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기 38 - 다음 상대는!
Chapter 38
“아야야야…….”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속도 뒤집혔다. 목은 사막처럼 메말라 지독한 갈증이 밀려왔다.
“뭐야 이거, 여기 어디야?”
갈라진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긴 감독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어제 한수연과 여기서 대작을 한 것 같은데?
“한수연? 이 기지배는 어디 갔지?”
눈이 잘 떠지질 않았다. 눈을 비벼 억지로 눈꺼풀을 치켜 올렸다. 구석 쪽에서 핑크색 추리닝을 입은 한수연이 몸을 배배 꼰 채로 잠들어 있었다.
“일단 나가자.”
비틀거리는 몸으로 감독실을 나섰다. 일단 뭐라도 마셔야 했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왔다. 그 물이 지나가는 곳 마다 되살아나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휴! 좀 살 것 같네. 그러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뭔가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뿌연 안개라도 낀 듯이 생각날 것 같으면서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뭐지? 엄청 좋은 일이 있었는데? 대체 뭐지?”
흔히들 일컫는 필름 끊김! 어제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무식하게 마셔댄 탓이었다.
“아니 잠깐만! 오늘이 연진공고와 시합하는 날이잖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 물로 얼굴을 때리듯이 세수했다. 아직 숙취로 제 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응암고와의 시합보다는 컨디션이 좋았다.
‘그 날은 정말 최악이었으니까.’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급히 몸을 푸는데 팀원 녀석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현재 시각 아침 6시 20분. 하품을 하면서도 녀석들은 밝은 얼굴로 걸어왔다.
“좋은 아침이다! 오늘 컨디션 어때?”
“어? 조, 좋지! 그럼 좋고 말고.”
태경이의 말에 자연스럽게 대답했지만 가슴속에 남아있는 이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 말해 줘야 하는데, 지금 말해야 하는데! 가슴 속에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지만 생각이 나질 않는데 뭘 어쩌겠는가.
팀원들 전부가 모이자 둥글게 서서 몸을 풀었다. 녀석들은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다. 모두들 신중한 얼굴로 몸을 체크하며 불편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스트레칭 했다.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정말 뭐지? 내가 뭘 잊어 버렸길래 이렇게 불안하지?’
불안감은 대질 버스가 도착하자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쯤의 난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며 발만 동동 굴렀다. 녀석들이 자연스럽게 버스에 타기 시작했다.
“자! 버스에 타자. 시간이 제법 촉박한걸? 지각이라도 하면 큰일나니까 빨리 가자!”
“그, 그래! 빨리 타. 오늘은 콜드 게임 한 번 만들어 보자!”
에잇, 뭐 될 대로 되겠지. 정체 모를 불안감에 계속 떨고 있자니 한심하기도 하고 뭐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은 불안했지만 그냥 싹 무시하고 평범하게 버스에 올랐다.
의자에 앉으니 다시 잠시 좀 밀려왔다. 아직 경기장까지 가려면 한참이나 한 숨 자고 일어나야겠다.
“아참! 수면 쿠션!”
응암고와의 시합 때 담에 가까운 어깨 결림을 당한 이후로 망설이지 않고 산 쿠션이었다. 보다 쾌적한 환경이 만들어지자 자연스럽게 잠이 밀려왔다.
북적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창 밖을 내다보니 아직 도로가 보였다. 경기장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무슨 소란인가 보니 녀석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 마침 잘 일어났다. 이것 봐봐 태오야.”
“뭔데?”
태경이가 핸드폰을 건네 줬다. 다른 학교 친구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였다.
“3회전 진출 확정 팀……. 해동고를 꺾은 광주제일고, 와산고를 꺾은 불연고, 동암고를 꺾은 상마고……”
아직 2회전 둘째 날이라 올라간 팀은 몇 팀 없었다. 첫째 날엔 세 팀이 올라갔다. 광주제일고 외에는 그리 이름 없는 팀 이었고, 동암고 만이 제법 명문이었는데 이번에 패배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광진고? 뭐야? 우린 아직 경기도 안 했잖아?”
