 전투에서 타쿤의 압도적인 실력에 밀린 쓰린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성천을 보면서도 많이 느꼈다. 그래서 나도 세상 돌아다니며 좀 배워보려고.”


“하긴··· 선배는 그런 게 어울리죠. 사람이랑 사는 것보다 어디 밀림 속에서 몬스터랑 있는 게 보기에도 좋고··· 으아아악!”


이번엔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관절기가 안샬의 몸을 비틀었다.


“집으로 간다고?”


“응. 할머니가 내주신 숙제도 일찍 마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 배워보려고.”


샤이르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카델 졸업이었지? 할머니 숙제가.”


모흐란 가의 속사정은 모르나 샤이르가 카델에 오게 된 배경을 칼리도 얼핏 알고 있었다.


“응. 졸업 후에 본격적으로 상단 운영에 합류하기로 했는데, 내겐 잘됐지.”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 받을 생각인데 네 덕 좀 보게 생겼구나?”


“물론이지. 친구 부탁인데 못 들어줄 것 없지. 하하하.”


‘친구? 아오~ 흔한 표현인데 이 자식 입에서 들으니까 왜 이렇게 오글거리냐······.’


칼리는 속으로 진저리쳤다.


“그나저나 1년 만에 졸업이라니··· 이거 맞는 건가?”


졸업. 더는 카델을 수호할 수 없다던 바기라의 공표가 불러온 파장의 결과였다. 학생들과 달리 그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학장을 비롯한 교수들은 바로 알아차렸다.


“바··· 바기라 님! 그, 그건······.”


놀란 학장이 당황해 소리쳤다. 그러나 바기라의 반응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학장을 바라봤다.


“때가 됐습니다.”


“그래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 번 꺼낸 말을 번복할 바기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카델엔 성벽이 없었습니다.”


바기라는 다시 교수와 학생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성문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멋진 건물도 없었습니다. 작고 소박한 건물 몇 채가 전부인 볼품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린 이곳을 사랑했습니다. 많은 것들이 시작된 곳이었기에 그 자체로 큰 의미였습니다.”


카델의 성벽이 생기기 전 일은 학장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긴 시간이 흐르고 흘렀습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더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결국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저 아저씨 도대체 몇 살인데 저렇게 얘기한담?’


아현의 생각은 대강당에 있는 모두의 생각과 같았다. 학장이 카델의 학생일 때도 바기라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표정, 목소리, 말투까지 어느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벌써 60년 전이다. 그 시간 동안 머리카락 한 올 달라지지 않은 바기라의 나이를 가늠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들은 떠나기 전에 제게 한 가지 부탁했습니다. 아니, 서로 약속했다고 말하는 게 옳겠군요. 그 약속의 결과는 저를 카델의 문지기로 만들었습니다.”


‘뭐야?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아저씨 말은, 자기가 카델이 만들어질 때부터 살았다는 거야? 카델 역사가 천 년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리고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사실, 제가 직접 문지기를 자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쩌면 문지기를 맡는 게 약속에 어긋나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제가 사랑하는 카델의 최소한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호자를 자처했던 겁니다.”


‘프롤로그야? 뭐야? 도대체 뭔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진지한 거야? 게다가 정작 중요한 것 같은 얘기는 죄다 어물쩍 넘어가네. 감질나게··· 그래서 그 약속이 뭔데?’


“그들과의 약속을 지금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


아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약속에 대해선 정확히 선을 그었다.


“다만 약속의 결과에 대해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이제 카델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대강당 안은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바기라 옆에 서 있던 학장도 너무 놀라 벌린 입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학장이 우려했던 상황은 바기라가 카델을 떠나는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별안간 폐교라니 믿기지 않았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지될 수 없다니요? 폐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무리 바기라 님이라 해도 폐교를······.”


학장의 항변에 정신 차린 교수와 학생들의 아우성이 대강당을 가득 메웠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얘기였다. 바기라는 문지기였다. 그의 권한 오직 카델의 출입뿐이었다.


‘이럴 순 없다. 아무리 바기라 님이라 해도 이런 중대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 카델의 출입 외에 어떤 것도 관여하시지 않던 분이 왜 갑자기······.’


