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기 47 - VS 백상고 (7) 뿌득
Chapter 47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어디서일까, 경쾌한 흐름을 타고 두둥실 날아온 바람이 혹독하게 달궈진 그라운드를 부드럽게 쓸었다.
“고작 투수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참 많이 달라 보이는군.”
말 그대로 투수 하나였다. 에이스인 나 대신에 구원 투수인 태경이. 하지만 그 작은 변화가 마치 다른 팀처럼 느껴질 정도로 커다랗게 보였다.
“플레이!”
별 다른 연습 투구 없이, 그저 장난 치듯 서너 번 던진 태경이가 대뜸 오른 다리를 올렸다. 사우스포(좌완 투수) 특유의 저 이질감.
“하압!”
몸을 똘똘 말아 웅크린 상태로 오른 다리를 쭉 뻗으며 전신을 고무줄처럼 튕기는 투구폼, 그리고 그 끝에서 타자의 몸 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직구!
쐐애애액!
“우왓!”
백상고 6번 타자는 미처 배트를 휘두르지 못하고 몸을 뒤로 젖혔다. 공은 확실한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 미트에 안착했다.
“스트라이크!”
“나이스 볼!”
“공 좋다 태경아!”
태경이는 악동처럼 웃으며 글러브를 흔들어 화답했다. 전광판을 보니 구속은 132km, 썩 좋은 스피드는 아니었지만 궤도가 이상적이었다.
‘좌타자가 우타자를 상대할 땐 몸 쪽 공만 잘 뿌려도 아주 이상적인 투구를 할 수 있지.’
보통 좌, 우타자를 구분하는 건 투수의 기준이다. 투수의 눈으로 오른쪽에 있으면 우타자, 왼쪽에 있으면 좌타자로 정의한다.
여기서 우투수가 우타자의 몸 쪽으로 던지면 그건 그냥 별 특징 없이 날아오지만 좌투수는 다르다.
‘공이 대각선으로 뻗지. 외곽에서 몸 쪽으로 들어오니까 손 대기가 껄끄러운 거야.’
평소라면 정타를 칠 수 있는 공들도 좌투수가 던지면 까다로운 궤도가 되어 버린다. 바로 좌완의 강점이었다.
“하압!”
첫 공에 흐름을 탄 걸까, 태경이 녀석이 빠른 템포로 다음 공을 던졌다. 경쾌한 흐름, 공이 이번엔 아웃 코스로 빠졌다. 타자는 배트를 날렸지만 한 박자나 늦었다.
“치잇!”
타자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배트로 타석을 찍었다. 지금껏 우완인 내가 던졌기 때문에 눈에 익지 않은 좌완의 투구, 거기다 무엇보다 구속이 올라 있었다.
“135km? 저 녀석이?”
135km라면 태경이가 절정기였던 중학교 때의 구속이다. 타자는 경악한 얼굴로 태경이를 바라보았다. 백상고 덕아웃도 술렁이며 반쯤 일어서 있었다.
“웃고 있군. 참 어이 없는 녀석이야.”
고교 대회 첫 등판, 상대는 굴지의 명문고. 가혹하다면 가혹하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녀석의 얼굴엔 함지박만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자, 간다!”
다시 들어올린 오른 다리, 한 순간에 뻗어나가는 고무줄 같은 투구법! 그리고 지금 던진 공은 지금까지 중에 가장 빨랐다.
쐐애애액!
손끝에서 쭉 뻗는 무시무시한 직구가 몸 쪽 깊숙히 꽂혔다. 타자는 배트를 엉거주춤 휘두른 상태로 굳어버렸다.
“스트럭 아웃!”
심판의 화려한 아웃 선언, 주먹은 치켜든 김태경. 전광판에 찍힌 139km만이 녀석의 부활을 선언하고 있었다.
“1, 139km……. 태경이의 최고 구속보다도 높다!”
분명 전광판을 돌아봤음에도 태경이는 별다를 것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타석으로 들어오는 타자에게 또다시 그 경쾌한 리듬으로 공을 뿌렸다.
터업!
안쪽으로 꽉 차게 들어오는 매서운 직구. 그리고 같은 궤도로 들어오다 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슬라이더!
“마무리닷!”
좌측에서 파고 들어가는, 그리고 존 아래에서 쭈욱 가라앉는 서클 체인지 업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타자는 배트를 날렸지만 공에는 스치지도 못했다. 경악, 그리고 또 경악. 백상고 감독 한철도마저도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 대단해…….”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상대를 몰아치는 투구법!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옭아낸 저력까지.
"상용중의…… 아니, 광진고의 김태경이 부활했군."
6, 7번 타자가 나란히 삼진으로 물러나자 8번 타자는 어떻게 해서든 맞춘다! 이런 각오로 타석에 섰다. 다만 공교롭게도 8번은 좌타자였다.
