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위운 님의 서재입니다.

봉황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완결

은깨비
작품등록일 :
2012.04.05 01:07
최근연재일 :
2012.04.05 01:07
연재수 :
83 회
조회수 :
326,479
추천수 :
1,751
글자수 :
427,977

작성
11.11.15 22:42
조회
3,747
추천
17
글자
11쪽

봉황대기 34 - 들켜버린 이야기

DUMMY

Chapter 34


학교로 가는 내내 불안감에 떨었다. 버스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지갑을 손에 꼭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이 어색함이란. 큰 돈을 가져 본 사람 만이 안다. 이 불안함!

‘돈에는 분수가 있다던데…….’

통장에 들어있는 5천 만원을 보자 눈이 돌아갔다. 당장 근처 한정식 집으로 달려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헌데 배 부르고 등 따시니 이제 걱정이 새록새록 생겨나는 게 아닌가.

“으음……. 이 큰 돈을 어떻게 한다.”

18살 나이에 돈이 필요하면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기껏 해 봐야 밥 먹을 돈에 간식 사 먹을 정도 있으면 충분하지.

“아, 어제 고생 했으니 회식이라도 시켜 줘?”

다들 자기는 안 그럴 것 같지만 큰 돈이 생기면 씀씀이가 커지는 것은 피차일반이다. 눈이 뒤집힐 녀석들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혼자 실실 웃고 있는데 버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버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광채였다.

“우와…….”

한 순간에 입이 딱 벌어졌다. 버스 문이 열리며 한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올라왔다. 문제는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인이었다는 얘기다.

사람에게 눈이 부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이라. 이 삭막한 출근 버스에서 저 여자애 근처에만 꽃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냐…….’

심지어 저 여학생이 타고 버스가 잠시 멈췄다. 온갖 남자는 물론 버스 기사 아저씨마저도 구경하기에 바빴다.

“아저씨 출발 안 해요?”

질투 난 한 여자가 뾰족하게 소리치자 기사 아저씨는 무안한지 험험, 헛기침하며 출발했다. 1초 만에 버스의 모든 XY염색체의 시선을 빼앗아 버린 여자는 내 옆에 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옆에 좀 앉아도 될까요?”

그때 내 옆 자리가 비어있었던 것을 태어나서 이렇게 감사해 본 적이 없었다.

“예, 옙! 물론입니다. 고맙습니다!”

횡설수설, 내가 뭔 말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정신 없이 이 여자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뽀얀 얼굴에 고운 미소가 깃들었다. 한 순간 정신이 멍 해졌다. 코 끝을 스치는 이 향기는 아침의 샴푸. 흘러내린 머리칼은 백사장에 그려진 난초.

‘새, 새가슴이 날뛴다!’

손톱만한 새가슴이 이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는 짧은 말로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난 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심지어 이 압박을 견디지 못한 오른팔이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광진고 다니시나 봐요?”

“예, 옙! 광진고 2학년 오태오입니다!”

목소리도 어쩜 이렇게 청아하고 맑은지. 말을 걸어준 덕분에 겨우 고개를 돌려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건, 정말 현실감 없는 화사한 얼굴이었다.

고운 연꽃색의 볼에 백사장처럼 빛나는 새하얀 피부. 별 없는 밤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에 단아한 미모까지.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 여자와 분홍빛의 연꽃만이 새초롬하게 배경으로 피어나 있었다.

'우와아……. 이, 이쁘다…….’

사나이 오태오, 부끄럽지만 18년 동안 연애경험이 없다. 게다가 남중 남고로 진학해 왔기 때문에 이런 여성미가 물씬 넘치는 여인네가 근처에만 와도 몸 전체가 석고상처럼 굳어버린다.

"광진고 앞인데 안 내리세요?"

“에? 아, 아참! 아저씨 잠시만요!”

이 여자가 말하는 순간 영문도 모르고 소리쳤다. 소리치고 나서야 내가 왜 소리쳤는지 알았다. 정말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굴러 떨어지듯이 문에서 내려 버스를 바라보는데, 그 여학생이 살포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헤, 헤……."

떠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멍한 기분으로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오태오, 18년만의 첫 사랑이었다.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을 꼽자면 날을 새도 모자라겠다. 어머니의 이혼, 그리고 그 날의 경기에서 맞은 만루 홈런. 최근에는 한수연과의 만남도 추가되었지.

하지만 최고의 날을 꼽는 건 너무나도 간단했다. 왜냐면 바로 오늘이었으므로!

"히힛, 이힛, 이히히히…….”

신장 186cm에 90kg을 넘는 장대한 기골을 가진 내가 실성한 웃음과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모습은 과히 좋은 꼴이 못됐다.

얼굴엔 웃음 꽃이 피고 세상 만사가 다 화사해 보였다. 들뜬 마음에 부실로 달려갔다. 이 녀석들, 열심히 하면 오늘 거하게 회식이라도 시켜 줘야겠…….

