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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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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8,619

작성
22.01.2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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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80화

DUMMY

강인수의 염색 사업은 갈수록 기세가 좋아졌다. 강인수는 군복을 염색해 만든 옷들을 비교적 싼 값에 내놓았다. 모양은 평범하고 단출했으나 천이 질겨 옷 역시 길게 오래도록 입을 수 있었다.

옷을 빼내고서 까맣게 물든 염색물을 잠시 응시하던 강인수가 생각에 잠겼다.

지금처럼 전쟁 상황에서 옷은 사치품에 가까웠으나, 사치품은 언제나 사람들을 열망하게 하는 법이었다. 몇 시간 후 강인수는 길원상의 소개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들에게 고급 옷들을 지어 주던 재봉사를 만났다.


“한때는 내가 만든 옷들이 종로에 아주 쫙 깔렸었다고. 서울에서 ‘양장’하면은 바로 나, 장강철이었지. 내가 이 화신백화점에도 옷을 납품했던 사람이야.”

“선생님, 정말 방법이 없겠습니까?”

“아니, 글쎄. 나는 그때도 전부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니까. 지금 와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천들을 다 전부 만든다면 모를까. 지금 수입해 오는 것은 전부 쓸데없는 일이야. 수요가 있기는 하겠지만, 만드는 비용이 훨씬 더 들 테니 말이야.”


안타까워하는 강인수만큼 장강철도 안타까워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그의 말은 사실에 가까웠다.


“공장을 세운다면 모를까.”


그 말에 강인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


전쟁을 피한 온갖 인파가 모인 만큼 부산의 시장은 번잡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활기가 넘친다는 뜻이기도 했다. 최후까지 인민군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한 탓이었다. 피난민들은 이제 부산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오롯이 사람들이 만드는 이만한 소음이 강철수는 적응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인파 사이를 거닐었다.


“오늘 아주 좋은 물건이 들어왔십니더!”

“그래서 이게 얼마유? 뭐, 물은 좋아 보이는디.”

“아지매가 젤 먼저 와가, 내 특별히 알리 주는 기다. 아지매한티만 내가 헉 소리 날 만큼 싸게 줄게!”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강철수는 그 모습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러 사람의 각기 다른 여러 사투리가 강철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연명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총탄 한 알에 스러진다 한들, 오늘을 버티고 다시 내일을 버티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사람들이었다.

강철수가 마주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이었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절박했으며, 어떤 때에는 위태로웠으나 결국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찬란했다.

이상했지만 당연하게 목이 메었다. 최정혁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시장의 소란스러움 속에 섞여들었다.


‘아무래도 김의준은 오늘 저들의 손에 죽은 것 같습니다.’

‘실없는 소리.’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가 있습니다.’

‘이 꼴을 본 마당에 무슨 부탁? 양심이라고는 없는 놈이잖아, 이거.’

‘누군가 김의준이 변절했다고 하거든, 저를 옹호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를 옹호하지도 마십시오.’


강철수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최정혁의 눈빛을 기억했다. 슬픔으로 식은 화였다. 분노로 가득한 화 대신에 최정혁의 눈은 침전하고 있었다.

강철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눈과 최정혁의 눈은 같았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최정혁은 강철수를 보내 주었다. 그래서 강철수는 간청했다.


‘누군가 제가 죽었다는 말을 전하거든, 슬픈 기색을 보이지도 마십시오. 그러다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는 놈 태도가 이게 맞는 거냐?’

‘부탁이야, 형.’

‘재수 없는 새끼. 너는 줄곧 그랬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재수 없었어.’

‘···.’

‘그래도. 그래도 살아라. 이 세상에서 너만큼 재수 없는 놈은 보기 드물 테니 꼭 살아남아라. 죽지 말아라. 네가 했던 모든 일들이 후회가 된다면, 우리가 했던 모든 일에 대해 후회를 한다면··· 그 후회의 크기만큼 다시 살려고 노력해라.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바늘구멍만큼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마라.’


강철수는 김말자가 주먹밥을 담아 주었던 보자기를 동아줄처럼 움켜쥐었다. 강철수는 시장 한가운데 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


눈물은 마르기 전 닦아내면 자국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흔적은 남는 법이었다. 걸으며 쉴 새 없이 닦은 눈가가 시큰거렸다. 강철수는 또다시 쉼 없이 걸었다. 부산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랐으나 이곳에도 결국 몸을 의탁할 곳은 없었다.


다다다.


몸이 가벼워 물리적으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강철수는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강철수의 조금 뒤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동생인 희수와 제주도에서 함께 왔던 부승윤, 그리고 고아원의 아이들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강철수는 그대로 멈춰 서서 입을 열었다.

며칠 만에 쓴 목은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니?”

“배, 배고파요.”


아이의 뒤에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강철수를 바라보며 아이에게 손짓하는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강철수는 짐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찾았다.


“자.”


강철수를 쫓아온 아이는 망설임 없이 강철수가 내민 말린 나물을 받아들었으나,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경계가 가득했다. 강철수는 아이의 손바닥 한가득 나물을 쥐여 주고 턱짓했다.