“오우, 난 좌타자를 사랑하지.”
우투수 입장에서 우타자가 비교적 쉽듯이 좌투수도 마찬가지였다.
“차합!”
맹렬한 슬라이더가 존 바깥쪽으로 날다 그대로 쭉 휘어 도망쳤다. 타자의 방망이가 매섭게 쏘아졌지만 헛물만 켰다. 내 컷 페스트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휘는 슬라이더였다.
“저 녀석, 저 슬라이더는 여전하군.”
“저게 슬라이더야? 밑으로 떨어지는데 포크 아니야?”
“어떻게 슬라이더랑 포크를 헷갈릴 수가 있냐…….”
그때 김지환 사건 이후로 한수연과는 상당히 미묘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솔직히 가슴 속에 응어리진 앙금은 많았지만 내 성격 자체가 원한을 두고두고 쌓아두는 타입이 못됐다.
“어디서 반말이야? 나이도 어린 게.”
“그래 늙어서 좋겠다. 그 눈 화장도 자글자글한 주름 없애려고 칠한 거냐?”
“이게 진짜!”
솔직히 남자와 남자의 화해엔 내밀어 줄 손과 미안하다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 이 경우엔 남자와 여자의 화해가 되겠지만, 아무튼 지금 한수연과 나 사이는 썩 나쁘지 않았다.
“야, 가서 커피 좀 타와.”
“…….”
아니, 정정하자. 상당히 나쁜 것 같다.
따악!
그 잠깐 내가 한 눈을 판 순간에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내야에 바운드 된 공이 3루 베이스를 강습하고 있었다.
“잡아 강진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렇게 소리치는 것 뿐이었다. 3루 베이스를 강습한 타구는 솔직히 나라도 자신이 없을 정도로 불규칙하게 튀었지만 강진철은 그 특유의 동체시력으로 아슬아슬하게 잡아냈다.
“흡!”
그리고 짧은 기합성! 녀석의 송곳 같은 송구가 1루수 대호의 글러브에 꽂혔다. 의심할 여지 없는 아웃이었다.
“아웃! 쓰리 아웃 체인지!”
스코어 11대 9. 2점 뒤진 상황에서의 8회 초. 광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백상고가 시간을 끄는 군. 아무래도 유준성이 많이 지쳐 보여.”
“저렇게 꾸물거려도 되나? 우리 땐 타임 아웃 이라며 빨리 나오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똥통에 빠져 죽을 자식이라는 거지. 아까 보크도 그렇고 정말 울화가 치미네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한수연의 말에 다시 싫은 기억이 생각났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한철도 이하 백상고 타자들을 일렬로 세워두고 면상에다 차례차례 강속구를 꽂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 플레이!”
결국 몇 분이나 지연됐음에도 심판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타임을 신청했던 우리 때보다도 긴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강진철부터 인가……. 녀석이야 걱정 없지.”
저 날카로운 선구안은 모든 타자가 간절히 원하는 그야말로 매의 눈이었다. 아마 범인과 녀석과는 공을 대하는 시간 자체가 다를 터였다.
“차합!”
지쳐 보이는 유준성이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렸다. 이제 변화가 좀 무뎌진 투심이 존에서 몇 주먹 떨어진 볼 코스로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날카롭게 초구를 지켜본 강진철이 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스트라이크!”
“뭐, 뭣? 스트라이크?”
나도 모르게 벤치에서 벌떡 일어서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저건, 저건 결단코 스트라이크가 될 수 없는 코스였다!
“저게 왜 스트라이크야?”
“그러게. 누가 봐도 볼 아니야? 여기서도 보이는데…….”
심지어 강진철마저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평소엔 그렇게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녀석이 미간을 콱 찌푸리며 눈을 빛냈다.
“흐읍!”
다시 유준성의 손 끝에서 공이 뻗어 나왔다. 이번엔 커브! 하지만 초반의 그 기세는 없었다. 무딘 변화구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 존 하단의 볼 코스로 빠졌다.
그 순간 강진철의 배트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뻗어나다가 체크 존 앞에서 딱 멈췄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심판은 주먹을 쥐고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강진철의 포커 페이스가 완벽하게 깨지며 그곳에 흉신이 자리잡았다. 잔뜩 인상 쓴 녀석이 배트를 내려놓고 말했다.
“이게 왜 스트라이크입니까.”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가히 살벌할 정도였다. 오랜 시간 강진철을 관찰해 온 내 눈에는 보였다. “그 눈으로 참 잘도 주심석에 계시는군? 심판 짓 계속 하고 싶으면 라식 수술이라도 받고 오시지? 아니면 노환이신가?” 말은 안 했지만 녀석이 톡 쏘듯이 내뱉는 독설이 귓가에 맴돌았다.
