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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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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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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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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8,619

작성
22.02.0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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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87화

DUMMY

강인수와 강태수는 새벽의 어스름한 빛을 따라 길을 걸었다. 형제는 서로의 그림자를 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림자의 길이는 별다를 바가 없었다. 강태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뜨거웠던 바람에 어느새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시원함이 조금씩 섞이고 있었다. 바람을 느끼던 강인수가 입을 열었다.


“벌써 또 계절이 바뀌는가 보다, 태수야. 시간은 정말 잘 가는 듯해.”


강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가 건너는 중인 영도다리는 만남의 장소였고, 인근 국제시장은 피란민의 생활 터전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 중에 입을 모아 염원을 담은 약속을 나눴다.


‘살아 있다면 부산 영도다리 앞에서 다시 만나자.’

‘전쟁이 끝나면 영도다리 앞에서 만나자. 죽지 말자.’


낙동강에 방어 전선이 형성되는 사이 전국의 피난민은 하나같이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헤어짐이 임박한 피난길에서, 헤어져야 하는 이들이 떠올린 장소는 영도다리였다. 그만큼 영도다리는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한 다리였다. 동양 최초의 도개교이기 때문이었다.

영도다리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걸음 했고, 그들은 가족 이름을 적은 종이나 헌 옷을 영도다리 양쪽 난간에 빽빽하게 붙였다. 그 종이와 헌옷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저들은 가족을 찾았는지 모르겠구나.”


강태수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훑는 강인수의 눈에서 그리움을 발견했다. 강태수는 자신의 눈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파도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바다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점집이 여럿 보였다. 강태수의 의문스러운 얼굴을 본 강인수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다 지친 게지. 기다리는 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다려야만 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냐.”


고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하나둘씩 점집을 찾았다. 사람들은 헛된 희망을 바라며, 혹은 확실한 불행을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하나, 두 개 정도였다. 그런데 점점 더 많아지더구나. 저걸 ‘점바치 골목'이라고 해. 나도 태수 너를 찾지 못했을 때 가 볼까 싶었을 정도였으니, 저들은 더욱 간절하겠지.”


휘이잉.


색동천과 헌옷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렇게 피난민들은 영도다리를 떠나지 못하고 다리 주변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본래 살던 곳이 아닌 좁고 새로운 터전에 하룻밤마다 판잣집은 새로 생겼다. 판자로 엮은 집은 점차 산으로 올라갔고, 땅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무덤 위에 집을 짓고 다시 살아갔다. 무덤 비석을 벽 대신 삼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갔다.


촤아악, 촤악.


한순간에 50만 명의 인구가 들어선 부산은 기존 도시구조로는 그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한순간에 부산의 인구는 100만 명으로 불어났다. 짧은 사이에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9월을 앞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은 1023일 동안 서울을 대신한 임시수도였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독히도 길었을 듯합니다.”


그것은 강태수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강인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강태수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렸다. 강인수는 강태수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강태수는 기분이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 귓가에 생생하던 총성과 폭격음 대신 들리는 바람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 파도소리가 적응되지 않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강태수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벌써부터 사람들이 적지 않군요.”

“다들 부지런하지.”


사람들은 바쁜 와중에도 강인수를 발견하자 인사를 건넸다.


“강 사장님, 오늘도 일찍 오셨네예.”

“아, 김 사장님. 오늘도 생선 물이 좋아 보입니다.”

“지가 새벽부터 잡아왔다 안 합니꺼. 강 사장님 것도 미리 빼 놨습니더. 제일루 좋은 걸루다가요.”

“하하, 매번 신세를 지네요. 이따 꼭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다시 못 오면 아내에게라도 꼭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강 사장님이 어디 약속 어기실 분입니꺼. 기다리고 있겠십니더.”


강인수는 그렇게 자신에게 인사하는 이들 한 명 한 명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이고, 강 사장님. 안녕하십니꺼.”

“한 선생님도 벌써 나왔네요. 지난번에 다쳤다는 곳은 좀 괜찮습니까? 아내에게서 들었습니다. 무릎을 다치셨다고.”

“사모님이예? 하이고, 남사스럽어라. 하모예, 괜찮지요. 강 사장님은 어디 안 좋은 곳 없으십니꺼?”

“지난번에 챙겨 주신 것들 덕분에 아주 건강합니다.”


강태수는 그런 형을 한 걸음 뒤에 서서 지켜보았다.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 강태수는 어째서 강인수가 부산을 떠나기 힘들어하는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강태수는 부여와 서울, 그리고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라면, 그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향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 한 곳에 오래도록 머무를 수 없었다. 그 말은 정을 붙일 수 없었다는 것과 같았다.

강태수를 이 나라에 묶어 두는 것은 그가 만났던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다. 춘천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이 피난길에서 살아남았는지조차 알 수 없으면서도, 그 의무감은 언제나 강태수를 붙들었다.


