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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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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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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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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88,619

작성
22.01.2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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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79화

DUMMY

강철수가 근 몇 년간 웃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지금 강철수가 보인 웃음은 침묵의 웃음이었다. 여인은 마주 웃는 것으로 강철수에게 더 이상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여인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럼 내 이름을 알려 주야 쓰겠네. 나는 숙희요, 임숙희.”

“좋은 이름이네요.”


마을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열 가구도 넘지 않았다. 마을 안에 집은 많았지만 반절 이상이 빈집이었다. 강철수는 임숙희의 손에 이끌려 그중에서도 제일 멀쩡한 집에서 묵고 있었다.


“여기, 찾아보면 입을 옷도 좀 있을 거여. 총각이 키가 커서 바지가 좀 짧겠지만은 그래도 옷은 입고 다녀야지.”


임숙희는 집들이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비어 있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강철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은 쉽게 추측하게 했고, 어렵게 침묵하게 했다.

그 후로 강철수는 무거운 것을 옮기는 등 소일거리를 돕거나 집이 상한 곳을 고쳐 주며 시간을 보냈다. 쉴 틈 없이 총과 무기를 쥐었던 손에는 손때가 묻은 낡은 망치가 들려 있었다.


휘이이.


강철수가 햇빛과 바람이 새는 판자 사이로 다가갔다. 바람이 새는 소리가 마치 휘파람 소리 같았다. 고개를 올리자 맑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강철수의 얼굴로 맑은 햇빛이 쏟아졌다.


휘이이.


김인국과 최정혁, 동지들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몇 번 헛기침한 강철수가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 말씀하시는 게 맞지요?”

“응, 응. 그래, 거기. 비만 오면 물이 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탕, 탕.


강철수가 나무에 못을 갖다 댔다. 타격음이 귓가를 울렸으나, 근 몇 년간 느낄 수 없던 조용함이었다. 여인들과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후에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 여기저기에 아직 흔적이 남아 있었다. 강철수는 가만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집은 잘 정돈돼 있었다. 그만큼 금방이라도 이 집의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때문에 강철수는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도 정말 필요한 게 아니라면 손을 대지 않았다.


‘모든 일이 전부 다 꿈같군.’


서울과 평양에서 보내던 시간도, 전쟁도, 그리고 지금도 전부 현실감이 없었다. 모두 깨지 않고 길게 꾼 꿈만 같았다.

며칠 마주 보았다고 그새 익숙한 천장이었다. 강철수가 피식 조소했다.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니 눈이 감겼다. 강철수는 그대로 꿈을 꾸었다. 한참을 걷는 꿈이었다. 걷고, 또 걸었으나 바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쿵!


그러다 한순간 다리를 잡아당기는 거센 악력에 의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바닥에 부딪힌 얼굴이 쓰라렸다.


‘으윽.’


강철수의 괴로운 신음이 끝나자마자 수많은 비명들이 주변에서 쏟아졌다.


‘아아악-!’

‘으악!’


몇 명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비명은 그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가, 아주 멀리 메아리처럼 울렸다. 무언가 수없이 많은 것들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메아리 사이에서 김인국이 걸어 왔다. 피투성이의 김인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강철수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과 함께 흙처럼 변한 김인국이 천천히 형체를 잃어 갔다.


‘아버지! 아버지, 안 됩니다! 이거 놔! 놓으라고!’


강철수는 앞으로 향하려 했으나 수많은 손길에 붙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운 손들이었다. 김인국이 흩어진 자리를 누군가 밟으며 다가왔다. 김인국이 흩어진 자리에는 어느새 뼛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손과 팔에 파묻힌 강철수가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꺼드득.


강철수는 뼈가 뼈끼리 부딪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강철수는 괴롭게 숨을 들이켜며 깼다. 몸을 일으키자 툭, 볼과 턱을 타고 흐른 눈물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그 사람은···.’


임숙희였다.


*


강철수는 아침이 될 때까지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온몸이 아프고 결렸다. 강철수는 방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 햇빛이 따스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곳에 머문 지 일주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마을에 언제까지고 머물 수는 없다.’


강철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철수로 다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김의준으로 계속 살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방 안의 먼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몇 년을 놓치고 산 장면이었다. 질문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만약 다른 선택을 하게 될까?’


그것 또한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을 골라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만 같았다. 결론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결국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채 강철수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것밖에 없어.’


강철수는 옷을 갈아입고 집 밖을 나서자마자 산에서 나물을 뜯어 온 임숙희와 마주쳤다.


“어, 총각! 오늘은 웬일로 늦잠을 다 잤네?”


강철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벽에 잠을 좀 설쳤거든요.”

“어이구, 그럼 더 자야지.”

“아닙니다. 괜찮아요.”


나물이 담긴 소쿠리를 보며 강철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산에 다녀오셨나 봅니다.”

“어? 응, 요 앞에서 나물 좀 뜯어 왔어. 이제 나물도 거의 없네.”

“이제 곧 겨울이 올 것 같습니다. 바람도 많이 차가워졌어요.”


임숙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은 하여튼 잘만 간다니까. 아, 총각. 오늘은 저, 말자 언니네 집 고쳐 줘야 하는 것 안 잊었지?”

“그럼요. 마지막 순서라고 섭섭해 하시던 것까지 기억납니다.”