“태오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야?”

부실 문을 열려는 순간 제법 크게 들려온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태경이의 목소리였다. 들뜬 가슴이 얼음물에 담가진 듯 빠르게 식어버렸다.

‘뭐지? 장난스런 분위기는 아닌데?’

언뜻 듣기에도 진지한 톤의 이야기였다. 나도 모르게 문 옆에 숨어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아무리 둔해도 알 수 밖에 없지. 응암고와의 1회 말에서 너무……. 그래, 겁에 질려 있었어. 내가 10년은 야구를 해 왔다만 그렇게 궁지에 몰린 것처럼 겁에 질린 모습을 처음 봤어.”

이 빠른 말투는 분명 김석곤이었다. 그리고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들켰나? 내 상태가 어떤 건지 알아차려 버린 건가?

눈망울이 격심하게 흔들렸다. 숨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 나도 솔직히 태오가 던진 공은 좀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건……. 다른 걸 떠나 우리 팀의 에이스로서 던져서는 안 되는 공이 아니었나 해.”

이번엔 대호의 목소리였다. 소심하지만 녀석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녀석들은 1회에 맞은 만루 홈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호가 저렇게 말 할 정도니 그때의 내 상태가 과연 어떠했을지…….

‘녀석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 상황에서 그런 어이없는 공을 던진 것은 녀석들에 대한 지독한 배신이었다. 희망을 준다고 해 놓고, 이길 수 있다고 해놓고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던가…….

"휴우…… 말 할 수 밖에 없나."

태경이가 한 숨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덩달아 나 또한 힘이 쪽 빠졌다. 벽에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태오는 자기 얘기를 남에게 하는 걸 원체 싫어해서……. 하지만 너희들이 앞으로 봉황대기를, 그리고 그 뒤의 1년을 같이 헤쳐갈 녀석들이니까 말해둘게.”

말하지 말아줘.

“시작은……. 아마 그때 였던 것 같아. 초등학교 5학년, 태오의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을 때부터.”

“이혼?”

“태오네 부모님이 이혼을?”

“응……. 예전부터도 많이 다투시곤 했는데, 그게 이혼으로까지 번졌나 봐. 그리고 태오가 5학년이 되었을 무렵엔 위자료 때문에 아주 심하게 다투셨던 모양이야. 그래도 외동아들인 태오가 경기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억지로나마 싸움을 멈추고 웃어주셨다고 해.”

“아마 그때부터였지. 태오가 죽기 살기로 야구와 승리에 매달렸던 게. 포수인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이 던졌지.”

형진이의 덤덤한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얼굴을 가리고 최대한 작게 웅크렸다.

부탁이야 말하지마.

“그렇게 위태로운 나날 속에 태오는 견디고 있었어. 그런데 부모님이 이혼을 확정 지으시던 날, 태오는 시합이 있었어. 리틀 리그 준결승전이었지. 그 날은 작정을 하셨는지 싸움이 너무 심하게 번졌고, 견디다 못한 태오가 말했지. ‘내가 이기고 올 테니 제발 더 이상 싸우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시합에 나갔지만…….”

“어떻게 됐어?”

“태오는 분발했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흔들리고 있었어. 한 시합 동안 계속 얻어맞다가 마지막 회엔 만루 홈런까지 맞았지. 그 때 허망한 태오의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잠깐 동안, 나에겐 너무나도 귀중한 잠깐 동안의 적막이 흘렀다. 이대로 이 이야기가 끝났으면. 가슴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감춰뒀던, 이제는 딱지가 붙어 무감각해졌던 상처에서 다시 핏물이 흘러내렸다.

"……계속해줘."

“……정작 태오의 부모님은 그 경기에 오지도 않으셨어. 이혼과 위자료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거지. 나중에 부모님이 오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태오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어. 눈도 뜬 채로, 평범하게 걷다가 길에서 기절해 버린 거야. 쇼크가 너무 컸거든. 어머니를 워낙 좋아했던 태오니까.”

“아마 그 이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태오가 저런 심한 새가슴이 되어버린 것도, 공이 죽어버린 것도. 물론 지금처럼 빠르지 않고 컨트롤이 좋지도 않았지. 하지만 그때 태오의 공은 좀더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 마운드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웃었고."

"고것이 트라우마 같은 거 아니어라?

“글쎄. 그런 거창한 말은 잘 모르겠고……. 태오는 아직까지 어렸을 적 그 두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정신과에서 상담이라도 받아 보라고 권해 봤는데 많이 싫어 하더라구. 내가 미친놈도 아닌데 거길 왜 가냐고. 그런데도 계속 너무 속절없이 무너지니까 한 번 찾아가 본 적이 있어. 거기서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는데…….”

“거시기 복잡하구마잉.”

"그럼 대체 왜……?”