“응? 응.”


아이는 그대로 아이들에게 다가가 나물을 쥔 손을 뻗었다. 강철수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시큰대는 눈가로 말린 나물을 나눠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강철수는 가진 식량 중에서 절반 가까이를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강철수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눈치를 보면서도 나물을 조금씩 뜯어 먹었다.

웅크린 아이들의 작고 마른 몸을 보자 김인국의 말이 떠올랐다.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강철수는 김인국과 유례없이 크게 말다툼한 적이 있었다.


‘전쟁이라니요. 전쟁의 가부를 묻는 표결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전쟁만은 안 됩니다.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될 것입니다. 전쟁이 없을 때도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제주에서도! 여수와 순천에서도!’

‘나도 전쟁은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의준아, 희생이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피 한 방울 없이 얻은 것은 그만큼 쉽게 잃기 쉬워. 자신의 피가 묻은 것은 그게 무엇이든 쉽게 잊을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가족이나 친구도 마찬가지지. 우리가 흘린 피는 더 먼 날을 위한 밑거름이다. 그리 긴 전쟁이 아닐 것이다. 이미 전쟁 준비가 끝났어. 정보에 따르면 남한은 방심하고 있다. 이때라면 그리 큰 피해가 나지 않을 것이야.’

‘전쟁에 기한이 무슨 상관입니까? 전쟁은 전쟁 자체로 파괴적인 일입니다! 남조선의, 대한민국의 인민들 역시 구제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만을 위한 전쟁이 아니다. 그들을 위한 전쟁이기도 해. 우리가 하게 될 전쟁은 혁명의 해방 전쟁이다.’

‘꼭 피를 흘려야만 혁명인 겁니까? 아니요! 그것만이 정답일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몽양 선생님의 피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분의 피야말로 희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피가 이룩한 것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김인국은 강철수의 물음에 그저 강철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스스로 답을 찾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이 되어서까지도 강철수는 알 수 없었다. 당의 포부와 달리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희생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지금 이 한반도를 적신 피는 몽양의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름조차 남지 않고, 남지 못할 이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아래에 목숨을 바쳤다. 강철수조차 자신이 이끌던 부대원들의 모든 이름을 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죽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전황이 뒤바뀌고 불리해지면 불리해질수록, 강철수는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런데 왜 지금, 형을 떠나던 순간 형이 남긴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내가 틀렸다면, 네 그 이념도 틀리고 말 것이다.’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념이 틀린 것이 아니라 사람이 틀린 것이라 주장해 보아도, 김일성이나 박헌영 등 인물 자체가 이념의 상징이 되어 버린 지금은 고개 저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철수 자신 역시 그중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객관적으로 사고해야 했다.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을 봐야 했다.


‘당에서는 나를 이용했다.’


강철수의 또래라면 모두 강철수처럼 될 수 있다고 선전했으며, 이 시대의 젊은 장교를 따라 입대하여 혁명을 성공하는 즉시 앞으로 다시는 배를 곯는 일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라 호도했다. 그 말에 자원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철수야. 너의 그 이념은 틀렸다.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곳에서 죽고 말았을 거다.’

‘형님, 저는 형님의 말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다시는 저를 찾지 마십시오!’

‘형님은 틀렸습니다! 방법도! 목적도! 전부 다!’


언젠가 강철수 자신이 뱉었던 말이 먼 시간을 돌아와 그의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숨을 편히 쉬기가 힘들 만큼 이렇게나 고통스러움에도 피가 흐르지 않는 것은 모순이었다. 어쩔 수 없이 코웃음이 흘렀다. 그런 강철수를 아주 작은 손이 붙잡았다.


스윽.


악력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지만 강철수는 뒷덜미를 덜컥 붙잡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무릎에 닿는 감각이 차가웠다.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강철수를 바라보았다. 강철수는 손을 들어 아이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어 주었다. 사람을 수없이 죽인 손으로 해도 되는 일인지 짚이지 않았다.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속절없이 떨렸다. 답을 알면서도 하는 질문이었다.


“부모님은?”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뒤에서 아주 오래도록 우물거리며 나물을 아껴 먹던 조금 큰 아이가 무감한 듯이 이야기했다. 수십, 수백 번도 더 해 본 이야기라는 듯 태연한 어투와 목소리였다.


“가 아부지는 인민군한티 잡혀가서 죽었고, 어매는 을마 전에 병으로 죽었십니더. 우리도 뭐, 별반 다르지는 않십니더.”


표정을 숨기는 것이 이토록 어려웠던 적이 없었다. 강철수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의 시야에 아이들의 상처투성이 맨발이 들어왔다. 강철수는 몽양이 건넸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네가 걷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는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 길이 이런 길이었습니까? 물을 수 없었다. 이제 강철수가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어서 강철수 자신이 마지막으로 전달했던 몽양의 편지 속 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평등한 세상, 그리고 인민의 해방. 그것만이 강철수가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깨달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지난날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강철수는 그 소용돌이에 수긍하며 몸을 맡겼다.

아, 이것은 참회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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