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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행 님의 서재입니다.

저번 생이 기억나버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군자행
작품등록일 :
2021.05.12 21:11
최근연재일 :
2022.03.20 00:50
연재수 :
149 회
조회수 :
1,083,054
추천수 :
16,739
글자수 :
714,085

작성
21.05.12 21:23
조회
27,570
추천
296
글자
8쪽

오랫동안

DUMMY

백금발의 잘 생긴 소년의 호리호리한 몸이 빠르게 복도를 걸어 서재를 향해 움직였다. 지나가는 소년을 피해 사람들은 복도 벽에 몸을 붙이고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소년은 그 때마다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를 십 수회 반복하자 서재에 도달한 소년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재에는 많은 책이 있을 줄 알았으나 있는 것은 얇은 가죽을 돌돌 말아 묶어놓은 두루마리들 뿐이었다.


“아... 씨! 정말 대책없네.”


소년은 한쪽 책장으로 가 손에 닿는 두루마리부터 하나 씩 펼쳐 읽기 시작했다.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보면서 소년은 연이어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어느 새 소년의 뒤에 나타나 가만히 서 있는 시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왜 그리 한숨을 쉬고 그러세요.”


소년은 뒤에 서 있는 시녀를 셀쭉해진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시녀가 말을 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공자에게 시녀라니? 남자에게는 시종이 붙고 여자에게 시녀가 있어야 했다.


“이게 참 문제가 많은 건데, 왜 문제인지 말을 해줄 수가 없네.”


시녀에게 자연스럽게 대답을 해주는 귀족 소년도 다른 곳과는 달라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음... 정리도 잘 되어 있었고, 오는 동안 이상한 것도 없었고... 혹시 검을 배우는 것이 어려워서 그러세요?”

“아... 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머...!”


소년은 검을 배우기로 했던 것이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눈을 몇 번 끔벅거렸지만 이내 다시 가죽 두루마리에 시선을 주고 계속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 오랜시간 오크족과의 전쟁은 영지에 많은 부담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식량을 생산할 남자들의 수가 더더욱 줄어...


서재에 있는 두루마리는 그 동안 영지를 다스리던 영주들이 써 놓은 글들과 영지의 역사,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것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소년은 그 동안 신경쓰지 않았던 영지의 사정에 대해 알기 위해 이것들을 읽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똑똑.


서재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음... 곧 나갈테니 어디 계신지 말해.”

“지금 공작부인과 함께 계시며, 응접실에 계십니다.”

“알았어.”


남자의 조용한 발소리가 멀어지고도 소년은 몇 개의 두루마리를 더 펼쳐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문을 열고 서재에서 나왔다.


“가자. ...아버지에게.”


응접실에는 공작과 공작부인. 그러니까 창 밖으로 소년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두 남녀가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소년은 바로 그들 맞은 편에 앉아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이제 생각의 정리는 모두 끝이 난거냐?”

“뭐... 대충은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도 되겠니?”

“음... 이 영지의 앞날과 저의 미래, 이 시대를 선도해나갈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죄송합니다.”


두 부자의 대화를 듣던 공작부인이 다정하게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헤리.”

“네.”

“무슨 생각을 하던 우리는 너의 편이란다. 그리고 항상 우리는 너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단다. 이것만 기억해주렴.”


창백한 얼굴의 공작부인은 허약한 몸으로 겨우 아들 하나를 낳고는 더 이상의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공작부인은 항상 헤리를 보며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저 이제 성인이에요.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들의 말에 살포시 미소를 짓는 공작부인과는 달리 공작은 엄한 표정으로 아들에게 진중하게 말했다.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까불어서는 안된다.”

“음... 공작님.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처럼 있어서 영지를 물려받는 것은 미루고 싶은데요.”

“뭣...?”


갑자기 훅 들어오는 황당한 말에 공작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무슨 생각을 정리했는지 물으셨죠?”

“...그래.”


아들의 말에 화가 났는지 빨게진 얼굴로 겨우 대답을 한 공작은 주먹을 꽉 쥐고는 아들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생각하는 공작령은 돈도 아주 많고, 영지군도 무지 강해서 옆에 사는 영주들이 해마다 괜히 눈치보면서 인사하러오고, 없는 살림에도 트집 안잡히려고 굽신거리면서 선물보내고, 왕은 혹시라도 다른 마음 먹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기싸움을 할라치면 옆에서 추종하는 다른 귀족들이 서로 싸우는 거 구경하다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싸움 말리고, 영지에서는 항상 맛난 음식을 맛보고, 예쁘고 커다란 정원에서 공작부인들과 귀족부인들이 차를 마시고, 번쩍거리는 철제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커다란 말에 올라타서 우르르 달려가면 영지의 아이들이 와 하고 따라가고 여인들은 괜히 손수건을 던져서 마음을 빼앗고 싶어하는 그런 곳이거든요.”

“...”


