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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공장 님의 서재입니다.

격동의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완결

창작공장
작품등록일 :
2021.11.22 10:37
최근연재일 :
2022.03.23 10:50
연재수 :
19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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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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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88,619

작성
22.01.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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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
11쪽

격동의 시대 시즌1 - 76화

DUMMY

강철수는 늘 그래 왔듯이 태연하게 동요를 감추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안석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지.’


강철수는 나무에 몸을 더 깊게 기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딱딱한 나뭇결이 그대로 등에 느껴졌다.


“예, 지금 그 지령대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철수는 안석호의 눈에 짧은 순간 의문이 스치는 것을 놓치지 않았지만 모르는 척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언제든지 허리 뒤에 숨겨 놓은 칼을 낚아챌 수 있는 상태였다.


“제가 받은 지령대로 지리산에 피신 중인 안석호 동지를 비롯해 동지들을 만났고, 이렇게 합류했습니다.”


환자들을 눕혀 둔 곳은 조금 거리가 있으나 분명히 시야 안이었다. 강철수가 왼쪽으로 고갯짓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안석호는 말없이 강철수를 바라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강철수였다.


“안석호 동지 역시 지령을 받았나 봅니다.”

“··· 그렇소.”


안석호가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강철수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다시 대꾸했다.


“그렇다면 당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안이 있겠군요.”


이번에는 꽤 긴 침묵 후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강철수는 확신했다. 그의 눈이 덫을 탈출할 방법을 발견한 맹수처럼 맹렬하게 빛났다.


*


낮이 되자 최정혁이 짐을 양손에 든 채 돌아왔다. 최정혁은 강철수의 짐이 든 낡은 금색 보자기를 내려두었다.


턱.


“밤에 길을 잃어서 한참 걸렸다. 이 길이 이 길 같아서, 도저히 찾을 수가 있어야지. 계곡을 보고 겨우 찾아왔다.”


의심의 눈빛이 곳곳에서 쏟아졌으나 강철수는 대답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괜찮습니다.”


강철수는 가방 안에서 약을 찾아 환자들에게 먹이라며 나눠 주었다. 최정혁은 그사이 강철수를 끌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몸을 숨겼다.


“선생님께서 걱정하신다. 어떻게 할 셈이냐? 저들이 동지인 것은 확실한 것이지?”


강철수는 고민했다. 최정혁을 믿지만, 변수 하나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질 터였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주변에서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강철수가 대답했다.


“동지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들 말입니다. 숨기는 것이 있습니다.”

“숨기다니? 무엇을?”


강철수는 3월에 서울을 다시 빼앗기며 후퇴하였던 때 이후로 당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것이 없었다. 한 장소에 일주일 이상 머무르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와 김인국이 가지고 있던 연락책들과 연락이 하나씩 시작해 서서히 전부 다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보를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강철수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이곳에 있는 인원이 전부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당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 그거 다행인 일 아니냐!”


기뻐하는 최정혁에게 강철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나 참, 무엇이 또 문제인데?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는 동지들을 찾는 것이 우리의 지령이었고, 그 지령을 완수했고, 그 동지들은 우리가 한참 동안 연락하지 못한 당과 연락을 취할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이 또 문제란 말이냐?”


최정혁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최정혁이 알고 있는 지령은 ‘대한민국에서 때를 기다리는 동지들을 찾아 모으는 것’이었으니까. 강철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선택··· 해야 합니다.”

“선택이라니?”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철수는 지령을 미뤘다. 그것은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김인국은 리지웨이 장군이 전투에 뛰어들었을 무렵부터 휴전을 주장했다. 박헌영은 김인국의 사상을 끊임없이 의심했으며, 김일성은 그런 의심을 받는 김인국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김인국의 주장대로 결국 정전 협상은 이루어졌다. 김인국을 죽이라 명한 자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북한군으로서는 휴전만이 유일한 방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강철수는 의문이 떠오른 최정혁의 눈을 보며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날 김인국의 말들을 기억해냈다.


‘의준아, 휴전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궤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혁명의 희망이라고는 남겨 두지 않고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본대와 유격대에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지금도 거의 남지 않은 사기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질 테니까. 그렇지만 마지막 연락책이 남긴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과 박헌영 부수장 동지는 이미 휴전 논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회담이 성사되고, 휴전이 되어서 우리 인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구나.’


그때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었는지 강철수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최정혁은 강철수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가족일지라도 이념이 다른 자는 적일 뿐이다. 가족도 될 수 없는데 친구라고 될 수 있을 리가.’


단 사흘 만에 서울까지 밀고 들어와 최정혁과 재회했을 때, 최정혁은 강철수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강철수와 김인국이 월북하고 나서, 그들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던 동지들 중 몇은 돌아섰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강철수 자신이 내놓은 대답은 분명히 기억했다.


‘그럼 우리는 여전히 적이 아니겠군요.’

‘그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하지. 그리고 너는 그걸 여전히 증명하고 있구나, 김의준.’


