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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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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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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8,619

작성
22.02.0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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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92화

DUMMY

툭, 툭.


강태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백도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너무 무겁게 생각할 것도 없고.”


강태수는 한강다리가 끊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화를 참지 못하던 백도후를 떠올렸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었으나, 어젯밤처럼 선명했다.


‘다리를 폭파해야 했다면 시간이라도 공지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었다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막기라도 했어야 됐습니다! 전쟁 중에 자국민을 죽이는 나라가 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날의 백도후는 그 누구보다 인간답게 분노했다.


‘어쩌면 그날부터 진심으로 백 상사를 인간적으로 신임해 온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날 백도후의 보고를 들으며 강태수 자신이 했던 다짐도 기억해냈다.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기들만의 이권과 목숨을 지키려 하는 자들은···. 그런 고름들은, 짜내면 될 일이다. 국민들도 그것을 바랄 테고.’


강태수가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하지.”


강태수는 자신을 따라 앉은 백도후의 눈에 자리한 의문을 풀어줄 참이었다.


“백 상사 자네도 알겠지만, 이제 우리가 알던 기준은 어디에도 없어.”


강태수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전쟁은 한국인들의 가치관마저도 바꿔 놓았다.


“국민들은 전쟁 기간 동안 여러 한계를 경험했지. 죽음의 공포, 기아의 한계점.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그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나? 아니야.”


강태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폭격을 맞은 땅에서는 더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식량이 언제 떨어져서, 언제 굶어 죽을지조차 알 수도 없어. 하지만 그것보다도 무서운 것은 실체 없는 공포지.”


강태수는 여전히 큰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총에 손을 가져다 댔다. 원인이 무엇인지 확인한 후에나 손을 거둘 수 있었다.


“전쟁이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공포.”


생사를 함께한 백도후였으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강태수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나조차도 두려운데, 그저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어떻겠나.”


강태수는 백도후가 표정을 숨기려고 하지만 놀랐다는 것을 느꼈다. 강태수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전란 속에서도 금은 금이었고, 돈은 돈이었지. 아니, 오히려 더 대단해졌어.”


언제나 생존에는 물질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의리와 예의 등을 중시하던 가치관 대신, 당장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물질을 택했다. 죽음과 굶주림을 벗어나는 데에 의리와 예의 등은 걸림돌이 되면 걸림돌이 되었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물질 만능주의가 살살 고개를 쳐들었다.

침묵을 깨고 드문드문 강태수의 말이 이어졌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어졌고.”


그러나 물질은 목숨이 붙어 있을 때나 소용이 있었다. 죽음 후에는 그 무엇도 효용이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기회주의와 범법 친화적이고, 부패 친화적인 요소가 자연스레 침투해 나갔다.


“사람들은 북한군들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대문에 인공기를, 다시 국군이 서울을 되찾았을 때는 태극기를 걸었지. 살기 위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러다 그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서로 신고하여 죽이고.”


사이가 나쁜 이를 부역자, 혹은 통비분자로 신고해 죽이는 일이 만연했다.


“이런 기회주의를 몇몇은 실용주의라 미화해 부른다고 하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강태수는 사망자들의 명단이 적힌 서류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백도후를 바라보았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대부분의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없어. 더불어 손에 쥔 것이 생사를 결정하게 하지.”


혼란과 빈곤 속에서 어떻게든 숨을 붙이게 하는 것은 식량과 물질이었다. 전란 속에서도 숨겨 놓은 식량이 있다면 본인과 가족은 배를 곯지 않을 수 있었고, 웬만한 위기라면 물질과 돈으로 모면할 수 있었다.


“손에 쥔 게 값진 것이라면 말이야. 빈곤 속에서도 인생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신과 같을 정도의 존재가 된 것이지. 어쩌면 이제 국민들은 인간성의 밑바닥을 본 것과도 같아.”


강태수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백도후의 눈빛도 점차 가라앉았다. 백도후 역시 서로를 고발해 죽고 죽이는 시민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전쟁은 그렇게 한국인들의 가치관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그리고 원조.”


강태수의 목소리와 눈빛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갈수록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테지. 어쩔 수 없는 결과라 한다고 할지라도, 이건 문제가 될 거야.”


군사와 경제적으로만 대미의존도가 심해진 것이 아니었다. 전쟁 이후에도 한국의 외교활동은 미국의 후원과 안내 아래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백도후가 가져온 공문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이미 미군정 때부터 문화적 대미의존도는 시작되었었지만, 지금은 깊이가 더욱 깊어졌지. 대규모의 미군 병력들이 우리나라에 지속적으로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이대로 그들과 함께 그들의 문화가 한국에 전파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툭, 툭.


강태수는 백도후가 가지고 온 공문을 두드렸다.


“이것 또한 목표는 결국 유능한 한국 군인들의 귀화일 테고.”

“!”


스윽.


‘귀화’라는 단어에 백도후의 눈이 갈 곳을 모르고 흔들렸다. 강태수는 서서히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누가 보아도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이용하고자 하네, 백 상사.”

