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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연재수 :
19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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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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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8
글자수 :
988,619

작성
22.02.07 09:20
조회
1,163
추천
30
글자
11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95화

DUMMY

강철수는 그날 밤 간신히 꿈을 꾸었다.

몇 년 만의 안락한 잠자리는 이상하게도 불면을 불러왔다. 꽁꽁 언 길에서조차 웅크리기만 하면 잠들 수 있었는데, 깨끗하고 따뜻한 이불에서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강철수가 뒤척일 때마다 이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강철수는 창 너머로 들어오는 빛에 한참이나 시선을 뺏겼다.


”··· 죽어서 꿈을 꾼다면 딱 이런 기분이겠군.“


눈앞의 모든 게 현실감이 없었다. 차라리 죽고 난 뒤에 환각을 보고 있는 편이라는 생각이 현실성 있었다. 냄새가 나지 않는 깨끗한 몸, 온기가 느껴지는 바닥, 조용한 바람 소리 모두 꽤 오랫동안 강철수의 몫이 아니었다.


스윽.


강철수가 손을 들어 까만 때가 빠진 손톱과 손바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너무도 많은 일을 저질렀다. 강철수의 팔이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숨죽여 흐느꼈다.


”철,“


문고리를 잡아 쥐는 강인수의 인기척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울음은 점점 커졌다. 강인수가 잡았던 손잡이를 놓았다. 그렇게 강인수는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


어떤 밤을 보냈든지 결국 아침은 다시 왔다. 강철수는 문고리를 쥔 채 몇 분을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순간 강철수가 열어서 넘어야 하는 것은 문이 아니라 선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손바닥 안에 땀이 고였다. 강철수는 깊게 숨을 들이쉰 이후에 문을 밀었다.


끼익.


집은 조용했다. 강인수는 형제건설의 사무실에, 최민영은 강연우를 데리고 고아원에 간 참이었다. 거실에 놓인 테이블에 종이가 놓여 있었다. 강철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들었다.


[밥 먹거라. 점심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마.]


끝이 반듯한 글씨들이었다. 강철수는 그 글씨를 손끝으로 찬찬히 쓸어 보았다.


”형님 글씨는 여전하시군.“


이어서 강철수는 테이블에서 삼 형제의 액자를 발견했다. 사진은 낡았을지언정 깨끗했다. 그 옆에는 강인수와 최민영이 어린 강연우를 안은 채 웃으며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강철수는 두 액자에 손을 뻗지 못한 채로 사진 속의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 강인수가 집에 돌아왔다. 강인수는 혹시라도 강철수가 떠났을까 허둥지둥 집으로 들어왔다.


”철수야!“


집 안에 강철수가 보이지 않았다. 강인수는 강철수를 부르며 집 안을 찾았다. 그때 마당과 이어진 거실의 창문에서 강철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강인수는 마당에 있는 강철수를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게야. 추울 텐데.“


강인수의 말처럼 강철수는 겉옷도 입지 않고 서 있었다. 강인수가 서둘러 담요를 챙겨 나왔다.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형님, 이 꽃··· 무궁화 아닙니까?“


겨울이라 꽃은 피지 않았으나 강철수가 가리킨 것은 강태수가 심어 두었던 무궁화였다.


”그래, 맞아. 태수가 심어 둔 것들이다.“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나 강인수의 말은 생각보다 더 무겁게 강철수의 마음을 짓눌렀다. 강철수는 강인수가 돌아오기 전 떠나려 했다. 강철수 자신 역시도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강인수를 신고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터였다. 강철수가 무궁화를 발견한 것은 그러던 찰나였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강철수는 마당으로 향했다.

강철수에게 강태수가 선물해 주었던 무궁화는 너무 큰 사치가 되어 있었다.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떠나왔던 집이었으나, 만개한 꽃의 한 장면은 오래도록 눈 안에 남아있었다.

계절이 바뀌면 다시 꽃이 필 터였다. 강철수는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을 마른 나무들 앞에 머물렀다. 마치 자신이 멈춰서 뿌리를 내릴 것처럼 그렇게.


”들어가자. 춥다.“


강인수가 강철수의 팔을 잡아끌었지만, 강철수가 버티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흔들릴 뻔했으나 흔들려서는 안 됐다.


‘또 형님께 민폐를 끼칠 수는 없어.’


강인수가 다시 강철수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일단 들어와서 몸은 좀 녹여라. 얼음장이 따로 없다. 이야기는 그 후에 하면 돼.“


강인수는 강철수가 걸음을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 따뜻하게 데워져 있던 집이 큰 창을 열어 둔 탓에 식어 가고 있었다. 강철수가 거실 안으로 들어오고, 마침내 바람이 막혔다.

형제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별다른 대화가 없는 식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철수야.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너를 다시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강철수는 강인수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강인수가 강철수의 낯선 모습들을 발견했듯, 강철수 또한 몇 년 만에 만난 형의 낯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강인수의 이야기는 드문드문 이어졌다. 강태수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부여에 왔었다는 이야기와, 강태수가 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태수는 전쟁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어. 덕분에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떠날 채비를 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있는 법 아니겠느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들이 순식간에 밀고 내려왔다.“


강철수는 식탁 밑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강인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운이 좋아 무사히 부여를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강철수는 자신이 망원경으로 확인한 후 보내주었던 강인수를 떠올렸다. 강철수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었지.“


강인수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불길한 예감이 강철수를 감쌌다.