“그러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문자의 마지막엔 뚱 하니 광진고가 적혀 있었다. 팀원들 모두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아직 경기도 안 했는데 무슨 3회전 확정이란 말인가.
그때 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분명, 한수연과 대작을 하면서 전화를 한 통 받았었는데…….
“아아아아아아!!”
“뭐, 뭐야? 왜 그래?”
팀원 녀석들이 일제히 눈에 의문 부호를 그린 채 바라보았다. 난 드디어 깨달았다는 쾌감과 함께 밀려오는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하……하하! 좋은 일이 있는데, 모두들 놀라지 마? 어제 전화가 왔는데 연진공고는 기권했데. 부전승이야! 다들 신나지?”
“…….”
산뜻하게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녀석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하나둘 씩 얼굴에 악마의 형상을 띄워갔다.
“왜, 왜 이래 너희들…….”
“야 이 개자식아!”
맨 처음 날아오는 성래의 발차기를 시작으로 난 삼십 분간 복날의 개처럼 얻어 터져야 했다. 버스는 다시 방향을 돌려 학교로 향했고, 난 돌아 가는 내내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아파라…….”
계란도 없어서 얼음 주머니를 대고 있자니 견디기 힘들만치 차가웠다. 내가 신음 소리 한 번 내자 녀석들이 짠 듯이 노려봤다.
“미안 하다니까!”
시합이 없어진 걸 알자 우린 모두 학교로 돌아와 작전 회의를 열었다. 길쭉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일단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연진공고의 부전패는 오히려 우리 팀에 악재였다.
“일단 이겨서 올라가니 기분은 좋은데, 이건 오히려 좋지 않아.”
“왜?”
태경이가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시합을 몇 번이나 했지?”
“글쎄…… 연습 시합은 한 열 몇 번에 진짜 경기는 황금사자기와 봉황대기에서 각각 한 번 씩이지.”
“그래. 고작 스무 번도 안 되는 경기를 했을 뿐이야.”
녀석들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작 스무 번의 경기로 팀이 완전히 다져질 순 없었다.
“우리 팀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건 경험이야. 연진공고는 솔직히 내가 던지고 너희들이 치면 가볍게 승리할 수 있는 팀이었어. 경험을 쌓기 위해 필요한 경기였단 말이지. 우리는 텀도 없이 강호를 상대하게 됐어.”
정식 시합은 연습 경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과 실력 향상을 가져다 준다. 한 치의 방심도 없는 시합에서의 경험만이 진짜였다.
연진 공고는 그런 의미에서 실력 향상과 팀 자체의 레벨이 올라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그 구간이 없어진 것이다.
‘응암고에서 바로 우승을 다투는 명문과의 시합이라…… 너무 일러.’
그때 가만히 있던 형진이가 물었다.
“상대는 아직 안 정해졌지?”
“오늘 정해질 거야. 백상고 아니면 홍해고. 둘다 무시할 수 없는 강호지.”
욱일승천, 기세가 오르는 백상고냐 아니면 최고였던 저력을 가진 홍해고냐.
‘어느 쪽이든 승산은 적다…….’
감히 응암고 때와 비교할 수 있는 학교들이 아니었다. 두 학교 모두 나와 엇비슷한 에이스, 훨씬 뛰어난 타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방법은 하나 뿐이다.’
열흘 남짓 남은 3회전까지 타선을 강화시키는 것! 그리고 내가 호투하는 것! 자그마한 희망을 여기에 걸어봐야 했다.
“내일부턴 집에 가지 않는다. 학교에서 합숙하면서 시합 날 까지 죽어라 칠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
“뭐어?”
“오늘 집에 가서 모두 합숙에 필요한 물품 다 챙겨 온다. 이상!”
