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시즌1 - 73화
“이 이상은 안 됩니다. 더는 전쟁을 지속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1951년 3월, 서울을 다시 빼앗겼을 때였다. 김인국은 더 이상의 피를 흘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제자로 일컬어지던 자들은 전쟁의 시작과 함께 선두에서 모두를 이끌었고, 그 대가로 누구보다도 먼저 생사를 오가게 되었다. 시신조차 되찾을 수 없었다. 당에서는 그것이 조국을 위한 진정한 영광이라 했다.
“김인국 동지, 이 해방 전쟁에 목숨을 바쳐 과업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영광임을 진정으로 부정하는 게요?”
“부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강철수는 다섯 걸음 앞에 선 김인국의 입모양을 느린 속도로 따라 했다.
‘사실일 뿐입니다.’
김인국과 마주 선 간부의 표정은 강철수를 등진 관계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 등이 뿜어내는 살기만은 또렷했다. 하지만 김인국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김인국은 강철수가 봐 온 어떤 얼굴보다 완고한 얼굴이었다.
“내 그 말을 잊지 않갔소, 김인국 동지. 내 하나 장담하지. 동지는 지금부터 동지가 오늘 이야기한 ‘사실’을 책임져야 할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야 할 거요.”
경고는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김인국의 결심 역시 가볍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휴전을 주장했으며, 연합군 측과 이야기해 봐야 한다고 간부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탕, 탕!
콰아아앙!
“으아악!”
“으윽!”
비명이 그들의 사방을 메웠다. 발밑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김인국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강철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아니, 이것은 영광이 아니다. 의준아,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으로서 이럴 수는 없는 일 아니겠니. 이건, 이건 나의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다.”
김인국은 강철수가 아닌 김의준의 어깨를 잡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무의미한 희생일 뿐이야.”
강철수는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고귀한 해방 전쟁이 아니었던가. 그가 몇 년간 따른 아버지 같은 이는, 아니, 아버지는 이 질문부터 부정해 버렸다. 하지만 강철수도 느끼고 있었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부로, 눈으로, 진정으로.
이것은 그저 살육이었다.
화르륵!
“불! 불이야! 다들 피하셔야 합네다!”
대한민국의 군인들과 연합군이 화해전술로 서울로 밀고 올라오던 무렵, 한시가 촉박한 때에 당의 간부는 그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김의준 동지.”
마주친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번득였다. 살의로 점철된 무언가가.
“김의준 동지는 김인국 동지와 함께 이곳에 남아 적들의 동태를 살펴야 하지 않갔어?”
이것은 명령이었으며, 강철수는 응해야 했다. 그의 당은 결점이 없으니까. 없어야 하니까. 강철수가 결국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항력의 힘이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김의준 동지의 ‘옳은’ 결정은 내래 잊지 않도록 하갔어.”
툭.
간부는 강철수의 어깨를 힘주어 누르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강철수는 멀어지거나 죽어가는 동지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짧은 단도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이념이라 주장하는 것들이 강철수에게 건넸고, 강철수가 받아든 칼이었다.
화르륵.
치솟는 불길에 칼날이 붉게 변했다. 나무 타는 냄새가, 이제는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시신이 불타오르는 냄새가 강철수의 곁을 휘감았다.
*
아래쪽으로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강철수가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밑에는 전부 적들로 둘러싸인 상황입니다. 경계를 뚫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강철수는 김인국을 비롯한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도망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낮에는 연합군의 시선을 피해 피난민의 차림으로 움직였으며, 밤에는 인천 상륙 작전 때 낙동강 근처에서 헤어진 동지들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지리산이었다.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그래도 전화가 덜한 것 같군.”
풀썩.
꾀죄죄한 몰골의 최정혁이 대충 돌이 없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깊은 산속이었으나 산짐승 또한 전부 달아났거나 이미 죽어, 하루에 한 번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슥, 슥.
강철수는 최정혁이 건네는 나무껍질을 받아들었다. 최정혁은 이미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강철수는 최정혁의 손에 들린 짧은 칼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왜?”
“···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식, 싱겁기는. 겨우 다시 말 좀 놓나 했더니. 결국 또 원점이구나.”
장난스러운 최정혁의 말에 강철수 역시 실소하고 말았다.
“모든 게 원점이지요. 그러니 얼른 선생님과 동지들에게 합류해야 합니다.”
“이제야 바닥에 엉덩이 붙여 본 참이었다. 성격 급하기는 이 땅에서 네가 제일일 거다.”
“상황이 상황이지 않습니까.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강철수와 일행들에게는 변변찮은 무기가 없었다. 탄환은 바닥난 지 오래였으며, 지닌 것이라고는 탄창이 비어 있는 총과 칼 몇 자루뿐이었다. 피난민인 것처럼 행동하고는 있었으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철수와 최정혁이 정탐을 다녀온 것이었다.
“그래. 가자, 가. 읏차.”
최정혁이 힘을 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철수는 이미 어느 정도 멀어진 뒤였다.
