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용병은 마왕을 떠올리며 전율한다
그리니언은 상현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대로라면 피므루 시로 가서 카키와 연락을 취했겠지만, 생각보다 사건이 단순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서튼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상현은 그런 그리니언을 뒤로하고 현장을 지휘하며 수습과 조사를 병행했다.
'마왕이라... 제국도 확인했고, 마족들도 공표했고 거기다 하쉬 녀석까지 한 번 더 죽음을 확인했는데도 여전히 골칫덩이인 걸 보면 위상이 대단하긴 하군.'
그리니언은 자신이 플람이라고 불리던 시절 딱 한 번 멀리서 마주쳤던 마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신을 뒤덮은 투기와 얼음장 같은 기세. 호위병 하나 없이 단신으로 제국군과 용병단을 막아선 압도적인 위압감.
'만약 그때 마왕이 달려들었다면 여각이나 나 이외엔 순살이었겠지. 운이 좋았다면 에리 녀석까진 무사했겠지만... 장담할 순 없는 상황이었어. 하지만 그 녀석은 우리를 둘러본 뒤 경고만 남기고 사라졌지.
당시 제국군 사이에선 마왕도 별 거 없다는 둥 시답지 않은 소리가 나왔지만, 펄드레이 영감이나 신드레이 영감 정도만 돼도 눈치챘겠지. 마왕은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걸.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왕이 용사 일행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성에 가려고 했지만... 그 직후에 발작이 시작되어 이 빌어먹을 몸이 되어버렸고, 그 뒤론 마왕이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았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리니언은 우연치 곤 기구하다는 생각에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앳된 외모에 작은 덩치를 가진 그리니언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은 얼핏 보기엔 이질적이었지만, 묘하게 잘 어울렸다. 잠시 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리니언에게 상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신원조회 결과가 나왔소."
"헤에... 알려주기라도 하시려고? 수사 기밀일 텐데 설마 하니 특경에 안 좋은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리니언의 말에 상현은 굳었던 표정을 잠시 풀고 웃었다.
"하하. 말하지 않았소. 그리니언 공도 협력해줬으니 이쪽도 가능한 한 협력하겠다고."
그리니언은 한 마디 덧붙이려고 했지만, 다시 심각해진 표정의 상현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까 확인한 용의자는 특경 소속이 아니었소. 오히려... 전과가 있는 자였소."
그리니언은 뜬금없는 상현의 말에 담배를 땅에 비벼 끄고 물었다.
"전과자? 뭐 도둑질이라도 하던 놈인가?"
상현은 그리니언의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록에 따르면 사형집행을 당한 사형수였소. 혹시 몰라서 의복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제복은 진품이라고 하더군."
그리니언은 상현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흐응~ 이미 사형을 당한 사형수란 말이지? 그럼 뭐야? 죽은 걸로 위장하고 탈옥이라도 했다는 거야? 실력에 비해 담력이 큰 놈이었구만."
상현은 그리니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설명을 덧붙였다.
"린그 수용소에서 복역하다가 수감 태도 불량으로 형기를 앞당겼다고 하오. 당시 주모자가 아직 살아있는데 공범부터 사형을 집행하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소만... 아무래도 내부에 협력자가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하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조사하겠소."
"뭐, 당신이 맡았으니 걱정할 필요 없겠지. 나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
"흉수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 혹 습격을 당할 수 있소. 주의하시오."
그리니언은 상현의 충고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뭐, 습격해준다면 일이 쉬워질 테니 오히려 바라던 바야."
그리니언은 그 말을 남기고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갔다. 상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지막이 말했다.
"하기야 천하의 플람 공을 습격할 만큼 바보들은 아닐 테니 쓸데없는 걱정이었겠군. 그나저나... 용사 일행의 마을에 마왕 광신도가 특경의 옷을 입고 가짜 흉수로 나타나다니. 초대장이라도 받은 기분이군. "
---------------------------------------------------------------
하쉬가 떠난 뒤, 유디는 복잡한 심정으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테이트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지만, 곧바로 루브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해! 하쉬르단 후작의 말에 따르면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대충 예상하고 있는 듯했어. 그럼 어째서 나를 쫓은 걸까? 혹시 하쉬르단 후작이 말했던 것처럼 원래 그 흔적을 발견해야 할 인물이 나 때문에 발견했지 못했기 때문에 보복하려고? 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끈질기지 않아?'
유디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누워 침대를 두드렸다. 하지만 기분이 별로 풀리지 않았는지 유디는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경찰들은 이미 조사를 마치고 떠났으니 경찰들에게 보이려는 것은 아니었을 거야. 여관 주인도 경찰들이 현장을 건드리지도, 들어가지도 말라는 으름장을 놓았다고 했으니 평범한 제삼자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 같지도 않고. 음... 쉽게 생각해보자. 경찰에게 주의를 받았던 여관 주인이 경계심 없이 현장을 안내할만한 사람이라면... 경찰?'
유디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사고를 정지하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지. 경찰에게 보여줄 거면 처음 현장을 수사할 때 이미 보여주고 끝날 일이지. 나처럼 아예 독단적으로 수사를 하러 쳐들어온 경우라면 몰라도. 세상에 그런 경찰이 나 말고 또 누가...'
"위상현 경정?"
유디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이름을 말하고는 바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제국 경찰 내 최강의 사내. 황제 전속 특무기관이었던 특경을 단신으로 박살내고 양지로 끌어올린 장본인... 표면상으론 테비르 서 소속이지만, 관할서에 구애받지 않고 수사권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경찰.'
거기까지 생각한 유디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째서? 내가 범인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절대 위상현 경정이나 테이트 경감님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을 텐데...'
유디는 자신의 유능하고 과묵한 상사가 위상현 경정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의 유능함에 대해 설파하던 것을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으으... 만약 그 두 사람에게 추적당한다면 나는 그냥 자수할 거야.'
유디는 여전히 소름이 끼친다는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럼 범인은 대체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