강압적인 방법이었지만 단시간에 실력을 끌어 올리려면 합숙 밖에는 답이 없다. 녀석들은 툴툴거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긍정적인 녀석들은 재밌을 것 같다며 시시덕 거리고 있었다.
‘다아 죽욱었어. 이제 정말 죽을 정도로 굴려주지.’
내가 감독이 아니라서 지금까지는 정말 작정하고 굴리질 못했다. 부상도 좀 염려되고 녀석들 사기도 걱정되고, 여러가지 요인 때문에 좀 덜했는데 지금은 이미 그런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간다!”
그날 이후 야구부 그라운드에 떨어지는 토사물은 몇 배로 급증했다. 양 팔 양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그라운드를 달리고 140km로 설정한 배팅 머신을 쳤다.
“허억, 허억! 그냥…… 날 죽여라!”
“걱정마! 허억, 뛰다 보면! 허억, 허억…… 언젠가 죽을 테니까.”
“발에 감각이 없어!”
모두들 죽기 직전처럼 헐떡대고 있었다. 더운 공기는 그 자체 만으로도 고문이다. 한 낮의 땡볕이 데우는 그라운드의 공기, 유산소 운동으로 달아오른 몸. 이미 숨 쉬는 것 만으로도 고역이었다.
“50바퀴 땡!”
“나도!”
“거시기, 허억! 다 했구마잉!”
강진철을 제외하고 모두 팔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채 50바퀴를 완주했다. 이 녀석들 모두 성장하고 있었다. 체력도, 그리고 전체적인 신체 능력 모두.
“30분 동안 휴식하고 바로 타격 연습으로 들어간다! 몸 안 풀어지게 다들 주의해!”
별로 듣는 녀석들은 없었다. 모두들 땅에 엎어져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숨 고르기에 바빴다. 오직 강진철 만이 이 광경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타격 폼 체크를 하고 있었다.
“자, 다 쉬었으면 타격이다!”
30분은 순식간이었다. 다시 울상이 된 녀석들이 타석으로 섰다. 이제 태경이도 타석에 섰다. 그 동안 허리가 걱정되어서 부담을 최대한 줄였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투입하고 있었다.
‘태경이는 타격도 제법 하지. 한 7번 정도로 넣으면 제 역할을 할 거야.’
따악!
“오! 쭉쭉 뻗는데?”
달리기는 힘들었지만 타격에서는 모두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은 모래주머니를 떼어 냈기 때문에 팔 다리가 날아갈 것 같을 것이다.
모래주머니는 무식하고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효과 하나만큼은 뛰어났다. 팔과 다리에 근육을 붙여줌은 물론, 팔이 무거워 졌다고 근육을 착각하게 해 평소에 낼 수 있는 힘을 늘려준다.
따악!
이번엔 강진철의 타구였다. 녀석의 타구가 소름끼칠 정도로 예리한 코스로 굴러갔다. 여전히 대단한 녀석이었지만 강진철의 경우엔 문제가 있었다.
“저 녀석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군.”
분명 그 타격은 대단했다. 털끝 하나만큼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스윙. 하지만 종합적으로 본다면 결코 뛰어나지 못했다.
‘그 동안 쭉 웨이트 트레이닝에 힘을 쏟았는데 힘이 늘어나는 기미가 보이질 않아. 근육도 전혀 붙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근육이 붙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강진철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저 체격으로는 절대 장타가 나올 수 없었다.
‘외야를 뚫지 못하는, 다리까지 느린 4번이라…….’
분명 나아지곤 있지만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팀이었다.
‘역시 녀석이 필요해.’
내 눈이 가리키는 곳엔 여전히 헛스윙에 전념하고 있는 이명호가 있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묵묵히 형과 같은 공을 헛치는 녀석의 모습이 어쩐지 절박해 보였다.
- 작가의말
오늘은 2연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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