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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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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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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8,619

작성
22.01.2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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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78화

DUMMY

강철수의 말은 혼돈이 섞인 정적을 불러왔다. 최정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배성훈과 현욱성, 이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기색을 보인 것은 학생연맹이었던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동지들이었다.


“김의준 동지, 그, 그게 무슨 소립네까?”

“저는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와 함께 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턱!


강철수가 말을 덧붙이려던 그때, 최정혁이 강철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이야기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사람들을 향해 덧붙인 강철수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앞서가는 최정혁의 뒤를 쫓았다.


“쉬고들 계십시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걸음만 앞세웠다.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멀어진 후에야 멈춘 최정혁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나도, 나도 슬프다. 이게 전부 다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다. 내 손으로 선생님을 묻어 드렸지만, 믿기지가 않아. 선생님은 이렇게 가셔서는 안 되는 분이었다. 선생님이 이 나라에 헌신하신 세월과 노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나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거야.”


강철수는 말없이 흙이 가득 묻은 최정혁의 무릎을 보았다. 이리저리 찢겨진 옷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가슴 아파한다고 한들 아버지를 잃은 네 심정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지만.”


최정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분노가 느껴졌던 처음과 달리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만은 알겠어. 이건 아니다. 김의준, 이건 아니야.”


형체가 없는 누군가에게 입을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강철수는 고개를 젓는 최정혁을 향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아버지는··· 알고 계셨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안석호 저놈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라면, 설마.”


언제든 깨달음은 순식간에 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최정혁의 눈이 커졌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강철수는 괴로운 얼굴로 부정하는 최정혁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진 안석호가 시야에 걸렸다. 손잡이만 보일 뿐, 칼날은 보이지 않았다. 전부 안석호를 가르고 들어간 것이었다.

강철수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수없이 많은 피가 스쳐 지나간 손이었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제가 지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최정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철수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별다른 표정이 없는 무감한 표정이었으나 오히려 더 괴로워 보이는 것은 강철수였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혹시나 선생님께서 일부러 당해 주셨다는 이야기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김의준.”


침묵은 긍정이었다.


“제게 복수하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들과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요.”

“···.”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에 나를 증명해야 한다면, 다른 방법도 가능할 것이라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고립되었습니다. 우리는 고립된 게 아니라, 고립당한 겁니다. 그때부터는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

“지리산에 도착했을 때는 불안했습니다. 수십, 수백 번 선생님과 형, 그리고 형들과 함께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오늘이 아니더라도 결국 벌어질 일이었을 겁니다. 막으려고 애써도 소용없는 일이었겠지요.”


최정혁은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었다. 강철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에서는 저를 시험하는 것과 동시에 선생님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지령을 내린 간부는 헤어지기 직전, 제게 옳은 선택을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옳은 선택입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면, 살리는 것은 그른 선택이 됩니다.“

“···.”

”그들로서는 제가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든 이득을 얻게 됐을 겁니다. 제가 지령을 수행했다면, 이 전쟁과 혁명은 부모의 천륜도 끊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중하다고 선전했을 것이고,”


강철수가 천천히, 그러나 아주 세게 주먹을 쥐었다. 하얗게 도드라진 뼈 위에 아직 흙이 남아 있었다.


”제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옳지 못한 선택을 해 끝까지 지령을 거부했다면, 부자가 함께 변절했다며 우리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포상하겠다고 선전해 사기를 올리는 데 이용했을 것입니다.”

“김의준.”

“얼룩이 처음 생겼을 때 말입니다. 그게 피든, 흙이든, 무엇이 됐든 처음에는 지워집니다. 흔적이 남을지라도 지워집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섭습니다. 그 흔적들이 모이고, 모여서 새로 묻은 핏자국보다 더욱 짙을까 봐.”


강철수는 자신이 목숨을 빼앗았던 이들을 모두 기억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도 기억이 나는 것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빛은 쉬이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건 잘못된 전쟁입니다.”

“강철수!”


강철수의 입에서 그 말만은 나오지 않길 바라던 최정혁이 결국 소리쳤다. 몇 년 동안 부른 적도, 불린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강철수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 미소는 최정혁이 살면서 본 미소 중 제일 아파 보였다.


“예, 그러했지요. 그게 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강철수의 인생을 버리고, 강철수가 아닌 김의준으로 살면서, 오늘까지도 저에게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북과 남, 그 어디에도 상관없이 우리가 평생을 뿌리 내려 살아 온 이 땅에서 고통받았고, 고통받는 인민들을 위해 내 인생을 헌신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강철수가 떨리는 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후퇴할 때, 이 손으로 동지들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적들의 포로로 잡혀 수모를 당하느니, 동지들의 손에 편안하게 눈감을 수 있도록 해 주자 하여 그리했습니다.”


강철수의 말에 최정혁 역시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그 자리에 강철수와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강철수보다 더 먼저 방아쇠를 당긴 것도 최정혁이었다. 강철수의 말에 최정혁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잔상은 눈 안에 있었다.