“··· 어떻게 말입니까?”

“이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유능한 군인이지. 그럼 당연히 단순한 유학도, 지원도 아닐 가능성이 커. 아마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미국에 몸 바쳐 일할 유능한 군인을 길러내려고 할 테지.”


스윽.


강태수가 공문을 집어 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동남아와 남미의 많은 군인들, 그리고 젊은 장교들을 미국식 교육과 기술 전수를 위해 미국에 초대해 교육하고 돌려보냈어. 아이러니하게도 그 장교들이 대부분 쿠데타로 자국의 정권을 찬탈하거나 그 나라의 정권의 핵심부에서 친미 세력으로 자리 잡았지만.”


백도후는 강태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꽤 정확히 알아들었다.


‘어쩌면 미국이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신가?’


강태수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년에 헌법이 개정될 거야.”


강태수의 이야기는 백도후로서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게,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국이 한국에 원조를 해서 한국의 경제적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개헌이 필요해. 적어도 국가가 경제를 전부 주무르지 않겠다는 정도의 구체적인 선도 필요하고.”


원조는 물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무역 및 산업정책이 존재해야 했고, 강태수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럼 그 이후부터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테지.”


강태수는 얼이 빠진 듯한 백도후를 보며 자신의 군복을 손끝으로 당겼다가 놓았다.


“혹시 군복을 벗고 싶나? 만약에 군복을 벗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네.”


전쟁이 멈춘 후에 군복을 벗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백도후가 군인을 그만둔다고 한다면 진정으로 아쉬울 것 같았으나, 강태수는 그 뜻도 존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군복을 벗지 않을 예정이라면, 나와 떠나지. 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거든.”


강태수는 검지로 위를 가리켰다.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손짓이었다. 백도후가 그 손끝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씨익, 강태수가 근사하게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을 확신하는 자의 웃음이었다.


*


강태수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더불어 6사단에서 유학을 가겠다고 자원하는 이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특진해 이제 대대장에서 연대장이자 대령이 된 김웅배가 강태수를 불렀다.


“하하, 강 대위와 백 상사가 미국으로 간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이거, 이러다 우리 6사단에 아무도 남지 않겠는데.”


김웅배 연대장의 농담에 강태수가 말없이 웃어 보였다. 곧 김웅배가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강태수는 김웅배 연대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강태수가 지난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강 대위, 연합군 측에서 자네에게 지속적으로 접촉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을 상부에서는 필사적으로 막고 있네.’

‘저에게 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자네가 미군으로 재입대할 생각은 없는지 묻겠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귀화까지 제의할지도 모른다는 게 내 추측이네.’


쓰게 웃는 김웅배 연대장에게 강태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연대장님, 아예 미국으로 가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배우고 돌아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강 대위가 미국으로 가는 걸 왜 말렸는지 아나? 전쟁 중에 말이야.”


김웅배 연대장은 웃으며 강태수에게 곧바로 그 답을 들려주었다.


“지금처럼 될까 봐였다네. 강태수 대위 자네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한국군의 상징과도 같았어. 국민들이 군인의 이름을 알 정도면 말 다 했지.”


몇몇은 강태수를 알아보고 말을 걸기도 했다. 그때마다 김웅배 연대장은 대신 뿌듯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러니 군인들에게는 어땠겠나. 더 큰 의미고, 전혀 다른 의미지. 지금도 자네를 따라 자원하는 이들이 수두룩해.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도전하는 이들도 많고. 만약 자네의 미국행이 전쟁 중이었다면, 음. 상상하고 싶지 않군.”


강태수는 이어지는 김웅배 연대장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김웅배 연대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숨을 쉬며 강태수를 바라보는 김웅배 연대장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후우. 좋은 기회야, 강 대위.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더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나. 정말 어떻게 지켜낸 자유인데, 사람들의 자유를 지킨 강 대위 자네를 붙잡아 둘 수는 없지. 그건 잘못된 일이니까.”


김웅배 연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강태수의 예상과는 달랐다. 김웅배 연대장이 강태수의 등을 다소 세게 두드렸다.


툭, 툭.


“그러니 잘 다녀오게. 생각보다 자원자가 많이 몰려서 심사가 있을 거라고는 하지만, 강 대위와 백 상사 정도면 무리가 없지 않겠어.”


오늘 김웅배 연대장의 얼굴은 강태수가 본 얼굴 중에서 제일 밝아 보였다. 덕분에 강태수 역시 웃을 수 있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연대장님.”

“그래, 그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군인이 어떤 건지, 저 미국 놈들에게 보여 주고 오도록.”


툭, 툭.


김웅배 연대장이 다시금 웃으며 강태수의 등을 두드렸다.


“윽, 하하.”

“음? 왜 그러나, 강 대위?”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근육으로 단단한 등이 아렸다. 하지만 강태수는 어색하게 김웅배 연대장을 따라 웃었다.


‘아무래도 많이 아쉬우시긴 한가 본데.’


시간이 흘러 12월이 되었다. 곧 강태수가 떠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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