“오늘도 고생하십시오. 몸은 꼭 챙기시고요.”

“강 사장님도예. 꼭 조심하셔야 합니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는 강인수의 등 뒤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강태수는 그 풍경이 오래도록 평화롭기를 염원했다.


*


“이걸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럼 자투리가 조금 덜 나와요.”

“오, 그런 방법이 있네.”


공장에 도착한 강태수는 벌써부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에게서는 열정이 느껴졌다. 강인수는 소리 높여 사람들에게 인사했고, 사람들은 일을 멈추고 강인수와 인사를 나눴다.

강인수는 곧 사람들에게 강태수를 소개했다.


“몇 번 본 사람도 있을 테고, 처음 본 사람도 있을 테지만 이쪽은 내 동생 강태수 대위입니다. 내 입으로 이런 자랑을 하기는 민망하지만, 전쟁 동안 아주 용감히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서 연합군 사령관에게 훈장까지 받은 군인입니다.”


강인수의 말에 강태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연합군 사령관에게 훈장을?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게 가능한 일입니꺼?”

“그게 참말이어라?”


공장 직원들의 반응에 강인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형님은 무슨 그런 말씀을.”


강인수가 환하게 웃으며 강태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민망해하던 강태수도 그 웃음에 그저 웃고 말았다. 강인수는 그 웃음이 아주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천진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두 형제가 찾던 사람이 나타났다.


“강 사장님과 강 사장님의 동생 분 모두 대단한 분들이긴 합니다.”


길원상의 얼굴에도 역시 웃음이 가득했다.

세 남자는 공장 근처에 마련한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길원상이 익숙한 손길로 차를 내려 강인수와 강태수에게 내주었다.


“역시, 아저씨의 차 맛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강태수가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들을 때마다 기분이 참 좋습니다.”


분위기는 따뜻하고 향긋한 김이 올라오는 차처럼 훈훈했다. 길원상은 강인수의 부탁으로 모직공장의 공장장을 맡아 주고 있었다. 길원상은 유학하며 배운 경험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다. 강인수와 더불어 길원상은 공장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강인수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강인수는 강태수와 나눴던 이야기를 길원상에게 꺼냈다.


“이번에 서울에 가게 되면 공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태수가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서울에서는 서울에서의 장점이 있는 건설업을 하고, 부산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은 모직 공장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입니다.”


깍지를 낀 채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 둔 강인수의 모습에서 사업을 시작하던 처음과는 달리 확실히 여유가 느껴졌다. 강태수는 새삼 그 모습이 새로웠다.

강태수가 기억하던, 부여의 강인수의 모습들은 점차 희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강태수는 강인수의 결단력만은 여전하다는 것을 느꼈다. 강인수는 한 번 시작하면 그게 무엇이든 끝을 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리들 중 제일 끈기 있는 것은 형님일지도 모르지.‘


강인수은 말을 잇고, 길원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의 도움으로 전란 중에 이미 서울에서 사람들이 ‘형제’라는 이름을 내걸고 미군들이 지낼 건물을 한 번 지은 적이 있습니다마는, 그게 자랑할 만한 유일한 경험입니다.”


강태수는 3월 서울 수복 이후, 리지웨이 사령관이 부탁한 대로 미군들이 서울에서 지낼 수 있도록 초소를 짓는 일을 강인수에게 맡겼다.

강인수가 건설업을 시작하던 시기와 리지웨이 사령관이 부탁한 시기가 적절히 맞아떨어진 덕이었다. 서울에 미리 연을 알아 두었던 기술자들이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꽤 훌륭한 결과물을 얻었다. 강인수는 그때 더욱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그 후에는 길원상이 돌보는 아이들과 더불어 강인수가 고용한 상이군인들까지 함께 지낼 수 있는 보호 시설을 세우는 현장에 수없이 나가면서도 공부에 매달렸다.


“부산에서도 경험을 쌓았다고는 하나 앞으로 더 배워야 할 일들이 많을 테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커다란 창밖으로 파도가 쳤다. 강태수뿐만 아니라 길원상 역시 강인수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부산의 형제모직공장을 길 사장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을 터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민망합니다.”

“달라지는 게 없다니요.”


길원상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강 사장님이 저들의 눈앞에서 서울로 떠나신다는 것부터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겁니다. 직원들의 사기가 전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보다 길 사장님과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저를 믿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길 사장님을 믿고 제게 왔습니다. 항상 그 사실을 생각하며 자만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강태수가 강인수에게 고개를 돌렸다. 강인수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방만한 말이라는 것은 압니다만, 진심입니다. 길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만큼 꾸리는 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 공장을 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길원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인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 시름 덜 수 있겠군요.”


이후에는 일상적인 대화와, 서울에서 어떻게 하면 ‘형제건설’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강태수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햇빛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


“벤자민이 미국에 돌아갈 때 함께 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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