교수 임명권은 학장에게 있다. 그러나 의례적으로 바기라의 의견을 물어왔다. 그건 그가 카델의 문지기이기 때문이었다. 문지기의 허락 없이 누구도 카델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불문율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학장이 임명한 교수라 할지라도 출입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바기라가 동의하지 않으면 교수로 임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기라는 한 번도 학장의 의견에 반대한 적이 없다. 아니, 학장의 고유 권한에 한 번도 관여한 적이 없다.


‘그런 분이 도대체 카델의 출입과 관련도 없는 일에··· 아.’


학장은 그제야 깨달았다. 출입에 관한 모든 권한이 갖는 의미···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누구도 나갈 수 없게 할 수 있는 바기라만이 폐교를 결정할 수 있다.


“조용! 조용!”


학장의 목소리에도 소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바기라의 발언에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리암이 벌떡 일어나 뒤돌아 소리쳤다.


“주목! 학장님 말씀입니다!”


대강당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엄청난 소리에 억지 침묵이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혼란스러워 제대로 판단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소란이 잠잠해지자 학장은 바기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이런 중요한 얘기를 너무 갑작스럽게 꺼낸 제 잘못입니다.”


“아직 말씀이 끝나지 않으셨다면 마저 하시겠습니까?”


바기라는 미소로 답하고 다시 교수와 학생들을 향했다.


“미안합니다.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돼서 너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알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모든 결정은 여러분과 카델을 위한 것임을 알아주시길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바기라의 말은 여기까지였다. 강단을 내려간 그를 대신해 학장이 부연 설명을 붙이고, 설득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후폭풍은 한동안 거세게 카델을 울렸다. 결정은 바기라의 몫이었지만 현실적인 뒤처리는 학장과 교수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긴 회의 끝에 현재 재학 중인 모든 학생을 정식 졸업으로 인정하고, 본인이 원할 경우 추천장 발급 등을 결정했다. 그러나 혼란이 가라앉는 데는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게··· 실력만 놓고 보면 우린 아직 햇병아린데··· 어디 가서 카델 출신이란 말이나 하고 다닐 수 있을··· 악!”


퍽!


샤이르는 등을 강타한 뜨거운 충격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무지막지한 장난을 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헹! 도련님, 쫄았냐?”


역시 피아였다.


“피아, 왔어?”


그동안 당한 설움 탓인지 아직도 얼얼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샤이르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되려 쌤통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통쾌했다. 그러나 대놓고 표현할 수 없는지라 샤이르에게 시선을 거두고 피아를 반갑게 맞았다.


“앞길이 탄탄대로인 부잣집 도련님들이 뭘 그런 걸 걱정하냐? 나처럼 길바닥 출신이나 신경 쓸 일이지.”


“너하고 우리랑 같냐? 넌 교수님들하고 어깨를 나란히 싸웠잖아. 웬만한 전공생은 상대도 되지 않을 실력이고. 하지만 우린 이제 고작 학부 1년도 마치지 못한 실력이니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그런데가 아니지. 우리는 실력이······.”


“너희 무관(武官)될 생각이야?”


“어?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가 걱정인데? 카델이 장인이나 명장 같은 칭호냐? 카델은 그냥 학교잖아. 거기서 뭘 배웠느냐가 중요한 거 아냐? 카델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를 걸치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니잖아? 그럼 신경 쓸 거 하나 없잖아. 실력이야 아무렴 어떠냐? 너희들도 나름 열심히 공부했잖아. 이번 전투에서도 훌륭히 활약했고. 자신감 가져! 그래도 돼! 너흰 그럴 자격 있어!”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다. 전부 맞는 말이라 더 어색하고 불편했다. 게다가 피아였다. 단순무식, 안하무인, 일자무식(와, 이건 너무 했다)의 대명사 피아가 한 말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칼리는 눈앞에 있는 게 피아가 맞는지 의심스러워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피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뭐냐? 그 눈빛은? 뭔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상당히 안 좋다?”


‘무서운 년, 눈치는 더럽게 빠르네.’


“하하하··· 아니야. 눈에 자꾸만 뭐가 들어가서 그래. 맞아. 네 말이 옳아. 우리가 괜한 걱정 하고 있었던 거야. 하하하.”


피아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도 칼리의 칭찬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어깨가 으쓱한 피아를 마냥 지켜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뭘 우쭐하고 있어?”