“누구를 위한 김의준이고, 무엇을 위한 강철수인지 더는 알 길이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이 손에 총과 칼을 쥐는지, 모두들 무엇을 위해 이토록 살육을 해 대는지, 더는 알 수가 없습니다.”


확!


고통스럽게 눈을 뜬 최정혁이 거칠게 강철수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그 입, 닥쳐라.”

“우리가 함께 제주도에 갔을 때, 우리는 사람을 죽여 만든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면 그 세상에는 누가 사는 거냐고 묻던 할머니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입 닥치라고 했어!”

“예, 이제는 두렵습니다. 이 손에 또다시, 더 이상 피를 묻히는 일이 두렵습니다. 이게 제가 오늘 내린 결론이고, 결국 고른 선택입니다.”


휙!


최정혁이 다시 강철수의 멱살을 놓으며 힘주어 밀쳤다. 강철수는 이번에는 바닥에 구르지 않았다.


“너 같은 자식한테는 내 주먹도 아깝다.”

“다 같이 학생연맹에 있었던 언젠가 제게 겁쟁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자조적인 어투였으나 최정혁은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 강철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자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어졌다. 최정혁이 기억하는 강철수의 얼굴은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은 이제 소년이 아니었고, 누구보다도 빨리 사람을 죽일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총을 쏠 수 있는 사내들이었다.

침묵이 끝났다.


“나는 지금 당장 너에게 줄 대답이 없다. 하지만 네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내 양심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

“···.”

“그렇다고 지금 당장 너를 따라갈 수도 없다.”

“저를 따라와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입 다물고 듣기나 해.”


평소와 같은 최정혁의 모습에 강철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너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하다.”


최정혁은 엉망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곧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너를 따라간다고 해도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이 땅에는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이고, 전쟁이 끝난다고 하여도, 만약 통일이 된다고 하여도 다시 대립할 수밖에 없을 거다. 하지만 무력으로 충돌하는 일이 더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북조선도, 연합군도 알고 있으니 휴전은 되겠지.”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입 다물라고 했지.”


강철수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최정혁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다음에 이어질 말을 이미 들은 것 같았다.


“떠나라.”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


“미친놈. 무식하게도 꽂아 놨네.”


중얼거린 최정혁이 안석호의 시체에서 힘겹게 칼을 뽑아 들었다. 최정혁이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피가 굳어 있는 칼의 손잡이에는 그들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 있었다. 더불어 그것은 고위 간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이었다.

최정혁은 그대로 미리 피워 둔 불 안에 던져 넣었다. 칼날에 불 속에서 빨갛게 달궈지며 날카롭게 빛났다. 안석호의 피와 함께 나무 손잡이가 타들어갔다. 최정혁은 한참이나 불무덤 앞에 서 있었다.


*


‘네 결심이 확고하다면 지금 당장 떠나라. 때가 된다면 다시 만나겠지.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돼 있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다만.’

‘몸 조심하세요.’

‘죽지 마라, 김의준.’

‘아무래도 김의준은 오늘 저들의 손에 죽은 것 같습니다.’


강철수의 말에 최정혁은 실없는 소리라며 대꾸했지만, 강철수는 진심이었다. 줄곧 강철수를 지탱해 오던 이념이 무너졌다. 강철수에게 김의준은 그가 행하던 이념 그 자체였다. 그런 이념이 꺾여 버렸으니 강철수의 말대로 김의준은 죽은 것과 같았다.

그래서 강철수는 최정혁과 대화를 나누던 그 자리에서 헤어졌다. 강철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흐느낌을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뒤돌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위선이었다.

산을 넘으며 산을 내려갔다. 해가 지면 멈추었고, 해가 뜨면 다시 걸었다. 무식할 정도로 단순했다. 이토록 직관적으로 행동해 본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낯설다.’


참으로 낯선 감각이었다. 무엇을 선택해도 생사를 가르던 선택들과는 달랐다. 지리산에 들어와 처음으로 풀냄새를 맡았다. 줄곧 피 냄새에 가려져 있던 바람 냄새를 맡았다. 바람 냄새를 따라간 곳에는 물냄새가 이어졌고, 물냄새를 따라가면 계곡이 있었다.

계곡을 발견한 강철수는 그곳에서 몸을 씻고 피가 묻은 옷을 빨았다. 하지만 안석호의 핏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핏자국이 남은 것은 옷이었으나, 강철수는 몸이 빨갛게 변하도록 피가 닿았던 곳들을 문질렀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덜 마른 옷을 걸쳐 입고 다시 걸었다. 나뭇잎이 달라붙고, 흙이 따라붙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강철수는 산을 내려갈 때까지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산을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철수는 마을을 하나 발견했다.

마을에서 제일 먼저 만난 여인은 강철수의 몰골을 보고 기겁했다.


“이, 이게 무신 귀신 꼴이란 말여. 기, 기다려 보시오.”


그러나 그 여인은 곧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강철수에게 낡았지만 깨끗한 옷과 따뜻한 밥을 건넸다.


“총각, 계속 총각이라 부르니 정이 없네. 그래, 이름이 뭐시여? 이름은 있을 것 아니여.”


강철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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