”어떻게 인민군들이 전부 점령한 지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하나도 다치지 않고 멀쩡한지. 국군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


강인수는 아직도 가끔씩 그날의 악몽을 꾸고는 했다.


‘인민군 놈들이 가득 찬 그곳을 어떻게 너희 부부만 아무 탈 없이 건너올 수 있다는 말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으윽!’

네놈이 넘어온 저 산 너머는 지금 인민군밖에 없어! 민간인은 다 죽고 없다고! 죽고 싶지 않으면 불어! 네놈들의 목적이 뭐냐!‘

’나는 모르오!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강인수는 핏줄이 전부 불거지도록 억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제야 형의 손에 가득한 흉터가 다르게 보였다. 강철수는 막연히 그 상처들이 농사로 인해 생긴 것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러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르지.‘


강철수는 이제 외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사람을 해하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몸에 익은 것들은 강철수가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그를 움직였다.


턱.


강인수가 강철수의 손을 붙들었다. 형제의 손에서 서로 다른 흉터들이 맞물렸다. 강인수의 손은 따뜻했다.


”전쟁이었어. 사람이 미치고도 남는 날들이었다. 그래서 잊으려고 애썼다. 이제는 이렇게 털어놓을 수도 있게 되었고.“


강철수는 이를 악물었으나 강인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너를 용서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게다. 이 나라 역시 아닐 테지. 하지만 나는 너를 태수처럼 월북시켜 주고 싶지도 않고, 월북시키지도 않을 예정이다.“


강인수는 강철수가 떠나겠다는 말을 북으로 향하겠다는 말로 이해한 참이었다.


”형님.“

”철수 네가 이 땅에 남았다면 이유가 있었겠지.“


놀랍도록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였다. 강철수는 김인국을 떠올렸다. 김인국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강철수의 귓가에 맴돌았다.


’의준아, 복수,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돼. 그러려거든, 쿨럭, 차라리···. 차라리, 네, 형에게, 돌아가거라.‘


김인국과 강인수가 겹쳐 보였다. 겹쳐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김의준으로 산 날들은 모두 잊고, 다시 강철수로 살아라.”

“···.”


강철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강인수가 더 강하게 강철수의 손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전란에 헤어졌던 것이고, 그 후로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너를 찾아낸 것이지.”


강인수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줘 이야기하고 있었다. 강철수보다도 강인수에게 더 필요한 말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강인수의 얼굴은 간절했다. 마지막 희망을 눈앞에서 목도한 사람처럼 눈빛은 강렬했고, 손아귀의 힘은 풀릴 줄 몰랐다.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유학을 보내주마. 다리도 치료하고. 일본에서라면 네 다리도 고칠 수 있을 거다. 몇 년 동안 유학을 다녀오면 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강철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목구멍에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


강인수는 출발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날이 아닌 다음 날이 되어서야 강인수는 강철수에게 부여에서의 마지막 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살리려던 걸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 그럴 리가 있겠어. 덕분에 이렇게 살아 있다.‘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태수가 나를 살린 줄 알았는데, 철수 너도 나를 살린 거였다.‘


함께 있던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은 최민영 또한 강철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강철수가 저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부여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을 터였다.

강인수는 의사를 불러 강철수를 치료하도록 했다. 아직도 몸 이곳저곳 노덕출의 고문 후유증이 존재했다.

몇 번이고 빠졌다가 다시 자란 손톱은 제 모양이 아니었으며, 지속되는 구타에 살이 까맣게 죽어 차오르지 않은 부분도 상당했다. 강철수를 본 의사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영양실조가 심각합니다. 다리는 이미 너무 오래전에 다쳐서, 재활을 한다고 해도 남은 평생은 다리를 절게 될 것 같습니다. 이미 피부가 괴사한 곳들도 적지 않네요.‘

’선생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겨우 만난 동생입니다. 치료비는 얼마가 되든 상관없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게, 저도 손을 쓸 수가···.‘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강인수는 방도가 없는지 수차례 물으며 애원했으나 강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죗값에는 여전히 모자라겠지만.‘


강철수는 꾸준한 치료를 통해 점점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감했던 얼굴에 점차 웃음도 다시 생겨났다. 불가능할 줄 알았던 일이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여름이 되어서, 강철수는 다리를 전보다 덜 절게 되었다. 그때 강철수는 이야기했다.


’이제 다녀와도 될 것 같습니다.‘


강인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인수도 이제는 그럴 수 있었다.


’다녀오거라.‘


무궁화는 다시 피었고, 다시 졌다. 시간은 틈을 주지 않고 흘렀다. 또다시 해가 바뀌었다. 강인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1955년, 전쟁 후 심각했던 외형상의 피해는 집중적인 복구 과정을 거쳐 상당 부분 회복되었다.


“후, 드디어 완공되었군.”

“축하드립니다, 강 사장님.”


그리고 그 중심에 강인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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