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그녀는 인질로서 가치가 없다
유디의 수다는 복도를 지나가던 바이올렛이 시끄럽다며 핀잔을 줄 때까지 계속됐다. 슬릭은 바이올렛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했지만, 바이올렛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슬릭에게 말했다.
"교환가치가 있는 제국의 왕녀님이나 영애도 아닌데, 몇 대 쥐어박아서 조용히 시키지 그랬어? 애초에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유디는 바이올렛의 말에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냉정히 따지고 보면 이들이 자신의 눈치를 볼 이유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유디가 내심 뜨끔한 표정으로 슬릭을 바라봤지만 슬릭은 고개를 저었다.
"감사... 당당"
슬릭의 말을 들은 바이올렛이 헛웃음을 짓자 옆에 있던 유디가 알았다는 듯 손바닥을 톡 치고 말했다.
"아! 알았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 남자를 다시 만날 때 당당하려면 때리면 안된다는 뜻인가 봐요!"
바이올렛은 그런 유디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참... 아! 그러고 보니 인간 여자. 얼마 전 하쉬르단이 왔었지? 그 자식 하곤 무슨 이야기 했어?"
"네?"
"시치미 뗴지마. 공작님이 나 몰래 하쉬르단 녀석이 들어오는 걸 용인해주시고 너랑 만나게 해 주셨다는 것 정돈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까."
바이올렛의 말을 들은 유디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말을 더듬었다.
"따... 딱히 엄청난 이야기를 한 건 없어요. 하하. 그냥 뭐 세상 사는 이야기?"
유디는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별 일 아니라는 듯 넘겨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딴청을 부려도 아무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바이올렛의 시선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
"으으... 일단 제 생사랑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 당분간 여기 머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제가 하쉬르단 후작.. 아니 그 사람... 아니 그 마족에게 마왕에 대해서 물어봤었죠. 별다른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요."
유디는 중간에 하쉬르단을 후작이라고 칭했을 때 바이올렛의 눈빛을 보고 생명의 위협을 느꼈지만 어떻게든 잘 넘겨낼 수 있었다.
"흐음... 그런데 그 자식이 왜 네 생사를 확인한 거지?"
유디는 바이올렛의 질문에 전부 대답해도 되는 것인지 잠시 고민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생각에 말했다.
"저를 찾는 동료 형사님에게 전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수사를 위해 함께 움직이는 중이라고..."
"하! 누가 배신자 아니랄까 봐 그새 인간 경찰과 함께 다니는 모양이군? 일단 알겠어.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바이올렛은 용건이 끝난 것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바이올렛이 멀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디는 묵묵히 앉아있는 슬릭에게 물었다.
"바이올렛 씨는 왜 하쉬르단 씨를 저렇게 미워하시는 건가요? 하쉬르단 씨도 헤이나르 공작과 사이가 좋은 모양이고, 바이올렛 씨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헤이나르 공작의 편이잖아요? 아! 혹시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을 질투한다거나?"
슬릭은 유디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질투... 아니다... 위험... 경계.."
슬릭의 대답을 들은 유디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쉬르단 씨가 위험하다는 건가요?"
슬릭은 유디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디는 그 모습에 뭔가 더 캐낼까 생각했지만, 조금 전 바이올렛의 말을 떠올리고 말을 아꼈다.
"뭐, 하긴 마족들 사이에선 제국 쪽에 붙은 배신자일 테니까 경계하는 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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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는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잠에서 깼다. 평상시엔 길어야 4~5시간. 그것도 선잠을 자는 카키에겐 오랜만에 숙면이었다.
'고민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카키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은 뒤, 잠자리를 정리하고 숙직실에서 나왔다. 테이트가 없을 때 루브린 서 내부에 있는 숙직실에서 나가도 괜찮을지 걱정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숙직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수사하러 나간 건가?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키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면서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까지 가는 길에 경관들과 마주치면 어떤 핑계를 댈지 고민했지만, 다행히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루브린 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일단 라스베트로 가봐야겠지. 가게도 걱정이고, 숙직실에 없으면 테이트 씨도 그쪽으로 오 실 테니.'
카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라스베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가자 카키의 눈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라스베트의 모습이 보였다.
카키는 그대로 라스베트를 향해 걸어갔지만, 한 경관이 앞을 막아섰다.
"통행금지다. 다른 길로 돌아가도록."
카키는 경관의 고압적인 말투와 귀찮다는 태도에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 저희 여관이라서요."
"너희 여관이라고? 아. 라스베트의 주인장인가 보군. 얌전히 여기서 대기해."
경관은 카키에게 으름장을 놓은 후 라스베트 쪽으로 걸어갔다. 카키는 그런 경관의 뒷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시안 씨가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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