멍해진 공작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죄책감, 열등감, 자괴감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 헤리오스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영지는 안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언제부터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했나 궁금해서 서재에서 영지에 대해 쓰여진 기록들을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전대도 아니고 전전대도 아니고 무려 10대 조상까지 올라가도 영지가 가난하더라구요.”

“부끄럽지만 영지가 넉넉하지는 않지.”

“그래서 ‘왜 그럴까?’하고 생각을 해봤어요.”

“왜 그런지 알았니?”

“네.”

“응?”


알았다는 아들의 말에 공작의 얼굴이 묘하게 변하다가 살짝 화가 난 표정이 되었다.


“헤리오스. 그건 알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묻겠다. 왜 우리 영지는 이렇게 힘들게 지내는 것 같으냐?”

“그거야. 지원 없이 우리가 오크와 항상 싸우기 때문이죠.”

“...그래. 그래서 해결 방법도 있니?”

“음... 솔직히 모르겠어요.”


아들의 말에 피식 웃고 마는 공작이었다. 하지만...


“아직 영지의 세금징수와 생산량, 군사력과 주위 영지의 동향, 오크족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거든요.”


곧 표정이 딱딱해졌다.


“무언가 많이 변했구나.”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무얼 알고 싶은거냐?”

“제가 말한 거 전부요.”


공작은 아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공작부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으며, 소년은 담담히 차를 마실 뿐이었다.


“내일 가신들을 모두 모으고 너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게 하겠다.”

“정말요?”

“어차피 언젠가는 너에게 줄 땅이다.”

“그럼 내일 뵈요.”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삐 걸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달라진 자신의 아들을 보던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 공작님. 지금 웃고 계세요.”

“응? 그런가?”

“요즘 웃는 일이 거의 없으셨어요.”

“하하. 내가 헤리오스만할 때에는 그저 검술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러고보니 루크경의 하소연이 있겠네요. 오늘도 헤리는 검술을 배우러 가지 않았어요.”

“아... 그렇군요. 하하... 하...”


공작은 영지의 가신들을 모두 저택으로 소집하였고, 헤리오스는 밤 늦게까지 서재에 있는 영지의 대한 정보를 모두 탐독하였다. 점심 시간이 지나고 저택의 집무실에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책상에 공작이 그리고 공작 옆에는 헤리오스가 서 있었고, 그 앞에 두 줄로 기사단장, 영지군 대장, 경비병 대장, 집사장, 시녀장, 행정관, 재정관이 서 있었다.


“이제부터 헤리오스가 질문하고 그대들이 답을 한다. 회의는 이렇게 진행될 것이며, 헤리오스가 궁금한 것을 모두 알았을 때 회의가 끝난다. 이제 시작하지.”


어릴 때 초롱초롱한 눈을 가졌던 귀여운 소년이 성인이 되자마자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가신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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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전쟁은 돈지랄이야 +3 22.03.12 562 16 15쪽
144 남기면 평생을 먹게 될지도 몰라 +3 22.03.09 587 18 11쪽
143 초대를 거절했다고 이 지랄을 하는 거야 +3 22.03.09 527 15 10쪽
142 증명해 봐 +3 22.03.09 558 16 11쪽
141 깨끗이 금방 씻고 올라갈게 +3 22.02.01 906 26 12쪽
140 그 놈 머리 좀 가져와 +4 22.01.29 843 26 11쪽
139 제이크는 왜 +3 22.01.23 1,018 30 11쪽
138 어딜 가 +4 22.01.15 995 34 12쪽
137 그냥 여기다 묻고 갈까 +4 22.01.11 1,019 30 13쪽
136 니들... 미쳤냐 +3 22.01.09 1,040 32 11쪽
135 이제부터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야 +3 22.01.09 1,013 29 10쪽
134 해주시겠어요 +3 22.01.04 1,135 33 9쪽
133 땀이 조금 나기는 하지 +3 21.12.31 1,137 34 12쪽
132 마음이 약하신 것 같단 말이야 +3 21.12.29 1,232 31 10쪽
131 그거 다 필요한 거라니까 +2 21.12.27 1,329 33 11쪽
130 살아있는 것은 모두 죽음으로 +2 21.12.25 1,347 36 11쪽
129 저게 왜 저기에 있는건데 +3 21.12.25 1,293 33 15쪽
128 병신인가 보죠 +4 21.12.12 1,518 35 13쪽
127 저 너머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3 21.12.05 1,587 35 12쪽
126 그럴 듯 하군 +3 21.12.04 1,506 30 9쪽
125 우리의 기회는 끝났지 +3 21.12.01 1,640 38 10쪽
124 깜빡하고 말하는 것을 잊었네요 +3 21.11.28 1,689 41 10쪽
123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다 +3 21.11.28 1,611 36 11쪽
122 적을 더 피로하게 만들어라 +4 21.11.22 1,704 40 8쪽
121 저들은 절대 꿈을 꿀 수 없다 +3 21.11.20 1,756 40 10쪽
120 확실히 정상은 아닌 것이 맞는 것 같다 +3 21.11.20 1,683 3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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