어느새 다가와 피아 뒤에 선 성천이 한심스럽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꺼져. 거짓말쟁이 오징어!”


피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조금 전에 저쪽에서 교수님들이 하던 얘기 그대로 따라 하면서 우쭐거리고 싶냐? 가만히나 있지. 하여간··· 꼭 무식한 애들이······.”


성천은 피아의 발차기가 제대로 명중한 배를 붙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네가 감을 잃었지? 응?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지? 응?”


피아는 바닥에 엎어져 눈물 콧물 흘리며 고통에 신음하는 성천을 이참에 아주 보내버릴 기세였다.


“워, 워. 참아. 참아. 그러다 진짜 죽어.”


칼리는 사람 하나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눈이 반쯤 뒤집힌 피아의 앞을 용감히 막았다. 그러나 칼리의 힘으론 피아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칼리를 질질 끌고 성천 앞에 선 피아는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근데··· 왜 네가 길바닥 출신이야?”


“뭐?”


당장이라도 성천의 얼굴을 짓이길 것 같던 발을 슬그머니 내리며 샤이르를 쏘아봤다. 과거 몇 번이나 두려움에 떨게 했던 광기 어린 피아의 얼굴을 보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설레발친 자신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꺼낸 말을 주워 삼킬 수도 없었다.


“아, 아니··· 난 당연히 네가 귀족이라고 생각했거든.”


“······.”


“과격한 모습에 가릴 때도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은 고치기 어렵잖아. 특히 식사할 때 많이 느꼈어.”


식당에서 아현을 훔쳐볼 때 항상 곁에 있는 피아도 자연스럽게 시선에 들어왔다. 외모나 성격도 워낙 눈에 띄는 피아였지만, 샤이르는 은연중에 비치는 그녀의 몸짓을 유심히 봤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어느새 다가온 루리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명망 있는 귀족··· 아니, 왕족이 아닐까 싶더라니까?”


‘왕족’이라는 단어에 잊고 있던 소문이 떠올랐다. 샤이르의 방정맞은 주둥이에서 시작된 왕족 편입생에 대한 소문의 정체가 드디어 밝혀지는 게 아닌가 하는 시각이 피아에게 쏠렸다. 피아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무, 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아니야. 말이 안 되잖아.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정말 아니라니까? 어, 언니다! 언니! 아현 언니!!!”


아현을 알아본 피아는 시선을 돌리려고 일부러 더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아현을 불렀다. 피아와 친구들을 알아본 아현은 한걸음에 뛰어왔다.


“다들 여기 있었네? 뭐 하고 있었어?”


“응. 응. 학교 나가서 뭐 할지 얘기하고 있었어.”


“정말? 다들 계획이 있는 거야?”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크게 당황한 피아의 반응만으로도 전부 눈치챌 수 있었다. 왕족, 혹은 그와 비슷한 신분이며 모종의 이유로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했다. 사실, 눈치 못 채는 게 바보겠지만, 피아는 아현을 핑계로 적당히 넘겼다 착각했다.


“샤이로도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야. 얀느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우리 집에 같이 가기로 했어.”


“칼리의 검술 스승님께 함께 배울 거야. 뒷일은 실력을 더 키운 뒤에 생각해 보려고.”


“나도 집.”


칼리를 시작으로 얀느와 루리아까지 더 이상 피아를 난처하지 않게 하려 모른 척 넘어갔다.


“너희는?”


“나! 난 스승님 만나러 갈 거야. 언니도 같이! 그리고··· 저 지렁이 새끼까지.”


아직도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져 꿈틀대는 성천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리켰다.


“너흰 학교에서도 내내 붙어 다니더니 또 같이 다니는 거야?”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왜? 부러워? 너도 같이 갈래?”


아현의 권유를 들은 루리아는 슬그머니 아현의 손을 잡으며 슬며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까?”


‘미친··· 너무 예쁘잖아.’


루리아의 빛나는 미소에 아현은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아름다운 미소를 언제 다시 볼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게 끔찍이도 슬펐다.


“그런데 나도 할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아.”


“쳇, 말이나 말지.”


아현은 입을 샐쭉 내밀었다.


