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용병은 뒤늦게 알아차린다
루브린 서 앞에서 일행과 헤어진 하쉬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역시 재밌어. 이번엔 이오스라 이거지?'
마왕의 죽음에 대해선 안타까움과 죄책감 투성이인 하쉬였지만, 라스베트의 주인장을 둘러싼 묘한 기류는 하쉬의 안 좋은 성격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뭐, 그리니언 씨야 어떨지 몰라도 테이트 씨나 카키 씨 앞에서 이런 기분을 드러낼 수는 없겠지만 말이지.'
하쉬는 처음 봤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던 테이트와 촌장의 시체를 확인한 뒤로 어쩐지 묘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카키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난 거냐?"
하쉬는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빈정거림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서 내일 오후에나 오실 줄 알았는데요."
"뭐,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지. 그나저나 주인장은?"
하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리니언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뭔가 좋은 생각이 난 것인지 말을 이었다.
"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여기 서서 말하긴 좀 그렇군요. 그것 말고도 상담 드릴 이야기도 있으니 오랜만에 여각 태자님도 보실 겸 같이 가시죠?"
그리니언은 하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지. 피곤하니까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씩 설명해주면 좋겠군."
"우선 라스베트의 상황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쉬는 라스베트가 습격당했다는 것과 카키가 살던 고향의 촌장에게 저주 마법이 걸려있었던 것. 그리고 테이트, 시안, 클린트, 레드럼과 합류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꽤 잘 간추렸는데도 이야기를 다 마칠 때쯤 두 사람은 라스베트의 현관에 도착했다.
"아직 수사는 진행되지 않는 모양이니 이 틈에 빨리 가도록 하죠."
"특경 조사가 시작되면 게이트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한 것 아니냐? 다시 걸어 올 생각은 없는데."
그리니언은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하쉬는 그런 그리니언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럴 줄 알고 라스베트의 상황을 보자마자 다른 출구도 마련해뒀습니다."
"좋군. 하여간 정신만 멀쩡하면 퍽 유능한 놈인데 말이지."
그리니언의 말에 쓴웃음을 지은 하쉬는 그리니언과 함께 자신이 머물던 객실로 올라갔다. 하쉬가 자신의 객실에서 마법진의 조정을 하고 있는 동안, 그리니언은 라스베트로 오는 길에 들었던 사건의 내용을 떠올리며 객실들을 둘러봤다.
'확실히 이건 마물의 기운이군. 다른 객실에는 손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역시 주인장 한 사람만을 노린 건가?'
한참 동안 객실과 사건 현장을 둘러보던 그리니언은 게이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하쉬가 자신을 부르자 하쉬의 방으로 향했다.
하쉬는 오는 길에는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왜곡 마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카쉬르의 이름이 나오자 뭔가 고민하던 그리니언은 하쉬를 먼저 게이트로 밀어 넣었고 안전이 확인되자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마나의 이변을 느낀 것인지 마법진 앞에 서있는 춘봉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고. 후작님 무슨 일이십니까요?"
춘봉은 떠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은 하쉬에게도 여전한 환대를 보였다. 그 모습에 심통이 난 그리니언은 춘봉을 보고 말했다.
"네놈 눈엔 나는 안 보이는 모양이구만?"
"거 덩치가 좀 작아야 말이지! 여긴 또 무슨 일로 오셨수?"
춘봉의 빈정거림에 바로 달려드는 그리니언을 제지한 하쉬는 두 사람을 여각 태자가 누워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한참 옥신각신하던 그리니언과 춘봉은 한기에 둘러 쌓여 누워있는 여각 태자의 모습이 보이자 기세가 푹 죽었다.
'이런 걸 보면 둘이 꽤 닮았군.'
하쉬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오스 공작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하쉬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춘봉의 주변에서 엄청난 기세가 피어올랐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말버릇 조차 잊을 정도로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춘봉과 달리 그리니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군. 아까 말했던 저주 마법이... 확실히 그놈 정도가 아니면 섭섭한 사건이 되긴 했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인간의 체내에서 마물을 피워내는 방식이나 제가 감지하기 힘들 만큼 숙련된 솜씨를 봐선 거의 맞다고 생각됩니다."
그리니언이 하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 이제는 따가울 정도의 살기까지 흘리는 춘봉이 먼저 물었다.
"어딥니까?"
'호오. 춘봉 씨도 제법 강력한 마나를 가지고 있군요. 북대륙인들은 쉽게 자신들의 마나를 보이지 않아서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하긴 그 여각 태자의 시종이 약하다는 건 말이 되자 않겠죠.'
하쉬가 춘봉의 모습에 감탄만 할 뿐 별 다른 말이 없자 그리니언은 하쉬의 나쁜 버릇이 도졌다는 생각에 춘봉을 진정시켰다.
"춘봉아. 여각의 앞이다. 기세를 거둬."
춘봉은 그리니언에게 살기를 뿜어댔지만, 덤덤히 자신의 기세를 받아 흘리며 누워있는 여각 쪽으로 눈짓하는 그리니언의 모습에 천천히 기세를 거뒀다.
"고맙수."
"별말씀을. 그나저나 이오스란 말이지... 주인장을 노리는 건 제국만이 아니었던 건가?"
그리니언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춘봉에게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춘봉이 기세를 거두자 입맛을 다시는 하쉬에게 물었다.
"제국과 이오스가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죠. 제국과 마공작이라는 껍데기만 놓고 보면 적대관계지만, 이해타산이 맞았을 땐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쉬는 말을 끝마치며 여각 태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춘봉은 주먹을 꽉 쥐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됐고, 그리니언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이오스 그 놈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주제에 그럴 때는 이해타산적이니까. 에르가 녀석이 알면 당장이라도 도와주러 올 텐데 말이지. 나중에 수도에 갈 일이 생기면 물어나 봐야겠군. 그나저나 앞으론 신경 쓸 게 굉장히 많..."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하던 그리니언은 갑자기 몸을 굳혔다. 그 모습을 본 하쉬는 이상하다는 듯 그리니언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시죠?"
"하쉬. 저주 마법은 대상자와의 접촉이 불가피하지?"
"우선 투기로 낙인을 한 번 찍어야 하니까요. 음... 그렇군요. 그럼 이오스 공작은 카키 씨 고향의 촌장과 접촉했던 적이 있다는 게 되는군요."
하쉬의 말을 들은 그리니언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감싸며 초조한 듯이 말했다.
"과시하는 듯한 모양새. 인식하지 못하고 당한 듯한 시체들. 빌어먹을! 에리 녀석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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