“하하, 기억력도 좋으네. 우선 밥부터 먹어.”


강철수는 임숙희와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마지막 집을 고치기 위해 망치를 들었다. 며칠 사이에 손때가 가득한 나무 손잡이가 손에 익고 말았다는 사실이 결국 실소를 짓게 했다.


탕, 탕.


마지막으로 들른 김말자의 집에는 손 볼 곳이 적지 않았다. 임숙희는 그녀를 언니라고 칭했지만, 김말자는 마을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노파였다.


탕!


마지막 못이 깊숙이 박혔다. 땀을 닦은 강철수가 지켜보고 있던 김말자에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고마워요, 총각.”

“하하, 별일 아닌걸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정말로 강철수에게는 자신이 해 왔던 일들에 비하면 별일 아닌 일이었다. 인사하고 나서려는 강철수를 김말자가 붙잡았다.


“이거, 이것 좀 가져가. 주먹밥 좀 만든 거야. 가면서 먹어.”


강철수가 받아 든 보따리는 꽤 무거웠다. 임숙희의 집으로 가면서 먹기에는 꽤 많은 양이었다.

집을 고쳐 주고 돌아온 강철수에게 임숙희도 곧바로 보자기로 곱게 싼 짐 하나를 내밀었다.


“자, 받어.”


툭.


강철수는 망치를 내려놓고 임숙희가 내미는 짐을 받아들었다. 보이는 것보다도 더 무게가 나갔다.


“이게 뭡니까?”

“우리 아들이 입던 옷이랑, 먹을 것 좀 챙겼어.”


되묻지 못하는 강철수에게 임숙희는 슬프게 웃어 보였다.


“총각이 딱 나타났을 때, 나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지 뭐여. 훤칠한 것부터 해서, 키도 크고 아지매들한테 살가운 것까지 어찌나 닮았는지. 총각도 보면은 서로 똑닮았다 할 텐디.”


임숙희가 장난스레 말하며 강철수의 등을 두드렸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침에 마주치자마자 딱 알았지. 딱 떠나는 사람 얼굴이더만, 뭐. 옷도 내가 처음에 준 걸로 갈아입었잖어.”


임숙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인사는 하게 해 줘서 고마워. 안 그랬으면 두고두고 섭섭할 뻔했어.”

“저도···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편히 쉬었어요. 너무 편해서, 이곳에 계속 머무르고만 싶었습니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요.”


강철수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떠나지 말고 우리와 함께 머물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이때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총각에게 다시 이름을 묻지 않은 것도 그래서여. 묻지 않는 게 배려일 때도 있더라구.”


저벅, 저벅.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마을 입구로 향했다. 이보다 무거운 것을 수도 없이 들어 봤음에도 오늘 손에 들린 짐이 제일 무겁게만 느껴졌다. 미련의 무게였다.

허리가 부러진 장승 앞에서 임숙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임숙희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내 아들이 떠나면서 남긴 약속을 믿어. 돌아온다고 약속했으니 돌아오겠지. 한 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애였으니까. 어미 마음은 다 그래. 부모 마음도 다 그렇고. 걱정만 가득하지. 잠깐 품은 아이도 오래도록 기억하게 돼.”

“···.”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말이여. 무슨 일이 있든지 꼭 살아남아.”

“아주머니도 꼭 조심하십시오.”


그 다음으로 강철수가 단단히 일렀다.


“혹시라도 누군가 찾아와 제 사진을 들고 묻거든 모른다고, 본 적이 없다고 하십시오. 산을 넘어 온 자가 없다고 하세요. 그래야만 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부 그렇게 일러 주세요.”

“그래, 조심해서 가. 얼른 가.”


임숙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휘저었다. 몇 걸음 멀어진 강철수가 망설이고 망설이다 돌아와 입을 열었다.


“이런 느낌이 들면 꼭 후회를 하더군요. 불린 지 오래되었으나 저는··· 철수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어느새 모인 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강철수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뒤돌아보지 않은 강철수는 볼 수 없었다.


*


강철수는 나무에 기대 앉아 차갑게 식은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혹사시킨 다리에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마을에서 받은 식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말자가 준 주먹밥은 오랜 시간에도 상하지 않을 만큼 짭짤하게 간이 되어 있었다. 임숙희가 건넨 식량들도 비슷했다. 마지막 한 입을 삼킨 강철수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휘이잉-!


거센 바람에 구름이 순식간에 산등성이를 넘어 지나갔다. 바람은 그만큼 거칠게 강철수를 스쳐 지나갔다.


‘돛도, 지도도 없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며 바다를 떠도는 배가 된 기분이군.’


망망대해를 떠도는 느낌이었다. 전부 동지들을 떠날 때 결심한 것들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강철수가 휙 고개를 털었다.


‘쓸데없는 감상으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지.’


강철수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다시 걸었다.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남부군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강철수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인기척을 느끼면 숨었고, 사람이 다니지 않고 짐승들이 다니는 길들로만 골라 걸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는지도 헷갈릴 무렵, 강철수는 멈출 수 있었다.


“오늘 막- 잡은 생선입니더! 아주 싱-싱합니더!”

“우리는 오늘 아침! 잡은 생선만 판다 아입니까!”


부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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