“야이 기지베야. 난? 나랑 헤어지는 건 안 서운하냐?”


타미였다.


“어? 너 아직 안 갔어? 벌써 간 줄 알았지?”


“왜? 얼른 안 꺼져서 섭섭하냐? 하여간 정 없는 년. 안 그래도 갈 거다.”


고등학교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타미와 헤어짐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쉬움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른 친구들과 달랐다.


“삐쳤냐? 키만 멀대같이 커서 소심하기는··· 이 언니가 정 심심하면 한 번쯤 방문할 테니까 청소 잘해놓고 기다리고 있어라. 알겠냐?”


“오냐. 말만 하지 말고 꼭 와라. 쟤들처럼 으리으리한 저택은 아니지만 너 재워줄 마구간 정도는 넉넉하다.”


투박한 말투와 달리 타미의 눈에 어렴풋 눈물이 고여있었다.


“히히. 알았어. 꼭 갈게.”


“우리 집도 와! 별 볼 일 없는 작은 마을이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야. 근처 지날 일 있으면 꼭 들려.”


얀느가 먼저 선수 쳤다.


“야, 넌 우리 집에 있을 거잖아. 괜히 헛걸음하지 말고 그냥 우리 집으로 와.”


칼리가 뒤를 잇자 샤이르도 거들었다.


“모흐란 상단은 대륙 전체에 있지.”


“아르리안 문장도 대륙 어디서나 찾을 수 있어.”


루리아까지 말을 얹었다.


“어? 언니? 울어?”


말없이 멀뚱히 서 있는 아현의 얼굴을 본 피아가 놀라 소리쳤다. 아현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왜? 왜 울어?”


예기치 못한 아현의 눈물에 피아는 당황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멍하니 눈물만 흘리던 아현은 결국 대성통곡했다.


“으앙! 나··· 나··· 이렇게 좋은 친구들··· 친구들이랑··· 으앙~ 싫어··· 으앙~”


울음과 섞여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의미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이 말은 친구들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어이구, 이 철딱서니 없는 년아.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다 큰 처자가 뭘 그런 걸 가지고 우냐? 뚝! 뚝!”


타미가 아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무뚝뚝하게 달랬다. 다른 친구들도 다가와 아현을 위로했지만, 피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섭섭한 것도 있지만, 아현이 통곡하는 이유를 피아는 잘 알고 있었다.


‘헤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아현이 깨어난 건 불과 7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평생을 살던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에 온 지 7개월이다. 그동안 아현이 만난 건 푸른 숲의 산골 마을 사람들, 아르젠느와 자제르 등의 호위무사, 그리고 카델에서의 인연이 전부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인연을 많이 만들 수 있어서 정말 잘 됐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곳, 문화와 환경이 완전히 다른 곳,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온전히 믿고 의지할 자리조차 넉넉하지 못한 곳··· 그런 곳에 덩그러니 떨어진 아현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어림잡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상황은 다르나 피아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언니, 그만 울어. 그러다 눈 팅팅 붓는다? 그럼 오늘 출발 못 할 수도 있어.”


“훌쩍, 훌쩍. 으··· 응. 알았어.”


억지로 눈물을 삼켜보지만 쉽사리 멈추진 못했다. 그래도 감정을 추스르려 고개를 흔들고 고개를 들어 멍하니 하늘을 보기도 했다.


“이제 좀 진정이 돼?”


“응··· 괜찮아.”


“다른 사람들하고 인사는 다 했고?”


“응. 학장님이랑 교수님들하고도 인사하고 왔어. 아직 못 본 애들도 몇 명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네.”


“먼저 출발 했겠지. 그동안 서로 정신없어서 오늘처럼 인사 주고받는 건 생각도 못 했을 거야.”


학장의 공식적인 폐교 선언을 들은 일부 학생들은 혼란 속에서도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대부분 학생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졸업시험 대상자들은 달랐다. 이미 졸업 후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들은 가장 먼저 카델을 떠났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학생도 하나둘 각자의 목표를 향해 길을 나섰다.


지난 열흘 동안 학생의 반 이상이 떠났다. 그리고 약속된 마지막 날, 남은 학생과 교수들이 떠나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아쉽다··· 어디로 가는지라도 알아뒀으면 좋았을 텐데······.”