“알고 있어? 태오는 원래 겁이 많아. 얼굴도 좀 사납게 생기고 거칠어 보이지만 사실은 속이 엄청 여린 놈이거든. 귀신도 무서워하고 협박에도 약하고. 위기에 몰리면 녀석이 절박하게 변하는 거야. 필사적이 되는 거지. 팀원 모두가 승리에 대해 걸 고 있는 기대, 이기기 위해 한 연습. 그런 것들이 걸려 있으니 중압감을 느껴버리는 거야. 겁도 많은 녀석이, 그런 압박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무너지는 게 아닐까.

저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을 움켜쥔 채로 온 몸을 파르르 떨었다. 왜지? 이 상처는 중학교 때 이미 덮어버린 것 아니었어? 다 나았잖아. 근데 왜. 왜 이렇게 여기가 아프지?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입을 열면 토악질이 쏟아질 것 같았다. 힘겹게 다리를 일으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달렸다.

“우웨엑!”

뱃속이 들끓었다. 토악질과 함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토하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아침의 그 행복했던 순간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한 순간에 끝나버린 백일몽과도 같았다. 멍한 기분, 돌아가지 않는 머리.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생각나지 않았다.

몽롱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갈피를 잡지 못할 감정의 급류 속에서 흔들렸다.

"조금 쉬자..."

지금은 그저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조금, 쉴 수 있는 시간이.


작가의말

휴우........ 아쉽습니다. 조금 더 버틸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연참대전이 너무 어이없이 끝나버렸군요.
그날 왜 잤을까 흑흑.
그래도 주간연재 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봉황대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3 봉황대기 52 - 백일현 +8 11.12.23 2,787 12 8쪽
52 봉황대기 51 - 저주할거다! +12 11.12.20 2,737 14 13쪽
51 봉황대기 50 - 대명고 vs 서운고 (2) +8 11.12.18 2,760 18 17쪽
50 봉황대기 49 - 대명고 vs 서운고 +6 11.12.17 2,871 12 11쪽
49 봉황대기 48 - VS 백상고 (8) 이리의 최후 +17 11.12.14 2,994 14 14쪽
48 봉황대기 47 - VS 백상고 (7) 뿌득 +12 11.12.13 2,795 12 13쪽
47 봉황대기 46 - VS 백상고 (6) 체인지 +8 11.12.11 2,974 16 12쪽
46 봉황대기 45 - VS 백상고 (5) 더이상 못 참아 +7 11.12.10 2,892 14 11쪽
45 봉황대기 44 - VS 백상고 (4) 의문 그리고 또 의문 +10 11.12.07 3,019 17 11쪽
44 봉황대기 43 - VS 백상고 (3) 이질감 +9 11.12.05 3,112 17 13쪽
43 봉황대기 42 - VS 백상고 (2) 깨어나는 광진 +11 11.12.02 3,101 17 14쪽
42 봉황대기 41 - VS 백상고 (1) +7 11.11.30 3,194 20 8쪽
41 봉황대기 40 - 그냥 가! +11 11.11.26 3,102 18 14쪽
40 봉황대기 39 - 쌍둥이의 이야기 +9 11.11.26 3,082 16 11쪽
39 봉황대기 38 - 다음 상대는! +5 11.11.25 3,110 19 11쪽
38 봉황대기 37 -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 +6 11.11.22 3,344 16 15쪽
37 봉황대기 36 - 코피? +14 11.11.20 3,618 16 15쪽
36 봉황대기 35 - 우승이 먼 이유 +5 11.11.17 3,704 16 10쪽
» 봉황대기 34 - 들켜버린 이야기 +4 11.11.15 3,748 17 11쪽
34 봉황대기 33 - 무대의 뒤 +5 11.11.13 3,909 17 12쪽
33 봉황대기 32 - 봉황대기 (8) 막을 내린 경기 +13 11.11.12 4,132 19 12쪽
32 봉황대기 31 - 봉황대기(7) 스타의 자질 +13 11.11.11 4,003 18 10쪽
31 봉황대기 30 - 봉황대기(6) 반격의 시작 +6 11.11.10 4,000 20 14쪽
30 봉황대기 29 - 봉황대기(5) 부활의 순간 +11 11.11.08 4,139 20 9쪽
29 봉황대기 28 - 봉황대기(4) +10 11.11.07 3,763 16 11쪽
28 봉황대기 27 - 봉황대기(3) +5 11.11.05 3,803 20 11쪽
27 봉황대기 26 - 봉황대기(2) +6 11.11.02 4,061 20 10쪽
26 봉황대기 25 - 봉황대기(1) +6 11.10.30 4,346 21 8쪽
25 봉황대기 24 - 출진전야 +8 11.10.26 4,301 21 14쪽
24 봉황대기 23 - 어느 지독한 날 +7 11.10.25 4,306 17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