“당연히 존 안에 들어왔으니까 스트라이크다.”
그 말을 듣고 웃음만 나왔다. 논리 대로라면 맞는 말이지만 그 스트라이크 존이란 개념을 지 좋을 대로 잡고 있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고의야.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저렇게 스트라이크 존을 흔들어 주면 칠 공도 못 쳐. 단순한 볼이 최고의 코스로 변해버리는데 칠 수 있을 리가 없지.’
특히나 강진철처럼 정교함을 무기로 삼는 교타자에겐 치명적이었다.
“아 그렇습니까?”
나, 나왔다. 저 특유의 말 꼬리가 올라가는 비꼼! 강진철이 무지막지하게 열 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저 치켜 뜬 눈, 굳게 다문 입!
“크, 큰일났다. 모두 대기해! 여차하면 바로 그라운드로 뛰어들어간다.”
“왜그래? 여기서 그라운드로 뛰어 들면 안되지!”
“닥치고 준비해! 강진철이 지금 어마어마하게 열 받았으니까. 저놈 저거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이야.”
강진철은 화가 치밀면 독설을 내뱉지만 정말 열 받았을 땐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묵묵히,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버린다.
“흐읍!”
따악!
유준성이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진 공을 무성의하게 커트해 냈다. 정말 보는 사람이 울화통이 터질 정도로 무성의한 배팅이었다.
“파울!”
그리고 그 다음 공도
“파울!”
그리고 그 다음 다음 공도.
“파울!”
그때쯤에서야 우리들도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강진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저, 저 자식 설마…….”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강진철은 유준성이 던진 공을 모조리 커트해 내고 있었다. 암만 볼로 빠지는 공이라지만 저렇게 모조리 다 쳐 내면 방법이 없다.
“오직 강진철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다…….”
고등학교 수준에서 녀석의 컨택 능력을 저지할 수 있는 투수는 두 손가락에 꼽았다. 오로지 백일현이나 김광호의 직구 만이 녀석을 잡아낼 수 있었다. 힘에 의한 충돌이 아니라면 강진철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젠장!”
다시 한 번 파울이 선언되며 유준성가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강진철은 그 모습을 잠시 비웃어 주더니 슬쩍 고개를 돌려 심판을 보았다.
‘복수하고 있다. 무서운 녀석…….’
심판마저 비웃고 나자 비로소 직성이 좀 풀리는 듯 한결 편안한 얼굴로 타석에 섰다. 유준성이 결연한 얼굴로 공을 던졌다.
“흐아압!”
제구력 문제로 후반에 와서는 어지간히 던지지 않던 포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미묘하게 가라앉다 존 근처에서 급속도로 떨어지는 포크볼! 천하의 강진철마저 이 공 앞에선 배트를 꺼내 들어야 했다.
터업!
“휴, 잘 참았군. 저건 볼이다.”
맹렬하게 휘두른 배트를 가까스로 체크스윙의 한계점에서 잡아냈다. 공은 미트에 오기 한참 전에 떨어져 폭투가 되었고. 아무리 심판이라고 해도 이 공을 스트라이크로 잡을 순 없었다.
“스윙 아웃!”
아웃이 선언되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스윙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모두 달려나갈 준비를 마쳤지만 의외로 강진철은 별 말 없이 벤치로 돌아왔다.
“아, 아쉬웠네.”
“괜찮아……?”
모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진철은 그저 배트를 내려놓고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뿌득!
고개 숙인 강진철에게서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근처에 있던 모두가 흠칫, 놀라며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고개를 든 강진철의 눈이 검은빛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오태오.”
“넵! 아, 아니 응.”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지만 강진철의 분위기가 너무 무시무시했다. 감히 말하건데 아버지가 화났을 때와 비견될 만 했다.
“전달해라. 이번 회에 무조건 0점으로 틀어막으라고.”
“어, 어? 그래. 저, 전달할게.”
“그리고 무조건 내 타석까지 이으라고 해.”
녀석이 고개를 돌렸다. 평소엔 그렇게도 나태하게만 보였던 강진철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으로 상대를 박살내고 싶어졌다.”
뿌드득!
녀석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이렇게 백상고는 무시무시한 맹수 한 마리를 그라운드에 더 풀어놓았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격동하고 있었다.
- 작가의말
혹시 야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부족하지만 적어 놓습니다^^ 서클 체인지업이란, 말 그대로 체인지업의 일종이긴 한데 좀 애매한 구질입니다. 류현진 선수가 좌완 서클 체인지업의 대명사로 유명하죠.
일반적인 체인지업과는 다르게 좌우로도 무브먼트가 상당한 구질입니다. 옆으로 휘다가 뚝 떨어지기 때문에 포크나 투심과도 많이 닮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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