휴대전화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라도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겠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또 볼 수 있겠지.”


조금 전까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던 성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엔 세 마리의 말 고삐도 들려있었다.


“우리도 그만 움직이자. 칼날 산맥의 겨울은 유독 추워. 더 늦어서 눈이라도 오면 오도 가도 못 하게 될지 몰라.”


“알았어.”


섭섭했지만, 언제까지 인사만 나누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마차가 데리러 올 때까진 기다려야 해.”


“나도. 그러니까 먼저 출발해.”


“마차 없이 가려면 고생 좀 할 텐데 되도록 빨리 출발해야겠다.”


마차를 챙기지 않은 건 성천의 의견이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지난 소문을 다시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진짜 갈게.”


아현은 짐을 확인하고 훌쩍 말에 올랐다. 수개월 전 푸른 숲을 나올 때만 해도 말을 몰 줄 몰라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안장에 앉아 한껏 높아진 시선으로 둘러보는 카델의 풍경도 새롭게 느껴졌다.


봉사활동을 위해, 피아와 성천의 재시험을 위해 힘겹게 오르던 중앙도서관 탑, 루리아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던 숲, 많은 일을 겪은 기숙사와 본관, 훈련장, 여전히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은 웅장한 성벽까지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다시 뭉클한 것이 치밀어 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을 막상 떠나려니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만 가자.”


한참이나 멍하니 주변을 훑어보던 아현을 마냥 지켜볼 수 없던 성천이 먼저 말 고삐를 돌렸다. 성천을 태운 말은 푸르르 하얀 콧김을 뿌리며 머리를 돌려 성문을 향했다.


“다음에 보자.”


아쉬움 담긴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하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아 아현은 한마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도망치듯 말을 몰았다. 등 뒤에서 익숙한 친구들의 작별 인사에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을 거야.”


아현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던 피아가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흐르는 눈물을 삼키려 이를 악문 탓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성천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부족한 작품 봐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부로 찾아뵙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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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후기라고 하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23.04.19 25 0 -
104 #102. 에필로그 23.04.19 20 0 22쪽
» #101. 작별 인사(1부 마지막) 23.04.18 13 0 23쪽
102 #101. 전후(戰後) 사정(5) 23.04.17 31 0 12쪽
101 #100. 전후(戰後) 사정(4) 23.04.16 17 0 14쪽
100 #99. 전후(戰後) 사정(3) 23.04.15 19 0 15쪽
99 #98. 전후(戰後) 사정(2) 23.04.14 19 0 14쪽
98 #97. 전후(戰後) 사정(1) 23.04.13 20 0 16쪽
97 #96. 카델 침공(29) 23.04.12 23 0 16쪽
96 #95. 카델 침공(28) 23.04.11 18 0 14쪽
95 #94. 카델 침공(27) 23.04.10 21 0 12쪽
94 #93. 카델 침공(26) 23.04.09 21 0 14쪽
93 #92. 카델 침공(25) 23.04.08 20 0 14쪽
92 #91. 카델 침공(24) 23.04.07 16 0 13쪽
91 #90. 카델 침공(23) 23.04.06 17 0 14쪽
90 #89. 카델 침공(22) 23.04.05 26 0 12쪽
89 #88. 카델 침공(21) 23.04.04 18 0 11쪽
88 #87. 카델 침공(20) 23.04.03 16 0 14쪽
87 #86. 카델 침공(19) 23.04.02 16 0 11쪽
86 #85. 카델 침공(18) 23.04.01 20 0 13쪽
85 #84. 카델 침공(17) 23.03.31 15 0 13쪽
84 #83. 카델 침공(16) 23.03.30 15 0 12쪽
83 #82. 카델 침공(15) 23.03.29 20 0 16쪽
82 #81. 카델 침공(14) 23.03.28 18 0 14쪽
81 #80. 카델 침공(13) 23.03.27 19 0 11쪽
80 #79. 카델 침공(12) 23.03.26 19 0 12쪽
79 #78. 카델 침공(11) 23.03.25 18 0 14쪽
78 #77. 카델 침공(10) 23.03.24 19 0 14쪽
77 #76. 카델 침공(9) 23.03.23 19 0 13쪽
76 #75. 카델 침공(8) 23.03.22 2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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