“이 의리도 없는 놈!”
강철수는 최정혁이 서둘러 뒤를 쫓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걸음을 늦추었다.
저벅, 저벅.
휘이잉.
발걸음 소리에 가끔 바람 소리가 섞였다. 강철수는 남겨 놓은 표식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다. 김인국과 동지들이 있는 곳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간밤에 비가 와 질퍽한 땅이 몇 번이고 그들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
강철수는 최정혁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먼저 운을 띄우지는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최정혁이었다.
“··· 이제 어떻게 할 참이냐?”
“무엇을 말입니까?”
최정혁이 잠시 뜸을 들였으나 강철수는 보채지 않았다.
“··· 모든 것을 말이다.”
강철수는 모든 것이라 칭하는 최정혁의 눈에서 망설임을 읽었지만, 결국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다시 서울을 빼앗기던 3월, 수많은 동지들이 불속에서 잿더미로 화했다. 그날 살아남은 이들 중 얼마 되지 않는 인원이 김인국과 김의준을 따랐다.
강철수가 칼과 지령을 받은 것은 찰나였다.
‘··· 정말 없을까?’
파삭!
그때 최정혁이 마른 나뭇가지를 힘주어 밟아 부러뜨린 다음, 허리를 숙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
“곳곳에 숨어 있는 동지들을 찾는다 한들, 이곳은 적진이다. 한때 우리의 나라였다고는 하나 더는 아니야. 그렇다고 우리에게 변변찮은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
“동지들을 모두 찾는다고 하여도 몇 백이나 될까? 몇 십 명도 웃기는 일이지. 그리고···. 그들을 믿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작년 9월에 헤어진 이들이다. 이미 변절하고도 남았겠지. 변절하지 않았다면 이미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겠어? 그게 아니라면 죽은 것일 테고 말이다.”
최정혁이 피난민처럼 위장한 짐 위에 나뭇가지를 쌓았다. 불을 피우기 위함과, 위장을 동시에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낡은 금색 보자기가 힘없이 흔들렸다.
“그래, 너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 아니, 아무리 김의준이라고 하여도 할 수 없는 일이지.”
김의준은 당의 핵심 인물들 중 제일 어린 나이에 이름을 알린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래서 강철수는 문득 그리웠다.
“··· 아이들은.”
“···.”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요? 도범이도, 승희도, 승윤이도. 모두들, 잘 지내고 있을까요?”
목이 메었다. 차마 살아 있을까요라는 물음은 뱉을 수 없었다.
강철수가 최정혁을 다시 만날 수 있던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강철수와 김인국이 비슷한 시기에 월북하고 난 뒤, 그들의 측근들은 모조리 고초를 당했다. 얼마 남지 않던 인원들은 또다시 와해되었다.
“··· 무사하기를 바라야지.”
최정혁이 풀려나서 고아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고 했다.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강철수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와서 확인했을 때 역시 똑같았다. 아무것도,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인국 선생이라면 저 강 건너편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고아원은 이미 맡아 줄 사람이 있어.’
형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사람들처럼 아이들은 존재했다는 느낌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강철수는 고개를 들어 높고 굵은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네를 타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숲에 머물렀다.
*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엮어 만든 간이 천막 아래에서 김인국과 여덟 명의 동지들이 강철수와 최정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제주도에서 함께했던 배성훈과 현욱성, 이휘 또한 있었다.
“의준! 정혁! 무사해서 다행이군!”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응, 의준. 아무 일도 없었어. 새 두 마리를 잡은 것 외에는 말이야.”
“그거 좋은 일이군! 배고팠는데 말이야!”
최정혁은 어느새 다시 밝은 모습이었다. 강철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방에 적들이 있어 하산하는 건 무리인 듯합니다. 조금만 더 이곳에 머물렀다가 자리를 옮기도록 합시다.”
“그래, 그러자꾸나.”
천막 뒤에서 나온 김인국이 강철수의 말을 받았다. 그의 손에는 깃털이 손질된 새 두 마리가 들려 있었다.
금방 식사가 끝나고, 강철수는 김인국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전협정이 개시되었지만 금방 중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러다가는 다시 전투가 일어날 듯싶습니다.”
“좋지 못한 전조다.”
김인국이 수염이 길게 자란 턱을 어루만졌다. 강철수가 머뭇거림 끝에 입을 열었다.
“하산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위험하기 때문이겠지. 알고 있다. 걱정되는 것은 이곳 지리산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던 동지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정탐을 다녀올 수 있는 곳들은 정혁과 전부 다녀왔으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최근까지 머물렀던 흔적들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강철수는 김인국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지령을 받은 이후, 김인국의 눈을 마주치는 일은 강철수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품 안에는 여전히 칼이 있었다. 하지만 강철수는 이 칼을 쓸 생각이 없었다.
‘당에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것이 사실이어야만 했다. 김인국의 존재감은 아직도 여전히 커다랬다.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강철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어느 쪽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김인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선생님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몽양 선생님이 그리 되었던 것처럼.’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