그리고 최정혁 역시 강철수에게 여전히 증명했다. 재회한 이후부터 자신은 적이 아니라고 시시각각 온몸으로 증명했다. 강철수는 결심했고, 결심했기에 반년 동안 숨겨 두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지난봄에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후퇴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걸 어찌 잊을 수 있겠냐? 그 덕에 우리가 지금 이 모양인데. 더군다나 너 같은 장교들 중에서 그때 북으로 올라가지 않고 남은 이들은 별로 없잖아.”


강철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게 끄덕이는 고개였다.


“저는 그때 지령을 하나 더 받았습니다. 후퇴하던 그 찰나에 말입니다.”


입은 말하고, 머리는 생각했다. 머리는 차갑게 식었으나, 목구멍과 가슴은 뜨거웠다.


‘화를 낼까? 지령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그게 아니라면, 숨겼다고 화를 낼까.’


강철수는 무엇을 염원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것만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지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게 뭔데? 너답지 않게 뜸을 들이고. 사람 불안하게 왜 이래. 빨리 말해라.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하지 않느냐. 하물며 네가 이러니,”

“선생님을··· 제거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손으로 선생님을 제거함으로써 당에 대한 충성도 증명하고, 김의준 스스로도 증명해 보이라고 했습니다.”

“!“


최정혁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다음은 고개였다. 강철수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무슨 말을. 하, 거참. 며칠을 못 잤더니 꿈 한번 지독하게··· 지독하게 생생히도 꾸는구나.“


짜악!


최정혁이 양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때렸다. 순식간에 눈이 충혈 된 최정혁의 다음 순서는 강철수의 멱살을 있는 힘껏 붙잡는 것이었다.


확!


”아니라고 해라. 아니라고 해! 금수도 자기 가족은 끔찍이 아낀다. 그런데 뭐? 선택을 해! 미쳤어? 네가 미친 게 분명한 게지.”


실소한 최정혁이 있는 힘껏 힘을 줘 강철수를 그대로 밀쳤다. 일부러 몸에 힘을 뺀 강철수가 그대로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엎드린 강철수가 마른 풀을 우악스럽게 쥐어뜯었다.


‘김의준 동지! 무엇 하고 있어! 거동을 못 하는 이들은 즉결처형이라고 하지 않았어! 우리 손으로 동지들의 목숨을 거둬 주는 것이 동지들을 위한 것이다! 명령을 거부할 셈인가!’

‘···.’

‘김의준 동지, 나, 나 움직일 수 있시요, 살, 살려···!’


강철수는 눈을 감았고, 방아쇠는 당겨졌다.


‘탕, 탕!’


강철수는 그날부터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끊임없이 사죄했으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다.


“으, 으윽.”


강철수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모든 것들을 목 너머로 삼키며 괴롭게 신음했다. 강철수가 연달아 바닥을 내리쳤다. 최정혁이 강철수의 뒤에서 절규하듯 소리쳤다.


“아니라고 하라고! 하지 않겠다고 해!”


강철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강철수는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김인국에 대한 배신, 이념과 당에 대한 배신.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강철수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는 순간, 그가 제일 먼저 배신하는 이는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최정혁이 엎드린 강철수의 멱살을 잡았다. 강철수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 형도 알잖아.”


목이 메어 침을 삼키기조차 어려웠다.


“당은 어떠한 경우에도 오류가, 없고, 우리는,”


퍽!


최정혁이 주먹으로 강철수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만. 그만 말해라. 죽는 날까지 오늘을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 말해.”


최정혁의 뜨거운 눈물이 누렇게 죽은 잔디 위로 추락했다. 강철수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김의준에게 내려온 지령을 안석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은 이 대한민국 땅에서도 역시 표적이라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국적에 불문하고.


*


김인국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푸르렀으나 예감은 불길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이었다.


스윽.


희미하던 인기척이 순식간에 몸집을 불리며 늘어났다. 그것은 마치 위협과도 같았다. 동굴 근처에서 강철수와 최정혁을 기다리며 김인국을 엄호하고 있던 이들이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끄덕.


시선을 교환한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무기를 챙겨 경계 태세를 취했다.


“선생님을 지켜야 한다.”

“예!”


저벅, 저벅.


열다섯 걸음 정도를 남기고 인기척이 멈췄다.


“김의준 동지가 보내서 왔소.”


바람을 타고 온 말에 김인국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

“선생님!”


금방이라도 뛰어들 것 같은 이들에게 김인국이 손을 들었다.


“당신은 누구요?”

“안석호라고 하오.”


하늘이 선명한 만큼 그림자의 색 역시 짙었다. 김인국처럼 한 발 앞으로 나온 안석호의 얼굴에는 나뭇잎이 만든 그림자가 가득했다. 김인국의 얼굴에는 햇빛 외에는 그 무엇도 비치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김인국의 직감은 한 번도 비껴 나간 적이 없었다. 강철수를 처음 보았을 때, 몽양과 마지막으로 술잔을 기울였을 때, 강철수의 형이라던 청년이 찾아왔을 때, 처음으로 더 이상의 피는 그만 흘려야만 한다고 입에 올렸을 때 역시.

그리고 김인국은 자신의 모든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탕!


총알이 김인국의 가슴에 명중했다. 김인국을 향해 달려오는 모두의 발밑에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 떨치지 못하는 그림자가 지겹게 달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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